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베네룩스 3국과 중부,동유럽 여행 제 2일째
전략 요충지인 중세 요새 도시인 룩셈부르크는
16세기부터 도시 성벽이 해체된 1867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의 하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부르고뉴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프랑스 및 에스파냐 왕들
그리고 나중에는 프러시아인에 이르기까지 유럽 열강들은
모두 룩셈부르크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도시의 방어시설은 계속 확장되었고 견고한 성벽이 축조되면서
북 지브롤터라는 명성을 갖는 요새가 되었다.
1867년 런던조약 조인과 함께, 유럽 강대국들은 대공국을 영구 중립국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3개월 내 요새 철수 및 파괴라는 피해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180㏊에 달하는 견고한 요새도시가 개방된 도시로 변화하였다.
유럽 지도
룩셈부르크 지도
정식명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다.
동쪽으로는 독일, 북쪽과 서쪽으로는 벨기에,
남쪽으로는 프랑스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국이다.
룩셈부르크 국기
룩셈부르그 대공국은
서유럽에 위치한 나라이며 대공작이 통치하는 대공국으로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60석)이다.
앙리 드 룩셈부르크 대공
본명은 앙리 알베르 가브리엘 펠릭스 마리 기욤.
1955년 장 대공과 벨기에의 공주인 조제핀 샤를로트 대공비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 3세이며
외할머니는 스웨덴의 공주 아스트리드 왕비이다.
1964년 11월 12일 법적 계승자로 공포되었고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며 1974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제네바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1981년 졸업했고
영국 왕립군사아카데미에서 장교 훈련을 이수했다.
제네바에서 공부하는 동안 만난 쿠바 출신 마리아 테레사와 1981년 2월 결혼한 후
대공세자 기욤과 펠릭스,루이, 알렉산드라, 세바스티앵의 4남 1녀를 두었으며,
그란듀칼 궁전을 집무소 겸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룩셈부르크 시외의 베르크성에 거주한다.
1998년부터 섭정으로 장 대공을 보좌하다가 2000년 10월 7일 대공위에 즉위하였다.
IOC위원이며 갈라파고스 제도의 보호를 위해 결성된 다윈 재단의 회장이다
룩셈부르크 대공비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테레사 메스트르는 쿠바 출신의 여성으로서,
룩셈부르크의 앙리와 결혼하였고,
그가 즉위하자 룩셈부르크 대공비가 되었다.
기욤 장 조세프 마리 대공세자와
벨기에 귀족가문 출신 스테파니 드 라노이 백작부인의 결혼식
룩셈부르크 대공가
룩셈부르크가 1815년 대공국으로 승격하면서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네덜란드 국왕 빌럼 1세가 룩셈부르크의 대공을 겸했고
1890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사망한 후 나사우-바일부르크 왕가의 아돌프가 대공이 되었다.
이후 빌럼 4세(1852~1912), 마리 아델레드(1912~1919), 샤를로트(1919~1964)가 대공위를 이어갔다.
이후 1964년 즉위하여 36년간 대공위에 있던 장 대공이 별세하자
그의 장남인 앙리 대공이 2000년 10월 여섯 번째로 대공위를 계승하였다.
앙리대공은 헌법상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입법부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군대의 총사령관이기도 하다.
형식상 행정권을 가지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각료회의나 내각을 통하여 집행된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골동품이라고 불렀던 작은 나라로
오랫동안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중세 봉건제의 유물적 존재로서,
또 독일과 프랑스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후는 온대의 온화한 기후로
총면적은 2,586㎢,
인구는 48만 6,000명(2008년 기준),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며
행정구역은 3개 시로 이루어져 있다.
민족은 룩셈부르크인이 63%,
포르투갈인 13%, 프랑스인 4.5%, 이탈리아인 4.3% 등이다.
언어는 게르만계 룩셈부르크어(모젤 프랑크어)가 일상어이고,
공용어는 프랑스어, 독어, 룩셈부르크어이다.
주민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가장 가까우며,
종교는 주민의 87%가 가톨릭교도, 13%가 개신교도이다(2000년).
세출의 30%가 사회보장비로 책정되는 복지국가로,
무상교육기간이 11년(유치원 2년, 초등학교 6년, 중등학교 3년)이다.
15세 이상 문맹률은 0%이다.
