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
2018년 4월 6일 금요일
미소국여행 아홉째 날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머물며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하고,
미국의 유명 소설가 시드니 셀던이 쓴
'시간의 모래밭' 무대로도
유명한 팜플로나에 왔다.
옛날 시드니 셀던 소설을 전집으로 읽을 때,
시간의 모래밭에 나오는
바스크 독립 투사 주인공을 보며
언젠가 꼭 바스크 지방에 가 보리라 했었는데,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에야 이루게 되었다.
여행 지도
사라고사의 호텔을 나와
팜플로나로 향했다.
옛 아라곤 왕국의 수도 사라고사에서
옛 나바로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린다.
고대 로마의 대수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도
건재하다 못해 현대에 공사한 것 같은
로마의 건축술에 놀라울 뿐이다.
피레네 산맥 남쪽에 있는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팜플로나
팜플로나는
에스파냐 피레네산맥 서부 구릉의
나바라 자치지역에 있는 나바라 주의 주도이다.
아르가 강변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10세기부터 16세기 초반까지
나바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도시의 면적은 23.55km²이며,
인구는 198,491명(2009년)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바스크인이며,
스페인어와 함께 바스크어가 사용된다.
인근 팜플로나 공항은
마드리드나 포르투갈 리스본 등에 취항하며,
철도와 육로는 프랑스와 스페인 주요지역으로 연결된다.
산업은 화학, 가죽, 제당, 제분, 포도주 등의
소규모 공업과 관광산업이 대부분이다.
공립나바라대학교 (UPNA)와
사립 나바라대학교(UNAV)가 있다.
팜플로나
고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건설된
요새 도시로 폼파일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옛 나바라 왕국의 북부에 해당하며,
8세기 프랑크 왕국 지배권의 바스크 공작령에서
9세기 팜플로나 왕국으로 독립 국가를 이루고,
이후 나바라 왕국으로 개칭했다.
11세기 초 산초 대왕(산초 가르세스 3세)이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지역을 통합했으나,
사후에 아들들의 분할 상속으로 영토가 축소되어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하고 변방에 머물렀다.
1234년 산초 7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 귀족과 혼인한 여동생 블랑카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남편 가계에 따라 이후 프랑스 가문의 승계가 이어졌다.
1512년 오늘날 프랑스 지역인 하부 나바라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가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에 복속되었다.
스페인에 병합된 나바라 왕국은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 새로운 사상의 물결에 영향받지 않고
별도의 사법체계, 세금제도, 관습 등을 유지했으나
19세기 스페인 왕국에 의해 자치권이 축소되었다.
팜플로나
기원전부터 살던 바스크인은
로마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르만 민족(프랑크족·서고트족)에게도 굴하지 않았고,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에게도 저항하였다.
1512년 에스파냐왕 페르난도가 북부를 빼앗은 후
이 부분은 에스파냐령이 되었다.
프랑스 쪽의 나바라(하부 나바르)는
나바라왕 앙리 3세가
1589년 앙리 4세로서 프랑스왕이 되었을 때
프랑스에 병합되어, 현재 프랑스의 아키텐주
피레네자틀랑티크 데파르트망이 되었다.
바스크인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을 경계하는
피레네 산맥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이며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살고 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오래 된 민족이라고 전하며,
언어도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지만
독자적 언어구조를 가지며,
세계 어떤 언어와도 유사성이 없는
독톡한 언어라고 알려져 있다.
용감하고 민첩한 산악민족이며,
역사시대 초기부터 작은 공화국을 세워
특수한 부족법인 푸에로스를 지켜왔다.
바스크인은
보수적이어서 전통을 중시하며,
자립성이 강하여
바스크의 독립을 주장하며 저항하였는데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라는 무장 독립운동파가 있다.
1979년 스페인에서는 이들의 거주지를
바스크 지방이라는 자치공동체로 지정하였지만,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바스크인들과
스페인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붉은 띠로 특징되는 의복과
바스크인에서 유래된 베레모가 유명하다
팜플로나 구시가지는
요새처럼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팜플로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길이 지나는 곳으로
가톨릭 성지 순례자들과 도보 여행자들이 많이 찾으며,
번영했던 고도의 과거를 말해주는
역사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가지는 요새처럼 성벽으로 둘러 쌓인 구시가와
아르가 강을 끼고 프린세페 데 비아나 광장을
중심으로 한 신시가로 구분된다.
카테드랄, 나바라 미술관, 팜플로나 시청 청사 등
많은 역사 유적과 박물관들이 있다.
특히 매년 7월 초에는 소몰이행사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가 열려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바스크인은
독립성과 자립성이 강하여
거리의 이름이
모두 스페인어와 바스크어로 병기돼 있다.
팜플로나도 바스크어로는
완전히 다른 말인 이루냐(Iruña)이다.
