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

파베르제 부활절 달걀의 탄생 (1)

푸른 바다. 2021. 6. 22. 11:00

파베르제 부활절 달걀과 로마노프 왕가

 

 

'파베르제의 달걀'이란

러시아 파베르제가문의 공방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시대에

각종 보석으로 만든 화려한 부활절 달걀 공예 작품들을 말한다.

파베르제가 달걀을 만들던 시절 러시아 황실은

파베르제 공방에 ‘차르 인증서’를 내렸다.

파베르제 공방은 1885년부터 러시아혁명 전까지 30년 동안

많을 때는 700명 넘는 예술가, 기술자를 두고서

10만점 넘는 작품을 생산해

러시아는 물론 유럽 왕가, 명가들에게 공급했다.

파베르제 공방에서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부활절 달걀은

총 69개가 생산됐는데 이중 57개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황실용 부활절 달걀 52점을 제외한 나머지 달걀들은

그의 작업장에서 생산한 덕분에 여전히 "파베르제 달걀"이지만,

이 알들은 황실 달걀만큼 정교하지 못하고, 디자인적으로도 독특하지 않다.

파베르제 황실 부활절 달걀 총 수량은 1917년 혁명으로

황실에 전달되지 못한 2개에 의해 달라진다.

1917년 분을 포함하면 52개, 불포함하면 50개이다.

파베르제가 황실을 위해 만든 52점의 부활절 달걀을

가리켜 파베르제의 황실 부활절 달걀이라고 한다.​

파베르제 황실 부활절 달걀 52개 중에 6개는 행방불명 됐으며,

현재는 46개만이 남아 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19세기 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는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고향인 덴마크를 그리워하자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녀를 기쁘게 하기 어려웠다.

어느날 표도로브나가 부활절을 준비하는 달걀을 보며

미소지으며 어린시절 부활절 달걀과 관련된 일화를 얘기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의 보석 디자이너이자 세공인으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친 보석 장인 파베르제를 불러

덴마크 부활절 달걀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피터 파베르제는 16시간씩 무려 15개월 동안 작업해

덴마크 양식이 아닌 러시아적인 달걀 보석을 완성했다.

완성된 파베르제의 달걀을 알렉산드르 3세는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선물했다.

'암탉'이라는 이 작품은 겉은 하얀 색이고 안을 열면

눈이 루비로 된 금색 암탉이 들어있었다.

마리아는 정말 마음에 들어하며 감격했다. 황후가 깊이 감동하자,

알렉산드로 3세는 매년 황후에게 달걀 공예품을 선물했다.

1894년 11월 1일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한 후,

이어 아들 니콜라이 2세가 이 전통을 이어받아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에게

러일 전쟁 기간인 1904년과 190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달걀 공예품을 선물했다.

기록에 따르면 52개의 부활절 달걀 중 20개는

모후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30개는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에게 주어졌다.

1917년 혁명 해에 만들어진 달걀 2개는 황실에

바쳐지지 않았고, 러시아 혁명으로 황실이 무너지자

달걀 공예품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1885년 최초의 부활절 달걀 '암탉 달걀'

 

1885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는

사랑하는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와의

결혼 20주년을 기념한 부활절 달걀을 선물하게 되는데

이것이 파베르제 부활절 달걀의 시작이다.

최초의 부활절 달걀은 파베르제가 만든 '암탉 달걀'이다.

파베르제는 달걀 장식 속에 금으로 세공한

닭이 들어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흰색 에나멜로 제작된 달걀을 열면

무광의 금으로 제작한 노른자가 나오는데,

그 노른자를 열면 작은 암탉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암탉을 열면 작은 루비 펜던트가 세팅된

러시아 황실의 다이아몬드 대관식 왕관(미니어처)이 숨어 있었다.

황후 마리아가 이 선물에 매우 기뻐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파베르제를 "황실 특별 임명에 의한 금 세공인"으로 임명하고

그 다음 해에 또 다른 달걀을 의뢰했다.

그 후, 피터 칼 파베르제는 미래의 부활절 달걀을

디자인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고,

그들의 디자인은 더욱 정교해졌다.

