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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박물관 2 (세계의 박물관 카테고리)

푸른 바다. 2021. 8. 5. 12:59

이집트 박물관 2층

 

 

2018년 12월 18일 화요일

이집트 여행 둘째 날

 

 

투탕카멘의 무덤의 발견은 단순한 운이 아니라 준비를 철저히 한

하워드 카터의 끈기에 하늘이 감탄하여 내린 운명적 사건이라는 평이 있다.

무덤을 발견한 과정도 대단하지만 발굴과정에서 카터가 행한

꼼꼼하고 세밀한 기록은 현대의 전문가들도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터가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은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굴된 모든 유물들이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고 모두 이집트 박물관에

보관 전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황금가면 등 투탕카멘의 유물들이 세상에 선 보이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그 보물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정치, 외교적으로 긴장감이 높아졌는데,

이때 하워드 카터는 카나번의 상속자인 그의 딸 에버린 허버트에게

발굴에 들어간 모든 비용과 성과급을 받기로 하고

모든 소유권을 이집트에 양도할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후 하워드 카터는 더 이상 무덤 발굴 작업을 하지 않고

1932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39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라오의 저주는 우연이 겹치고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짐이 카터로 인해 증명되었다.

이제 100여년 전 모습을 드러낸

투탕카멘을 만나 볼 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옛날 책에서 접한 황금마스크를 본 순간부터

언젠간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다는 열망을 가진지,

어느덧 긴 세월이 지나 지금 이집트에 왔고 이제 볼 참이다.

2층에는 투탕카문의 보물, 목관, 황금마스크,

마라보호관, 파피루스, 신상, 미이라, 기타 등등이 전시 되어 있다.

 

 

 

유야와 투야의 마스크 (투탕카멘의 외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

 

투탕카멘이 사망하자 그의 파라오 자리는 왕비 가문인

아이에게 돌아갔다.

아이는 제사장을 지냈던 이집트의 권력자 유야의 아들이다.

유야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장인이자 왕비 티예의 아버지이다.

또한 유야의 손녀이자 아이의 딸인 네페르티티가

아케나톤의 왕비가 됨으로서 왕실과 이중 인척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막강한 당대의 실력자가 된 아이는 투탕카멘이

후사 없이 죽게되자 투탕카멘의 왕비이자 외손녀인

안케세나멘과 결혼하고 이집트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노령이었던 그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통치하고 생을 마친다.

이후 파라오 자리는 아이의 딸과 결혼한 장군 출신 호렘헤브에게 넘어간다.

그는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던 아크나톤의 아마르나 시대를 정리한 인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영원한 삶을 위한 미라의 제작과정과 그 의미 등은

다른 문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고대 이집트만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영생을 간절히 바랬고 사후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선 육신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죽은 사람의 몸을 보존해야 했고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사자의 서 파피루스

 

사자의 서는 신왕조 시대 이후,

미라와 함께 묻은 지하 세계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두루마리이다.

죽은 이들이 안전하게 다음 세상에 도착하길 기원하는 기도문과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칠 때 외우는 마법의 주문,

또 신들에 대한 서약에 대하여 적혀 있다.

 

 

 

사자의 서

 

중왕국 시대에는 귀족이나 부자의 관 속에 죽은 후의

행복을 주문한 관구문이 있었다.

그리고 신왕국 시대에는 이제까지 주문으로만

내세의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던 거에서,

현세에서 선행을 쌓지 않으면 내세에 갈 수 없다는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심장의 무게로 망자의 과거 행적을 심판하는 것을 포함하여,

망자가 죽은 자의 영역인 듀에트를 여행하는

절차와 방법을 파피루스에 적어 관에 넣었는데

이를 사자의 서라 한다.

 

 

 

사자의 서 파피루스

 

사자의 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죽은 자의 심판이다.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재판관 오시리스는

배심원을 거느리고 검사인 호루스 신, 서기관인 토트 신,

안내자이자 저울을 다는 아누비스 신과

죽은 이가 죄를 범했다고 판명될 경우 벌을 주는 아뮤트 신

(악어의 머리, 사자의 갈기와 하마의 다리)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자가 내세로 들어갈 수 있는가를 재판한다.

양심을 상징하는 죽은 이의 심장 무게를 저울에 다는데,

깃털보다 심장이 무거운 사람은

죄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뮤트에게 심장을 먹히나,

착한 사람은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사자의 서

 

이집트인은 죽으면 오시리스 신 앞에서 살아있을 때

바르게 살았는지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은 저울에 죽은 자의 심장과

정의를 상징하는 깃털을 놓고 저울질하는 것이었다.

살아서 지은 잘못이 깃털보다 더 가벼워야 했다.

이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관문을 의미한다.

 

 

 

유야의 미라

 

왕의 계곡에서 발견된 가장 화려한 무덤 중 하나로

유야는 제사장을 지냈던 하 이집트의 권세가로,

그의 집안은 시리아 계열이었다.

딸인 티예가 아멘호테프 3세의 왕비 중 한사람이 되어,

유야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장인이자

투탕카멘의 아버지 아케나톤 왕의 외할아버지로서,

왕의 계곡에 무덤을 둘 정도의 권력가이자 고관이었다.

또한 유야의 손녀인 네페르티티가

아케나톤의 왕비가 됨으로써 왕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유야의 미리관과 뚜껑

 

투탕카멘이 죽자 유야의 아들인 아이가 파라오가 되었다.

