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창덕궁,창경궁
경복궁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후 완공 되었으며 완공된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근정전, 강녕전, 교태전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으며
경복궁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 되고 그후 270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 하였다.
중건한 경복궁은 33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고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이상의 전각이 헐리고 파괴 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내전과 동궁 권역도 제 모습을 되찿아 가고 있다.
근정전 국보 제233호
근정전에서는 서울에서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었는데 이를 조하라고 했다.
조하에는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석 하였다.
근정전의 마당 즉 조정에는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이 서 있는데,
이 앞에서 신하들이 깔고 앉는 방석도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어가가 올라 가던 곳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의 접견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단청
왕좌
내부 모습
내부 모습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침전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수, 부, 강녕, 유호덕(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종명(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 가운데 세 번째인 강녕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우물 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들이 숙직을 하였다.
생각보다 방들이 작음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1440년 세종22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 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는데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옮겨다 쌓은 계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이 아름답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 태종 12년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주역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조 대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등 왕실의 안 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이다.
조 대비는 남편 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하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즉위시켜 조 대비의 힘을 약화 시켰다.
인조의 8대손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조 대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차남을 양자로 삼고 고종으로 즉위 시켰다.
이때 고종의 나이 12세여서 10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주도 하였다.
북쪽 후원 영역에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6.25때 파괴 되었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 고종10년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며 사대부집을 연상 시키는 구조로 지었다.
1895년 을미사변때 건청궁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되어 녹산에서 불태워지자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1896년 2월11일 새벽에
고종은 변복을 한 채 황태자만 데리고 신무문을 빠져나가 러시아공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며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 가지 못했다.
왕의 처소인 장안당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이곳에서 명성왕후가 시해 됨.
장안당에서 곤녕합을 잇는 복도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건청궁의 부속 건물들
경복궁 수문 교대식
끝 날 무렵이라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음.
사진은 없지만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던 내전인데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빼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옮긴 뒤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돌들을 1993년에 김정동교수가 발견하여 노력 끝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이미 상해 버린 돌들은 자선당 복원때 쓰이지 못하고 녹산 한쪽에 전시 되어 있다.
창덕궁
창덕궁은 1405년에 태종이 세운 조선 왕조 제2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별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활을 하였다.
임진왜란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 되지 않고
1610년 광해 2년에 창덕궁이 재건 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1991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들의 접견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내부는 화려하고 높은 천장이 있는 통층이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다.
전등, 커튼, 유리창문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 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 하였으며, 왕가생활의 마지막 모습을 비교적 잘 보관하고 있다.
대조전은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청 관원들이 궁중에서 정사를 보던 곳
호위청 조선 후기에 설치된 군영의 하나.궁중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 되었다.
창덕궁 풍경
조선24대 임금 헌종은 1847년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창살과 벽체의 무늬, 평원루의 건축양식등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낙선재는 영왕의 비 이방자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기거 했던 곳으로
지금의 낙선재는 1996년에 복원된 옛 모습이다.
창경궁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이라 칭하였다.
원래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남경 이궁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을 지었는데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란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이후 창덕궁이 정궁 역활을 하면서 이궁으로서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일제때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 하였으며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 살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명정문 보물 제385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이다.
1484년 성종15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다가
1616년 광해 8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데 이는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어진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43세의 나이로 죽었다.
복원된 황실 어차
현대 자동차가 창덕궁에 방치 되어 있던 어차를 사회공헌 차원에서 몇년의 노력과 10억여원의
복구비를 들여 어렵게 복원하여 고궁 박물관에 전시한 어차들
순종황제 어차
순종황제 (재위 1907년~1910년)가 탔던 어차로 미국의 GM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7인승, 31.25마력, 8기통엔진, 배기량 5.153cc로 연식은 1918년으로 추정된다.
차체는 철재가 아닌 목재이고 외부는 칠로 도장되어 있다.
차문에 황실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전 세계적으로 20대만 남아 있다.
순정황후 어차
순종의 황후인 순정황후가 탔던 차로 영국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 20마력, 4기통, 엔진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으로 추정.
순종황제 어차와 같이 차체는 목재이며 외부는 칠로 도장하였다.
황실문장인 황금 오얏꽃 장식을 차문에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비단으로 꾸몄다.
전 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차로 순종황제 어차와 함께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황실의 생활상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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