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박물관

[김해] 국립김해박물관

푸른 바다. 2011. 3. 17. 10:32

국립김해박물관

 

가야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199년 7월 29일  개관하였다.

 그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 가야의 건국신화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다른 국립박물관들과는 달리 가야시대 테마를 중심으로

가야유물의 고고학 중심의 유적과 유물이 공개되어 있다.(출처: 위키백과)

 

 

 

1층과 2층의 상설 전시실에는 선사시대와 가야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는 낙동강 유역의 선사시대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수렵이나 어로의 도구와 채집 유물, 농경 유물, 홍도와 채도 그리고 청동검이 전시되어 있고,

사천시 앞바다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과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의 유물과 함안 마갑총의 유물을 전시하였다.

2층 전시실에는 가야시대의 장신구와 농경에 관한 유물, 그리고 가야 시대의 문자와 기호,

그리고 각종 전쟁 용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내동 고인돌(지석묘)과 돌널무덤(석관묘)이 전시되어 있으며,

창원시 다호리유적에서 발굴된 가야시대의 무덤인 돌덧널무덤(석관묘)이 전시되어 있다.(출처: 위키백과)

 

 

 1998년 개관한 본관은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 한 검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건축가 장세양(1947년~1996년)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위키백과)

 

 

 

 

 

 

 

창녕 비봉리패총은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배와 신석기시대 편물기술을 보여주는 망태기를 비롯하여

대규모 도토리 저장시설 등이 출토되어 신석기시대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확인되었다.(출처: 문화재청)

 

 

 

 

동물뼈

 

물고기뼈와 조개껍질

 

식물류   가래와 도토리

 

 

간돌도끼   신석기시대  창녕 비봉리外

 

흑요석 원석, 흑요석 격지        맨돌화살촉, 흑요석촉  신석기시대  통영 연대도  

 

돼지모양토우   통영 욕지도               장식옥   통영  연대도           뼈치레걸이  통영 연대도    신석기시대 

 

갈돌, 갈판  신석기시대  창녕 비봉리

도토리 같은 딱딱한 견과류를 가루로 만들거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데 사용한 것이다.

 

간돌도끼   신석기시대  창녕 비봉리

 

새김무늬토기  신석기시대  김해 수가리

 

빗살무늬토기: 토기 겉면에 빗살 무늬를 새겨놓아 붙여진 이름이다.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어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불려지기도 한다.

토기 겉면에는 뾰족한 도구로 누르거나 찍어서

손톱무늬, 톱니무늬, 문살무늬, 생선뼈무늬, 점무늬 등 여러가지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겼다.

빗살무늬토기는 시기에 따라 무늬모양, 무늬가 들어가는 면적등에 차이가 있다.    

 

붉은칠토기   신석기시대   통영 연대도

 

 겹입술토기  신석기시대  부산 금곡동 

 

덧무늬토기  신석기시대  통영 연대도   김해 수가리

 

톱니입술무늬토기   신석기시대   통영 연대도

 

눌러찍은무늬토기  신석기시대  통영 욕지도

 

조가비팔찌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팔찌는 조개나 옥을 사용하였지만,

삼국시대가 되면 금속으로 재질이 변한다.

금이나 은 ,청동으로 고리를 만들고 표면에 무늬를 새긴 것이 많지만,

 은사슬에 장식품을 매단 것도 있다.

 

작살  신석기시대  통영 욕지도

 

돌칼   신석기시대  통영 욕지도

 

낚시바늘   가야  창원 다호리

뼈낚시바늘  신석기시대  통영 연대도

 

그물추  신석기시대  창녕 비봉리

 

그물추  신석기시대  창녕 비봉리

 

사냥돌   청동기시대  경남지역

 

돌창   청동기시대   경남지역

동물을 사냥할 때 찌르거나 던져서 사용한다.