아이가 죽자 즉위한 호렘헤브 파라오의 왕비는

유야의 친 손녀인 무트네드즈메트였다.

유야와 그의 부인 튜유의 이들인 아이는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와 호렘헤브의 왕비였던

무트네드즈메트의 아버지였다.

또한 아멘호테프 3세는 아이의 처남이었으며,

아케나톤 왕은 아이의 외삼촌이자 장인이었고,

투탕카멘의 왕비이자 이복 여동생인 안케세나멘은

아이의 외손녀이자 왕비였다.

고대 이집트의 근친상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유야의 아내인 튜유의 미라관

 

 

 

미라 관

 

선사시대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든 것은 보편적이고

소박한 장례풍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박물관의 미라들은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장식과 그림, 보석과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관,

그리고 단순히 자연을 이용한 것이 아닌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영원히 보존될 수 있게 한 미라는

파라오와 왕족,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 등 상위 1%에만 허락되었다.

이렇게 특별한 미라는 고왕국 4 왕조(기원전 2600년) 때부터 만들어져

후대 로마가 점령한 시절(기원전 30년~364년)까지 이어졌다.

신왕국 18 왕조에서 20 왕조 사이에 만든 미라는

그 기술이 정점에 달했다는 걸 보여준다.

미라를 담은 관도 황금처럼 비싼 재료를 써서 만들었고 예술성도 뛰어났다.

신왕국 18 왕조의 '소년 왕' 투탕카멘의 관이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미라는 돈을 얼마나 들이느냐에 따라 제작 기간이 달라졌다.

짧게는 40일에서 길게는 70일까지 걸린다.

절대적인 권력과 부를 가진 파라오는

70일의 긴 과정을 거쳐서 사후세계로 건너갈 완벽한 준비를 했다.

 

 

 

미이라의 장기를 담는 4개의 카노푸스 단지

 

미라는 죽음 이후에도 영생하고자하는

이집트인들의 사후세계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어쩌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현재의 삶보다

죽은 후의 삶에 더 집착하는 듯 보인다.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독특한 점은

간, 폐, 위, 장기는 개별적으로 보관되기도 했고

각각 따로 싸서 미라에 다시 집어넣기도 했다.

뇌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버려졌다.

여러 장기들 중 오직 심장만이 방부처리 없이 시신 속에 넣어뒀다.

살아있을 때의 행동과 생각을 심장이

모두 기억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이라의 장기를 담는 4개의 카노푸스 항아리와 카노푸스 함

 

고대 이집트어로 미라는 ‘사흐(sah)’라고 불린다.

이 단어는 ‘고귀함’ 또는 ‘위엄’과 같은 의미도 갖고 있다.

미라는 영원한 삶과도 연관돼 실제로 이집트 신앙에서

미라로 제작된 신체는 영혼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을 염할 때

장기를 종류별로 각각 토기에 넣어 보관하고

장기가 있던 자리엔 소금을 넣어 만들었다.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 필요했고

그 그릇으로 신체는 생전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 다음의 삶이 계속될 수 있고, 영혼이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KV62 투탕카멘 무덤의 내부 구조도와 무덤의 벽화

 

투탕카멘의 무덤(KV62)이 소규모로

소박하게 만들어지고 나서 초기에 경미한 도굴 흔적이 있고

200여년이 지난 뒤,

람세스 6세의 무덤(KV9) 공사가 시작되었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조성하던 인부들은

무덤 속에서 파낸 돌과 흙들을 입구 가까운 곳에 버렸으며,

또한 근처에 숙소를 짓고 생활했다.

그렇게 그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모른채 흙으로 완전하게 덮어버렸다.

그리하여 오두막과 흙더미 밑에 깔린채 33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 도굴꾼도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되었다.

소박한 덕분에 도굴꾼의 눈에서 벗어나 세상에 온전히

등장한 그의 유물들은 지금 세계의 보물 대접을 받고 있다.

도굴꾼들은 원본 가격이 훨씬 비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발될 리스크를 줄이려 금은 보석들을 해체하여 녹여 팔았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무덤 구조도

 

1922년 11월 26일, 영국인 하워드 카터는

잊혀진 소년왕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아낸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몇 겹으로 쌓인 관과 미라가 있는 현실,

보물로 가득한 전실, 보물실, 별실로 구성되어 있었고,

별실에는 초기에 약간의 도굴 흔적이 남아있었다.

투탕카멘 무덤의 내부 구조는

파라오의 무덤치고는 굉장히 작고 소박하다.

작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무덤이지만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양의 고 퀄리티의 유물이 나왔다.

투탕카멘의 경우 젊은 나이에 죽는 바람에 재위 기간이 짧아

자신의 무덤을 제대로 조성을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용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투탕카멘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된 아이가 고관이었던 시절

조성한 무덤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투탕카멘 무덤 보물실 (카터의 사진과 꼼꼼한 기록으로 재현된 방)

 

투탕카멘의 무덤 보물실에서 제일 먼저

대면하는 대상은 자칼 형상의 아누비스 신상이다.

그의 뒤에는 카노푸스 사당이 있는데,

아누비스는 이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나무에 금박을 한 사당도 화려하지만

사당의 네 면을 보호하고 있는 4명의 여신 모습도 아름답다.

