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부르 박물관
전 날 영국에서 유로스타 타고 밤 11시 26분 파리 도착하여,
파리와의 첫 만남을 버스에서 피곤한 몸으로 조우하였다.
그리곤 밤 11시 58분 호텔 도착하여 방 배정 받아 씻고,
베드에 누우니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다음날 일찍 기상하여 호텔 조식을 마치고
파리에서의 첫날 관광을 루부르 박물관부터 시작하였다.
루부르 박물관 안내도
박물관 관람 티켓 앞면
티켓 뒷면
루부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으로,
루브르궁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파리의 세느강변을 포함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소장품의 수와 질 면에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처음에는 국왕의 수집품이 중심이었으며,최초로 미술품을 모은 것은 프랑수아 1세였다.
루이 13세 시대에 벌써 왕의 ‘수집실’ 속에는 200점의 회화가 있었고,
루이 14세 시대에 재상 콜베르의 적극적인 예술진흥정책으로 수집품이 급증하였다.
그 수집품을 미술관으로서 공개할 생각은 루이 15세 시대의 재상 마리니 경의 안이었으나,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였다.
그 후 나폴레옹이 많은 작품을 전리품으로서 추가하고,
기타 다른 수집가들의 협력도 있어서 현재 그 작품수는 약 30만점이며 그 중 2만 5천점이 전시되고 있다.
루부르 박물관은 동서로 약 1km, 남북으로 약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후반 필립 2세의 명으로 착공되었는데, 그당시만 해도 궁이 아닌 요새였다.
아직도 당시의 요새 잔재들을 볼 수 있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루브르를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했다.
루브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 중의 하나이며,
이들 작품은 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유럽 모든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 소장된 15~19세기 프랑스 그림들은 세계 최고이며,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바로크 시대 플랑드파, 네덜란드 화가들(루벤스.렘브란트)의 걸작도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세기 인상파 이후의 회화 부문 역시 루브르미술관 소관인데
그 작품들은 '인상파미술관'에 전시하다가, 1986년에 완공된 오르세미술관으로 옮겨 전시 중이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비롯하여 모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고흐 등
근대 회화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들의 우수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루브르박물관 대개조 계획인 그랑 루브르(Grand Louvre)를 세웠고,
이에 따라 1989년에 유리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출입구와 매표소, 상점 등을
유리 피라미드가 있는 중앙 지하로 모아 현재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대개조 계획으로 복잡한 동선이 정리되긴 했지만 박물관 전체를 다 보려면 사나흘은 잡아야 한다.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 조형물은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 계획에 따라 건설된 것으로
한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이 많았으나 현재는 루브르를 대표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미국 건축가 I.M.페이가 디자인한 강철과 유리로 된 피라미드.
이곳을 기준으로 3개의 관(리슐리외, 슐리, 데농)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유리 피라미드의 규모는 길이 220미터, 폭 110미터, 높이는 12,60미터이며,
그 기울기는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의 각도인 50.7도이다.
피라미드의 꽃인 유리는 생고뱅 회사에서 제작했고,
순수 수정과 같은 맑은 투명도를 갖도록 영국에서 표면을 처리했다.
루브르미술관의 관장 이 전국의 공 ·사립 미술관 운영을 총괄하도록 되어 있어,
프랑스 미술관 행정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루브르 박물관과 튈르리 정원의 경계지점에 서있는 카루젤 개선문
나폴레옹이 오스텔리츠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며 1808년에 세운 개선문이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이며 8개의 장밋빛 원기둥이 독특하다.
카루젤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 라 데팡스의 신 개선문인 르 그랑 아슈가 일직선에 놓여있다.
소장된 미술품의 규모는 세계 최대이다.
대형 스핑크스
밀로의 비너스( BC 100년 경, 작자 미상)
파로스섬의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 그리스 말기의 비너스상이다.
높이 204cm이고, 멜로스의 아프로디테라고도 불리우며,
루부르 박물관의 대표적인 소장품중 하나이다.
1820년 4월 8일 그리스 에게해의 멜로스(밀로)라는 작은 섬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작자 미상의 조각품으로,
기원전 100년 경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 섬에 정박했던 프랑스 해군이 입수하여 다음해 리비에르 후작 손을 거쳐
루이 18세에게 헌납했으며 왕명으로 루브르미술관에 전시 되었다.
로마인들에게 사랑의 여신의 표상이었던 이 비너스는 얼굴 표정이나 젖가슴, 허리부분등
전체적인 균형미가 뛰어나며, 독특한 곡선미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 조각 중 머리가 붙어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고고학자나 미술사의 추측으로는 그녀의 오른손은 왼쪽다리쪽으로 내려졌고
왼팔은 앞으로 내밀어 그 손엔 사과를 쥐고 있을거라고 한다.
