베드로 성당과 베드로 광장
베드로 성당(산 피에트로 성당)과 베드로 광장을 마주한 순간
한 동안 머리 속이 하얘지면서 할 말을 잃었다.
나의 일생 동안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이렇게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 웅장하고도 장중함에, 예술적이고도 화려함에,
그리고 그 속에 깃들여 있는 무한한 종교적 힘에 압도 당하여,
나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라고 느껴지는 동시에
인간의 능력에 끝없는 존경심이 솟았다.
베르니니의 회랑중 한쪽 회랑
성당 전면 중앙에 난 베란다는 콘클라베라고 불리는 교황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새 교황이
군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 연설하는 곳이다.
교황이 해마다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광장에 모여든 군중과 세계에 보내는 축하 메시지를 읽는 곳이기도 하다.
교황이 강복과 설교를 하는 이 행사를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라고 하는데
'도시와 세계에게’라는 뜻의 라틴어다.
카톨릭 신자들에게 교황의 축복은 벌의 면제, 즉 시간을 초월해 죄의 모든 보속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미켈란젤로의 베드로 성당 중앙 돔
미켈란젤로의 돔은 피렌체 대성당의 고딕 양식의 윤곽으로 되돌아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다른 면에서는 1500년대의 다른 어떤 건물들보다도
바로크 건축의 형상을 미리 예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성당 정면은 높이 45m, 너비 115m에 이르며,
인류 최초의 성당인 일명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이라 부르는 초기 베드로 성당은
324년에 첫 공사를 시작하여 326년 교황 실베스트로가 축성한지 23년 후인 349년에 완공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1,100년을 견뎌오던 성당은 붕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대성당 신축을 위해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채택하고 공사를 시작한 뒤
라파엘로,줄리아노,미켈란젤로,포르타와폰타나를 이어 그 뒤 카를로 마데르노에 의해 1614년 현재의 대성당 정면이 완성 되었다.
마데르노는 변경된 내부 설계에서 미켈란젤로의 기존 설계와 잘 조화 될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켈란젤로풍으로 건축하였다.
마데르노가 죽자 그의 수제자인 바로크 예술의 대가 로렌조 베르니니가 뒤를 이어 마무리 공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의
중심 과제는 미켈란젤로의 돔을 중심으로 한 설계와 마데르노의 확장된 설계를 바탕으로 이 두 안을 잘 조화 시키는 거 였다.
이미 시대적으로는 바로크 양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대성당의 설계는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 되어 있어 이 두 양식을 접목 시키는게 아주 어려운 일 중의 하나였다고 후에 베르니니는 밝혔다.
현재 성당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대부분의 것들이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위에 처음으로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을 세우고 축성한지 1,300년 만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506년에 시공한지 120년만인,
1625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새롭게 축성되었다.
교황 알렉산더 7세의 요청으로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는
16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전당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한 양쪽 베르니니의 회랑과 함께
30만을 수용 할 수 있는
성베드로 대광장을 건설하였다.
성당이 예수님의 몸이라면 양쪽 광장 회랑은 예수님의 팔로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이 팔을 벌리고 이 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을 상징 하였다.
광장의 양쪽은 타원형 회랑인 베르니니의 회랑이 에워싸고 있다.
토스카나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높이 16m의 대리석 원기둥이 각기 네 줄로 서 있다.
그 위에 성인과 교황의 대리석상 140개가 서 있는데 이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으로
높이가 3.25m가 넘는데도
광장과 성당이 워낙 웅장해서 석상들이 작게 보인다.
바로크 예술의 천재 베르니니는 바로크 예술의 화려함과는 달리
베드로 광장은 교회 예술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위하여 단순한 균형미로 예술적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다.
성 베드로가 하늘나라 열쇠를 들고 서 있다.
베드로는 예수가 승천한 뒤 으뜸 사도로 포교하다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머리가 아래로 오도록 매달아 달라"고 하는데,
이는 감히 예수님처럼 똑바로 매달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한다.
베드로는 지금의 바티칸에 접한 네로의 경기장에서 순교한 뒤 근처 언덕 공동묘지에 묻히고
서기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칙령이 나오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베드로 무덤 위에 베드로 성당이 건축된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은 신성한 영역에 자리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건넨 하늘나라 열쇠가 바로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오는 카톨릭 교황 수위권은 마태복음에 근거한
베드로의 수위권에 바탕을 둔다.