 

간돌화살촉  청동기시대

 

가락바퀴   청동기  가야  경남지역

선사시대 사람들이 실을 뽑을 때 사용한 도구

 

                                                                  반달돌칼   청동기시대                     돌 낫   청동기시대  경남지역

 

보습   청동기시대   진주 대평

농사를 지을때 땅을 일구거나 고랑을 팔 때 사용한다.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경남지역

 

청동기시대가 되면 그릇 표면을 장식했던 빗살무늬들이 사라지고

그릇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토기들이 등장한다.

또한 뾰족했던 바닥이 편평해지고

바리, 대접, 접시, 항아리, 시루, 독, 굽달린접시,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들이 만들어진다.

특히 이시기에는 무늬가 없는 토기들이 많기 때문에 포괄하여 민무늬토기라고 부른다.

간단한 선무늬나 구멍무늬 등이 있는 경우도 있고 토기 표면에 붉은색이나 검은색 색깔을 입힌 것도 있다.

민무늬토기는 일반적으로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은 다소 거친 흙으로 빗어 한데가마에서 구운 토기로

대게 갈색 계통의 색깔을 띠며,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경남지역

 

< 합천 영창리 유적>

 남북으로 길게 뻗은 언덕위에 주거지, 환호, 무덤이 있는 방어취락이다.

덧띠토기, 굽다리접시, 쇠뿔손잡이항아리, 홈자귀와 함께 한국식동검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3~2세기에 주로 형성된 유적이다.

 

왼쪽: 사발, 두형토기, 검은간토기   합천 영창리 유적   초기철기시대

   오른쪽: 덧띠토기 김해 대정,  검은간토기 사천 늑도, 붉은간토기 산청 소남

 

 

가야는 삼한시대 변한에 해당하는 낙동강 서쪽을 중심으로

군소 성읍국가들이 발전한 연맹체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 명칭은 가야, 가라, 임나 등 다양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 영역은

오늘날의 낙동강 하류, 남해안, 지리산, 가야산 일대로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야 후기의 영역으로 초기 가야는

고고학 연구 성과에 따르면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도 포함하고 있었다.

낙동강 하류의 금관가야, 가야산 일대의 대가야, 남해안 일대의 소가야, 함안지역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등

여러국가들이 철을 기반으로 한.중.일 연안무역의 중심지로서

삼국시대에는 백제, 신라와 서로 패권을 다투었지만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막을 내렸다.(출처:김해박물관)

 

<가야의 건국 설화> 

두 가지의 가야 건국신화가 전한다.

하나는 ‘가야산에 살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됐고,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하나는 ‘하늘에서 6개의 커다란 알이 내려왔는데,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나온 동자들은 5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앞엣 것은 신라 말 최치원의 <석이정전>에 나온 이야기를 인용해 실은

조선 초의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이고,

뒤엣 것은 고려 중기에 나온 <가락국기> 내용을

고려 후기에 일연이 인용해 실은 <삼국유사>의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다.( 출처: 고령 대가야박물관)

 

42년에 200~300명의 무리가 구간(9간)과 함께 구지봉에 모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의 목소리가 구지봉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자 사람들은 “네, 저희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자

“그럼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라고 했더니 “구지봉입니다” 라고 다시 말하자

“하늘이 나에게 너희들의 왕이 되라고 명하셔서 이렇게 왔노라

그러니 너희는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라고 하자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지가를 불렀더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오고 줄 끝에는 황금색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 알이 있었다.

그 상자를 귀하게 여겨 12일 동안 아도간의 집에 놔두었더니

12일 후에 사내아이로 바뀌고 10일이 다시 지나자

사내아이 중 키가 9자, 얼굴은 전한 고조, 눈썹은 요 임금, 눈동자는 순 임금 같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 나타냈다는 뜻으로 수로왕 혹은 수릉 이라고 했다.

이 가야 건국 설화의 뜻은

자주색 줄은 탯줄을 의미하고 황금 알이 담긴 황금 상자는 엄마가 아기를 키우는 아기집을 뜻한다.