사라사테의 고향 팜플로나
팜플로나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작곡가겸 바이올리니스트인
파블로 사라사테(1844. 3-1908. 9)이다.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바이올린 곡
<지고이너바이젠(Zigeunerweisen)>,
열정 속으로 휘몰아 넣는 <카르멘 환상곡> 등의
명곡을 작곡한 그는 파가니니 이래의
비르투소(음악의 거장)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린 바이올리니스트였다.
5세 때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8세 때 이미 공개 연주회를 열어 갈채를 받았으며
10세 때 이미 신동으로 널리 알려져
당시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는
그에게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하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널리
러시아, 유럽, 미국 등지로 연주 여행을 했다.
이 길에는
여러 조각상들이 서 있다.
여인상 뒤 나바라 자유 기념관
바스크지방 사람들의 자유 기념관
여인상
카스티야왕국이
나바라를 지배하는 조건으로
나바라왕국의 자치를 인정해준 것을
기리는 동상이라고 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다.
나바라주 정부청사
팜플로나 구시가지 골목길
소몰이 축제 포스터
산 페르민 축제 기간에는
넘쳐나는 관광객으로
숙박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특별히
노숙을 허용한다고 한다.
소몰이 포스터
산 페르민 축제 소몰이 포스터
산 페르민 축제는
성자 페로민을 기리는 축제이다.
13~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7월 7일 아침 8시 정각 시 청사에서
폭죽을 터뜨리면서 시작된다.
구시가지를 가로질러 2.4km 떨어진 투우장까지
소를 몰아가는 행사로서 7월 7일부터 열흘간 열린다.
500~600kg 상당의 소 6마리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도록 몰아간다고 한다.
옛날에는 소를 72시간동안 캄캄한 방에 가두어 두고
물만 먹여 흥분상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잔인하다는 여론에 따라 24시간만 가둬둔다.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흰 옷을 입고
허리에 붉은 천을 두르고 소를 앞질러서 달린다.
이 소몰이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작년만 해도 12명의 사상자가 났다.
소뿔에 박혀 허벅지 동맥이 끊어지면 죽는다고 한다.
이 소동은 1분 30초 만에 끝난다.
엉뚱하게 헤매는 소가 생겨도 또 사람이 다쳐도,
2분 조금 지나면 모두 끝난다.
산 페르민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물론 소몰이이지만,
그밖에도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소몰이 방향의 골목길 곳곳에는
소몰이와 투우에 관련된
기념품 가게가 있다.
산 페르민 소몰이 축제 동안 입는 복장
산 페르민 축제 기간이면
대부분 사람들이
흰 옷에 투우사를 상징하는
붉은 스카프를 매고 거리를 쏘 다닌다고.
팜플로나 길에는
말뚝 박는 쇠로 된 장치가 되어 있어
해마다 축제 기간에는
이곳에 튼튼한 나무 말뚝을 박아
관람자들을 보호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조가비) 표시와
자전거 길 표시가 함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지,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를 떠난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시골 동네를 지나 맨 먼저 거치는 도시가
팜플로나이다.
팜플로나의 수호 성인인 순교자
산 페르민이 있기 때문이다.
건물 벽에도
산티아고 순례길(조가비) 표시가 있다.
이런 표시는 곳곳에 있다.
조가비가 문 앞에 그려진
순례자 숙박시설 알베르게
팜플로나 구시가지 골목길
팜플로나 대성당
팜플로나 대성당
고딕양식의 건물로
팜플로나 주교좌 성당이다.
팜플로나 대성당
그동안 워낙 대단한 대성당들을
많이 봐와서인지
대성당이라기에는
조금 덜 웅장한 것 같다.
카테드랄(cathédra)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증축된 전면부 모습
대성당으로 입장
나바라 왕국
카를로스 3세와 왕비의 무덤
안쪽으로는 15세기에 건축된
또 다른 성당이 이어져 있다.
대성당 안쪽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성당의 기원이 되었던
옛터와 유물이 발굴된 상태로 남아 있다.
팜플로나 대성당을 나왔다.
팜플로나 시청 청사(Ayuntamiento)
중세양식의 건물에는
인간과 동물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테라스와 정문에는
나바라왕국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팜플로나 시청 테라스
테라스가 인상적이다.
팜플로나 시청사
시청사의 왼쪽 골목길 끝자락의
Arga 강변에서 소몰이가 시작되면
시청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진행 방향은 건물에 표시되어 있다.
팜플로나 시청 입구
나바라 박물관 채플
카스티요 광장 (Plaza Del Castillo)
있는 카스티요 광장이다.
카스티요 광장 분수대
분수대 왼쪽이 헤밍웨이의 단골카페 이루냐이고
오른쪽 흰 건물이 호텔 라 페를라이다.
라 페를라(La Perla) 호텔은
1881년에 개업을 한
이 곳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다.