 

 

 

투탕카멘의 카(수호자)가 지키던 전실과 현실의 차단 벽을 허물자 나타난 현실의 제 1관 모습(발굴 당시 사진)

 

투탕카멘의 미라가 있고,

그 미라를 보호하는 미라관과

금박목관이 있는 곳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투탕카멘 왕의 카(수호자)

 

파라오가 영면하고 있는 현실로 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금박의 목재 조각상으로

발굴 당시 전실의 3구역에 놓여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역청으로 온 몸을 검은 칠 했지만

왕관과 주요 액세서리에는 금박의 화려함을 입혔다.

특히 삼각형의 앞치마와 황금 샌들을 신고,

곤봉과 기다란 장대를 쥐고 엄숙하게 서 있다.

 

 

 

실물 크기의 투탕카멘의 카

 

전실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차단벽을 지키고 있던

이 한 쌍의 전신 조각상을 가리켜

발굴자 하워드 카터는

'황금과 흑색의 가디언(수호자)'으로 불렀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황금 왕좌

 

황금마스크 다음으로 인기 많은 황금 왕좌는

금박 목조 왕좌로 파라오 투탕카멘에게

향유를 발라주는 왕비 안케세나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

 

발견된 여러 공예품 중

가장 화려한 유물로 등받이 부분의 금박부조에는

왕과 왕비의 다정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투탕카멘 왕의 황금마스크 이마 부분에 시들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는데 아마도 왕비가

눈물로 이별하며 놓은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들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확인되는게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어린 미라 두 구가 함께 발견되었다.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은 이복남매이다.

 

 

 

투탕카멘 황금 왕좌 측면

 

후계자도 없이 투탕카멘 파라오가 사망하자

왕위 승계와 관련하여 왕실과 조정은 물론

사제들까지 나서 암투가 벌어졌다.

파라오 아크나톤의 딸로 유일하게 왕가의 정통성을 가진

안케세나멘에게 고위 관료이자 신관인 아이가 압력을

가하며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에 못마땅한 안케세나멘은 비밀리에

히타이트의 왕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한다.

그나라의 왕자와 결혼하면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것이다.

히타이트 왕은 진심을 확인한 후 아들 한 명과 사절단을 이집트로 보낸다.

하지만 조정을 손에 잡고 있는 아이가 눈치채고 이를 몰살 시킨다.

결국 안케세나멘은 아이와 결혼하게 된다.

아이는 유야의 아들로 네페르티티의 아버지이고 안케세나멘은

네페르티티의 딸이다.

아이는 파라오가 되기 위해 왕가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자기 외손녀와 결혼한 것이다.

 

 

 

투탕카멘 황금 왕좌 뒷면

 

아이가 투탕카멘을 타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2005년에 실시한 CT촬영에 의하여

타살의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토르소 조각상

 

목재에 회반죽을 바르고 칠을 한 이 조각상은

전실에서 발견 되었으며,

팔과 다리가 없는 토르소 형태로

예복이나 장신구를 입혀보는

마네킹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얼굴이 투탕카멘을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네페르템 두상

 

연꽃에서 새벽 태양의 신인 네페르템이

솟아나오는 모습의 이 조각상은 어린 투탕카멘 왕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높이 30cm, 나무에 스터코 처리,

투탕카멘 왕의 무덤 전실에서 발견되었다.

 

 

 

아누비스상

 

투탕카멘 무덤의 보물실에서 출토된 아누비스이다.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해 준다.

개 또는 자칼의 머리를 가진 반수의 모습이나

자칼 그 자체의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이동식 관 위에 앉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아누비스 상은 나무를 깎아 다듬어 만들었고,

눈꺼풀은 황금으로 장식하고 눈알은 수정과 흑요석 들으로 꾸몄다.

아누비스의 몸을 검게 표현하는 것은 미라를 만들 때

방부 처리를 위해 시신에 시꺼먼 타르를 바르는 것과 연관이 있다.

아누비스가 앉아있는 금박의 나무 상자,

즉 이동식 관 안에는 미라의 신이라는 명성에 맞게

방부 처리에 필요한 재료와 가슴 장식용 펜던트와

장례식에 사용된 그릇 등이 있었다.

투탕카멘의 아누비스는

3,300년 동안 왕의 장기를 완벽하게 지켰다.

 

 

 

아누비스 상

 

죽은 사람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아누비스는 요즘 말로 하면 ‘죽음의 사자’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아누비스는 저승길을 동행하는 것 이상으로

막중한 책임을 졌던 중요한 신이다.

아누비스는 우선 시체가 썩지 않도록 방부처리해서

미라로 만드는 일도 담당했다.

미라를 빌려 사후세계의 문턱을 밟은 죽은 사람을 인도해

신들의 법정으로 데려가는 일도 한다.

법정에서는 죽은 사람의 심장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정의의 여신인 마아트의 깃털과 비교해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가리는 역할도 했다.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워야 사후세계로 갈 수 있었다.

만약 죄를 많이 지어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아누비스 옆에서 기다리던 괴물 아밋이 죽은 사람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영혼이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누비스는 깃털보다 가벼운 심장을 가진 착한 사람을

사후세계의 신인 오시리스에게 데려갔다.

 

 

 

투탕카멘 왕의 미라 장기를 담은 카노푸스 함, 항아리 뚜껑, 함 뚜껑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 있었는데

바로 미라를 만드는 것이다.

