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폴란드]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푸른 바다. 2014. 8. 14. 13:40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여행 제 8일째 4월 29일 화요일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면서

여학생때 읽었던 안네의 일기와 영화 피아니스트,

그리고 흑백영화로 봤던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났다.

 다락방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자유를 갈망하던 안네를 같은 소녀로서

안타까워 했었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다

아카데미에서 상을 7개나 받은 영화라 해서 보았었는데

 보고난 뒤 쉰들러가 유대인을 한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던 감동을 느꼈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는

폭격으로 무너진 폐허 속에 남아 있던 피아노를 치던 장면을 비롯해서

독일군 장교가 먹을 것을 건네 주던 장면 등

영화의 몇 몇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홀로코스트의 어원은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들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 학살하는 행위를 통털어 이야기 하지만,

고유명사로 쓸때는 2차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의 학살을 의미한다.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오시비엥침시의

 독일식 이름이 아우슈비츠이다.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잘 알고 있는 수용소가 있는 곳이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와 안네의 언니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베르젠 수용소로 옮겨진 후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고,

안네의 어머니는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아우슈비츠는

1939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오시비엥침이라는 폴란드 지역에 독일식 이름을 붙인 것으로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는

 애초 폴란드인 학살을 위한 장소로 이용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치에 의해 유럽 각국에서

폴란드 정치인,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 체코인, 슬로바키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독일인, 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보내 수용하였으며

 급기야 1942년에는 2만 8천명의 수감자들이 동시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는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오시비엥침 마을의 전경,

이 마을을 지나는 소규모 하천이

한때는 수용소 유대인 희생자들의 유골분으로 인해 상당기간

 성분이 기준 이상으로 다량 검출되었다고 한다.​

 

 

폴란드 정부는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오시비엥침 제1수용소와

그곳에서 3㎞가량 떨어져 있는 비르케나우 제2수용소는

 현재까지 특별히 보존되어 관람이 가능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대기 중이다.

 

예쁜 쌍둥이 소녀들이 보인다.

 

폴란드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홀로코스트 현장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관람객들

 

폴란드 정부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지금은 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으로 명명했다.

 

 

오시비엥침 박물관은

하루 관람객이 평균 약 1만명이 된다고 하며,

 지금까지 30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2013년에는 방문객 1위가 독일인,

 4위가 이스라엘, 7위가 한국인, 일본인은 14위였다고 한다.

 

북 스토어

 

입구에서 입장 시간을 기다리다

잠시 북 스토어에 들어가 책을 구경 했다.

 

 

책과 엽서들을 봤다.

 

나치 친위대를 뜻하는 SS 책이 보인다.

 

나치스친위대

   나치스 무장조직으로 독일SS라고도 한다.

  1925년 4월 아돌프 히틀러의 소규모 개인 경호대로 창설했다. 

  독일과 유럽을 정복하려던 히틀러의 계획을 실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29년부터 1945년 해체될 까지 헤인리치 힘러가 책임자였다.

 광적인 인종주의자인 힘러는 신체가 건강한 순수 아리아인 혈통만 대원으로 뽑았다.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도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었다.

대원들독특한 휘장을 단 검은 제복을 입었다.

 처음에는 300명 정도였다가 1933년 나치 집권 당시에는 5만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늘어났다.

히틀러가 SS도움으로 1934 나치스돌격대(SA)를 숙청해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만든

히틀러에 복종하는 독립집단 되었다.

1934년에서 1936년까지 힘러는 전 독일 경찰력을 장악하고 조직을 통합·정리했다.

1939년에는원이 25만 명으로 늘어났고 일반SS와 무장SS로 분리되었다

 SS 대원들은 다른 인종을 증오하고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교육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정치범, 집시, 유대인, 폴란드 지도자,

 공산당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

독일이 패배한 후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했다.

 

북 스토어에서 본 엽서 속의 비르케나우 수용소 앞의 철도

 

 비르케나우 제 2수용소에는

기찻길이 수용소 앞까지 연결되어 있다.

 

입구 문을 통과해 들어왔다.

 

아우슈비츠 제1, 제2 수용소는 현재까지 보존이 돼 있어

다시는 되풀이 돼서는 안 될 비극의 역사 현장으로 후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유대인 학교는 초.중.고등학교 교육기간 중 의무적으로 이곳을 방문,

조상들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폴란드 정부도 자국 청소년들에게

아우슈비츠를 의무적으로 방문토록 해 슬픈 역사를 둘러보게 하고 있다.

 

제1수용소

 

제1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는데

이 수용소는 급하게 퇴각한 독일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해 당시의 상황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하면 자유롭게 된다는 입구의 독일어 문구

 

 정문을 통과해 걸어가면 제1수용소 문 위에

일하면 자유로와진다는

기만적인 독일어 문구도 옛날 그대로 붙어 있다.