이 곳은 팜플로나를 찾아온 귀빈들이
즐겨 묵는 곳으로
헤밍웨이도 이 곳의 손님이었으며,
사라사테도 매년 산 페르민 축제 때
고향을 찾아올 때는 바로 이 곳에서 묵었다.
이 호텔 발코니는 산 페르민 축제기간 중
소몰이 행사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자리인데 사라사테 역시 이곳에서
소몰이 행사를 지켜보며 환호했다.
그리고 그는 이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이 작곡한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나바라'>를
다른 연주자와 함께 즐겨 연주했는데,
이는 자신이 바스크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긍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페 이루냐(Café Iruña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 이루냐(Café Iruña)
카페 이루냐는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명소로
카페 안에는 헤밍웨이 기념상이 있다.
카페 이루냐 앞에 서 있는
할머니는 옛날 주인장인듯 한데,
관광객들의 모델이 되어 주고 있다.
카페 이루냐
카페 이루냐는 1888년에 개업하여
131년이 된 카페이다.
카페 이루냐 내부
연륜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131년 된 노포에
헤밍웨이와 사라사테 등
수 많은 유명 인물들이 다녀간 곳이라
생각하니 감흥이 다르다.
내부 메인 홀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가 나온다.
여기에 서 있는 헤밍웨이와
기념 촬영 할 수 있다.ㅋ
헤밍웨이 입상이 있는 바
칵테일을 파는 바였는데 한쪽 끄트머리에
헤밍웨이 기념상이 서 있다.
헤밍웨이 입상
헤밍웨이는 팜플로나에 오래 머물며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1926) 소설에서
투우사와 스페인 투우에 관한
세부적인 묘사와 소몰이 축제 이야기를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카스티요 광장 (Plaza Del Castillo)
팜플로나 시민과
관광객들의 휴식처이다.
카스티요 광장 (Plaza Del Castillo)
카스티요 광장 (Plaza Del Castillo)
신시가지의 소몰이 조형물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아침에 열리는 소몰이라고 한다.
El Encierro
(엘 엔씨에로, 스페인 소 축제)
산페르민축제 기간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길거리를 따라 소떼들과 남자들이 뛰는 광경이다.
맹렬히 뛰어가는 소떼들
그리고 뒤엉켜 넘어지는 남자들!
1km 정도를 뛰는 이 행사를
엔씨에로 (encierro) 라고 한다.
소떼 바로 앞에서 달리는 건
일반인은 불가하고 선별된 사람들만이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산 페르민 축제의 소몰이 행사(El encierro)
매년 7월 초에는 소몰이행사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Fiesta de San Fermín)가 열려
전 세계의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13세기부터 시작되어 온 산 페르민 축제는
3세기 말 팜플로나의 주교였고
도시의 수호 성인인 산 페르민을 기념하는 행사로,
헤밍웨이의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1926)에
소몰이행사의 광경을 묘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축제기간 동안 투우에 쓰일 소들이
수백명의 사람들과 뒤엉켜
산토 도밍고 사육장에서 투우장까지의
8백미터 가량의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산 페르민 축제의 소몰이 행사 장면
신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소몰이 조형물
투우장이 보인다.
팜플로나 투우장
투우는
산 페르민 축제의 가장 주요한 행사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동상
팜플로나 투우장 앞에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대한 전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동상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동상
헤밍웨이는 안달루시아지방
론다의 유명한 투우 가문과 교제하면서
투우에 심취하게 됐고,
팜플로나에 머물면서 1926년에
'태양은 또 다시 떠 오른다'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를
소개한 덕택에 팜플로나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9. 7. 21, - 1961. 7. 2.)
미국의 소설가
1899년 7월 21일 미국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수렵 등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하고 종교심이 돈독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부모의 성질이 그의 인생과 문학에
미묘한 영향을 주었다.
제 1차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십자 운전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종전 후 기자 겸 해외 특파원으로 일했다.
헤밍웨이는 신문기자 시절에 습득한 건조하고
간결한 특유의 문체를 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1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연상의 해들리와 결혼,
1961년 아이다호 주에서 엽총으로 자살했다.
《노인과 바다》(1952)로
퓰리처상(1953 ), 노벨문학상(1954 )을 수상했다.
그 외《무기여 잘 있거라》,《오후의 죽음 》,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있다.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한 20세기의 대표작가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빌바오로 가기 위해
버스 주차장으로 이동 중
이제 구겐하임 미술관이 유명한
빌바오로 출발했다.
[참고 발췌: 두산백과, 세계지명대사전]
'스페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바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0) | 2019.04.29 |
---|---|
팜플로나에서의 식사 (0) | 2019.04.28 |
사라고사에서의 식사 (0) | 2019.04.25 |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0) | 2019.04.25 |
바르셀로나에서 귀국 길 (0) | 201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