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 만리장성

푸른 바다. 2009. 12. 16. 16:42

만리장성

 

북경여행 제 2일째인 12월 11일

날씨가 어떻게 될지 몰라 눈이 오기전에

만리장성을 보기 위해 호텔 조식후 팔달령 장성으로 향했다.

 

만리장성은 BC 220년경 진시황이 북쪽 흉노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쌓기 시작하여

이후 명대에 이르러 완성된 대성벽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사시설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거대한 만리장성은

황해와 가까운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으로 간쑤성 자위관이란 곳까지 약 3000km가 보존되어 있다.


 

 

 

만리장성의 개방하는 곳 중에 많이 찾는 곳은 팔달령·모전욕·사마대 장성등이 있는데,

우리는 북경 시내와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팔달령 장성으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갔다.

 

 

팔달령 장성은 만리장성 중 가장 빨리 관광지로 일반에 공개된 장소이다.

 현재의 옛날 건축 잔존물은 명대에 건설된 것이다.

산기슭에는 장성박물관이 있다.

 

 

만리장성은 그동안 우주에서도 육안으로 보이는 지구의 인공구조물로 알려져왔으며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이 내용이 실렸으나,

사람 눈의 식별력을 감안할 때 우주에서 만리장성을 육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산 굽이굽이 끝없이 장성이 놓여 있다.

그 옛날에 쌓았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며,

 인간의 위대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B.C. 7세기 전후의 춘추·전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원 지방에서 군웅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에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연, 조, 진은 북쪽 흉노족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B.C. 221년에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전국 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각지의 성벽을 하나로 통합했다.

 즉,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장성을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방벽이 만들었던 것이다.

 만리장성의 기초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B.C. 133년 이후, 흉노족의 침입이 다시 활발해지자 한 무제에 의해 장성의 복원과 확장이 이루어졌다.

 무제는 장성 각지에 봉화대 등의 연락망을 설치하게 하고, 방어체제를 한층 더 강화시켰다.
그후 계속적인 수리와 확장이 이루어진 만리장성은

 1368년 명의 태조 주원장이 현재의 북경 주변까지 새로운 장성을 건설하여 확장시켰으며,

 1567~1572년에는 융경제가 472개의 파수대를 설치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다.

출처: 고대유적 들녁

 

 

만리장성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교역시 발생하는 관세를 거둬들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유사시에는 방위의 필수 요소인 성벽으로 기능했으며, 병사들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봉수대는 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상황을 통보해주는 유력한 통신수단이었다.

 

 

진,한 시대에는

판과 판 사이에 흙을 집어넣어 위에서부터 굳게 하는 판축공법을 사용해서 대부분의 성벽을 축조했다.

그리고 명대에는 벽돌과 석탄을 사용해서 쌓기도 했다.

 

 

실로 2,000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쳐 완성된 만리장성은 그 대부분이 명대의 것으로

진시황제 이전에 건설된 장성은 현재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성벽 양옆에는 벽돌을 이용해서 2m 높이의 방패막을 쌓아 놓았는데,

이 방패막에는 총을 쏠 수 있는 구멍들이 군데군데 뚫려 있다.

그리고 성벽 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망루 역할을 하는 2층 짜리 성루가 세워져 있으며,

 성루 밑에는 수십 명의 병사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중국 사람들은 남아로 태어나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고서야 사내 대장부라 할 자격이 없다고 한단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마천은 진시황제가 쌓아올렸던 장성이

1만여 리(1만 리에 가까운)의 길이를 자랑했다고 기록해놓았다.

 

길이 가팔라 옆 손잡이를 잡고 내려와야 미끄러지지 않는다.

 

 

만리장성은 지역에 따라 그 규모가 일정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성벽의 높이는 평균 7.8미터이며, 폭은 5~10미터로 간선도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성벽 위로 말 5∼6마리, 또는 병사 10여명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수 있는 너비로,
자재 운반과 군대의 이동용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기에

시체를 매장하거나 치우지 않고 시체 위에다 성을 쌓았기에

 성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시체가 나왔다 하여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을 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남여가 하룻밤을 자고 나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란 말은

 

첫번째로 오랑캐들은 단 하루를 숙박해도 경계를 위해 성을 쌓는다고 한다.

그래서 하룻밤을 자도 만인(蠻人 : 미개한 종족, 오랑캐)은 장성을 쌓는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서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로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몇 십년에 걸쳐서 진행되는 상당히 큰 공사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뽑혀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기약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시대엔가 어떤 시골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남편이 장성을 쌓는 일에 뽑혀 갔다.  

그때 이웃에 사는 젊은이는 아름다운 부인에게 욕심을 품고 있었는데,  

‘나를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다. 나도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남편보다 당신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

 당신의 청을 들어주겠다.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남편과의 인연이 있지 않은가?

  내 마음을 전하는 글을 남편에게 보내서 지금까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

 그 편지를 남편에게 전해준 뒤, 남편의 답장을 받아 오라. 당신이 그 부탁을 들어주면  평생을 함께 하겠다.’

  그러면서 부인은 그 젊은이와 하룻밤 정을 나누었다.

그녀는 극진한 태도로 젊은이에게 사랑을 표현했고

젊은이는 자신을 향한 부인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부인과 맺어지기 위해 다음 날 편지를 가지고 떠났다.

 그는 장성을 쌓는 현장으로 가서, 장성의 공사책임자를 만났다.  

그 편지 속에는 ‘제 남편은 몸이 허약하고 병이 있으니 돌려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대신 건장한 이 남자를 보내니 남편과 바꾸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젊은이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장성의 공사 책임자는 그 편지를 읽어본 뒤, 그에게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젊은이는 그 부인과의 관계를 묻는 것인 줄 알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공사 책임자는 그 젊은이를  공사장으로 보낸 뒤 남편을 돌려보냈다. 

 부부는 다시 만났고, 그 젊은이는 평생을 장성 쌓기에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즉, 단 하룻밤만 맺은 인연이라도, 평생을 바쳐 만리장성을 쌓아야 할 만큼 큰 짐을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관계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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