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12월 10일 목요일 북경 도착 후 천안문을 거쳐
자금성 정문인 오문에 도착하였다.
평소에 보고 싶었던 자금성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인 새로운 문화를 본다는 사실에 흥분이 되었다.
자금성
자금성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으로 불리고 있으며, 1925년 10월 고궁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일명 9999개의 방(실제로는 8707칸이라고 한다.)이 배치되어 있다.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곳의 중문인 오문의 가운데 문은 황제만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반인의 출입을 엄금한다. 자금성의 정문을 천안문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으나,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이며, 천안문은 황성 내성의 남문이다.
오문
12미터에 달하며 중국 고대의 문중에 제일 높다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큰 문은 산서성 린펀시에 위치한 화문이다.)
이 곳 오문에서는 황제가 조서를 내리거나 출정을 명령하였다.
또한 황제를 거역한 대신이나 죄인들에게 채찍형을 행하던 장소이다.
오문의 중앙문은 황제만 출입할 수 있었으나, 황제가 식을 올릴 때 황후가 한 번 들어올 수 있고
청나라 때는 과거시험의 장원부터 삼등까지 딱 한번만 이 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문무대신은 동쪽의 문으로 출입을 하고 왕족은 서쪽의 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은 궁궐 문으로서는 세계 최대 크기이다. 가운데 누각에 황제의 옥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황제는 이 누각에 올라 포로를 받는 의식을 행하였다. 또한 해마다 이 곳에서 새 역법을 알리고, 군대의 사열식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 궁전인 자금성은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가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14년에 걸쳐 건설한 거대한 궁궐이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되어 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어 있다.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 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과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금성은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박물관이며, 종합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영락제 때 처음 지어진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졌지만
청나라 때 고치고 새로 지으면서 명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기본 구조는 물론이고 자재와 장식 등 모든 것을 명나라 때의 건축을 바탕으로 지었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과 관련이 있다.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한 것이다.
오문을 들어와 태화문을 통해 외조인 태화전으로 갈 수 있다.
태화문은 자금성 정문인 오문을 지나 외조의 태화전 전면에 있는 문으로
영락 18년 1420년에 완공되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 청조 광서제때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태화문 앞 내금수교 밑으로 내금수호가 있는데 이는
목조 건물의 약점인 화재에 대비하여 궁궐 안에 금수하라는 인공 하천(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였다.
태화전
자금성의 상징으로, 궁궐의 중심 건물이다.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황제의 즉위식이 이 곳에서 거행되었으며, 생일 잔치나 중요한 명령 발표,
외국 사신과의 만남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자금성의 중심 건물인 태화전
태화전은 길이 64m, 폭 37m, 높이 27m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다.
자금성중에서도 가장 큰 면적과 크기를 자랑하며,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다.
또한 황제만 다녔던 중앙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말,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3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태화전
태화전은 여느 건축물과 다르게 3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다.
기단에 장식된 동물 조각과 문양도 하나같이 아름답다.
태화전
황제가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명나라 청나라의 24명의 황제들이 이 곳에서 황제즉위식, 혼례, 황후책봉,
출정 외에도 만수절, 설날, 동지의 3대 명절 등 성대한 전례를 올렸다고 한다.
황제는 이곳에서 문무백관의 아침문안을 받았고
여러나라의 사신들의 인사를 받았으며 왕족과 대신을 위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태화전 옥좌
금칠을 한 용조각 옥좌와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6개의 금칠 반룡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7단의 층계를 올라가 연단 위 황제의 용상에 앉아 신하들의 인사를 받았고,
최고의 정치 명령을 내리는 의식도 모두 이 옥좌에 올라서 행하였다.
6개의 금칠한 반룡기둥
12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2층 건물로, 지붕의 기와도 내부도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하여 화려하기 짝이 없다.
태화문 앞에서 바라본 웅장한 자금성의 모습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생각했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넓은 공간에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하나가 중국 고대 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1644년 명나라 뒤를 이어 들어선 청나라의 열 명의 황제들은 자금성을 정부 소재지로 삼았다.
1912년, 신해혁명에 뒤이어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퇴위했고,
자금성은 결국 박물관이 되었으며 많은 보배와 진기한 물품들을 전시하게 되었다
(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 동안 대만으로 옮겨졌다).