또 알과 상자가 모두 황금빛인 것은 철기 문화를 뜻하는 것이고

청동기 사회에서 금과 철기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커다란 힘이 되므로

6왕은 외부에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온 사람을 상징한다.(출처: 위키백과)

 

6가야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경남 김해     경북 고령      경남 함안     경남 진주    경북 성주     경남 고성

 

자루달린칼. 뼈찌르개. 뼈칼  초기철기시대  사천 늑도

 

<가야의 여명-사천 늑도유적지>

경남 사천시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 늑도 . 그곳은 섬 전체가 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유물도 나왔지만 ,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 가는 초기철기시대가 중심이다.

청동검과 함께 출토된 납작쇠도끼. 쇠칼. 뿔손잡이칼 등은

남부지방에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의 모습을 보여주며,

 집터에서는 남한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난방시설과 부뚜막시설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말기의 덧띠토기. 뚜껑. 소형토기를 비롯하여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도 많이 나왔고 중국계 유물인 낙랑토기와 중국 진나라 화폐인 반량전도 발견되어,

이곳이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한국-중국-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무역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 토기 토제품  초기철기시대  사천 늑도 

 

야요이토기  초기철기시대  사천 늑도

 

야요이는 일본 선사시대(기원전 200~기원후 300) 문화를 말하며,

중국과 한반도에서 이탈한 세력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형성된 문화로 추측이 되기도 한다.

일본신석기문화인 조몬문화와는 큰 차이를 보이며 일본에서 철기와 청동기를 사용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이 야요이토기로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독, 컵  초기철기시대  사천 늑도

 

칸막이접시  초기철기시대  사천 늑도

 

뼈화살촉  초기철기시대

 

굽다리바리   초기철기시대  사천 늑도

 

청동투겁창   가야   김해지역                                  한국식동검   가야   창원 다호리

 

<가야의 여명 - 창원 다호리유적 (유력개인의 등장)>

주남 저수지에 인접한 다호리유적은 평지에서부터 구릉 정상부까지

목관묘, 옹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다양한 무덤이 분포한다.

목관묘는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속을 파서 만든 통나무관과 판재를 조립하여 만든 관이 있다.

통나무관은 1호 무덤에서 실물이 나왔다.

1호 무덤은 통나무관 아래에 껴묻거리 구덩이가 있었고

여기서 청동검, 쇠칼, 여러가지 형태의 쇠도끼, 중국거울, 동전 등 금속기류와 붓, 부채, 검집, 화살통 등 칠기류가 나왔다.

청동과 쇠로 만든 검은 그 형태가 비슷하다. 이것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붓은 2,000년 전 우리나라에서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중국거울과 동전은 당시 중국과 교역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런 유물을 소유한 무덤 주인은 당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부를 통해 권력을 지녔던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호리 유적은 삼국이 형성되기 전에 집단내에서 개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청동검   가야  출토지미상              청동투겁창   가야   창원 다호리

 

쇠화살촉   가야  창원 다호리

 

작은칼 (복제품), 붓 (복제품)  가야   창원 다호리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 한반도인들이 이미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다.

작은칼은 죽간 또는 목간에 새겨진 글씨를 지울 때 사용한 것이다.

 

칠기   복제품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토기, 철기, 목기, 대나무 등 여러재질의 유물에 칠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칠기법은 같은 시기

낙랑이나 중국의 그것과 달리 독자적인 칠문화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토기제작 기술

 

기원전 1세기경 민무늬토기의 제작 전통에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더해져

 와질토기라는 독창적인 토기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토기제작기술로는 회전판,굴가마, 환원염소성, 타날 등이 있다.

 

                                             접시   가야  창원 다호리                                          주머니호   가야  창원 다호리

 

항아리   가야  창원 다호리

 

주머니호  가야  창원 다호리

 

 

 

「가락국기」에는 제2대 거등왕부터 제10대 구형왕까지 역대 임금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나,

 그 밖에 금관가야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532년(법흥왕 19)에 마지막 왕인 구해는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아들 무력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었다.

무력은 이러한 공로로 각간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 사람이 바로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멸망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새 달린 미늘쇠   함안 도항리

 

길쭉한 철판의 양쪽 가장자리를 오려내어 만든 것으로 미늘의 형태는 고사리나 가시모양이 많다.

