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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 카를교, 카를 4세동상, 성 프란시스코 성당, 클레멘티눔,프라하성

푸른 바다. 2014. 8. 23. 21:32

프라하

 

 

 

 

 

카를교, 카를 4세동상, 성 프란시스코 성당, 클레멘티눔,프라하성 

 

 

여행 제 8일째 4월 29일 화요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의 잔혹함의 끝을 보고 난 뒤,

체코로 들어올 때까지 한참을 창 밖을 보며 우울하게 보내다

  올로모우츠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라하에 다가갈수록

백탑의 도시에 대한 기대로 기분이 나아졌다.

거기다 오랫동안 오고 싶어 했 프라하인지라

평상심을 찿으려고 애도 썼다.

 

 

 

한 해 여행자 1억명이 다녀간다는

중부 유럽의 고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로

체코 최대의 경제, 정치, 문화, 역사, 산업의 중심도시로

 인구 약 200만명의 체코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대통령궁, 정부기관, 의회와 수많은 국제기구가 상주해 있다. 

 

 

프라하는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발전한

도시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역사적 도시로

프라하시의 중심가는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프라하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4세 때(1346~1376) 프라하는 최고 전성기

 중세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였다.

유럽 복판에 있어 로마에서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프라하까지 무역로가 이어졌다.

 

 

 중앙 보헤미아 주가 프라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행정 관청 또한 프라하에 있다.

9세기에 창건,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를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도시였다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과 함께 그 수도가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유명하며,

1993년 체코 공화국이 성립되자 그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프라하 중앙역 승차장과 도로를 연결하는 유리 엘리베이터들

 

 

 대표적인 역사 중심지인 중세 도시 프라하는,

카를 4세가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로 건설된 신도시이다.

프라하의 건축은 14, 15세기의 고딕 양식, 18세기 전반 바로크 절정기의 양식,

1900년 이후 모더니즘 양식까지를 한눈에 보여 준다.  

 

 

프라하에는

 건축 역사의 각종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데,

이는 1945년 이후의 도시계획에 의해

 옛 도심지가 보존되는 한편 새 건축물들의 건립이 규제되면서 

 전반적인 구조와 양식, 그리고 공간 구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도시와 관련한 기록에 따르면, 1,1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라하는

각 시대의 역사와 문화 양식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중세 초기 프라하는 유럽의 문화 중심지였다.

  1348년에 문을 연 프라하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가운데 하나이고,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의 대학 환경은 사실상

 종교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된 후스 파의 사상을 형성하는 토양이 되어

프라하는 중세 시대 중부 유럽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프라하는 천년 세월 동안 수많은 역사적 풍파를 겪으면서도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로서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비잔틴, 로코코,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르누보 등

온갖 양식의 건축물들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럽의 종합건축박물관과 같은 예술의 도시이다.

 

 

문화재들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어 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가 불리하자 독일에  곧바로 조기에 항복함으로서 

도시가 황폐화되는 전쟁의 참화를 모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비굴하다는 소리도 들었으나 

훗날에 나라의 후손들이 길이 잘 살 수 있는 문화자산을 지켜 낸

당시 지도자들의 혜안이 지금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되있다한다.

 

 

 다양한 양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옛 건물들, 많은 탑들,

고풍스럽고 오래된 성당과 성들 그리고 블타바강보여주는 경관 때문에

 프라하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젊었을 때 프라하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히틀러가

은퇴 후의 노년을 프라하에서 보내기 위해

전쟁 중에도 이 곳만은 폭격을 못 하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프라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건축물들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도시다.

 유럽의 근대 건축사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파리나 빈보다도

프라하가 낫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프라하는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

특히 배낭여행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고 한다.

 

 

 체히 지방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블타바강은 독일명으로 몰다우강으로

프라하시를 S자 형태로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은 너비가 100~300m이며 몇 개의 강이 있고

강 위에는 7개의 다리가 가로 놓여 있는데 그중 카를교(카렐교, 까를교, 찰스교)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하다.