파베르제 가문에 따르면,

황제조차도 그들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몰랐다고 한다.

단 하나의 요구조건은 각각 놀라움을 포함하고,

각각이 유일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파베르제가 초기 디자인을 승인하면,

이 작업은 마이클 퍼킨, 헨리크 위그스트롬,

에릭 아우구스트 콜린 등의 장인 팀에 의해 수행되었다.

 

 

 

1885년 첫번째 파베르제 황실 부활절 달걀 Hen Egg

 

최초의 부활절 달걀 암탉 달걀은

덴마크 스타일이 아니라 러시아적 창의성으로

걸작품을 만들었다.

뚜껑을 열면 또 다른 것이 나오는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쉬카를 응용한 것이다.

흰색 에나멜 달걀 속에 노른자가 들어있고

또 그 안에 금으로 세공한 암탉이 있고

또 암탉 안에는 왕관이 있고

그 왕관 안에는 루비펜던트가 들어 있는 식이었다.

 

 

 

분실된 왕관과 루비 펜던트

 

"기쁘게 해드릴 선물을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깨뜨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서 다뤄 주십시오.

처음에 흰색 달걀을 열면 금으로 만든 노른자가 나옵니다.

그 속에 암탉이 있습니다.

두 손가락만 이용해서 암탉의 턱 밑을 누르세요.

그럼 왕관이 나올 겁니다.

왕관 속에는 루비 펜던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마마께 걸어 드리십시오.”

1885년 서른아홉의 젊은 보석공예가는 성질 급한

거구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에게

꼼꼼하게 쓴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만든 첫 부활절 보석 달걀의 ‘사용설명서’였다.

황제는 1882년 러시아 산업아트전을 비롯한

수많은 국내외 귀금속 경연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쓴

재주꾼 파베르제에게 덴마크 공주였던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위해

덴마크 보석 달걀을 본떠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파베르제는 덴마크 스타일을 따라 하지 않았다.

대신 러시아적 창의성을 가미했다.

뚜껑을 열면 또 다른 것이 나오는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쉬카를 응용한

이 부활절 보석 달걀(이 중 왕관과 루비 펜던트는 분실)에

황제 부부는 매료됐고 황제는 그에게 매년

부활절 달걀 제작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파베르제 달걀의 시작이다.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파베르제를 황실 보석세공인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부활절 달걀 제작에 관한 전권을 맡겼다.

파베르제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해

만들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단 달걀 안에 '놀라움(surprise)'

즉 깜짝 놀라게 하는 요소 내지는 장치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파베르제는 본인 스스로가 창조적인데다

황제로부터 든든한 후원까지 받게 되자

이후 최고의 달걀 장식품을 만들어낸다.

달걀 내부에 기계식 또는 시계처럼

움직이는 장치를 집어 넣거나

큰 알이 작은 알을 품고 그 속에 또 다른 장식품을 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미술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총 10개를 소장한 모스크바 크렘린 뮤지엄에서

19세기 및 파베르제 보석을 연구하고 있는

학예사 타티아나 문티안은

“그가 만든 황실용 부활절 달걀은 모두

인보이스(매매 관련 기록)가 있는데

1904년과 1905년 것만 없다.

아마 러일전쟁 때문에 만들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문티안은 “보통 10cm, 가장 큰 것도 30cm에 불과한

크기의 달걀에 러시아 문화와 역사의 상징을 압축해

표현했다는 것이 파베르제의 특징”이라며

“특히 작은 금 열쇠가 들어 있는 부활절 달걀은 5개가 있는데

이는 달걀 속 깜짝 선물이 움직인다는 뜻”이라고 했다.

 

 

 

파베르제의 달걀(Faberge Eggs)은

19세기 러시아 차르 황실의 보물로

알렉산드르 3세가 1885년

부활절에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당시 보석 세공의 명장

칼 파베르제에게 제작을 명해 만든 것이다.

이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30년간

파베르제 부활절 달걀 선물 전통을 이어갔다.