말탄 무사를 말에서 끌어 내릴 때 사용하는 무기였으나 새모양의 미늘을 만드는 등 의기로 변모하게 된다.

 

3세기~6세기 대까지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철판에 미늘이 달려있다.

무기로 보기도 하지만,특정집단을 상징하는 의기로 파악하기도 한다.

미늘의 형태는 고사리무늬, C자 형태, 새모양, 삼각형 등이 있다.

이 중 새모양 미늘쇠는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 등 서부 경남지역에 한정되어 출토되는데,

 새를 숭배했던 고대인들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오리모양 토기

 

3세기경에 남부지방에서는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묻었다.

등과 꼬리 부분에는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변, 진한의 새모양토기는 오리모양이 주류를 이룬다.

머리에는 벼슬이 있고 대체로 두 마리가 한 쌍을 이루어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목을 자른 오리모양토기, 혹은 머리만을 넣은 경우도 있어

오리모양토기와 관련된 여러가지 제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혼의 전달자

 

삼국지위서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죽은이의 영혼을 이끄는 매개자로서 새를 신성시하였음을 보여준다.

낙동강을 생활기반으로 하는 변한 사람들에게

해마다 찿아오는 철새는 친숙하면서도 인간보다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였다.

  

 

< 금관가야의 성립 - 김해 양동리유적>

김해시 주촌면에 위치한 양동리 고분군은

1969년 알려진 이래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에서 500여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에 해당하는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약 5,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변한과 가야의 물질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형무덤에서 출토된 중국, 일본의 유물들은 활발한 해상교역과 금관가야 문화의 국제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양동리 고분군이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의 집단 무덤이었음을 보여준다.

 

수정목걸이  가야   김해 양동리

 

중국 사서의 기록과 같이 변,진한 지역에서는 금,은제품이 출토되지 않고

대신 벽옥, 수정, 마노 등 다양한 옥이 출토된다.

특히 수정은 빛깔이 곱고 아름다워 장신구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목걸이  가야  김해 양동리

 

가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소중히 여긴 수정목걸이

 

목걸이   가야   김해 양동리

 

가야무덤에서는 금은과 같은 귀금속 대신에

구슬로 만든 목걸이, 곱은옥 등 여러가지 꾸미개가 많이 출토된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 가야인들은

구슬을 재보로 삼았으며, 혹 옷에 꿰어 장식하고, 혹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은.비단을 진기하게 여겨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증명한다. 

 

쇠칼, 쇠화살촉  가야  김해 양동리

 

고리모양청동기  가야  김해 양동리

청동거울        가야  김해 양동리

 

항아리   가야  김해 양동리

 

화로모양토기  가야  김해 양동리

 

청동세발솥   가야  김해 양동리

 

<김해 대성동유적지>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 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재 구릉의 정상 일부분을 제외한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덧널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관)을 만든 것으로,

이전에 통나무관을 이용하던 것에서 나무판널을 사용하는 시기로의 전환이 1세기경임을 보여준다.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목류, 중국제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

 한·중·일의 문화교류 상황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재갈   가야  김해 대성동

 

고리모양청동기   가야  김해 대성동

 

뼈화살촉    가야   김해 대성동

 

목걸이   가야  김해 대성동

 

목걸이   가야  김해 대성동

 

목걸이   가야   김해 대성동

 

화로모양토기    가야  김해 대성동

 

화로모양토기   가야   김해 구지동

 

굽다리접시  가야  김해지역

 

목항아리, 그릇받침  가야  김해 대성동

 

원통모양그릇받침  가야  김해 부원동

 

굽다리접시   가야   김해지역

 

단지, 그릇받침  가야  김해 대성동

 

항아리   가야  김해 대성동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가락국기』에는 금관가야를 대가야라고 하였다.

이는 가야연맹 전기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었기 때문이며, 금관가야를 본가야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삼국사기』지리지에는,

 고령군은 본디 대가야국으로 존속 기간이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인데,

신라 진흥왕이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진 뒤, 또는 금관가야가 멸망한 뒤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국이 대신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라고 불렸기 때문인 듯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용, 봉황장식 고리자루칼  가야 합천 옥전

 

칼 손잡이 끝에 달린 둥근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이 장식된 것으로

가야 무덤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에서 나온다.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여 장식대도라고도 한다.