중국 공산당의 정책이 완화되면서 자금성은 중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가 찾는 주요 명소가 되었다.
(출처: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세계역사 유적1001)
자금성 건설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자금성의 건축 재료는 여러 곳에서 가져왔는데, 돌은 가까운 팡산 채석장에서, 벽돌은 산둥 지방에서 가져왔다.
이 두 지역에서 자금성까지는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대리석과 나무는 쑤저우와 윈난 성 등 2000km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가져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자금성의 방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금성 방의 개수가 9999개라고 처음 건설될 당시의 소문을 믿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금성에 있는 방은 모두 8886개이다.
중화전
중화전은 태화전과 보화전의 사이에 있다.
황제가 태화전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전에 이곳에서 잠시 쉬거나,
신하들의 축사를 받고 중요한일을 하거나 ,
문서를 읽기전에 이곳에서 연습을 하던 곳이다.
지금으로 보면 리허설을 하는 대기실과 비슷하다.
중화전
청조 역대의 옥새가 진열되어 있는데
옥새는 황제 즉위시의 조서, 진사의 인가, 칙서 등에 사용되었던 왕의 도장이다.
보화전
보화전은 명나라 때 큰 의식을 치르기 전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때는 섣달 그믐, 정월 15일, 소수민족 왕이나, 귀족과 12품 대신을 위한
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청나라 때는 공주가 시집갈 때 황제가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부마를 초대하였다고 한다.
1789년부터는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되어 과거의 최종 시험인 진시가 이곳에서 열렸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을 합하여 삼대전이라고 부른다.
세 궁전의 건축을 위하여 1415점의 조각과 1460개의 기둥 1138개의 용머리와
수많은 백옥장식들이 필요했다고 한다.
보화전의 옥좌
보좌 위쪽에 청 건륭제가
군왕으로서 천하의 최고 준칙을 세운다는 의미의 황건유극이라고 친히 쓴 현판이 걸려있다.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라고 불렸다.
보화전 뒤쪽 건청문 풍경
금 빛나는 단지들은 드무라고 화재를 대비해 물이나 소금을 넣어두는 곳이다.
건청문 암사자상
태화전의 태화문과 건청궁의 건청문 앞에는 사자 한 쌍이 양쪽에 서 있다.
동쪽의 숫사자는 권력과 천하 통일을, 왼발로 어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 서쪽의 암사자는 자손의 번성을 상징한다.
건청궁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 들이 사용하던 내정은 건청궁과 교태전, 곤녕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정은 이 3개의 건물들 주변에 대칭으로 많은 건물이 세워져 있어,
공적인 공간인 외조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내정의 중심 건물인 건청궁은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초기까지 황제의 침실이자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황제가 정무 이외에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곳이라고 한다.
명대에는 황제와 황후의 침궁으로 활용되어 황후도 같이 거주하였으며,
황제의 집안일로 많은 비극이 일어난 곳이다.
건청궁은 청나라 옹정 황제가 양심전에 새로운 침실을 마련하고
태화전에 이어 보조 직무실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오직 황제와 황후만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옹정 황제 이후부터 건청궁은 황제의 서재이자 고위 관리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고,
때론 외국 왕실의 손님을 맞는 곳이자 연회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건청궁 옥좌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부의 모습이 태화전과 비슷한데,
역시 금박 병풍과 옥좌를 비롯하여 천장과 기둥,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화려하다.
건청궁 옥좌 뒤의 정대광명이란 커다란 액자와 건물 입구에 걸려 있는 건청궁이란 현판은
청나라 순치 황제가 직접 쓴 것으로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쓰여 있다.
자금성의 현판들은 만주어가 같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황실의 주인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시이다.
화려한 건청궁 내부
액자에 쓰여 있는 ‘정대광명’은 바른 것을 밝힌다는 뜻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가 바른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려하게 장식된 자금성 문 장식
교태전
교태전은 건청궁과 곤녕궁사이에 있다. 교태의 의미는 천(하늘)과 지(땅)이 즉,
음양이 위아래로 합하여진다는 뜻으로 만물의 번성을 의미한다. 교태전은 황후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축하를 받던 곳이다. 천장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황제의 상징인 용과 황후의 상징인 봉황이 뒤엉켜 있다. 천장의 뜻은 황후는 권력에 뜻을 두지 말라는 의미이다.
