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주라호 동부 사원군의 자이나교 사원군
2017년 12월 1일 금요일
인도여행 셋째 날 유네스코 세계유산 카주라호 기념물군(1986)인 카주라호 서부 사원군에서
천년 전의 삶을 보여주는 지극히 예술적인 석상들과 함께 카마수트라의 관능의 극치를 표현한 미투나 상 등을 놀랍고도 경이로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난 뒤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문화가 잘 혼합된 카주라호 동부사원군의 자이나교 사원군으로 넘어왔다.
북인도 여행 지도 델리-바라나시-카주라호-오르차-아그라-자이푸르-델리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 지도
카주라호 사원군
카주라호에는 10~11세기
찬델델라 왕조시대(950~1050)에 건립된
85개 사원 중 힌두교, 자이나교 사원이 22개 남아 있다.
동서남북에 각각의 사원군이 존재 하였으나
북부는 이슬람 침략자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재는 동부와 서부, 남부 사원군을
찾아 볼 수 있다.
자이나교 사원군
카주라호 사원은
서부, 동부, 남부 사원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서부사원군에 대부분 사원이 몰려 있고
볼거리도 많이 있다.
동부 사원군은 서부 사원군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고,
서쪽과는 달리 넓은 지역에 사원이 분산되어 있다.
서쪽 사원에는 힌두교 사원들이 많은 반면
동쪽에는 힌두교 사원과
자이나교 사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조화,
동부사원군에 속하는 자이나교 사원은아디나트 사원, 파르스바나트 사원,
산티나트사원이 있다.
동부사원군에 속하는 힌두교 사원으로는
자라바사원, 바나마사원, 하누만 사원,
브라마 사원 등이 있다.
자이나교 사원
카주라호의 다른 사원들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는 동쪽 사원은
자이나교 사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찬델라 시대에 자이나교 신자들은
카주라호 동쪽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사원들이 건축되어 보존되고 있다.
카주라호에서 가장 큰 자이나교 시원인
파르스바나트 사원이
동쪽 사원군에 위치하고 있다.
브라흐마 사원은
비쉬누 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으로
유일한 화강암 사원이다.
동부 사원군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담벽을 두른 구역 안에 있는
세 개의 사원인
아디나트 사원, 파르스바나트 사원,
산티나트 자이나교 사원들이고
다른 사원들은
카주라호 구시가지에 흩어져 있다.
사리 산티나트 사원(Shantinath Timple)
동부사원군을 들어가게 되면
처음 만나게 되는 사원으로,
불과 100여 년 전에 세워져
카주라호에서 가장 젊은 사원으로 손꼽힌다.
지금도 예배를 보고 있는 사원이다.
안에는 수 많은 사두들의 업적을 적은
종이와, 인쇄물,사진들이 있다.
자인교의 창시자 마하비라의 조각상이 있고
높이 4.5m의 16번째 티르탄카라인
산티나트의 입상이 있다.
사리 산티나트 사원(Shantinath Timple)
자이나교 사원군의 3개 사원
왼쪽부터 산티나트사원,
파르스바나트 사원, 아디나트 사원
이곳에 있는 자이나교 사원 3개는
방치되고 있는 힌두 사원과는 다르게
자이나교 재단에 의해 관리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카주라호 동부 사원군
자이나교 사원군에는
아디나트 사원, 파르스바나트 사원,
산티나트 사원이 한 곳에 있다.
파르스바나트 사원(Parsvanath Mandir)
자이나교 사원들 중 가장 크고
훌륭한 사원에 속한다.
규모로는 서부 사원군보다 뒤 떨어지고
발코니도 전혀 없고,
성의 묘사도 비교할 수 없지만
건축 기법과 정확성, 아름다운 조각상들은
서부 사원군에 못지 않다.
파르스바나트 사원(Parsvanath Mandir)
우뚝 선 시키라 밑으로
작은 시키라가 흘러내리 듯
중첩된 성실 지붕이 아름답다.
10세기 중엽에 세워졌는데
서부 사원군의 락슈마나 사원과
닮은 점으로 보아
건축시기는 950년~970년 경으로 추정된다.
원래 1대 티르탄카라인 아다나트에게 바쳐졌지만
1860년 23대 티르탄카라인 파르스바나트상을
봉안하며 파르스바나트 사원이 되었다.
외벽에 조각된 신상은
비슈누파의 힌두교 신상들이어서
힌두 사원과 별 차이가 없으나
조각의 부분에서는 작은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조각 중에는
카주라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조각 중 하나인
눈화장을 하는 여인의 조각상과
발바닥에 헤나를 그리는 여자 조각상,
발목 벨을 채우는 여자 조각상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 외벽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등
힌두교의 신들이 조각돼 있는데,
자이나교 입장에서는
힌두교 신들이 자이나교로
귀의 했기 때문이란다.
나체의 부처 같은 수행자 상이
자이나교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에로틱한 조각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자이나교의 이념에서 비롯된
벌거벗고 있는 조각도 찾아볼 수 있다.
발바닥에 헤나를 그리는 여자 조각상
카주라호 동부사원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조각 중 하나인
발바닥에 헤나를 그리는 여자 조각상
눈화장을 하는 여인 조각상
카주라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조각 중 또 다른 하나인
눈화장을 하는 여인의 조각상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첫 출입구
신발을 벗고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두개의 출입구 중
첫 출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인도의 모든 사원은 신발을 벗어야 한다.
자이나교의 1대 티르탄카라 아디나트
상징 동물인 황소가
아래에 조각되어 있는 걸 보아
아디나트로 추정한다고.
가슴에 있는
해탈에 이른 성자(티르탄카라)의
표시를 인도인 가이드가 가르키고 있다.