2007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501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0만 4,673 달러로 2012년 기준 1인당 GDP가 세계 1위로
철강공업이 발달하여 총수출의 90%를 철강제품이 점하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다.
작은 성이란 뜻인 룩셈부르크는
그 전략적 위치로 인해 16세기부터 1867년까지
유럽의 완충 지대인 동시에 커다란 하나의 요새 도시였다.
일찍이 천연의 요새지로서 로마의 인정을 받아
성채도시로 발전한 곳으로 1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때는 유럽 최강의 요새로 일컬어졌던 곳이며,
수세기에 걸쳐 군사적 건축물들의 축소판이다.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1명이 있을 때는 장미화원을 가꾸고,
2명이 모이면 커피를 마시고,
3명이 의기투합 하면 악단을 구성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통해 룩셈부르크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중 하나로
세계 제1의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좌파를 자처하고 있고,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1867년 런던회의에서 영세중립국이 되었으나 1948년 이를 포기하였고,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협력을 기조로 하여
유럽의 통합을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의 하나로 삼고 있다.
또한 베네룩스동맹을 통해 네덜란드·벨기에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유럽재판소,유럽의회 사무국,유럽투자은행 등이 있어
벨기에의 브뤼셀과 더불어 EC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EC는 1995년도의 유럽문화수도로 지정하였다.
룩셈부르크에서는 자신들을 서유럽의 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럽의 강대국들 독일, 프랑스, 벨기에와 국경이 맞닿아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고,
그래서 언덕 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쌓아 외세에 맞서 싸워온
조그만 국가 룩셈부르크는 그 위치만큼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유럽 재정의 중심지로
160여개국의 은행이 상주해 있는 세계 금융의 중심 국가이다.
룩셈부르크가는
중세에 독일국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백작 집안이다.
헝가리와 보헤미아(현 체코 일대)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자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마지막 룩셈부르크 왕조의 황제가 되었다.
지기스문트가 사망으로 혈통이 단절되기까지 하인리히 2세, 하인리히 7세, 카를 4세등
4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였다.
룩셈부르크의 수도는 룩셈부르크인데
남부를 흐르는 모젤강의 지류 알제트강과 페트루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며,
해발고도 300m의 절벽을 이루는 사암구릉에 위치하여,
깊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가지의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룩셈부르크 대공의 궁전과 의사당이 있고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이다.
라틴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교류하는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룩셈부르크는
16세기 이후 부르고뉴, 에스파냐, 프랑스, 프로이센이 눈독을 들이는 대상이 되어,
1815년 자치 회복하기까지 여러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북쪽의 지브롤터라고 불릴 만큼 역대 통치자들이 강화한 요새의 일부는
지금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며 룩셈부르크 시 풍경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옛 시가지에 세워진 대공 궁전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에는
건설 당시의 통치국 문화가 반영되어, 각 시대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전설에 따르면 사암 구릉에 세운 뤼첼부르크 성의 첫번째 성주였던
지그프리트 백작의 부인이자 아름다운 요정이었던 멜루시네는 남편에게 쫓겨나
알제테 강 위의 암벽 지대로 귀향을 갔다.
그녀는 거기서 셔츠를 만들면서 석방을 기다렸는데,
아주 천천히 7년에 한 땀씩 셔츠를 꿰메었다.
그리고 마침내 셔츠가 완성되자 룩셈부르크시는 저주를 받아
흙과 잿더미로 뒤덮이게 되었다고 한다.
룩셈부르크의 역사
룩셈부르크는 963년에 지그프리드 백작에 의해 건국되어,
1443년까지 백작령 및 공작령으로 존속되어 오다가
1443년 부르군디 공작에 의해 점령당한 뒤 1815년까지 지배를 받았다.
1815년 빈회의에서 룩셈부르크의 지위가
종전의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독립이 부여되었으나,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을 겸하게 되고
프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게 되어 네덜란드와 프러시아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867년 1월 1일 독립하여
런던조약에 의해 영세중립의 지위를 얻고 프러시아 군대가 철수하였으며,
1868년 10월 17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1890년에 네덜란드 왕 윌리엄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독자적 왕가를 가지게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점령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룩셈부르크 유네스코 세계유산
1. 룩셈부르크 중세 요새 도시 1994년 16세기부터 도시 성벽이 해체된 1867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의 하나였다.
2. 인간가족 사진전 2003년 기록유산 1950년대에 살았던 인간들의 매우 다양한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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