이 문을 통해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했다.

 

 

입구 문 위에

'ARBEIT MACHT FREE'라는 독일어 문구는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뜻으로 자세히 보면

'B'라는 글씨의 아래 위가 대칭이 아니고 밑 부분이 조금 작은데,

 이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을 조심스럽게 표현한 용기 있는 행동이라 했다. 

 

 

세계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태인 수용자들을 처음으로

독가스로 학살시킨 것을 시작으로

약150만명이 목숨을 잃은 홀로코스트 역사의 현장이다. 

그중 유태인이 대부분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고압 전류 철조망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명이며,

이중 7만 5천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음산하게 줄지어 진 막사들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들이 보였다.

 

 

1940년 봄,

나치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히물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 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붉은 벽돌 건물 28개 동이 배열되어 있다.

 

원래는 폴란드군의 병영으로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이 점령한 후

 예전 폴란드군의 벽돌 막사에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추가 되었다고 한다.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인 이곳에는

가스실, 철벽, 군영, 고문실 등이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가 28동으로 되어 있는 빨간 벽돌 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티트론 가스실과 시체소각로와 2만 명을 총살한 벽, 환기가 안되는 방,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의 구두, 모자, 의복, 식기,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 당시의 끔찍한 흔적들이 생생히 남아 있다.

   

4 전시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에스파냐 출생의

미국 철학자 겸 시인 이자 평론가인 조지 산타야나의 글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4 전시실 정문에 쓰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아우슈비치 강제 수용소를

 폴란드의 오시비엥침 지역으로 선택한 이유는

위 사진과 같이 이 지역이 유럽의 중심부이며,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나치 정권이 유럽 각지에 있는 유태인들을

 효율적으로 이송하기 쉬운 지리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시관의 정문을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당시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골분을 담아둔 추모비가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사망자 설명서

 

독일어 위령비문에 써 있다고 한다.

           '이곳은 인류에게 향한 영원한 절망과 경고의 절규일 것이다.

 이곳에서 나치는 150만의  남자, 여자, 아이들을 학살했다.

그들의 다수는 유럽 각지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복도 벽에 붙어 있던 사진

 

 

전시실 내부

 

전시되어 있는 서류들

 

 

 

폴란드 현지 한국인 가이드가

당시의 잔혹하고 참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총괄적인 설명을 하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독일군이 찍은

전시된 사진 자료들을  중심으로 상황을 설명 했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을 위해 광분하였던 H.힘러의 명령 아래

 나치스 친위대(SS)가 이곳첫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그 뒤 A.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졌고,

 1945년 1월까지 나치스는 이곳에서 150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70-80%의 사람들이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150만명이 넘는 유대인과 기타 수용자들이 이곳에서 살해 당했다.

 

 

아우슈비츠에

 감금 되었던 사람들은 굶주림, 중노동, 의학 생체실험, 

사형집행 등 온갖 만행들로 희생되었다.

 

 

유대인을 표시하는 다윗의 별을 달고 있다.

 

집시들

 

 2만1천명이나 되는

 집시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유럽 최대의 학살지인 이 수용소로 끌려온 유대인 대부분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명부에 등록조차 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해

현재까지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옛 소련군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약 400만명이고

이 중에 25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발표했으나

1995년 뉴스위크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해

110만~150만명으로 추산했다.

 

 신부님들이 끌려 오는 사진으로 이 분들 중 한 분이 콜베 신부다.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동료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에 억류됐다.

 그 중 콜베 신부는 유대인을 도왔다는 죄가 더해져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1년 7월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수용소에는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수감자 10명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는 형벌이 가해졌다.

수용소장은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갈 10명을 뽑았는데

 한 사람이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죽을 수 없다”며 울부짖었고,

이에 콜베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콜베 신부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 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기적적으로 2주를 버티자

독일군은 독약을 주사해 콜베 신부의 목숨을 끊었다. 

훗날 그는 순교자로 기록되고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악명 높았던 나치 독일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가 쌍둥이 부검실험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번 방

 

 

아우슈비츠는 

유럽의 철도교통 중심지여서 수용소로 적격이었다.

 

 

 우슈비츠 제 1 수용소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다.

 아우슈비츠보다 약 20배나 큰 53만평 땅에 300동 이상의 수용소 건물이 있고,

 대부분의 학살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수용소로 기차가 들어오는 곳을 죽음의 문이라 불렸다.

 

제2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는

바로 제2수용소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이다.

이곳에는 모두 4개의 가스실을 갖춘 절멸수용소였다.

