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사원,에펠탑,개선문

푸른 바다. 2010. 5. 3. 11:00

노트르담 사원

 

 

 

 

 

 서유럽 여행 11박 12일중 셋째날에 가 본 노트르담 사원.

먼저 떠오르는것은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 ( 노트르담의 곱추) 책이 생각나며,

뒤이어 안소니 퀸의 콰지모도 연기가 압권이었던, 또한 집시 에스메랄다로 나온

 지나롤로 브리짓다의 춤이 생각나는 영화가 생각났다.

세느강을 끼고 있는 사원은 도로와 연결 되어 있고 웅대하여,

똑딱이로는 도저히 전체 샷을 잡기가 어려웠다.

 

 

 

세느강 시테 섬에 자리하고 있는 파리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자

프랑스 가톨릭의 상징인 노트르담 성당은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이다.

노트르담은 가톨릭에서 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칭이며

프랑스어로는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1163년 모리스 드 쉴리 주교는 로마시대부터 있었던 그리스도교

성당  자리에 파리시민을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완공된 것은 170년 뒤 1330년경이다.

그러나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69m의 노트르담 성당은

  1790년경 프랑스 대혁명의 급진적인 시기에

반기독교 사상에 의해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고, 많은 성상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파괴된 상태에서 복구되어

 오늘날 모습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이야기된다.

 

 

 

1802년 나폴레옹은 정식으로 이 대성당을 교회에 반환하였다.

노트르담 사원은

그간 1455년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심판, 1760년 국왕 루이 16세의 결혼식과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

1944년 8월에는 2차세계대전 종전 기념 미사가 봉헌되었고,

드골 장군의 장례식, 그리고 미테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등이 치러져

 프랑스인들에게는 유서 깊은 현장이자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원으로 깊이 각인되고 있다.

고딕 교회 건물의 원형인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9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3개의 장미창과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걸작으로 손꼽히며,

특히 장미창은 직경이 13m에 이르며 햇빛의 각도와 강약의 변화에 따라

창의 모습도 시시각각 변하게 돼 ‘신비의 색깔’이라고도 칭해진다.

 

 

 

사원은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앞면 보다는 뒷면이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방문하면 4명의 연주자에 의해서 연주되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파이프 오르간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3개의 장미의 창중 하나

 

 

정면에 보이는 두개의 종탑과 장미창이 있으며 입구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정면에서 왼쪽 문이 ‘성모마리아의 문’,

가운데가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최후의 심판의 문’, 그

리고 우측에는 ‘성녀 안나의 문’이다.

이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의 왕을 상징하는 28개의 입상이 나열되어 있으며

그 윗쪽의 둥근 창은 서쪽 장미창으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중앙의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최후의 심판의 문

 

 

최후의 심판문 윗쪽의 화려한 조각들. 13세기 조각예술의 결정판이라고 한다.

이 문을 최후의 심판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문 바로 위,

가장 아래 조각을 보면 죽은 자들이 관을 뚫고 심판을 받기 위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위에서는 천사들이 저울로 영혼의 무게를 달아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여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 (왼쪽), 악한 사람은 지옥 (오른쪽)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가장 위에는 예수님이 심판을 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문 윗쪽의 줄 지어선 사람 형상은 왕의 발코니로

28명의 유대 왕들이 군중을 굽어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성모마리아의 문

 

 

성당의 안과 밖,벽과 천정,모든 부분에 성서에 관련된 조각,그림들로 가득차 있다.

이유는 당시에는 문맹율이 높아 글을 읽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하여

건축과 조각과 그림으로 성서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돌로 만든 성경책이라 할 수 있다.

 

 

성 루이왕은 십자군전쟁에서 돌아오면서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가져와서 노트르담대성당에 보관 했다고 한다.

 

노트르담 사원 내부

 

 대성당의 조각들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는 초기 로마네스크건축에서 부족한 세속적인 외관을 더해준다.

 

 장미의 창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실제로 미사를 집전 중이다.

 

 

미사 도중이라도 파란선 밖에서 관광객들이

외곽 통로를 이용하여 조용히 둘러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독일이 창문을 폭격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1939년 9월 11일에 성당의 창문들을 분리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이 창문들은 다시 복원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구약성서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노트르담 정문 입구에 zero point라고 거리 측정 기준점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한바퀴 밟으면 파리를 한바퀴 돈거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을 밟으면 다시 파리에 오게 된다고 해서

한 발로 밟았다가 다시 두 발로 밟았다.