베드로에게서 유래하는 교황의 또하나 상징은 손가락에 끼는 황금반지로
어부의 반지인데 베드로가 어부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이 공문서를 봉인할 때 쓰고,
사람들이 교황을 알현할 때는 무릎을 꿇고서 반지에 입 맞추며 인사한다.
교황이 선종하면 반지를 부숴 교황의 시신과 함께 관에 넣어
그 교황의 통치가 끝났음을 알리고,
다음 교황은 새로운 어부의 반지를 맞추게 된다.
성 바오로의 조각상
반대편에는 성 베드로의 조각상이 서 있다.
사도 바오로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부조 되어 있다.
이는 사도의 순교를 의미하며
또한 사도가 되기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 지도층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탄압 했던 모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성령으로 무장하여 영적 투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벨리스크
40년 로마 3대 황제 칼리굴라가 전리품으로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네로 황제 경기장의 중앙 축 장식을 위해 옮겨 세웠다.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마차 경기장에서 순교 했는데 그 곳이 바로 이 곳이며,
현재 베드로의 순교 당시 있었던 유일한 것이 이 오벨리스크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념 대성당을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은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25.5m 높이의 청동 사자들로 지탱하고 있으며
맨 위에 있는 십자에서 41m 떨어진 키지 가문의 청동 문장 위에 올려져 있다.
그리고 정오에 태양이 황도의 각 표지에 들어갈 때 오벨리스크의 그림자 끝을 표시하고자,
둥근 돌들을 1817년에 배치하므로,
오벨리스크가 거대한 해시계의 바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지시로 기술자 겸 건축가인 도메니코 폰타나의 책임하에
900여명의 인부와 말 140여 마리 그리고 권선기 47대를 동원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이 탑 위에 십자가를 세우므로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대표적인 박해자였던 네로 황제가 사랑했던 이 오벨리스크를 광장 중앙에 옮겨 놓으므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분수대 두 개가 있다.
이 분수대는 광장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위한 설계에 따른 것이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앞서 물로 죄를 씻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한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도 대성전에 순례 오는 사람들은
분수대 물을 손으로 떠서 머리 위에 뿌린 뒤 성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른쪽 분수대는 마데르노의 작품이며
왼쪽의 똑같이 생긴 분수는 도메니코 폰타나의 작품이다.
사도궁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의 집합체인 사도궁전이 보인다.
바티칸 궁전또는 교황궁으로 불리며, 교황이 직접 거주, 집무하는 곳이다.
견고한 이 궁전에는 장중하고 웅장한 천사백 개가 넘는 방과 천 개에 달하는 계단,
스무 개의 안뜰, 수천 채의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이들 속에 박물관, 도서관, 화랑, 전시실 등이 무수히 포함되어 있다.
교황님의 거처인 사도 궁전의 창문에서 교황님이 가끔 모습을 보이신다 한다.
궁전의 최고층에 있는 교황의 사저는 궁전의 두 측면을 둘러싸면서 복도로 이어지고
이 복도는 프레스코 그림들로 장식된 오래된 로지아(한쪽에 벽이 없는 복도 모양의 방)로 연결되어 있다.
교황 사저에는 현관, 서재, 교황 비서실, 그리고 주일이면 순례객들을 향해 축복을 내려주는 직무실,
침실, 대리석 목욕탕, 영화 상영실, 의료실, 개인 경당, 작은 거실, 식당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드로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선 줄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고 베드로 성당을 찿고 있다.
1950년 성탄 이브 전날인 12월 23일 교황 비오(피우스) 12세는
라디오 방송에 나와 성탄 메시지를 전하면서
성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다.
베드로성당 지하실 묘역을 조사한 지 1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1968년엔 교황 바오로 6세가 베드로 유골을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베드로의 것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30년 전인 1981년 이 광장에서 일반 알현을 하던 중
스물세살 터키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에게 총격을 받고 쓰러진 요한 바오로2세
나중에 바오로 2세는 로마 레비비아 교도소에 수감된 범인을 찾아가 20분 동안 비밀 대화를 나눈 뒤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 하자. 나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다"며 사면을 요청한다.