전쟁이 끝날무렵 증거인멸을 위해 모두 폭파되고 현재는  45동의 벽돌건물과
22동의 목조건물만 남아 있어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제3수용소 아우슈비츠-모노비츠

 

1942년에 세워진 제3수용소는

아우슈비츠-모노비츠로 합성고무를 생산하던 파르벤 공장을 비롯한

 생산시설이 위치한 강제노역수용소였다.

 여기 외곽에는 40여개의 작은 수용소가 만들어져

탄광, 철광소, 공장 노동에 필요한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오시비엥침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비르케나우 수용소 안으로는 철길이 들어온다.

유럽 각지에서 강제로 체포당한 사람들이 화물열차에 실려 짐처럼 이곳으로 보내졌다. 

철길을 따라 이곳에 보내진 수십만명의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혹은 추위와 배고픔,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수용소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인간을 학살하기 위한 곳이었다.

 

 

화물열차 한 칸에 백명도 넘는 사람들이

 앉지도 먹지도 못한 채 화물 짐짝처럼 며칠을 달려

 오시비엥침역까지 실려왔던 사람들은 먼저 독일군들이

남자와 여자,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일할 수 없는 아이와 여자, 노인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하였다.

 

소각장이 아닌 야외에서 시신을 태우고 있다.

 

아우슈비치 수용소의 모형

 

1945년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대로 보존 되어온 아우슈비치 수용소의 모형,

이곳에는 죽음의 블록, 제1화장터, 가스실, 총살의 벽,

수감자 수송을 위한 철도, 수감동, 고전압 전류를 흘렸던 철조망, 정문 등

잔혹한 나치 범죄의 증거가 되고 있다.

 

 

 

 

전시실에서 밖을 내다 보았다.

 

사이클론 비(Cyklon B) 독약

 

유대인 살인에 사용된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독약이 들어 있는 통,
이 독약은 1942년부터 1943년까지 2만Kg의 사이클론 비가 사용되었는데, 
이 독약 한통으로 400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독가스로 사용된 사이클론-B는

 원래 수용소에 들끓는 이를 잡기 위한 살충제였다.

사이클론 비를 이용한 최초의 집단 학살은

1941년 9월 600명의 소련군 포로와 입원 중이던 폴란드 정치범 환자

250명에게 처음 사용 했다고 한다.

 

사용한 사이클론 비의 빈 깡통들

 

수용소 창고에는

이 독가스 빈통이 산더미처럼 발견됐는데 그 중에는

내용물이 들어있는 것도 있었다.

사이클론 비의 제조사인 훽스트사는 전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가담 전과 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실례로 훽스트사는 1990년대 태아를 낙태시키는 약을 제조했다가

'나치독일시절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더니, 제는 태아를 살해할 생각이냐'고

거센 비판을 받았다. 

 

 

 

수감자들이 처음 수용소에 들어올때 관리국장은

 "너희들에게 출구는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른 전시관으로 이동 중이다.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 방에는
 머리카락을
산더미처럼 전시해 놓았는데,

그곳에 있는 머리카락의 색이 똑같이 희뿌옇게 보인 것은

 독가스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약품 때문이란다.

그리고 7톤이나 발견된 머리카락으로는 메트리스와 카펫을 짰는데

실제로 머리카락으로 짠 천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학살당한 유대인들에게서

 뺏은 물건의 대부분은 독일로 보내졌으나

일부 창고에서 신발과 안경, 빗, 의복, 머리카락 등이 산더미처럼

쌓인채 발견됐다.

발견된 유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안경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화장시킨 사체의 재는 비료로 사용되거나 하천.연못 등에 버려졌다.

 

의 수족

 

식기들

 

주방용품

 

가방들

 

아이들 옷과 인형

 

이 곳을 보는 도중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꼈다.

 

신발들

 

이 신발들을 보존하기 위해

1년에 한번 일일이 하나하나 닦는다고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 매년 엄청난 인원의 독일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온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행한 나치의 만행은 독일 교과서에

사실대로 기록되어 교육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이웃인

일본이 좀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 신발을 신었을 어여쁜 유대 아가씨가 연상되어

정말 마음이 아팠다.

 

 

 

구두약

 

구두약까지 챙겨온 그들을 생각하니...

 

 

 이곳을 둘러보노라면,

그 슬픔을 공유하는 데에

 민족과 나라의 구별이 따로 없었다.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명으로 쓰고 있다.

 

 

유대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사진은 비상용 종탑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수용소 주변은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책으로 둘러 싸여 있다.

 

수용소 감시탑

 

기관총을 설치한 감시탑 이다.