 

사원 정문 맞은편에 있는 파리 시청

 

개선문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오스테를리츠에서 유럽 연합군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프랑스 파리의 드골(에투알) 광장 중앙에 있는 석조 건축물이다.

 1806년에 공사를 시작해 나폴레옹 사후 1836년에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의 유해가 프랑스로 돌아오자 프랑스 국민들은 유해를 앵발리드에 안치하기 전에 개선문 밑을 지나가게 했다.

 높이 50m, 너비 45m로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각부를 장식한 조각 가운데 F.뤼드의 《라 마르세예즈》(1833~1836)은 특히 유명하다.

 

 

개선문 벽에는 나폴레옹의 승전 부조를 비롯,

 전쟁에서 공을 세운 600여명의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하에는 1차세계대전 때 숨진 무명용사들을 위해,

 1년 내내 횃불이 타오르고 있는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1998년  불이 딱 한 번 꺼진 적이 있는데,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 때 브라질이 프랑스에 패하자 브라질을 응원했던

멕시코 축구팬이 술에 취한 채 횃불을 껐을때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상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284계단을 올라 개선문 옥상에 이르면

방사형으로 뻗어있는 12개의 도로와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또한 2차대전후 4년간의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샤를 드 골 장군이 이 개선문 아래로 당당히 행진했다고 한다.

 

샹젤리제거리

 

유명한 파리의 쇼핑거리 중 하나다,

샤를 드 골 광장에서 방사선으로 뻗은 12개의 거리 중 하나이며,

에투알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도로의 양쪽에는 마로니에, 플라타너스 등의 가로수가 울창하다.

도로의 중간쯤에는 너비 300~400m, 길이 700m의 산책용 공원이 있다.

1667년 이전까지는 센강이 범람하는 황폐한 늪지였으나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아름답게 변모하였다.

레스토랑과 카페, 여행사, 은행, 쇼핑 아케이드 등이 많이 모여있고,

콩코르드 광장 쪽에는 숲이 아름다운 공원과 산책로가 있어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이 많다.

밤이 되면 거리의 가로수에 작은 전등에 불을 밝혀 화려한 모습으로 바뀐다.

 

까르띠에 메종

루이비통의 본점도 있었는데 사진은 ...

 

에펠탑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의 교량기술자 A.G.에펠이

설계하여 만든 탑으로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인  마르스 광장에 세워졌다.

높이는 984피트(약 300m)로 격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할 만큼 세계적인 유료 관람지이다.

  완공 당시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고,  모파상과 같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비판과 함께, 시민들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완공 후 프랑스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나 탑을 싫어했던 소설가 모파상은 점심을 의도적으로 탑 안의 식당에서 해결했다.

왜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그 건물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유명하다.

 탑의 시한인 20년이 지나 1909년에 해체될 예정이었으나 송신탑으로 이용되면서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에펠탑 가이드

 

에펠탑 티켓 앞부분

 

티켓 뒷부분

 

 

에펠탑에 오르기 위해 거의 한시간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겨우 올라갔으며

기념품 가게도 있다.

 

<에펠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의 풍경들>

 

1940년 파리가 독일에 점렴중이었을때, 승강기 케이블이 프랑스군에 끊겨,

파리 방문 중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탑을 오르려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수리가 필요했던 부분은 당시로선  전쟁 때문에 불가능했으므로 

히틀러는 탑에 오르는 대신 땅에 머무르기를 택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컬어, 히틀러가 프랑스는 정복했으나 에펠 탑은 정복하지 못하였다고 회자한다고 한다.

1944년 8월, 연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히틀러는 파리의 군정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에펠탑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폰 콜티츠는 이 명령을 어겼고,

 파리 해방 불과 몇시간 뒤에 탑의 승강기는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다.

 

에펠탑에서 바라다 본 파리 시내

 

일몰이 찿아드는 파리

 

에펠탑에서 바라다 본 사이요궁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두 개의 별관을 잇는 곡선의 날개부가 아름답다.

파리 국립극장과 해양 박물관, 인류 박물관, 문화재 박물관, 영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리시내에서 에펠탑,샹 드 마르스,앵발리드의 모습을 짤리지 않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세느강변에서 바라 본 야경이 아름다운 에펠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