러시아 황실은 파베르제 공방에 차르의 인증서를 내렸고,

파베르제의 공방은 러시아 외에도 유럽 각국의

왕가와 귀족 가문에 공예품을 공급했으며,

한때 700명 이상의 예술가와 기술자가 일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방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곳에서는 10만점 이상의 공예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파베르제 황실 부활절 달걀은 52개에 불과하고

현재 러시아의 파베르제 박물관이 소장한 9개를 포함해

러시아 크렘린궁에 10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소유 3개,

미국 버지니아 미술관 5개, 개인 콜렉션 등

전 세계에 46개만 남아있는 희귀품이다.

 

 

 

파베르제는 금, 은, 비취, 청금석, 공작석 등

다양하고 다채로운 색상의 보석을 주로 다뤘다.

전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파격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을 만드는 데 전념했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부활절 달걀이다.

알 공예는 이전부터 유럽에서 발달해왔는데,

파베르제의 손을 거치면서 절정을 이뤘다.

파베르제 달걀이 매력적인 것은

단순한 달걀 모양에 그치지 않고

그 내부에 시계 또는 기계식으로 움직이는 장식품을 넣거나

외관에 스토리를 담은 장식을 가미했다는 데 있다.

큰 알이 작은 알을 품고 또 작은 알이

다른 장식품을 품는 디자인을 통해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미술의 극치를 보여줬다.

또 다른 세상을 품은 달걀을 만들어내면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이다.

 

 

 

피터 칼 파베르제의 생전 모습 [파베르제 공식 홈페이지]

보석 세공의 명장, 유럽 장식미술의 최고 거장

서양 장식미술에서 가장 뛰어난

제정 러시아의 금세공인, 보석세공인, 디자이너.

 

1846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위그노 교도의 후손으로 신교도 탄압을 피해

독일로 다시 러시아로 이주한 보석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구스타프 파베르제는

184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작은 보석공예점을 내고

파베르제가 어려서부터 러시아와 유럽 각국을 돌며

보석공예 기술과 주얼리 최신 유행을 익히고

각종 광물 연구를 할수 있게 했다.

페테르 카를 파베르제는 독일에서 교육 및 금세공을 익힌 뒤,

1866년 독립할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버지 작업장에서 보석세공 기술을 익혔다.

1870년 아버지의 가업을 이으면서

본격적으로 금, 은, 보석 장식품을 만들기 시작해,

모스크바의 '전 러시아 박람회'(1882)에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유럽, 특히 러시아의 왕족들이 그를 후원했다.

그의 아들들 및 스위스의 공예가 프랑수아 베르바움 등이

이끄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파베르제는

훌륭한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금·은·공작석·비취·청금석 등의 귀금속이나 준보석을 전문으로 다루었다.

그는 전통적인 보석류의 배타적인 디자인과 제조법을

대담하게 변화시켜 환상적인 제품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프랑스의 루이 16세 치세에

유행한 장식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곧이어 모스크바와 키예프, 런던에서

다른 독립 작업장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문을 열었는데,

그가 고용한 장인들 중 두드러진 사람으로는

뛰어난 공예가인 미하일 페르친이 있었다.

파베르제의 공방은 우아하고 정교한 걸작들,

꽃, 군상, 장식용 골동품, 동물 등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고,

황제의 부활절 달걀은 특히 유명했다.

 

 

 

22가지 서로 다른 색깔의 돌을 연마해 붙여 만든 ‘예비역 사병’

모자의 챙, 수통, 가방, 버클, 군화, 소총을 이루고 있는

돌들의 질감이 각각 다르다.

 

파베르제는 광물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파베르제가 당시 유럽 최고의 장식미술가이자

사업가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는,

첫번째로 그는 새로운 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당시 막 쓰이기 시작한 플래티넘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보석 제작에 적극 활용했다.

또 우랄산맥 주변이나 시베리아 지역에서만 나는

컬러스톤의 가치도 높이 샀다.

두번째는 새로운 기법에 대한 활용이었다.

