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13릉
북경 여행 제 2일째인 12월 11일 금요일
엄청난 추위에 떨면서 만리장성을 관광한 후 명 13릉중 정릉으로 향했다.
정릉
베이징시 북서쪽 50㎞ 지점의 창평구 천수산 아래 약 40㎢의 분지에 있는
명 3대 영락제부터 마지막 숭정제까지 13명의 황제와 23명의 황후, 2명의 태자, 30여 명의 비빈 등의 능묘 군으로
현재 공개된 지역은 13릉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명 제3대 영락제의 능인 장릉과
제13대 만력제 주익균과 효단, 효정 두 황후가 합장된 능인 정릉이다.
만력제는 10세 때에 제위에 올라 22살 때부터 자기의 묘를 만들기 시작해
6년이라는 세월과 국가재정의 2년분에 해당하는 예산을 들여 만들었으며,
지하궁전 5실로 축조되어 있다. (출처: 중국시사문화사전)
명십삼릉은 난징의 명효릉과 함께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최초로 정릉을 발견했다는 장소
지하궁전을 발굴하기 위해 첫번째 시도했던 곳으로
이 곳으로 들어가다 실패해서 다시 반대쪽으로 들어가서 성공 했다고 한다.
도굴꾼들이 판 구멍
중국의 무덤은 나무든 풀이든 자라는대로 두어 자연과 함께 되도록 했는데,
그래서 이 산 전체가 지하궁전 만력제의 무덤이다.
명나라에는 총 16명의 황제가 있으나, 베이징의 명십삼릉에는 13개의 능묘만 있다.
명조 개국 황제 주원장은 도읍을 난징에 건설했는데, 그의 사후에 난징의 종산에 있는 명효릉에 장사를 치렀다.
주원장의 장손자인 건문제 주윤문은 연왕 주체에게 정난지변을 통해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에 능묘가 없다.
대종 경태제 주기옥도 황제였으나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경태릉으로 불렸으며 현재 베이징 근처에 묻혀 있다.(출처: 위키백과)
정릉의 능문을 지나서
계단 중간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과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 조각이 있다.
황제가 황후보다 위기 때문에 용이 봉황보다 위에 있지만,
딱 한명 서태후 능에는 봉황이 더 위에 있다고 한다.
정릉 조감도
발굴된 정릉의 지하궁전은 정·중·후 및 좌우의 5개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에 있지만, 기둥이 없는 아치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하궁전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옷과 장신구, 각종 진귀한 문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유물들은 지상의 박물관에 현재 전시중이다.
지하궁전
정릉은 중국인들의 순수 기술로 이루어진 최초의 황릉 발굴 유적지이다.
중앙 석실에 있는 3개의 한백옥 보좌
지하궁전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만력제 보좌와 장명등,향로들
청화백자 도자기는 기름을 담아 둔 장명등으로
이 곳에 불을 켜두어 무덤을 밀봉한 뒤에도 이 불이 오랫동안 타게하였다.
이는 불이 산소를 쓰면서 타므로,
자연스럽게 진공상태를 유지하게 하여 오랫동안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란다.
정릉의 지하궁전에서는
관곽외에 금, 은, 진주, 보석, 옥기, 보관, 의류등 3,000여점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지상의 정릉박물관에 전시되어
명나라 공예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쓰인다.
13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은 10살에 왕위에 올라 20세때부터 자기 사후의 무덤을 준비했으며,
6년간의 공사뒤 완공하여 대신들을 초청해 이 곳에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명 만력제와 2명의 황후 관과 금은보화를 담아 놓았던 함으로 복제품이다.
3개의 관중 가운데 제일 큰 관이 만력제의 관이고
왼쪽 관은 효정현황후 왕씨의 관이고, 오른쪽은 효단현황후 왕씨의 관이다.
정릉 명루가 보인다.
지하궁전에서 올라와 정릉 명루로 이동
신종 현황제비
대명신종현황제지릉이라고 씌여져 있어 이 곳이 명나라 만력제의 능임을 말해준다.
황릉 발굴단이 이 비석을 따라 직선으로 가서 정릉의 표지석을 발견하였고,
그 아래의 입구를 파고 내려가 지하궁전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비석 위에 천장이 있어 비바람을 막아 주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비석 색깔이 약간 붉은 색을 띄는 이유는
문화혁명때 홍위병들이 빨간 페인트를 칠했는데,
그 흔적이 세월이 지나다보니 붉은색 돌같은 색감을 내게 되었다고.
정릉 명루의 벽돌
돌의 사각형 모양은 옛날 무덤을 조성할 때 포장돌의 생산자를 표시하는 문양이다.
이 문양을 보고 여러군데서 온 돌의 출처를 파악해 작업이 더디거나 제대로 안되었을 경우 3대를 멸했다 한다.
정릉의 영성문
사후 세상에서 현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해 주는 문이며,
능으로 잡귀가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활을 하는 문이다.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발을 세번 구르고 남자는 왼발, 여자는 오른발로 문 턱을 지나야
자기 영혼을 도로 데리고 나간다 한다.
문 밖은 이승의 세계이고 문 안은 지하궁전 즉 저승의 세계라 하는데...
명 만력제
명 제13대 황제(재위 1573~1620)로 명 황제 중 재위기간이 48년으로 가장 길었다.
이름 주익균. 묘호 신종. 시호 현황제. 연호 만력.
융경제의 셋째 아들로 10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선제의 부탁에 따라 대학사 장거정을 등용하여
제정의 개혁을 단행하여 기강을 숙정하고 전국적으로 토지의 면적을 측정하여 일조편법의 시행에 합리적인 기초를 닦았다.
외정으로는 몽고의 제 부족을 회유하고, 계주ㆍ요동 방면의 수비를 견고히 하였으나
1582년 장거정이 죽자 정치는 방만에 빠지고, 3자 상순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태자 책봉 문제가 시끄러웠으며,
여기에 편승한 환관들의 농락으로 동림파와 비동림파의 당쟁이 발생하였다.
또한 30년간 여러가지 구실을 대며, 업무를 거부한 태정으로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다.
임진왜란 때의 조선 출병 등 만력의 3대정으로 국력은 날로 쇠진하고,
이에 따른 가혹한 징세로 민심은 점점 명으로부터 떠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처: 중국시사문화사전)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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