 

금동관   가야   고령 지산동   복제품

 

고령 지산동 32호묘에서 출토된 것이다.

불상 광배모양의 솟은 장식 양쪽으로 작은 연봉오리모양의 장식이 하나씩 있다.

관테의 안쪽에 천이나 가죽을 덧대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걸이   가야   고령 지산동

 

금귀걸이   가야   고령 지산동

 

목항아리, 그릇받침   가야  고령 지산동

 

원통모양그릇받침  가야  합천 반계제

 

굽다리접시   가야  합천 옥전

 

뚜껑접시   가야   고령 지산동

 

항아리, 그릇받침   가야   고령 지산동

 

손잡이잔  가야  고령 지산동

 

여러잔토기  가야  고령 지산동

 

쟁반같은 큰 그릇에 작은 토기들을 넣은 독특한 형태의 그릇이다.

 

쇠낫 , 낫모양철기,  끌모양철기  가야   고령 지산동

 

쇠말방울, 방울, 미늘쇠   가야   고령 지산동

 

발걸이   가야  고령 지산동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가야  고령 지산동

 

띠고리   가야   고령 지산동

 

화살통꾸미개  가야   고령 지산동

 

 

흔히 가야제국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은

김해의 구야국(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로 알려져 있으나 함안의 아라가야도 큰 세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라가야는 김해의 구야국, 고령의 대가야와 함께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존재하였고,

국력이 가장 강력하였을 때가 5세기로 여겨진다. 이 고분군은 그때의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말갑옷   가야  함안 마갑총

말갑옷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미늘로 구성된

가야무사의 미늘갑옷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말갑옷은 전투때 적의 공격으로부터 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

크게 목가리개와 몸통가리개로 이루어져 있다.

말갑옷은 긴 철판을 여러 매 이어 만들었는데 목가리개는 부채꼴 모양으로 연결하였다.

고구려 벽화무덤에 많이 표현되어 있는 말갑옷의 실물은

마갑총 출토품을 통하여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갑총은 함안 도항리. 말이산 고분군의 북쪽 능선상에 위치하며 덧널무덤 안에서 말갑옷이 출토되었다.

 

마갑총에서 말갑옷이 발견되던 당시의 사진

 

마갑총은 함안지역의 중심고분군인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이 입지한 주능선의 북쪽 말단부에서 발견된 대형덧널무덤이다.

 아파트 건축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나무널 좌우에는 말갑옷을 잘 펼쳐서 부장해 놓았고 피장자의 우측편에는 고리자루큰칼이 놓여져 있었다.

아쉽게도 말갑옷은 일부가 공사로 인하여 훼손되었으나 전체의 2/3가 복원될 수 있었다.(출처: 네이버고고학사전)

 

 

      말띠드리개, 쇠칼, 쇠낫, 쇠화살촉, 쇠투겁창  함안  말이산

 

<함안 도항리유적>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은

함안지역의 최고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지로 삼국시대 전기간동안 조영된 중심고분군이다.

함안군의 남쪽을 에워싸고 있는 높은 산줄기를 배경으로 분지의 한가운데로 뻗어내린 능선 위에

 대형봉토분들이 밀집되어 분포하는 대표적인 가야지역의 고분군이기도 하다.

 내부에서 반달돌칼, 그물추, 가락바퀴, 민무늬토기 편, 골아가리무늬토기 편, 석재 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 네이버고고학사전)

 

새 달린 미늘쇠   함안 도항리

 

길쭉한 철판의 양쪽 가장자리를 오려내어 만든 것으로 미늘의 형태는 고사리나 가시모양이 많다.

말탄 무사를 말에서 끌어 내릴 때 사용하는 무기였으나 새모양의 미늘을 만드는 등 의기로 변모하게 된다.

 

3세기~6세기 대까지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철판에 미늘이 달려있다.