예를 들어 길로셰 에나멜 기법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개발된 것이지만 그는 더 깊은 느낌이 나도록 했다.

여기에 자신만의 색채기법까지 더했다.

파베르제에게 하얀 색은 그냥 하얀 색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흰색을 오이스터 화이트라고 명명했다.

새먼 핑크, 임피리얼 블루, 스트로베리 레드 등

이렇게 만들어낸 자신만의 색깔이 144개에 이른다.

그는 또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이를 형상화했다.

민들레 홀씨를 보고 그런 느낌을 주는 다이아몬드 꽃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보다 나은 작품을 보다 많이 생산하기 위해 분업 시스템을 만들고

손이 빠르고 꼼꼼한 보석 전문가들을 끌어 모았다.

그의 스튜디오는 최고 700명이 넘는 아티스트와 공예가가 모여

러시아 황실은 물론 유럽 각지에서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에 이어 유럽 최고의 보석공예 가문도

송두리째 쓰러뜨려 버렸다.

회사는 1918년 볼셰비키에 의해 국유화됐다.

통한을 품은 파베르제는 핀란드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했고

혁명 3년 뒤인 1920년 74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고

프랑스 칸에 묻혔다.

 

 

 

파베르제 공방 팬지꽃

 

팬지꽃이 투명유리병에 꽃혀 있는 모양인데

물과 유리처럼 보이는 것은 크리스털이고,

꽃대가 물 안에서 굴절되는 모습까지

크리스털에 표현했다.

꽃잎이 접히는 팬지꽃은

금과 다이아몬드, 라인석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베르제 Shop 1900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황실의 궁궐들은 약탈되었고

그들의 보물들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명령으로

크렘린 무기고로 옮겨졌다.

자금 조달을 위해 1927년 스탈린은 로마노프 왕조가 가지고 있던

파베르제의 가치를 평가한 후 많은 달걀을 매각했다.

1930년과 1933년 사이에 14개의 황실 달걀이 러시아를 떠났다.

많은 달걀들은 Armand Hammer와 런던 골동품상인

Wartski의 Emmanuel Snowman에게 팔렸다.

파베르제가 만든 황실 부활절 달걀 52개 가운데

10개는 러시아 크렘린궁 무기고에 남아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베르제박물관 9개,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3개,

미국 버지니아 박물관에 5개가 있고,

그외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총 52개의 달걀 가운데 6개는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왕가 알렉산드르 3세 (1845~1894)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 아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다.

처음에는 군인이 될 생각이었으나

1865년 맏형 니콜라이가 죽자 황태자가 되었고,

이어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테러로 부친이 사망하면서 제위에 올랐다.

그는 이전 통치기의 개혁적이며 자유주의적 정치 체제를

절대적인 전제 체제로 되돌려놓았다.

또한 강력한 전제주의로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산업 발전과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와의 동맹 체결을 통한

일관적인 평화유지 정책으로 러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1888년 열차 사고로

허리를 다친 이후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요양을 위해 가족과 함께 크림반도의 리바디야로 거처를 옮겼으나

리바디야에서의 휴양 생활 한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94년 10월 20일 오후 알렉산드르 3세 사망 후 1시간 반이 지나

리바디야 교회에서 신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식이 거행되었다.

다음 날인 10월 21일 같은 장소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시신은 1894년 11월 1일

페트로파블롭스키 사원에 안장되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1847~1928)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딸

 

덴마크의 공주 마리야 소피야 프리데리카 다그마라는

원래 형 니콜라이의 약혼녀였으나 니콜라이가 죽자

니콜라이의 유언대로 1866년 둘은 결혼했다.

결혼 전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마리아 표도로브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3세는 마리아 표도로브나와의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엄격함과는 달리 황제는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다른 여인(정부)을 두지 않은 유일한 황제로

그만큼 아내를 사랑했다.

그는 일생에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고

버릇없는 언행에도 관대했다고 한다.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1847~1928)

 

덴마크의 공주였던 마리아는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3세와 결혼하며 황후가 되었다.