교태전
건청궁 뒤쪽에 있는 교태전은 명나라 초기에 황후가 살던 곳이자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였다.
청대에는 황제의 옥쇄를 보관하는 장소이다.
옥좌 뒤에는 커다란 병풍과 건륭 황제가 강희 황제를 공경하여 직접 썼다는 무위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그리고 교태전 뒤쪽에는 황후가 사용했던 곤녕궁이 있다.
곤녕궁
후 삼궁중의 마지막 건물인 곤녕궁은 명대에는 황후의 침전이었으나, 청대에 와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의 강희, 동치, 광서 황제가 이 궁전에서 혼례식을 올렸다고 한다.
곤녕궁 동난각
황제, 황후의 신혼방으로 청나라의 강희, 동치, 광서 황제가 혼례의식을 거행하였다.
곤녕궁 신혼방에 있는 용침대의 머리위에는
일승월항 (황제는 떠오르는 태양이고 황후는 상현달이다)이 쓰인 편액이 걸려있다.
유리창문을 통해 찍은거라 화질이 많이 안 좋다.
구룡벽
황극문 외부에 위치하며 건륭 38년에 만들어진 거대한 유리로 된 조벽이다.
정면은 모두 270개의 유리조각을 이어 만들어졌으며,
9마리의 용으로 장식되어 있고 배경은 돌, 구름, 바다로 되어있다.
가운데 하얀색 용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각각 다른 포즈의 용이 양각되어 있는 벽이다.
맨 밑의 용의 배는 유리조각이 아니라 나무로 되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조각가가 조각을 하던 중 저 부분을 조각할 때 실수로 유리를 파손하게 되었는데,
위기에 처한 조각가가 나무로 대신 조각하여 위기를 피하려 했다 한다.
어화원
자금성의 중심축에 있으며, 곤녕궁의 뒤쪽에 있다.
자금성에서 후궁까지 지나가야 유일하게 나무와 돌이 있는 공원이 나타나는 어화원은
황제가 달이나 꽃을 감상하던 곳으로 동서 130m 남북 90m 크기인 자금성의 정원이다.
어화원은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어화원의 대표적인 곳은 흠안전과 퇴수산이다.
흠안전은 황제가 매년 음력 1월 1일 도교의 수신(물의 신) 현무대제에게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해 달라며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티베트 불교 사원과 만주족들의 오랜 동물 숭배 사상인
애니미즘 풍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퇴수산
어화원내에 엄청난 양의 태호석을 쌓아 인공산을 만들고 꼭대기에 정자(어경정)를 올려 놓은 곳.
어화원에서는 궁녀를 선발했으며 서태후도 17살에 궁녀로 선발됐고 함풍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비가 되었다.
아들이 동치황제가 되면서 25살에 황후가 되어 48년간 수렴청정했다.
어화원에 있는 어경정은 궁녀가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눈이 빠지게 바라다 보는 곳이다.
태호석은 여러개의 구멍이 나 있는 기묘한 형태와 색을 띠고 있으며,
중국에서 네번째로 큰 담수호인 장쑤성의 태호부근에서만 나서 이름 붙여진 희귀한 돌이다.
중국의 고급 정원에서는 필수적인 것으로,
태호 근처의 백성들은 이 태호석을 수집하여 세금 대신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인공 바위로 만든 퇴수산은
매년 음력 9월 9일에 황제가 죽은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다.
퇴수산의 어경정은 자금성 밖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자금성에 사는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곳이다.
천추전
원내의 중심 건물인 흠안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방과 양쪽에 20채의 정자와 누각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대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흠안전은 수기(水氣)를 다스리는 현무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물을 상징하므로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루 최대 8만명의 관객이 자금성을 방문한다고 한다.
자금성은 깊이 6m의 해자와 높이 11m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 서쪽을 서화문, 북쪽은 신무문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는 각루가 서 있다.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자금성 주변의 방어 수로 통자하(筒子河)
각루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사각 누대는 자금성이 궁궐과 성의 역할을 동시에 했던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각루는 9개 대들보, 18개 기둥, 72개 용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가 교묘하고 아름답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 놓았다.
자금성 외조와 내정
자료 출처: 1.네이버 지식백과
2.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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