19년을 이탈리아 교도소에서 보낸 아자는 터키로 추방되어 10년을 더 수감된 뒤 2010년 1월에 출소 하였다.
당시 교황은 파티마의 성모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믿었고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총알을 파티마의 성모상에 봉헌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2009년 12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영웅적 덕행’의 삶을 살았다고 밝히며, 가경자로 선포하였다.
가경자는 시복의 전 단계로 복자 후보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가경자 : 로마 교황청 시성시복성성은 시복에 대한 조사가 접수되면 시복 후보자에게 이 존칭을 수여한다.
가경자의 수준에 대하여 1913년 교황 비오 10세는 공식적인 교령으로, “놀라운 정도의 덕행을 실천하거나,
순교한 사람이라야 가경자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고 밝혔다.
복자 :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어져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 된 사람,
즉 공경할 만한 성도에게 붙이는 존칭.
복자 ·복녀에 대한 공경 권역은 어떤 도시나 교구, 지역 등지에 국한된다.
성인 : 시복된 사람에 대한 그 이상의 기적이 확인되면 다시 시복의 과정과 비슷한 절차를 거쳐 교황이 시성을 하여 성인으로 추대한다.
전세계의 신자들로부터 공경받게 되며,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화려한 베드로 성당 입구의 회랑
성당 출입문과의 사이에 마데르노가 설계한 나르텍스라고 불리는 회랑식 공간이 있다.
나르텍스의 양쪽 끝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구획지은 공간이 있는데,
성당을 바라보며 왼쪽 공간엔 1725년 코르나키니가 조각한 샤를마뉴 대제의 기마상이 서 있다.
회랑의 오른쪽 끝 공간인 북쪽 공간에는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대리석상이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나르텍스 도금된 천장
정교한 석고 조각에 금박 장식으로 우아하고 품위 있는 회랑의 분위기를 나타내 준다.
설계자 마데르노는 여기에다 초기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의 입구 천장 장식을 그대로 재현 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 내부에는 모두 44개의 크고 작은 제대와 11개의 돔이 있고
778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395개의 조각들과 135개의 모자이크로 된 그림들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과 박해에서
일어난 교회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본당의 양쪽 벽 기둥 아래 위 벽감에는 39명의 수도원 창립 성인들의 석상이 있다.
성당은 길이 186m, 폭 137m에 이르는 장방형으로 돼 있고 한꺼번에 6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아기 천사 케룹이 지키는 성수반은 본당 기둥 양편에 2개 있다.
케룹은 하나님의 보좌나 성스러운 장소를 지키는 수호천사다.
성당에는 성인, 교황들만 모셔져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황제, 왕족들도 묻혀 있다.
17세기 잉글랜드 스튜어트왕가의 마지막 혈통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카톨릭 신앙을 지키다 쫓겨나 아들 찰스, 헨리와 함께 교황 클레멘스11세에게 몸을 의탁 했고,
삼부자는 결국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베드로성당에 묻힌다.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한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도 묻혀 있다.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기념 무덤
대성당 내에는 3명의 여성에 대한 무덤이 있는데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기념 무덤은 그 중 하나이다.
소비에스카는 폴란드 왕 존 2세의 질녀로 영국의 제임스 스튜어트 3세와 결혼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카톨릭 신앙을 지키다 영국에서 쫓겨 나올때 같이 나왔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자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국가장으로 치르고 베드로 성당에 묻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의 기념 무덤
세바스찬 예배당 왼쪽 벽감에
태양왕 루이 14세의 프랑스와 교황청의 관계를 개선한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의 무덤
중앙의 성 베드로 의자
중앙 제대 뒷벽 창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데,
유리처럼 보이지만 얇게 깎은 천연 대리석이다.
사진엔 안 보이지만 창 복판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빛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둘기는 성령을, 주변의 12개로 나누어진 글라스는 예수의 12제자를 의미한다.
창 앞에는 베드로의 의자가 자리잡고 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포교할 때 앉았던 참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에 상아로 장식한 의자로 만들었고
이것을 교황 알렉산드르 7세가 베르니니를 시켜
이 의자에 청동을 입히고 장식했다고 한다.
중앙 제대를 덮고 있는 지붕과 같이 생긴 발다키노는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바로크시대 위대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니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중앙 제대 위에 작은 집 모양으로 세운 청동 발다키노(천개)를 제작 했다.