볼세비키 혁명 다음해인 1918년 아들인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당할 때 황태후 마리아는

크림반도로 피신해 있다가 그대로 망명길에 올랐다.

평생동안 아들 니콜라이 2세의 사망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1926년 친정 덴마크에서 사망하며, 남편 알렉산드르 3세 옆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이 유언은 사후 78년 뒤인

2006년에야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의 대관식

 

 

 

러시아 로마노프왕가 니콜라이 2세 (1868 ~ 1918)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1894년 즉위하여 1917년까지 23년간 재위했다.

니콜라이 2세는 선친의 정책을 계승하여 변화된 사회적

조건들을 간과한 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성격은 선량하고 교양도 있었으나 황제로서는 부적격하였다.

독일의 공주이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여 살면서 그 영향하에 있었고,

또 왕세자의 혈우병으로 인하여 라스푸틴의 전횡을 초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하였다.

적극적인 극동진출로 러일전쟁을 초래하였으며,

전쟁에서의 패배는

국내 상황과 결부되어1905년 혁명을 야기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수도를 떠나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으나,

내정을 라스푸틴에 빠져있는 황후가 맡게 되어,

라스푸틴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국정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로인해 3월혁명으로 제정의 붕괴를 맞았다.

1917년 3월 15일 퇴위를 선언하고 유폐, 감금되었다가

11월 혁명 뒤 시베리아로 이송되는 도중,

우랄 지방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롭스크)에서

볼셰비키 지방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1918년 7월 16/17일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872~1918)

 

1894년 11월 14일 니콜라이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독일 게센공의 딸 알리사를 배우자로 맞았다.

애초에 알렉산드르 3세 부처는

니콜라이와 알리사의 결혼을 반대했다.

당시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알렉산드르 3세는

니콜라이를 프랑스 루이 필립 공의 딸과 결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의 의지 앞에 알렉산드르 3세 부처는 결국 결혼을 승낙했다.

1894년 4월 6일 니콜라이와 알리사의 결혼이 공포되었다.

1894년 10월 10일 알렉산드르 3세가 휴양 중이던

크림의 리바디야에서 니콜라이와 함께 황제의 임종을 지켰다.

알리사는 10월 21일 알렉산드르 3세의 추도식에서 개종하고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받았다.

결혼식은 1894년 11월 14일 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에르미타지)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들 부처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니콜라이 2세는 가족을 사랑했고, 특히 혈우병을 가진

아들 알렉세이를 깊은 애정으로 보살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결혼식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는

1895년부터 매년 부활절에

어머니인 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위한 달걀과

아내를 위한 달걀 등 파베르제 달걀 두 개를 주문해

매년 부활절 때마다 선물했다.

파베르제 황실 부활절 달걀 총 52개 중

20개는 모후가, 30개는 황후가 소유했고

1917년 혁명 해에 만들어진 달걀은 바쳐지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이 계속되자 니콜라이 2세는

1916년 9월 이후 스스로 군 총사령관을 겸임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이 바로 황제에게 귀속되어버린

역효과를 가져왔다.

괴승 라스푸틴은 알렉세이 황태자의 혈우병을 진정시키면서

황후 알렉산드라의 신임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라스푸틴은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그에게 아부해서 출세하려는

귀족, 군인, 관료들이 들끓었다.

게다가 황후는 러시아 국민들이 반감을 품고 있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일계 여인이었다.

고집세고 허영심도 강했다.

프랑스 대혁명 전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황후 알렉산드라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국민들의 거부감을 조장했다.

유약한 니콜라이 2세는 이런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1917년 혁명을 맞이해 로마노프왕조가 붕괴되고

가족과 함께 살해 당했다.

 

 

 

니콜라이 2세 가족(1913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후예라고 칭하는

아나스타샤가 계속 나타나자

과학의 힘으로 이 모든 일을 종식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모계를 통해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분석기법이다.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황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였기 때문에

혈우병과 함께 영국 왕실의 미토콘드리아도

함께 자녀들에게 유전되었다.

그 유전학적 정보를 통해서 총살당했던 지역에서

발견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 출처: 위키피디아 영어판,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