시신에는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이를 보존하는 것이

고인의 내세에 중요하다고 여겨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게 된 것이다.

미라를 만들 때 제거된 장기를 보관하기 위해

카노푸스 단지가 사용되었다.

제거된 장기들은 한 단지에 보관한 것이 아니라,

사후 세계에서 필요하다고 믿었던

위, 창자, 간, 폐를 구분하여 4개의 단지에 각각 보관했다.

4개의 단지는 태양의 신 호루스의 네 아들이 지키며 보호하는데,

사람 모양의 임세티는 간을, 매 모양의 케베세누프는 창자를,

자칼 모양의 두아무테프는 위를,

개코원숭이 모양의 하피는 폐를 담당했다.

심장은 제거되지 않고 죽은 자의 몸 속에 그대로 두었는데,

심장에 영혼이 깃든다는 믿음 때문이다.

 

 

 

가장 안쪽의 카노푸스 항아리 뚜껑과 카노푸스 함

 

투탕카멘의 장기를 담았던 카노푸스는

3중으로 되어 있는데

정교한 금박처리로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사당 안에는 장기를 보관하는 네 개의 작은 황금관이

들어있는 카노푸스 함이 들어있다.

카노푸스 함의 재료는 방해석으로,

함의 밑부분은 제 1외관에 새겨져 있던 제드와 티엣 문양을

금박 처리했으며 손잡이는 황금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도 부조로 묘사된 네 명의 여신이 모서리에

팔을 양쪽으로 뻗어 함을 보호하고 있다.

 

 

 

미이라의 장기를 담는 4개의 카노푸스 항아리 뚜껑과 카노푸스함(뚜껑 1개가 지금은 안보인다.)

 

투탕카멘의 카노푸스함은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 안에 사람 모습의 네 개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모두 똑같은 얼굴인데, 그 모습이 왕을 닮았다.

보통의 카노푸스 항아리의 뚜껑에 조각되는

호루스의 네 아들 대신 왕의 머리가 자리했다.

더 큰 차이는 항아리의 몸체이다.

호루스의 네 아들 항아리는 뚜껑과 몸체가 합체되는

항아리를 사용했는데, 투탕카멘의 경우는 왕 모습을 한

설화석고의 뚜껑에 미니 황금관을 몸체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왕의 내장을 담는 용기로 항아리가 사용됐지만

투탕카멘의 경우는 미라보호관의 두 번째 관과

비슷한 황금관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이곳에는 전시되어 있지 않아 볼 수가 없었다.

 

 

 

투탕카멘 카노푸스 함과 항아리 모조품(사진출처: 파라오의 비밀 용산 전쟁기념관)

 

전문가와 기술진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무덤과 유물들을 이집트에서 대여하여 전시한 사진에서

이집트 현지 박물관에서 미처 보지 못한

장기를 담은 미니 황금관 사진이 있어 가져왔다.

 

 

 

투탕카멘 왕의 카노푸스 사당 Canopic Shrine

 

카노푸스 사당은

투탕카멘 무덤의 보물실 아누비스 신상 뒤에 있던,

왕의 미라에서 꺼낸 장기를 보호하는 일종의 관이다.

목재에 금박 처리한 사당의 각 면에는 왕의 장기를 보호하는 여신들이

생명의 상징인 앙크를 왕의 얼굴에 갖다 대며,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듯한 부조가 있다.

또한 관의 4면 각각에는 이시스, 세르케트, 네이트, 네프티스 등

네 명의 여신이 팔을 뻗어 관을 보호하고 서 있다.

카노푸스의 뜻은 방부처리된 시체의 내장을 보관하는데

사용된 고대 이집트의 항아리이다.

 

 

 

우: 네프티스 여신, 성전 머리 장식, 폐

좌: 세르케트 여신, 전갈 머리 장식, 창자

 

나무에 금박을 입힌 카노푸스 사당은

썰매에 고정된 네모난 모서리 기둥과

천개형 궤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 153cm, 너비 122cm, 높이 198cm 크기이다.

관 상부의 돌출된 프리즈에는 태양의 상징 원반을

이고 있는 코브라가 차지하고 있는데,

코브라는 하이집트의 여신 우제트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라에우스라 부른다.

모서리 기둥보다 더 위에 돌출된 윗단의

프리즈 또한 동일한 장식이 자리하고 있다.

 

 

 

우: 이시스 여신, 왕좌 머리 장식, 간

좌: 네이트 여신, 화살 방패 머리 장식, 위장

 

카노푸스 관의 각 면에는,

이시스 여신이 서 있는 면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네이트, 오른쪽은 세르케트,

뒷면은 네프티스여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머리에 장식한 물건이다.

이시스는 왕좌를, 네이트는 화살과 방패,

세르케트는 전갈, 네프티스는 성전을 머리에 이고 있다.

이 네 여신은 각각 왕의 장기를 보관한

카노푸스항아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호루스의 네 아들의 후견인 역할도 한다.

 

 

 

좌 이시스 여신, 우 세르케트 여신

 

 

 

중앙: 세마 타위 설화석고 조각상 (용도는 오일 보관함)

 

이 설화석고 오일 보관함 조각상은

제 1관과 제2관 입구 사이의 공간에 있던

여러 유물 중 하나이다.