 

 

프라하는

뾰죽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얀 탑의 도시, 유럽의 심장, 북쪽의 로마, 연인들의 도시 등

많은 애칭으로 불리워진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소련은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 당 제1서기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에 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바츨라프 광장은

1989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궐기함으로서 프라하의 봄을 이끌어냈었던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이다.

이 광장의 길이는 750m, 폭은 60m로서 광장 양편에는 호텔과 고급음식점및

 기념품판매점들이 어서있는 번화하고 호화로운 쇼핑거리이다.

광장의 끝에는 국립박물관(사진 중앙)의 웅장한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그 앞에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바츨라프의 기마동상이 서있다.

 

프라하 시내의 트램들

 

 

 

몰다우강 (블타바강)

 

프라하를 남북으로 흐르는

블타바강(독일어 몰다우강)을 중심으로

동쪽이 구시가지, 서쪽이 신시가지로 나뉜다.

 

 

 프라하의 역사는 길다.

9세기경에 이미 동유럽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14세기에는 전 유럽에서 파리 다음 가는 큰 도시였다.

몰다우(프라하에서는 블타바라고 부른다) 강변에서 번영한

프라하는 석탑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고색이 짙은 건물들이 많아 중세의 향기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블타바강(독일어 몰다우강)은

 체코 서부 보헤미아 산맥에서 1,300m내외의 고지에서 발원해

체코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 지르는 체코와 프라하의 젖줄로

프라하 시가를 관통하고 435km를 흐르다 독일 엘베강과 합쳐진다.

 

몰다우강의 유람선

 

 

 체코가 자랑하는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교향곡

나의 조국에 등장하는

교향시 몰다우가 이 강을 예찬한 작품이다.

 

 

프라하 시내 관광을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프라하 트램을 타고 카를교 앞까지 갔다.

본래는 걸어서 이동을 해야 하는데

가이드가 트램 경험을 시켜 준다고 우리에게 한턱 쏘았다.

 

삼성의 갤럭시 S 4 광고를 부착한 프라하 트램

 

트램 안에서 프라하성과 성비투스 대성당을 조우했다.

 

 

 오늘날의 프라하 성이 건설된 것에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프레미스 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각기 독특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큰딸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재주가 있었고 둘째는 병을 낫게 하는 재주,

그리고 막내인 리브쉐는 예언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느 날 리브쉐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저 곳에 한 농부가 성을 짓고 있는데 거길 가면 그 농부가 도끼로 문턱을 찍고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과연 그곳에는 농부가 도끼로 문턱을 찍고 있었고 왕은 그 자리에 성을 건설할 것을 명했다.

프라하라는 말은 체코어로 문턱을 뜻한다.

성 바울 성당의 뒤뜰에는 도끼를 든 농부와 왕의 셋째 딸이 손가락으로

프라하 성 쪽을 가리키는 모습의 조각이 서있다.

그 후 농부와 리브쉐는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카를교를 바라다 보는

성 살바토르 성당 트램역에 내렸다.

 

클레멘티눔 

 

초기에 도미니크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거대한 복합단지로

1556년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당시 틴 성당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후스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예수회를 초청하여 이 건물에 본부를 설치하고 이름을 클레멘티눔이라 칭했다.

이후 예수회는 계속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1601년 이곳에 프라하 최초의 예수회 교회인 성 살바토르 교회를 세우는 등

약 150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을 동원해 

 바로크 양식의 성 살바토르 교회와 도서관, 강당, 출판기관 등을 계속 건립하고 단과대학을 세웠다.

 

성 살바토르 성당

 

1601년 클레멘티눔 복합단지내에

 건설된 성당으로 카를교 입구 십자 기사단 광장에 있다.

 바로크 건축으로서는 유럽 최고(古)의 대학(1383 창립)에

부속되어 있는 성 살바토르(1578~1714)성당이다.

