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달레성
북유럽여행 제 8일째인 오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자라인 탈린크를 타고 라트비아 리가에 도착했다.
이제 드디어 발틱 3국 관광이 시작된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우선 룬달레성을 관광하고 난 뒤 리투아니아로 넘어가
트라카이성을 조망하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서 늦은 시간까지 관광한뒤
숙박하게 된다.
라트비아 리가항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고 있다.
차창 밖의 리가 모습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오늘 리투아니아 관광후
내일 다시 와서 관광하게 된다.
룬달레성으로 가기 위해 라트비아 농촌을 지나고 있다.
오늘은 라트비아 룬달레성,
리투아니아 트라카이성,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를 관광한 뒤
빌니우스에서 하룻밤 여장을 푼다.
그리고 내일은 다시 라트비아로 올라와 수도 리가를 보고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숙박하게 된다.
라트비아 시골 모습
유럽 신랑 신부들은
웨딩촬영을 유명한 관광지에서 많이 한다.
룬달레성 가는 길에 만난 신랑신부와 그 친구들
사진을 찍자
기꺼이 모두들 다시 포즈를 잡아 주었다.
신랑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주변의 사과 과수원
룬달레성 마로니에 가로수길
항상 스치듯 지나가는 벤치들을 보면,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앉아 있고 싶다.
룬달레성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건축한 이태리 바로크의 거장,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1730년대에 쿠제메의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의 여름궁전으로 지은 라트비아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라트비아의 베르사이유 라고 불릴정도로 화려한 궁전으로 당시 라트비아 귀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공작이 실세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방치 상태로 있다가
1760년대에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돌아와 실내장식을 마무리 하였다.
황금의 방, 무도회장인 흰방등 138개의 방이 있으며 내부의 벽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비론 공작의 상징인 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화려한 문
룬달레 성은
1795년 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에 흡수되자
예카데리나 2세가 자신의 연인인 주보프공에게 선물로 하사 하였다.
라트비아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19년 심하게 손상되고
1920년에는 일부가 학교로 이용 되었다.
1933년 라트비아 국립역사박물관이 인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곡물창고가 들어서고 공작의 식당이었던 곳을
학교 체육관으로 사용하는 등 험하게 다루어져 오다가
1972년에 들어서야 룬달레궁 박물관이 들어섰다.
룬달레 궁전은 쿠를란드라고 하는
옛날에 사라진 제후국인 비론 대공작의 여름별장으로 건설된 궁전이다.
궁전 복도
궁전에는 이태리의 거장 프란체스코 마르티니 등이 참여해 만든
황금의 방, 하얀방 등을 포함한 138개의 화려한 방이 있다.
룬달레성은 발틱의 베르사이유라 불린다.
위의 도자기로 된 타일을 붙인것은 난방 시설인 페치카이다.
실제 불을 지피는 작업은 손님들 있는데선 할수가 없으므로
뒷쪽에 문을 내어 하인들이 왕래하며 불을 지펴 온도를 높였다.
황금의 방
황금의 방은 대관식을 위해서 설계된 방으로
사실 이곳에서 대관식이 열린 것은 몇회 되지 않는다.
천장화는 주권상징을 의미한다.
창문
금장으로 화려하다.
모서리 금장 장식
벽면 금장 장식
창문의 금장 장식
황금의 방 옆 도자기 방
중국도자기로 그당시엔 굉장히 고가라 부의 과시용으로
수집해 전시해 놓았다.
갤러리
다른 색으로 3겹이나 덧 칠해져 있는 그림들을 벗겨내고 예전 그림을 살려 복원했다.
원래 이곳은 3개의 방이었는데 벽을 허물고 복도로 만들었다.
세라믹으로 겉모양이 장식된 난로는 청색으로 마감 되어있다.
연회장인 하얀방
모든 벽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다.
방이 흰색으로 칠해진 이유는
사람이 제일 돋보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궁전 계단참에서 다들 신어야 했던 파란 비닐 덧신
관리를 위해선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천장에는 황새의 조각이 되어 있는데,
새집 부분이 실제 나무를 붙여서 만든것이다.