나일강의 신 하피가 하이집트의 상징인 파피루스(왼쪽)와

상이집트의 상징인 연꽃(오른쪽)을 각각 잡고 있으며

이 둘은 가운데의 매듭으로 묶이면서 하나가 된다.

이런 묶음을 세마 타위라 부르는데

세마는 통일을, 타위는 영토를 의미하므로

세마 타위는 상,하 이집트의 통일과 왕국의 번영을 상징한다.

 

 

 

설화석고 화장품 용기

 

이 유물도 제 1관과 제 2관 입구 사이의 공간에

있던 여러 유물 중 하나이다.

화장품 용기로 추정되는 이 설화석고의 윗부분 뚜껑에는

왕권의 상징인 사자가 드러누워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듯 포효하고 있다.

원통형 모양의 표면에는 사자가 들소 위에 올라타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용기의 바닥에는

누비아 및 중동의 포로들의 머리가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왕이 세계의 통치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설화석고

 

값비싼 화장품이나 연고들을 보관하는

석재 용기이다.

투탕카멘의 무덤 중 별실은 초기에 도굴당하기도 했는데

도굴꾼들은 값어치가 높은 화장품 등 내용물만 가져가고

석재 용기는 그대로 남겨뒀다고 한다.

남은 화장품과 연고가 용기에 그대로 말라붙으면서

도굴꾼들의 지문 또한 보존됐다고 한다.

아직도 식별 가능한 정도라고.

 

 

 

투탕카멘 특별전시실

 

투탕카멘의 보물과 황금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관람은 자유롭지만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2016년 초 짧은 기간 재정난으로 사진촬영 허용)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술 작품 중 하나이며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이 투탕카멘 황금마스크의 우아함은 어느 유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이집트 박물관 최고의 보물로 손꼽힌다.

 

 

 

특별전시실 밖에서 찍은 황금마스크

 

투탕카멘(재위 기원전 1333년-기원전 1323년)은

이집트 제 18왕조의 12대 파라오이다.

10대 왕 아크나톤의 아들로, 출생 시의 이름은 투탕카텐이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 KV 62호)

그 이전에는 투탕카멘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그에 대한 자료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kv55호의 미라가 아크나톤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며,

투탕카멘의 아버지로 확인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어머니는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르나에서 왕자로 살아가던 투탕카텐은 10대 왕 아버지 아크나톤과 공동 파라오였던

삼촌인 11대 왕 스멘크카레가 죽은 후 멤피스에서 10세의 나이로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다.

행정관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이 나이 어린 파라오를 보좌하였다.

또한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이복누나인 안케세나멘과 결혼하였다.

재위 2년 째에 아크나톤의 아텐 신앙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공식화되었다.

즉위 4년째 투탕카텐은 투탕카멘으로, 안케센파아텐은 안케세나멘으로 개명하여

아멘 신앙으로의 복귀를 보여주며,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이후의 치세에 대해서는 몇 차례의 해외원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왕의 사냥, 전쟁 모습이 담겨 있는데, 사막에서 사자 등을

사냥하기도 하며, 누비아와 시리아의 적들을 화살로 공격하기도 한다.

투탕카멘은 근친상간의 혼인에 의해 태어난 자식으로,

오른쪽 다리에는 골질환과 왼쪽 다리에는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으며, 선천성 기형인 구개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한 언어 장애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분석한 연구팀은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치명적인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던 것을 밝혀내었다.

결국 여러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재위 9년째에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로 죽자 투탕카멘의 왕비인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의 왕인 수필룰리우마 1세에게 편지를 써,

히타이트의 왕자 중 한 명과 자신이 결혼해

파라오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수필룰리우마스 1세는 제안을 받아들여 왕자 잔난자를 보냈다.

그러나 잔난자는 이집트에 도달하기 전에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 파라오의 자리는 투탕카멘 시대의 권력가인 아이에게 돌아간다.

 

 

 

투탕카멘 황금마스크 사진출처: 위키메디아, 위키피디아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고대 이집트 제 18왕조의 12대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장례 가면이다.

1925년 하워드 카터가 KV62 무덤에서 발견한 유물로,

현재 이집트 카이로의 이집트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집트 미술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이집트에서 장례 가면은 제 4왕조(기원전 2575 - 2467년)부터

사용되었으나 신왕조 시대 (기원전 1550 - 1070년)에 이르러

보석 세공이 점차 많이 사용되면서 장례 가면도 훨씬 정교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제작된 투탕카멘 가면은 호화로운 재료와

뛰어난 기술이 결합되면서 웅장하고 복합적인 인상을 도출하고 있다.

이집트의 장례 가면은 망자의 시신에

도사릴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문에 시신이 방부 처리되면 사제들이 사자의 서의 주문을

암송하는 사이 가면을 씌워 파라오의 머리를 보호하도록 했다.

가면은 무늬모자에 부착해 다시 두꺼운 수지로 시신에 붙였다.

1925년 하워드 카터가 발굴할 당시 투탕카멘의 가면은

매우 단단하게 부착되어 있어 미라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진 뒤에야 가면을 분리할 수 있었다.

 

 

 

투탕카멘 왕의 미이라 얼굴에 씌워져 있던 황금마스크 (출처: 위키피디아)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는

순금 11Kg을 얇게 펴서 망치로 두드려 제작하였다.