사모트라키아의 니케 승리의 여신상(BC 190년 경)
140 년전 그리스의 에게해 북부 ‘사모트라키아’ 섬에서 출토된 이 조각품은
기원전 2세기(BC 190년 경)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3세가 사모트라키아에 진격 했을때,
로도스의 함대가 침공을 물리친 시데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승전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날개가 달린 이 여신상은, 높이가 328cm이며
가슴에 착 달라붙은 젖은 주름진 옷과 날개의 움직임이 생동감이 있다.
사모트라키아의 니케는
1863년 프랑스 영사 샹푸아소가 100개가 넘는 토막들로 흩어진
돌덩어리들을 발굴해 지금의 형태로 복원했는데,
여신의 두 팔과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티탄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인 스틱스의 딸로
그리스 신화의 정복과 승리의 여신,
로마신화의 빅토리아에 해당하고, 영어로는 나이키라고 한다.
일명 벨레트리의 팔라스라고 불리는 아테나 여신
작자 미상 BC 430 에트루리아 유물
일명 미네르바 인그레스라고 불리는 아테나 여신
작자미상 BC440 고대 그리스 에트루리아 유물 대리석
저 뒤에 교황 율리오 2세 무덤의 반란의 노예와 죽어 가는 노예가 있다.
좌측이 저항하는 노예, 우측이 죽어가는 노예 미켈란젤로(1441-1513)
세 아이들과 젊은 강의 신 피에리노 다 빈치?
1547-1548 대리석
히드라와 결투하는 헤라클레스
작자미상 16세기경 청동
거대한 비단뱀을 죽인 아폴로
작자 미상 16세기경
퐁텐블로의 요정 벤베누토 셀리니 16세기
모나리자 레오나르드 다빈치(이탈리아 1503- 1506년경)
눈썹이 없어 더 유명한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어로 Ms.정도의 유부녀에 대한 경어이며,
리자는 피렌체 출신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아내인 리자 게라르디니 이다.
그녀의 나이 24~27세 정도때의 초상화라고 하며,
다빈치는 리자 부인의 기분을 즐겁게 하여
아름다운 미소가 배어나오도록 하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렀다고 한다.
다빈치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에 소장되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유리관에 넣어져 보호되고 있는 모나리자는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는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이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출신이고
모나리자도 피렌체 사람이기 때문에 모나리자를 이탈리아가 되찾아 온 것뿐이다.”
유명세 만큼이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가까이서는 키 높이로 인하여 찍지 못하고 멀리서 겨우 줌으로 찍었다.
나폴레옹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1804년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는 장면을 그린 다비드의 가로 931cm, 세로 610cm 크기의 대작이다.
1806년 경에 그린 이 그림에서 다비드는 200여명의 인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나폴레옹이 왕비인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선택하였다.
그림의 크기 뿐만 아니라 대관식의 즐거움과 엄숙함이 배어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가톨릭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교황청과 화해하면서 대관식을 갖기로 했을때,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앞에 무릎 꿀리고 제관을 수여하면 교황의 권위가 높아질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런데 대관식에서 교황이 관을 씌우려하자 나폴레옹은 관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군중 앞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다.
그리고는 조세핀의 머리에 자신이 황후의 관을 씌워 주었다.
200명이 등장하는 이 그림에서 오른쪽 앞에는 나폴레옹의 근위병들이 서 있고,
중앙 정면에는 주교들이 앉아 있다. 조세핀의 뒤에는 두명의 여동생이 있고,
그 뒤에는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넣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어머니가 앉아 있다.
이 작품의 또다른 이름은 "조세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이다.
다비드는 처음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렸는데,
나폴레옹으로부터 정말 잘 그린 그림이라는 칭찬을 받자 루부르 박물관에 똑같은 그림을 또 하나 그렸다.
나폴레옹은 여섯살이나 많고 두 아이까지 있었던 미망인 조세핀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27세의 청년장교의 뜨거운 공세끝에 사귄지 3개월 만인 1796년 3월 9일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그리고 35세의 나폴레옹이 41세의 조세핀 머리에 황후의 관을 씌워 준다.
그림에서는 화가가 나폴레옹의 부탁으로 조세핀이 젊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알프스 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 폴 들라노슈
낭만주의 1834년
파죽지세로 유럽 전토를 석권하여 유럽 대륙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1814년 4월에 퇴위.
엘바 섬에 유배, 다시 탈출하여 재기를 시도하나, 백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나는 천성적으로 여자와 같이 있으면 수줍어진다.
그러나 보아르네 부인은 내게 어느정도 자신감을 준 최초의 여자였다."
황후 조세핀 피에르 폴 프뤼동
신고전주의 1805년
그녀의 무분별한 행동, 사치와 방탕, 그리고 제국의 존속을 위하여 아들이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1809년 12월 조세핀과 이혼하고 1810년 3월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 한다.
말메종성으로 옮긴 조세핀은 나폴레옹의 돈으로 계속 화려한 삶을 이어가다가
나폴레옹 퇴위 뒤 얼마 안돼(1814년)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하직하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 "조세핀"이라고 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부제는 1830년 7월 28일 ) 외젠 들라크루아
낭만주의 1831년
1830년 7월 시민들의 혁명으로 3일간의 시가전을 치른 끝에 샤를르 10세 왕가가 무너진다.