 

클레멘티눔

 

1773년 예수회 세력이 쇠퇴하면서

 카를 대학(프라하 대학교)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현재는 성 살바토르 교회와 체코 국립도서관 및 국립기술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네스코가 최고의 도서관으로 선정한

 바로크 양식의 도서관에는 600만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중에는 1,200벌의 파피루스 사본과 6,000권의 중세 필사본,

최초의 인쇄 성경인 구텐베르크 성경 등 희귀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클레멘티눔은

거울 예배당, 바로크양식의 도서관, 별 관측을 했던 천문학 타워만

오픈 되어 있고 가이드 투어로만 가능하다.

 

성자들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 장식이 아름답다.

 

 

 

왼쪽 성 프란시스코 성당(17세기)과 

오른쪽 프라하 시청까지 길게 뻗어 있는 클레멘티눔

 

카를 4세동상과 성 프란시스코 성당 그리고 성 살바토르 성당

 

성 프란시스코 성당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둥근 돔

 

성 프란시스코 성당 벽면의 조각상

 

성 프란시스코 성당 입구

 

성 프란시스코 성당 주제단

 

 

 카를(까를) 4세의 동상

 

카를교 탑교 맞은편  성 프란시스코 성당 앞에 있는 카를4세의 동상

 1406년에 다리를 놓은 그의 이름을 따서 카를교라 지었다.

 

 카를4세의 동상

 

1346년 보헤미아의 왕 카를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4세가 되었다.

예술과 교육을 숭상했던 카를 4세는

프라하를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즉위와 더불어 그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등에서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를

프라하로 데려와 프라하에 신시가를 건설했다.

이 때 중부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를대학과

30개의 석상이 다리의 좌우 양편을 장식하고 있는 석조다리 카를

그리고 프라하 성도 증축되었다.

  이로써 이미 대주교구로 승격되어 있던 프라하는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카를4세의 동상

 

룩셈부르크왕조의 카를 4세는

 뛰어난 통치능력으로 134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됨과 함께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건설하여

당시의 체코, 즉 보헤미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카를 4세의 왕비와 딸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한 것 같은데 확실치가 않다.

 

 

블타바 (독일어로 몰다우)강 유람선이다.

 

시계탑 앞 건물이 스메타나 박물관

 

체코의 국민적 작곡가

베드리히 스메타나의 일생과 그가 남긴 작품들을 전시 보관하고 있다.

뒷편 네모난 지붕이 체코 국립극장이다.

 

 스메타나 박물관 테라스가 프라하성 야경 뷰란다.

 

프라하성

 

 프라하의 초기 역사부터 존재해 왔으며 프라하의 상징이자 체코의 상징이다.

 체코의 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통치를 했으며,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대통령 관저로 쓰이기 시작하여

 성의 일부는 지금까지 대통령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라하성은

기네스북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옛성이다.

 길이는 약 570 미터, 폭은 약 130 미터에 달한다.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의 성채 단지로 9세기 말 보르지보이 왕이 건설한 성을

카를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거의 900년이 지난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프라하 안에는

성비투스대성당, 성조지 바실리카성당, 성십자가성당등 3개의 성당을  비롯, 

성베네딕도수도원등 성당 부속건물과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이 있다.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은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건축양식과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프라하성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보호 받고 다.

 

 

1989년의 벨벳 혁명이후 프라하 성은

개조 작업을 거쳐 현재는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성 안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 중에는 루돌프 2세가 수집한 체코와 유럽 예술품 컬렉션도 있다.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 12:00 정문에서 화려한 위병 교대식을 펼친다.

한 나절을 꼬박 둘러보아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볼거리가 풍성하다.

 

 

프라하성 구왕궁 뒤에 있는 비투스대성당은

원래 있던 성당을 고딕양식으로 바꾸기 위해

1344년 카를 4세 때 짓기 시작하여 1775년경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완성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성당으로

전체 길이는 124m,너비 60m,첩탑의 높이는 100m에 이른다.

 

 프라하 성내의 비투스대성당 인터넷에서 퍼 왔다.

 

비투스대성당에는

성 바츨라프 예배당과 중앙 제단 뒤쪽에 2톤의 순은으로 제작한 네포무크의 묘,

 성당 창을 장식한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 등이 있고

 지하에는 카롤 4세를 비롯한

역대 제왕들과 주교들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있다.