무기로 보기도 하지만,특정집단을 상징하는 의기로 파악하기도 한다.

미늘의 형태는 고사리무늬, C자 형태, 새모양, 삼각형 등이 있다.

이 중 새모양 미늘쇠는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 등 서부 경남지역에 한정되어 출토되는데,

 새를 숭배했던 고대인들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수레바퀴장식토기   함안   말이산

 

굽다리 위에 수레바퀴가 양측에 놓이고 , 그 사이에 뿔모양 잔을 마주보게 붙인 토기이다.

제사나 의례때 술이나 음료를 담는 용도로 추정되는데,

수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도 있다.

 

항아리, 그릇받침   가야  함안 도항리

 

항아리   가야   함안 도항리

 

굽다리접시   가야  함안 도항리, 함안 말이산, 함안 황사리

토기의 굽다리에는 보통 세모 또는 네모 모양의 구멍을 뚫지만,

이 토기에는 직선과 곡선을 이용하여 불꽃모양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불꽃모양 굽구멍은 대부분 함안지역 토기에서 보이며,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곡선적인 토기의 모습과 불꽃무늬가 어우러져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이 굽구멍들은 단순히 장식을 위한 용도뿐만 아니라 토기를 구울 때 굽이 터지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한다.

 

굽다리접시,입큰단지, 그릇받침  가야  함안 도항리     작은그릇받침  함안 말이산

 

목항아리 가야  함안 말이산     손잡이 잔  가야 함안 도항리

 

 

 

굽다리항아리  가야  고성 동외동     바리   고성 동외동

 

항아리  가야 고성 내산리    목항아리,  잔   가야  진주 무촌리      

 

굽다리접시  가야  고성지역

 

목항아리, 그릇받침  가야   마산 현동      항아리 가야  고성 연당리

 

 

 

굽다리접시,  손잡이바리   삼국시대  창녕 교동

 

자루솥   삼국시대   창녕 교동

 

청동합   삼국시대  창녕 교동

 

청동뿔잔  삼국시대   창녕 교동

 

뿔모양잔(각배)는 문자 그대로 소나 코뿔소 등 짐승의 뿔을 잘라

술과 같은 음료를 마시던 습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점차 토기나 금속, 상아, 옥 등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2,000년경 이란에서부터 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대왕인 석탈해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토함산에서 내려오면서 심부름꾼을 시켜 마실물을 떠오게 하였는데,

 심부름꾼이 몰래 먼저 물을 마시자 뿔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이것을 꾸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출토지가 알려진 뿔잔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해, 부산, 창녕, 달성 등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말안장  삼국시대   창녕 교동

 

[가야의 창고와 토기, 토기조각에서 나타난 가야인의 문자생활]

 

집모양토기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대 집의 모습과 구조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덟개의 기둥위에 마루를 만들고 방과 지붕을 얹은 다락집 형태로 물건이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추정된다.

 

가야인의 창고에 곡식 등을 저장했던 대형 토기류

 

 

[가야의 문자와 기호]

 

 

 

함안 지역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 항아리의 뚜껑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보통 동심원이나 삼각형무늬를 반복하여 새기지만, 점을 이용하여 복잡한 암호같이 새겨진 것도 있다. 

 여느 뚜껑과는 달리 손잡이가 없고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집선문이나 톱무늬가 장식된다.

 

                         문양뚜껑  가야   김해 화정                                             문양뚜껑  가야   김해 우거리

 

문양뚜껑  김해 화정,  의령 예둔리, 함안 윤외리

 

글자가 새겨진 토기   가야   김해 화정

 

대간 명 토기   삼국시대   창녕 계성

 

기호 있는 토기   함안 우거리

 

 

 

[가야의 토기]

가야토기는 크게 도질토기와 연질토기로 나뉘어 진다.

도질토기는 굴가마에서 1,0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단단하고 표면이 회색, 회청색, 흑색을 띠고 있다.

이에 비해 연질토기는 한뎃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 상대적으로 무르고 붉은색을 띤다.