얼굴의 특징과 그밖의 세부묘사에 있어서 가면 전반의

폭넓은 상감 기법으로 화려한 효과를 내고 있다.

살아 있는 듯한 두 눈에는 석영을,

눈동자에는 흑요석을 상감해 넣었다.

특히 얼굴 양옆에 달린 네메스의 깃에서 잘 드러나는데,

전통적으로 상,하 이집트 파라오가 쓰는 관이였던 네메스는

당시로서는 매우 비싼 재료인 금과 청금석으로 만들어졌다.

깃 아래쪽에는 청금석, 루비, 흑요석, 청록 유리, 터키석 등의

재료로 상감 처리가 되어 있으며,

매의 머리로 장식된 황금 견장이 부착되어 있다.

이 매의 눈과 부리는 흑요석으로 제작되었으며,

하늘의 신 호루스가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파라오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파라오의 이마에는 코브라와 독수리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왼편에는 파라오의 전통적인 머리 장식인 코브라로

하이집트의 여신 우제트를 상징하며,

코브라 옆에 달린 독수리 머리는

반대로 상이집트의 여신인 네크베트의 상징이다.

 

 

 

투탕카멘의 미라관은 3중의 관이 중첩된 구조이다.

 

파라오의 미라를 보호하는 관은 모두 3개이다.

각 관의 뚜껑에는 파라오의 상징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얼굴의 이마에는 상,하 이집트의 상징인

독수리와 코브라가 장식되어 있고,

턱에는 장식 수염이 있으며,

가슴에는 두 팔을 포갠 모양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헤카(왕홀)와 네카카(도리깨)를 들고 있다.

두 번째 관과 맨 속관에서는 투탕카멘이

머리에 네메스 관을 쓰고 있으나,

겉 관에서 쓰고 있는 것은 세 갈레의 고대 가발이다.

 

 

 

미라를 보호하는 제 1내관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

 

미라 보호관 중 금박목관의 첫 번째 관으로,

이 속에 두 개의 관이 더 들어있다.

이 관의 길이는 221cm, 너비는 85cm로

사이프러스 나무에 금박을 입혔으며,

은과 청동, 방해석과 흑요석, 준보석으로 상감 처리했다.

관 표면에는 새 날개 모양의 깃털이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불멸의 왕이 죽어서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바'라는 새의 형상을 새겨 넣은 것이다.

또한 이시스여신과 네프티스여신이 각각 한쪽 날개를

들고 있는 형상이 있는데, 이는 왕을 수호하는 의미이다.

제 1관 아래에 있는 받침대로 카우치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도 목재에 금박을 입힌 것으로 앞은 사자머리,

뒤는 사자꼬리로 장식되어 있다.

3개의 관에 미라까지 합쳐 1,250Kg이나 되는 무게를

3,300년 동안 받치고 있었다.

 

 

 

미라를 보호하는 제 2내관

 

미라 보호관의 가운데 관으로 길이는 204cm,

너비는 68cm로 목재에 금박을 입힌 것으로

용융 유리와 준보석으로 화려하게 상감했으며,

몸체의 깃털 문양 역시 다양한 색채의 유리와

귀금속으로 처리했다.

하늘색은 터키석을, 감청색은 라피스 라줄리,

적색은 홍옥수를 이용했다.

이 기술은 아르마나 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기법이다.

관의 발바닥에 있는 부조는 이시스여신이 미라를 수호하는

의미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미라를 보호하는 제 3관과 뚜껑 모조품 (사진출처: 국립과천과학원,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미라 보호관의 가장 속관인 세 번째 관으로

금과 유리와 보석으로 상감해서 만들어졌으며,

길이 187cm, 너비 51.3cm, 높이 51cm이다.

무게가 110.4Kg이나 되는 순금으로 만든 순금관은

무덤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화려하며, 황금마스크와 함께

범 세계적으로 최고의 보물이라 칭할 수 있다.

이 순금관 안에 황금마스크를 쓴 투탕카멘 왕의 미이라가 들어 있었는데,

이 관의 뚜껑 또한 파라오를 상징하는 장식을 하고 있다.

머리엔 메네스 두건, 이마에는 독수리와 코브라를, 얼굴엔 장식 턱수염을,

양 손엔 헤카(왕권 상징)와 네카카(땅의 비옥함)를 쥐고 있다.

몸 전체가 새의 깃털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가운데에는 이시스와 네프티스여신이 날갯짓으로

파라오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발 밑바닥 부분의 부조와 동일하다.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이 황금관은

이집트의 뛰어난 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2019년 8월에 멸균 및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미라 보호관 중 제 3관, 황금의 관

 

투탕카멘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던 황금관이다.

이집트 고고학뿐만 아니라 세계 고고학에서

최고의 발굴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투탕카멘의 석관은 발견된

왕가의 계곡 묘에 있지만 그외의 유물들은

모두 이집트 박물관에서 볼수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에 축조된 람세스 6세의

무덤 바로 아래에 있어 입구가 그 무덤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도굴을 면할 수 있었다.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 이마 위의 왕비가 마지막으로 선물한 시들은 꽃다발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가

감동했다는 일화이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감싼 아마포를 한 겹 한 겹 뜯어내던

카터는 어느 순간 황금가면을 마주하게 된다.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마스크는

우수에 젖은 소년의 모습을 담은 최고의 조각품이었다.