 

 얀 네포무츠키 (영어명 요한 네포무크) 신부님의 순은제 관

 

인터넷에서 퍼 왔다.

프라하성 구왕궁 뒤에 있는  성 비트대성당 (비투스성당)

중앙 제단 뒤쪽에는 은 2톤을 녹여 만든 순은제 관이 있고

이곳에 성 요한 네포무크 신부님이 잠들어 있다.

 

왼쪽 2층 건물 카프카 박물관과 마네스교

 

카프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출생한 유대계의 작가(국적은 독일)

188373일 출생하여 192463프라하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박사로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24년 폐결핵으로 41세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하여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작품에는 변신, 등이 있다.

 

   

카를교는

프라하를 동서로 나누는 블타바강(독일어 이름 몰다우강)을 가로질러

동쪽 구시가지와 서쪽 신시가지를 잇는 석조 다리다. 

 

카를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연결하는,

블타바강의 카를교

중부유럽에서 레겐스부르크 다리 다음으로 오래된 중세의 석조 다리이다.

카를교는 9세기 초 처음 나무다리로 놓았다가 홍수로 유실되고

 그 후 11세기 중반에 다시 석조다리(유디트 다리)로 지어졌지만 1342년의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지금의 다리는 1357년,

프라하 출신 보헤미아왕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4세(1346~1376)의 지시로

당시 27세인 독일의 궁정 건축가 페트르 파를레르시가 착공하여

1402년에 완성했으며(파를레르시는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도 건축함),

 파를레르시는 구시가지와 프라하 성을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방어적 역할 수행도 고려하여 카를교를 건설하였으며,

 실제로 1648년 스웨덴 군대가 프라하 성을 공격하려다가

구시가 방향 다리 끝에 있는 탑의 방어에 막혀 실패한 바 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이다.

 

카를교 구시가지 입구의 교탑

 

구시가 방향 탑은

구시가 쪽에서 카를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탑으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탑 중의 하나이다.

이 탑은 1648년 스웨덴군의 공격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조각품(1950년)이 탑 벽면에 있으며,

 블타바강 방향 쪽에는 1층 중앙에 성인 비투스,

오른쪽에 카를 4세(카렐 4세), 왼쪽에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의 조각상이 있으며,

  과거에는 채무자를 위한 감옥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138계단을 통해 탑 위에 올라가서 보면

 구시가, 카를교, 프라하 성이 어우러진 광경을 볼 수 있다.

 

 

윗 층에는 보헤미아의 두 성자인

 아달베르트와 프로코피우스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중앙에는 다리의 수호성인인 성 비투스이며

그 왼쪽에는 로마제국의 문장과 카를 4세이고

오른쪽에는 체코 국가의 문장과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의 조각상이다.

 

카를교 입구 탑 밑을 통과하고 있다.

 

이 탑에 13579753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숫자는 다리가 착공된 때인

1357년 9월 7일 5시 31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홍수예방을 기원하는

홀수로 맞추기 위해 일부러 이 시간에 맞추어 착공했다 한다.

 

입구 탑을 나와 탑 반대쪽을 찍었다.

 

이쪽 부분은 석판만 있는데

이 석판에는 1648년 30년 전쟁 때 스웨덴 군대가

프라하 성을 공격하려다가 이 탑에서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는데

그때 이 부분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길이 516m, 폭 9.5m의 석조교인 카를교는 

 블타바강 위에 놓인 18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양끝에는 고딕양식의 탑이 있고 양쪽 교각에는

각각 15개씩 모두 30개의 고딕 및  바로크 양식의 석상이 줄지어  있는데

마치 야외 조각 전시장 같다.

 

 

30개의 바로크 성자 조각상들은 모두 체코 최고 조각가들이

1683~1938년까지 250년에 걸쳐 성서 속 인물들과 체코 성인들을 제작한 작품들로

그 중 26개의 조각상은 1706~1714년에 완성 되었다.