하얀방 옆에도 도자기방이 있다.
각 방들 사이에는 대기실들이 있다
비론의 궁전이었던 룬달레궁은
세월이 지나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넘어가게 되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 궁전을 자신이 사랑한 주보프에게 선물로 주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주보프도 사랑했지만 그 동생도 사랑했다고 한다.
가운데 그림이 예카테리나 대제
왼쪽이 주보프, 오른쪽이 동생
초록방
초록방의 벽면들
초록방의 천장
장미의 방
장미를 만들어 붙인 장미의 방 벽장식
장미의 방 천장화들
블루홀
공작의 서재
공작 서재의 벽난로
공작의 침실.
이 궁전의 주인은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 한가운데 침실을 만들었다.
이는 바로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본딴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왕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맞추어 특별한 행사까지 열렸다고 한다.
좌우측의 청색 타일을 바른 벽난로는
뒤쪽에 난 작은 문으로 하인들이 드나 들며 불을 지핀다.
침대 사이즈는 별로 크지가 않다.
공작 침실의 천장
공작 침실의 초상화들
공작침실의 침대 맞은편 창문
거울에 뒷 모습이 비친이는 현지 가이드다.ㅋ
침대에서 일어나 커텐을 젖히면 바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 때문에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교되기도 한다.
공작 침실에서 커튼을 젖히면 나타나는 정원 풍경
공작의 옷방
변기인데 망뚜껑을 열고 볼 일을...
공작의 세면대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공작부인의 침실
공작부인 서재
공작부인 화장실
공작부인 화장실에 있는 변기와 물통(비데)
화려한 화장실 천장
리셉션홀
리셉션홀의 그림들
리셉션홀 맞은편 벽
리셉션홀 창문가
이탈리안 살롱
이탈리안 살롱
이탈리안 살롱 벽에 로마의 베드로 성당 그림이 걸려있다.
이탈리안 살롱의 그림들
룬달레 궁전의 식당
식당 천장
테이블 셋팅
식당의 조각상들
12대 공작의 초상화와 당구장
비론공작의 아들인 피터 요한네스 본 비론이 12대 대공작으로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쿠를란드 공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남자만이 대공작으로 즉위할 수 있는 쿠를란드의 전통 때문에, 피터 본 비론은 세 명이나 부인을 갈아치웠다.
이전 두 명의 부인이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세 번째 부인 역시 딸만 넷을 낳고 말았다.
세번째 공작부인과 공주들
오른쪽이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
1730년부터 10년간 제정러시아를 지배한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여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비론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며,
나중에는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가 후계자인 이반 안토노비치가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총애하는 비론을 임명하여 제정 러시아의 섭정황제직까지 맡게 되었다.
룬달레성 사진촬영 허가 스티커
내부 입장비와 별도로 내부 사진을 찍을때에는
사진촬영 허가 스티커를 2유로에 구입해서 가슴에 달고 다녀야 한다.
방 구석에 할머니들이 앉아 감시하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 놓인 건립 초기의 문장
지하에는 발굴된 건물 잔해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한때는 벽면을 장식했던 가문의 문장
철로 만든 간판으로 무엇을 하는 집인지 알렸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 중이다.
안나 이바노브나 (1693년 1월 28일 ~ 1740년 10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의 여제(재위 1730년- 1740년)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녀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로마노프 왕조 4번째 군주로 모스크바에서 즉위하였다.
추밀원을 해산시킨 대신에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하였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하여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그녀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하였다.
안나 이바노브나는 과도한 세금으로 민심을 잃었고, 재위기간 10년이 지난 1740년에 사망했다.
[출처:위키백과]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Ernst Johann von BIron)
비론은 쿠를란드 공국의 7번째 군주로써 (20년 후 다시 11번째 대공작으로 즉위한다)
바로 자신의 여름궁전으로 삼기 위해 룬달레 성을 건설한 사람이다.
약 2백년의 짧은 역사 동안 모두 12명의 군주가 이곳을 다스렸고,
비론 가문은 쿠를란드 공국의 번성과 쇠락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비론 가문은 원래 그렇게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의 천재적인 정치력으로 나중에는 엄청난 부를 긁어모았다.