그러나 카터를 감동시킨 것은 황금가면이 아니라

가면의 이마를 감싼 완전 시들어버린 화환이었다.

그는 황금의 화려함보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눈물과 함께

바친 왕비의 소소한 꽃다발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는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4개의 겹쳐진 상자 형태의 외관과 다섯 번째 석관 (사진출처: 파라오의 비밀 용산 전쟁기념관)

 

1924년 2월 12일,

카터는 투탕카멘 무덤의 현실에 있던

외관인 4개의 금박목관을 해체하고

12t짜리 분홍색 화강암 관 뚜껑을 들어내며 석관을 개봉했다.

그러자 값 비싼 원석과 유리로 장식된

길이 221cm 짜리 제 1 미라보호 금박 목관이 나타나고,

그 안에 다시 204cm 짜리 제 2 미라보호 금박 목관,

그 안에 또 길이 187cm, 순금 무게 110.4Kg의 제 3 미라보호 황금관이 나왔다.

뿐만아니라 순금관 속에는 황금마스크, 140여 개의 부적과 보석,

장신구로 치장한 파라오의 미라가 3,3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출현했다.

 

 

 

위에서 본 현실의 구조

외관인 4개의 금박목관과 1개의 석관 그리고 내관인 3개의 미라보호관 자리

 

제 1외관 안에 있던 관들을 나란히 배열해 놓은 모습이다.

4번째 외관까지 금박목재로 만들어졌으며,

다섯 번째 관은 돌로 만들어진 석관이다.

또한 그 석관 안에는 다시 2개의 금박목재 미라관과

1개의 순금미라관이 더 있었다.

파라오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해 황금미라관과 2개의 미라관은 물론,

석관과 4개의 목관까지 만들어 8개 관으로 겹겹히 보호했다.

전실과 현실을 가로 막았던 차단막을 제거한 날이

1923년 12월 16일, 이때부터 석관을 열기까지 1년이 지났다.

석관을 보호하던 4개의 금박목관을 무덤 밖으로 옮기는데 소요된 시간이다.

석관과 그 안의 황금미라관을 열기 위해서는

4개의 목관을 먼저 해체해야만 했는데,

공간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황금관과 황금마스크에 대한 조사는

석관을 열고나서 수년이 지난 1926년과 1927년 겨울에 이뤄졌다.

카터가 세심하게 평가하고 목록을 만드는데

소요한 시간과 관계자들의 마찰로 인해서이다.

이 발굴의 재정 지원자 카나번 경은 이 위대한 보물을

보지 못하고 1923년 4월 5일 숨졌다.

그는 현실의 대형 금박목관과 보물실의 유물까지는

지켜볼 수 있었지만 얼마 후 사망하는 바람에

'파라오의 저주'란 용어를 탄생시킨 배경이 된다.

 

 

 

투탕카멘 왕의 외관들

 

4 중으로 겹쳐진 상자 형태의 외관이

하나씩 유리에 넣어져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 현실에 있는 관은

4중으로 겹쳐진 상자 형태의 외관과

다섯 번째의 석관 그리고

3중의 미라보호형 내관으로 되어 있었다.

이중 다섯 번째 석관은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 있는

KV62 무덤에 그대로 있고 나머지는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투탕카멘의 제 1외관

 

투탕카멘의 제 1외관

2시간여가 지나서 차단 벽을 허무는 작업이 성공하고,

벽 너머 보이던 황금 벽의 정체는 바로 거대한 금박목관 남쪽 측면이었다.

금박목관은 마치 컨테이너 박스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에서도 유례없는 것으로 석관을 통째로 보관하는 관이다.

당시 매우 귀한 목재였던 중동의 백향목에 금박을 입힌 관의

길이는 5m, 너비 3.3m, 높이 2.8m이다.

매장실의 크기는 6m/4m/3.3m로 금박목관과 매장실의 벽과의 간격은

짧게는 30cm, 길어야 60cm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카터가 제 1관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4개의 목관과 마지막엔 석관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 번째 관과의 공간에는 다수의 지팡이와 화살, 금빛의 곤봉,

그리고 아름다운 2개의 설화석고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카터의 발굴팀은 매장실을 꽉 채운

전무후무한 유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금박의 일정 문양이 반복되는 형태이다.

 

백향목으로 만든 관의 바깥 면은,

금박에 제드와 티엣 문양이 반복되는 형태를 보이며,

그 사이는 청색옥으로 상감 처리되어 있다.

이곳에 사용된 문양을 제드와 티엣이라 하며,

앙크와 함께 고대 이집트의 조각이나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제 2 외관

 

제 1관과 같이 목재에 금박을 입혔다.

길이 374m, 너비 235cm, 높이 225cm이다.

이 관의 왼쪽 문에는 이시스여신이 망자인 투탕카멘을

저승 세계의 왕인 오시리스에게 인도하는 모습의

부조가 담겨있다.

 

 

 

제 2 외관 왼쪽 문의 부조

 

이시스 여신이 망자인 투탕카멘 왕을

저승 세계의 왕인 오시리스 신에게 인도하는

모습의 부조가 담겨있다.

 

 

 

제 3 외관

 

제 3관에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주요한 장례 문헌 중 하나인 암두아트를 묘사하고 있다.

암두아트는 서쪽 지평선으로 태양이 지면

태양신 라가 사후 세계인 두아트를 여행하면서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기까지의 여정을 서술한 것이다.