 

 

 1683년 제작된 성십자가상이

처음 다리 위를 장식하는 유일한 조각상이었는데,

 로마의 천사다리와 같이 피에타를 비롯한 여러 성자들의 조각상들이

다리 위를 아름답게 장식하게 되었다.

 

 

카를교에 상설 야외 조각미술관을 개최하려는 아이디어는

 로마의 천사다리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카를교에 있는 동상들은 모두 모조품으로,

 원형은 1965년부터 프라하 시 미술관 라피다리움 등으로 이전되었다.

 

성 도미니크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가운데 아기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있고

왼쪽에는 성 도미니크, 오른쪽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피에타

 

예수 수난 십자가상

 

다리 위 조각상 중에 가장 오래된 조각상인

17세기 예수 수난 십자가상은 다리 위 동상 중

최초로 세워졌다.

황금색 장식의 문구는 1696년 십자가를 모독한 유대인에게

물린 벌금으로 만든것으로

거룩, 거룩, 거룩, 주여란 뜻이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예수 수난 십자가상은

 히브리 문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장식된

 세계에서 유일한 성상이다.

십자가를 보며 비웃었다는 한 유대인에 대한 벌로써 히브리어로

거룩, 거룩, 거룩한 주여라는 문구를 새기게 되었다고 한다.

 

 

 

 

 

카를교는 16개의 아치가 받치고 있는 600년의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다리이다. 

 튼튼한 다리를 만들기 위해 보헤미아 사암에 달걀 노른자를 섞어 더욱 단단하게 했는데,

당시 체코 전역에서 보내온 달걀의 양이 셀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얀 네포무츠키 (영어명 요한 네포무크)의 상 

 

카를교의 서른개 조각상 가운데 가장 인기 높은 작품은

왕비의 외도 사실을 고해성사로 알게 됐으나

비밀을 지킨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추궁하는 폭군 바츨라프 4세에게 끝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는

머리 뒤로 다섯 개의 별을 후광처럼 두른 요한 네포무크 신부의 동상이다.

 

 

 이 성인의 동상에 왼손을 올려 놓고 소원을 빌면

  소원을 들어준다고많은 사람들이 동상을 만져

반질 반질 윤이 나 있다.

 

 

요한 네포무크 신부는

14세기 보헤미아의 왕 바츨라프 4세때 궁중의 사제였는데

왕이 왕비의 고해성사의 내용을 묻자

고해성사의 내용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 하자

왕은 화가 나서 그의 혀를 자르고 발에 돌을 달아 카를교 아래인 블타바강에 던졌다.

이 후 나라에 좋지 않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얼마후 블타바 강에 네포무크의 시신이 떠오르고 5개의 별이 강물에 빛났다.

그 시신을 수습해 비투스 대성당에 안치한 후에야 나라가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물에서 죽은 사람들의 성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상의 밑부분 왼쪽은 왕이 충직한 개의 머리를 쓰담는 모습과

왕비가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네포무크 신부가 잡혀 가면서 개에게 사실을 속삭였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 내용에 따라 왼쪽 조각상에는 개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상을 만지면 프라하로 다시 돌아온다고도 하고

 또 부자가 된다고도 한다.

 

 

동상의 밑부분 오른쪽은

바람 핀 왕비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

혀가 잘린 채 강물에 던져지는 요한 네포무크 신부의 모습과

 다리에서 떨어뜨려지고 있는 신부를 안타까워하는

왕비의 모습을 그린 부조다.

  

 

프라하성 구왕궁 뒤에 있는 비투스대성당

중앙 제단 뒤쪽에 은 3톤을 녹여 만든 순은제 관에

 성 요한 네포무크 신부님이 잠들어 있다.

 

 

 성 요한 네포무크 동상은

많은 동상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소원을 빌어 반질반질해진 성 요한 네포무크 동판

 

요한 네포무크 성인이

떨어진 지점을 청동 십자가로 표시해 놓았다.

 

 

소원을 빌고 있는 관광객

 

 

나도 소원을 빌었다.