이 시민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에서 들라크루아는 시민군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승리의 여신 니케를 본따 그렸고, 부루조아 계급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총을 든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자유의 여신은 삼색기를 흔들며 파리의 시민들과 함께 바리케이트전을 펼쳤다.
프랑스 7월 혁명 당시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을 치른 끝에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시민왕 루이 필립을 국왕으로 맞이 했던 것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1831년 살롱에서 호평을 받았고,
7월 왕정의 수반인 필립이 이 작품을 구입했다.
또한 나폴레옹 3세때는 파리 만국박람회에도 전시되었고,
1874년 들라크루아가 죽은 후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783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1783년 19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다비드가 처음으로 왕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왕은 로마 역사의 한 장면을 주문했고,
다비드는 리비의 로마사와 플루타르크 영웅전등에 등장하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이웃한 알바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국은 전면전 대신 각각 세 명의 대표를 뽑아 그들 사이의 결투 결과에 따라 승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가의 삼형제가, 알바에서는 쿠리아티우스가의 삼형제가 결투에 나섰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800년경
레카미에 부인은 당시 파리의 사교계에서 아주 인기가 높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드레스와 머리띠는 그당시 유행하고 있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799년
엔디미온의 잠 안 루이 지로데
신고전주의 1791
1791년, 다비드의 제자였던 안 루이 지로데가 로마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엔디미온은 달의 여신 셀레나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청년이다.
여신은 엔디미온의 완벽한 육신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를 깊은 산 속에 숨겨두고 결코 깨어날 수 없도록 잠재워 버렸다.
엔디미온은 이제 어느 누구의 욕망과 근심으로도 소진되지 않을 아름다움을 얻었고,
세월의 힘 앞에서도 소모되지 않을 생명을 얻었지만, 그 대신 영원한 동면에 빠진 것이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신고전주의 1819년
채색주의에 대항하는 화가의 수장이었던 앵그르는
오리엔탈풍의 규방을 연상시키는 (오달리스크란 터키 궁전 하렘의 궁녀들)
이 그림을 통해 기묘한 육감미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인의 나체를 실제의 모습보다는 곡선을 강조하여 매끄럽게 표현하여 인물에 대한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나폴리왕국 카롤린느 뮈라 여왕의 주문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그 당시에도 늘려 그린 허리때문에 고전주의를 지지하는 평론가들에게
많은 비난의 화살을 받았지만
앵그르는 그에 굴복하지 않고, 정확한 형태보다 선적인 음률를 중시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카롤린 리비에르양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신고전주의 18세기경
알제리의 여인들 외젠 들라크루아
낭만주의 1834년
1832년 모로코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들라크루아가 작품화 하였으며,
밝은 빛 아래에서 호화로운 권태를 보여주는 하렘의 여인들을 묘사하였다.
그후 그의 그림에는 동방의 삶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온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안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종
신고전주의 18세기경
리비에르 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신고전주의 19세기경
줄리엣 드 빌뇌브의 초상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824년
무덤속의 아탈라 (아탈라의 장례식) 안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종
신고전주의 18세기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8세기경
교황 비오 7세의 초상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8세기경
다비드의 처제 세레지아 부인과 그의 아들 에밀 자크 루이 다비드
신고전주의 1793년
화가 이자베이와 그의 딸 알렉상드린 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 남작
신고전주의 19세기
루시앙 보나파르트의 첫번째 부인 크리스틴 부아이예 앙투앙 장 그로
신고전주의 18세기경
프시케의 납치 피에르 폴 프뤼동
신고전주의 18세기경
퐁탱 채소밭 수확기의 도래 레오폴드 로베르
1830년
성스러운 대화 (성 카타리나, 성 세바스티아누스와, 기부자와 함께 있는 성 가족)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르네상스 16세기경
성녀 에티엔, 성 제롬, 성 모리스와 성 모자 티치아노
르네상스 16세기
엠마우스의 저녁 식사 티치아노
르네상스 16세기
아이와 개와 함께 있는 여인의 초상 칼리아리 파올로 베로네세
16세기경
비너스와 에로스 램브트 서스트리
16세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외젠 들라크루아
낭만주의 18세기경
돈 후앙의 난파 (바이런 , 돈 후앙, 2절) 외젠 들라크루아
낭만주의 18세기경
단테와 비르질리우스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올로 말라테스타의 영혼 아리 셰프
낭만주의 1855년
우측 위 예수 수난상 피에르 폴 프뤼동
신고전주의 18세기경
샤세리오양들 (두자매) 테오도르 샤세리오
낭만주의 19세기
맨 위 아기 예수에게 드리는 경배 로렌조 로토
르네상스 16세기경
맨 위 에로스와 프시케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19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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