 

곳곳에 설치된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기 철조망

 

2중으로 ​둘러 쌓인 고압 전기 철조망

 

아우슈비츠의

삼엄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고압 이중 철조망.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들

 

 

 아우슈비츠 제 1수용소의

제 10블록과 11블록 사이의 공간은

죽음의 블록이라 불리며 양쪽이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

         이곳에서 나치 SS대원들이 수천명의 수감자들을 총살했는데

  주로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이었다.

 

독일군 막사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곳에서는 술 마시고 파티하며 요란하게 웃고 떠들었다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교수대

 

화장터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 있으며,

 근처에는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사형을 집행한 교수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1천500명을 죽이는 데 6-7kg의 사이클론 비가 필요했는데

1942-1943년 아우슈비츠에서만 2만kg이 사용됐다고 증언했다.

 

 

하인리히 힘러

나치스에 입당, 1929년부터 1945년까지

SS가 해체될 때까지 책임자였다.

 그는 친위대장이 되어 강제수용소도 친위대의 감독 하에 두어

대학살과 탄압의 원흉이 되었고

 제2차대전 중 특히 유대인수용소의 운영과 유대인 절멸에 광분하였다.

 전후 연합군에게 체포되자 자살하였다.  

 

 

1941년 9월 3일 독가스 처형이 시작됐다.

독가스는 자동차 배기가스보다 대량학살에 용이했다.

 독가스로 사용된 사이클론-B는 원래 수용소에 들끓는 이를 잡기 위한 살충제였다.

처음에는 주로 소련군 포로와 공산주의자들이 독가스 처형 대상이었다.
1942년 중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막이 올랐다.

나치는 1000만 명이 넘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몰살시키기로 했다.

 유럽 전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밀려들었다.

많을 때는 하루 9000명의 유대인이 독가스실로 끌려갔다.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간 사람은 150만명.

홀로코스트 때 죽은 유대인 600만 명 중 4분의 1이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군은 7000kg이 넘는 머리카락을 찾아냈다.

 독가스실로 끌려간 죄수들로부터 잘라낸 것이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스 사형실과 시체 소각장의 구조를 표시하는 설명 판넬.

 

 제1수용소에 남아 있는 가스실과 소각로이다.

 

 샤워를 한다는 SS대원들의 말에 속아 

가스실에 한꺼번에 옷을 벗고 들어가면 SS위생병들은 문을 닫고

천장의 구멍을 통해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독가스를 투입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20분 사이에 질식사 했다.

소각장에 넣기 전 유대인들로 구성된 특공대들이 금니를 빼내고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곳을 관람하면서

 가이드 외에는 다 같이 말을 잃었다.

인간의 잔혹함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애감이 들고

억울하게 죽어 간 영혼들의 명복을 비느라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억울한 영혼들을 추모하기 위한 꽃다발이 놓여 있다.

 

아비규환의 가스실에는

 절규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벽면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죽어 갔는데,

 지금도 이 가스실에는 그때의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스실 바로 옆에는 시체 소각로가 있다. 

 

가스실 옆에는 시체를 소각하던 소각로가 놓여 있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검은 그을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가늠하게 한다.

소각로가 모자라

심지어는 야외에 시체를 쌓아 놓고 태우기까지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Km떨어진

제2수용소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는

  2000명씩 들어가는 독 가스실 4개로 15분이면 8,000명을 질식사 시키고

30분이면 전부 소각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패전과 함께 폭파시켰다고 한다.

 

소각로의 굴뚝

 

이런 끔찍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번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고즈넉한 이 일대에는

수백만 유대인들의 목숨과 눈물이 스며 있다.

 

 

안네의 일기

본명은 안네리엘 마리에 프랑크(1929년 6월 12일~1945년 3월)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가정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고,

 나치스가 유태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933년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941년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유태인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자,

1942년 프랑크 가족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식료품 공장 창고와 뒷방 사무실에서

 다른 유태인 가족 4명과 은신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밀고함으로써 1944년 8월 4일 발각되어 독일의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1945년 3월 하노버 근처에 있는 베르겐베르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가

언니 마고트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안네 프랑크는 아버지로부터 13세의 생일 축하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사춘기 소녀의 순수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잘 표현하고 있는 

동화 아기곰 브라리를 2년 동안 숨어 지내면서 썼다.

그밖에 이 기간 동안 유명한 안네의 일기와 단편소설, 수필 등을 썼다 

안네 프랑크의 사망 후 안네의 동화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버지가 발견하여,

1947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이후 안네의 일기와 함께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모두들 침묵에 쌓인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버스를 탔다.

아쉽게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된 크라쿠프 구시가지를 보지 못했지만

이로서 폴란드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천년 세월을 간직한 백탑의 도시

프라하로 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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