높이 29m에 무게 37톤에 이르는 발다키노를 만드느라 로마 판테온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어왔다고 한다.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돔을 받치는 네 모서리 벽감에 네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사진 오른쪽 아래는
예수의 십자가를 든 성녀 헬레나(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어머니)와
그리스도의 사망 검시관이었던 성 론지노상이 있고,
왼쪽 아래에는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든 성녀 베로니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의 얼굴을 닦아 주었던 )와
베드로의 동생인 성 안드레아의 조각상이 있다.
성녀 베로니카와 성 안드레아의 조각상이 보인다.
성 헬레나가 가져온 실제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의 일부,
성 베로니카가 그리스도를 닦아 주었던 실제 수건의 일부,
성 론지노가 그리스도를 검시하면서 옆구리를 찌른 창 일부가
각기 조각상 안에 안치 되어 있다.
예수님에게 천국의 열쇠를 받은 1대 교황 성 베드로의 청동 좌상
아르놀프 디 캄비오 (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약 5세기경 작품으로 추정 되는, 성 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성 베드로 축일인 6월 29일에는 이 청동상에 금실로 수 놓은 제의를
입히고 성 베드로 사도에 대한 예식을 진행 한다.
중세기부터 순례자들은 청동상의 오른발에 입을 맞추며 기도하는 전통 때문에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이전 모양이 없어졌으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신심이 깊어지고, 순교에 동참한다는 의미라 한다.
그리스도의 변용 제단
그리스도의 변용 제단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대작 그리스도의 변용을 모자이크 하였다.
원래 그림은 라파엘로가 11517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1520년에 완성한 마지막 회화 작품으로
원작은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에 보관되어 있다.
라파엘로는 1526년 37세의 나이로 정신착란증으로 생을 마감 하였다.
그의 무덤은 판테온 신전에 있다.
가운데 중앙 제대는 베르니니가 만든것이다.
중앙 제대는 교황님의 제대라 하여 교황님 이외는 미사 집전이 안된다. 일명 교황님의 제대.
그 아래는 베드로의 묘지가 있다.
1대 교황님을 포함해 총 265명 중 188명의 교황님이 이 성당에 묻혀있다고 한다.
그 위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죽을 때까지 만들었는데 완성을 못한 돔이다.
세계에서 철근을 쓰지 않고 만든 돔 중 2번째로 큰 돔이다.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중앙 돔을 비롯해 크고 작은 열개의 돔이 있는데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거대한 중앙 돔의 총 높이는 바닥에서 바깥에 있는 십자가의 끝까지
136.57m에 이르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다.
돔의 안쪽 지름은 41.47m로 판테온 신전이나 피렌체 대성당 돔 보다는 조금 작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교회 중에 유일무이한 교회,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의 돔 내부 둘레에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이 2m 크기의 글자로 새겨져 있다.
바실리카 디 산 피에트로, 성 베드로 대성당은
초대 로마 주교, 즉 초대 교황 성 베드로가 이곳 지하에 묻힌 이래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이르기까지 2000년 가까이 이어온
세계 카톨릭의 성지이자 신앙의 중심이다.
1929년 바티칸의 영토에 포함된 성 베드로 광장은 로마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탈리아 정부와 바티칸은 대체적으로 성 베드로 광장 밖의 비오 12세 광장 구역을 상상의 경계선으로 보고 있다.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성당 오른쪽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첫번째
경당 방탄 유리 안에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르네상스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작품인 걸작 피에타
가 있다.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가 생전에 만든 거대한 조각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끝마친 작품이기도 하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작업을 가리킨다.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친다.
그는 피렌체를 떠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며 로마에 머물렀고
고향이 아닌 로마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고향인 피렌체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죽었다 한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화해의 길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테베레 강가의 산탄젤로성까지 일직선으로 닿는 화해의 길이 있는데,
이 웅장한 도로는1929년 로마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가 체결한 라테란 조약을 기념하여 무솔리니에 의해
1937년에 착공하여 1950년 대희년을 맞아 개통되었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양편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줄지어 서 있고,
한 때 광장으로 가는 이 대로를 점유하던 중세 시대 아파트 700여 채는 1936년 10월 23일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철거가 시작되었으며,
1937년 10월 8일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늘날에는 산탄젤로성에서도 성 베드로 대성전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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