자이나교에는 티르탄카라가 24명이 있다.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반대편 출입구
자이나교 23대 티르탄카라 파르스바나트
1860년에 조성된
파르스바나트의 상이 있다.
티르탄카라란 해탈에 이른 성자란 뜻이다.
자이나교에는 24명이 있다.
외벽의 황소머리 신상
발바닥에서 가시를 뽑는 여자 조각상
발목 벨을 채우는 여자 조각상
중앙
아디나트 사원
아디나트 사원
크지 않은 사원으로
안에는 검은색의 아디나트 신상이 있다.
1대 티르탄카라(해탈한 성자)
아디나트에게 봉헌된 사원이다.
뒷 편의 파르스바나트 사원과
아디나트 사원을 보고난 뒤
이제 산티나트 사원을 볼 참이다.
산티나트 사원
힌두교 사원과는 완전 다른 외형의
산티나트 자이나교 사원
산티나트 사원 내부
자이나교는 약 300만 명의 신도,
그것도 인도에만 국한된 채 존속하고 있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시대에 번성한 인도의 소수 종교다.
브라만교 시대에 이미 존재해 왔던 종교가
기원전 6세기경에 계급적인 브라만교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었다.
평등을 주장하고 아힘사(비폭력)을 주장하는
극단적으로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다.
금욕적이고 살생을 피해서 아무런 육식을 하지 않는
철저한 채식주의자들인 이들은
벌레 등 모든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인교도는
아무도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업에 몰두한다.
자이나교 교도들은 주로 서인도의 부유한 무역업자,
상인, 금융업자가 많아 경제적 영향력이 막강하다.
자이나교(자인교)는 기원전 5~6세기
불교의 개조 고타마 붓다와 거의 동시대의
마하비라를 조사로 받들며,
특히 아힘사(살아있는 것을 상처내지 않는 것).
불살생의 서계를 준수하는 등 철저한 고행,
금욕주의로 알려진 인도의 종교이다.
이러한 철저함 때문에
불교와 달리 인도 이외의 지역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지만,
인도에 깊이 뿌리를 내려 2500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인도문화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오늘날에도 신도수는 얼마되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자이나교의 다섯 가지 대서계(마하브라타)는
첫 번째 살아있는 것을 상처내지 않는 것(아힘사),
두 번쨰 허위의 말을 하지 않는 것,
세 번째 타인의 것을 취하지 않을 것,
네 번째 성적행위를 일체 행하지 않는 것,
다섯번째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무소유)이다.
이들을 완전하게는 지킬 수 없는 재가자는
같은 항목의 다섯 가지의
소서계(아누브라타)에 만족한다.
그러나 가능한 한 준수해서 출가에
근접하는 것이 재가자의 이상이다.
자이나교의 기본 교리는
세계는 생명과 비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이다.
업에 의한 윤회를 믿고,
오계와 고행에 의한 해탈을 주장한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비폭력을 기초로 하며,
철저한 채식주의자이며
불살생, 불간음, 무소유, 금욕과 고행으로
알려진 인도의 종교이다.
자이나교 수행자
극도의 절제와 살생을 엄격히 금지하는
자이나교는 불교의 전신이라고 하며
무소유의 삶과 채식을 추구하고 있다.
승려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빗자루 하나와 물통만을 들고 다닌다.
빗자루는 승려들이 걷거나 앉을 때 사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조차도
살생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1세기 말 마하비라가 사망한 후 교단은
백의파 (슈베탐바라)와 천의파 또는 공의파
(디감바라) 두 파로 분열되었다.
백의파는 흰 옷을 입고 고행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하나,
천의파는 무소유의 이념에 따라 천지사방을 옷으로 삼아
몸에는 요대만 걸친 채 주로 수행자들이 나체로 다녔다.
천의파는 살상을 하지 않으려고
공작새 꼬리나 소의 꼬리로 만든 비로
길 위에 있는 벌레들을 쓸어내고 다녔으며,
나체가 허용되지 않는
여성의 사회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하비라(BC 599~BC 527)
자이나교의 교조 마하비라의 본명은
바르다마나(번성하는 자 의 뜻)라고 한다.
오래전부터의 종교상의 일파인
나간타(속박을 벗어난 자)파에 출가해서
수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그러나 그는 이 파의 교의를
정비,개량해서 자이나교를 확립하고,
이후 마하비라(위대한 용사)의 존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이나라는 말은 원래 지나에서 왔는데
최고의 승리를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생전에 마하비라를 지나라 존칭한데서
자이나교의 어원이 생겼다.
24번 째 티르탄카라 교주 마하비라(BC 599~BC 527)
BC 6세기경 마하비라는 마가다(현, 비하르주)의
바이샤리시 근교의 쿤다마을에
크사트리아(왕후)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시달타, 모친은 투리샤라였다고 한다.
젊어서 결혼하였는데
브라만교의 동물 희생제를 반대하여
30세에 출가해서 나간타파의 행자가 되고,
12년의 고행 후 해탈을 얻어 지나(승리자)가 되었다.
자이나는 지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후 30년간 떠돌아 다니면서
설교해 신자를 거두고,
72세에 파타리프트라(현, 파트나)시
근교의 파바 마을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무소유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조각상
가슴의 다이아몬드는
해탈에 이른 성자(티르탄카라)의 표시이다.
자이나교에는 티르탄카라가 24명이 있는데
마하비라가 마지막 24번째로
해탈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한다.
1대 티르탄카라 아디나트
16번 째 티르탄카라 높이 4.5m
산티나트
이제 카주라호 민속공연을 보기위해
공연장으로 향했다.
[발췌 참고문헌 ; 두산백과,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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