도질토기는 저장, 의례, 장식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연질토기는 일상 생활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토기는 점토준비, 성형, 말리기, 굽기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토기는 전문 장인 집단에 의해 생산되어 낙동강 수계를 이용하여 다른 지역과 유통되었을것으로 보인다.

 

토기가마벽체조각   가야  경남지역

  

 토기조각  진해 용원

 

 

 

 

 

 

 

 

[가야의 장신구]

 

금동관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부산 복천동 10, 11호 묘에서 출토된 것이다.

정면과 좌우 측면에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장식이 하나씩 있는데

신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팔찌  경남지역

 

목걸이   경남지역

선사시대에는 동물의 이빨이나 돌 등을 매달아 목걸이로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옥이나 유리, 금속으로 재질이 변하게 된다.

가야의 목걸이는 주로 수정, 유리, 마노, 호박 등이 사용되었다.

 

목걸이   경남지역

 

목걸이   경남지역

 

목걸이   경남지역

 

 

 

 

토제목걸이  가야  울산 중산리

 

위: 수정

수정은 투명한 광물질로 빛이 곱고 아름다워서 장신구 재료로 많이 이용되었다.

변한과 가야에서는 수정을 곱은옥이나 주판알 모양으로 가공하여 목걸이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하였다.

 밑: 곱은옥  

목걸이나 가슴걸이, 귀걸이 등의 부속 장신구로,

머리부분에 구멍을 뚫어 금실이나 가죽끈으로 엮어 사용하였다.

주로 옥, 유리, 수정을 이용하여 만들었지만, 흙이나 금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곱은옥  

 

귀걸이   함양 평정리,  전 거창, 창원 다호리, 함안 도항리

 

귀걸이

 

가야의 귀걸이는 중심고리가 가늘고,

긴 사슬 끝에 펜촉이나 공모양의 드리개를 매단 것이 대표적이다.

신라의 귀걸이에 비해 중심고리 아래의 장식구성이 규칙적이지 않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귀걸이   합천 옥전, 전 거창

  

금관   가야   전 고령   복제품

 

 

꾸미개   가야   전 고령   복제품

 

꾸미개   가야   전 고령    복제품

 

 청동거울   가야  밀양 교동

 

이형철기   밀양 교동

 

김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가야의 성장 기반은 바로 철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철생산과 그에 따른 철기의 보급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으며,

무덤에서 나오는 다량의 철제품이 그것을 증명한다.

가야는 철을 잘 다루는 나라여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나라의 힘을 키웠다.

 

[가야의 무기]

 

고리자루칼   가야  함안 도항리

 

고리자루칼  함안 마갑총外

 

        말띠드리개, 쇠칼, 쇠낫, 쇠화살촉, 쇠투겁창  함안  말이산

 

미늘쇠  함안 도항리 

 

[가야인의 식생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가 성립될 당시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농사가 활발하게 행하여졌음을 엿볼 수 있다.오곡이외에 과일과 채소도 재배하였다.

이외에 소, 돼지를 비롯한 가축, 사냥한 멧돼지,사슴, 야생에서 채집한 밤, 도토리,

강이나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 조개 등도 가야 사람들의 주된 먹거리였다.

 

시루   가야  김해 부원동   복원모습

 

 

가야인들은 찌거나 삶는 조리법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것으로 시루와 솥이 있다.

시루는 아래에 구멍이 뚫려 있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고온의 수증기가 구멍을 통해 시루 안의 음식물을 찌는 원리로 조리하는데,

물을 담아 끓이는 용기와 함께 사용한다.

솥은 가장 발달된 조리용기로 흙이나 쇠로 만들어졌지만, 가야지역에서는 주로 흙솥이 출토된다.

연질의 항아리나 단지는 삶는 조리에 사용되었으며,

조리과정에서 생긴 그을음이 토기표면에 남아 있는 것이 많다.

 

네모접시, 화덕모양토기, 구멍단지, 시루   함안 우거리    항아리  김해 봉황동

 

 

(출처를 밝힌 자료 이외의 자료출처는 국립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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