용도는 망자가 부활하여 영생을 살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제 4 외관의 측면

 

금박목관으로 목관으로는 마지막이다.

이 안에는 다섯 번째 관인 석관이 있다.

이 목관에도 금박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는데

내용은 파라오의 시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방법이

정리되어 있다.

 

 

 

다섯 번째 석관, 모조품 (사진 출처: 국립과천과학원,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이집트 신왕국 제 18왕조를 통틀어

석관에 묻히는 것은 왕실의 특권이었다.

투탕카멘 또한 석관에 묻혔는데

그의 석관은 규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뚜껑은 분홍색 화강암이었다.

하나의 관에서 몸체와 뚜껑을 다른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이는 제대로 된 규암 뚜껑을

제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로추정한다.

석관의 네 모서리에는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의 네 명의 여신이

관을 보호하고 있다. 이 네 명의 여신은 망자의 장기를 보호하는

호루스 아들인 네 명의 신을 후원하고 있다.

남쪽을 관장하는 이시스여신은 사람 모양으로 간을 책임지는 임세티를,

동쪽의 네이트여신은 자칼 모양에 위장을 보호하는 두아무테프를,

북쪽의 네프티스여신은 개코원숭이 모양에 폐를 담당하는 하피를,

서쪽의 세르케트여신은 매 모양에 창자를 책임지는 케베세누에프를 후원한다.

한편 길이 256cm, 너비 133cm의 석관은 현재 룩소르

왕가의 계곡 KV62 투탕카멘의 무덤에 그대로 놓여 있으며,

4개 외관과 석관의 속관인 3개의 미라보호관은 분리되어

카이로의 이집트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정중앙: 옥좌에 앉은 암사자 머리를 한 세크메트 여신

 

투탕카멘 무덤 보물실의 카노푸스 사당

주변에 있던 여러 개의 상자안에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정중앙은 암사자 머리를 한 세크메트여신이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녀는 멤피스 지역에서 주로 숭배되었으며,

세크메트란 힘 있는 자를 뜻하고 왕의 장례식에서

파라오의 영원한 권력을 보장하는 상징이었다.

또한 아툼 혹은 태양신 라의 딸이자 비서인 하토로와 한 몸이다.

오른쪽 맨 끝은 상이집트의 헤제트 왕관을 쓰고

표범을 탄 투탕카멘 왕의 입상으로,

아마르나 형식을 따른 것이라 왕의 생전에 만든 것을

사후에 무덤에 넣은 것으로 추정한다.

 

 

 

투탕카멘 황금 입상

 

파피루스 패들 보트 위에 서서

하이집트의 상징 데슈레트 왕관을 쓰고

작살로 뭔가를 잡고 있는 투탕카멘 황금 입상,

그 옆은 매의 모양을 한 솝두 신으로

하늘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투탕카멘 입상

 

왼쪽부터 3개 조각상의 받침대에는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3개 조각상 모두 오른손엔 도리깨를, 왼손엔 지팡이를 쥐고 있다.

오른쪽의 조각상은 유선형의 상이집트 상징 헤제트왕관을 쓰고 있고,

왼쪽 2개의 조각상은 하이집트의 상징 데슈레트왕관을 쓰고 있다.

이는 투탕카멘이 상,하이집트의 파라오 임을 상징한다.

중앙의 투탕카멘 옆에는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상과

그 옆에는 매의 모습을 한 솝두 신이 받침대에 앉아있다.

 

 

 

 

 

발 받침대가 있는 접이식 의자

 

제 2의 왕좌로 불리는

약 3,000여년 전의 접이식 의자이다.

발 받침대가 있는 옥좌로 목재에 금박을 입혔고,

유리와 흑단, 상아 등으로 상감한 장식이 포인트다.

의자의 높이는 102cm, 너비는 70cm이며

받침대는 가로 58.7cm, 세로 31.7cm이다.

 

 

 

 

 

 

 

 

 

 

 

 

 

 

 

 

 

 

 

 

 

샌들

 

100여 점의 샌들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골풀과 파피루스로 만들어졌다.

 

 

 

전차

 

 

 

 

 

 

 

더 보고싶다는 열망을 억지로 삼키고

가이드를 쫓아 밖으로 나가는 중이다.

 

 

 

이집트 박물관 정원

 

이집트 유물들을 박물관을 지어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던 프랑스 출신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사후 석관에 안치되어 이집트 박물관 정원 한쪽에

묻혔다는데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하고 간다.

 

 

 

The Grand Egyptian Museum 조감도

 

현재의 이집트 박물관은 전시공간 부족과 열악한 시설로

수만 점의 유물이 훼손되거나 지하 창고에 방치돼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적인 관광지인 기자 피라미드 2㎞ 앞에

새로운 이집트 대박물관을 건설 중에 있다.

본 전시장 건물의 길이만 300m에 달하고,

각종 편의시설과 공원으로 조성되는 부지까지 합치면

축구장 크기의 60배 면적이다.

이 박물관이 완공되어 이집트 7,000년 역사의

유물 10만여 점이 전시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으로 재 탄생한다고 한다.

 

 

 

현재 기자지구에 건립하고 있는 새로운 이집트 박물관

 

 

[참고 발췌: 두산백과, 위키 백과, 위키피디아, 이집트에서 보물찿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