 

 

성 루이트가르트

 

카를 다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평가 받는 작품으로 

 1710년에 만들어졌으며 루이트가르트라고 불리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자신의 상처에 입맞추려는 성녀를 위해 몸을 숙이는 장면으로
작은 천사들이 그의 움직임을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성 펠릭스,  성 요한 마타, 성 이반 조각상

 

카를 다리 위에서 만난 마지막 조각상으로
 발루아의 성 펠릭스와 성 펠릭스의 제자인 성 요한 마타 그리고 성 이반 이다.
 주위에는 개나 사슴 등의 동물들도 조각되어 있는데 1714년 작품이다.

 

소지구 방향 탑(말라스트라나) 교탑

 

다리 양끝의 탑(Bridge Tower)은

소지구(Mala Strana) 방향 탑과 구시가지 방향 탑이 있다.

구시가지 교탑과는 비슷한 듯 다른 모양을 한 말라스트라나 교탑인

소지구 방향 탑은 유디트 다리(1170년 건설)의 일부가 남은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이 있는 작은 탑과,

 고딕 양식으로 1464년 건축된 조각 없는 큰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개의 높이가 다른 탑으로 이루어진 두 탑 사이로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 통행로가 있다.

 

 

 

말라스트라나 교탑 너머로 성 미쿨라쉬(성 니콜라스)성당이 보인다.
프라하에 성 미쿨라쉬 성당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말라스트라나에. 
다른 하나는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다.

 

 

자유시간이 다 되어 모이는 장소로 가기 위해

다시 구시가지 교탑으로 돌아가고 있다.

 

 

 다리의 난간 양쪽에는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 등 30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들은 각자의 개성과 사연을 지니며

카를교의 볼거리가 됐다.

 

 

카를교는 그 사연과 역사가 천 년을 넘어선다.

600년이 흐른 최근에도

 다리의 초석을 놓은 오전 5시31분을 기리며

축포를 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카를교

블타바강위에 놓여 600세월을 보헤미안의 애환을 함께한 다리로,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연결하는, 블타바강의 가장 오래된 다리로,

 차가 없는 보행자 다리로, 

늘 여행자들과 거리의 예술가, 노점상으로 북적이는 곳이다.

 

 

카를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체코가

자랑하는 다리이다.

 

 

카를교의 미학적인 가치는

 다리 위에 놓인 동상들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블타바강 최고의 명소인

보행자 다리 카를교의 탑은

프라하 태생 작가 카프카가 자살충동에 휩싸였다는 곳으로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면 프라하 전경과 카를교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두 교탑 중 구시가지 교탑만 올라 갈 수 있다.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야경 유람선 투어처럼

몰다우강에서도 유람선 투어로 야경을 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저녁식사를 하고 난 뒤 걸어서 프라하 야경 투어를 한다.

이러나 저러나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체코국립극장이 보인다.

 

몰다우 강은 역사적으로 홍수가 심하여

홍수 범람지역의 2m부터 건물을 지어

 많은 건축물들이 현재까지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프라하 체코국립극장

 

체코 건축가 요제프 지테크의 설계에 따라

1868년 공사를 시작하여 1881년 완공되었으나

개관 직전인 1881812일 화재가 발생해 건축가 요제프 슐츠의 지휘 아래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2년 후인 18831118일에

스메타나의 오페라 리부셰  공연을 시작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건물의 안팎 장식에 이른바 국립극장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참여하였다.

1980년대 초반 다시 한 번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을 주로 공연하는 국립극장이 이루어졌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했던 카를교에서

 프라하성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보는 프라하성의 야경이 멋지단다.

 

 

일몰이 지고 있다.

 

 

 

 

 

석양이 프라하성과 카를교를 아름답게

물 들이고 있다.

 

 

 

 

구시가지 광장으로 가고 있다.

 

 

큰 독수리 모양의 석상에 다양한 문장 모양이 가득하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골목 마리오네트 인형 가게

 

 

 마리오네트는 인형극에 쓰는 인형을 말한다.

유럽 여러곳에서 상연하고 있지만 체코가 가장 발전한 나라이다.

가격을 보니 큰 마리오네트는 수백만원씩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