발트독일인으로서 현재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영토에 소속되어있는,
과거 프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쾨니스버그에서 수학했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그다지 성실한 학생이 아니어서 중간에 퇴학 조치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아주 매력적이고 사교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730년부터 10년간 제정 러시아를 지배한 안나 이바노브나여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여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비론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 룬달레 궁전은 그 비론의 힘이 최고에 올랐던 1736년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에는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의 겨울궁전을 설계인 이태리계 건축가인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참여했고,
그 외 미하일 그라프, 주키니 등 유럽의 유명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거들었다.
유럽 최고의 천재 건축가 중 하나인 라스트렐리는 건축이 시작된 지 4년만에
룬달레 궁전을 거의 완공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1740년 비론의 일가족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면서 궁전 건축은 중단되고 거의 버려진 상태에 이르렀다.
그 후 약 20년 후 비론이 유형에서 돌아온 후 11대 대공작이 되어 다시 재건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상태가 심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궁전 내부의 양식이 당시로서는 한물간 바로크 양식이었던 것.
비론은 다시 엄청난 돈을 퍼부어 궁전 내부를 거의 모두 로코코 양식으로 개조하였고,
그 당시 개조된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들인 피터 요한네스 본 비론이 12대 대공작으로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쿠를란드 공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남자만이 대공작으로 즉위할 수 있는 쿠를란드의 전통 때문에, 피터 본 비론은 세 명이나 부인을 갈아치웠다.
이전 두 명의 부인이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세 번째 부인 역시 딸만 넷을 낳고 말았다.
그 비운의 부인과 딸들은 룬달레 성 내부 당구장에 초상화 속에 모습이 남아있다.
1795년 쿠를란드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이 제정 러시아에 편입되자
룬달레 궁전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소유로 전환되었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그 궁전을 자기의 정부였던 주보프에게 선물로 바쳤다.
주보프는 일찍 생을 달리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동생 역시 예카테리나 대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니
두 형제를 동시에 사랑했던 예카테리나는 주보프 형제들을 위해서 궁전의 일부를 친히 개조까지 해주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주보프는 아내도 있었는데,
그 궁전의 공식 소유자였던 남편이 죽자 룬달레 성은 바로 그 아내의 소유권이 되었고,
그는 곧바로 러시아 왕가인 슈발로프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 결과 슈발로프 가문은 1차 대전 발발전까지 룬달레 궁전의 실질적인 주인노릇을 할 수 있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룬달레의 주인은 부엌에 있는 숟가락까지 모두 바리바리 싸들고 성을 떠났다.
그래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로 소련 시대를 맞았다.
그 기간 동안 주인 없는 성은 학교, 관공서, 심지어 창고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심지어 룬달레 성의 응접실은 농구연습을 하는 체육관이 되기도 했다.
1972년이 되어서야 이 룬달레 궁전의 가치가 인정되어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에게 문을 개방하게 된 것이다.
복원 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2014년 쯤 모든 복원 사업이 끝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출처: 발트한국인마당 네이버카페]
쿠를란드(Courland) 공국
현재 이 공국은 라트비아의 일부가 되었으나, 1561년부터 1795년까지 라트비아 서부에 존재하던 제후국이었다.
제후국이라 함은 완전한 독립을 구가하지는 못하고,
남쪽에 있는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에 조공을 바치는 준 독립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도는 쿠를란드 동쪽에 위치해 있던 미타우란 도시로 현재는 옐가바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 나라는 사라진지 옛날이며,
쿠를란드의 지배층은 중세시절부터 라트비아에 진출해있던 발트독일인들이었으므로
독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쿠를란드 지역언어도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기록 외에는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작은 면적과 짧은 역사에 못지 않게, 쿠를란드 공국은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에까지 진출해서
식민지를 건설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상당히 번성한 국가였다.
쿠를란드가 이토록 번성하게 된 데에는 룬달레 성의 주인인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대공작의 공이 크다.
[출처: 발트한국인마당 네이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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