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스페인 광장, 마드리드 왕궁, 알무데나 대성당
2016년 3월31일 목요일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여행 첫 날
스페인 마드리드-톨레도-콘수에그라-살라망카, 포르투갈 파티마-까보다로까-리스본, 스페인 세비야-타리파, 모로코 탕헤르-페스-라바트-카사블랑카, 스페인 미하스-론다-코르도바-그라나다-바르셀로나-몬세라트
고야의 옷 벗은 마하, 옷입은 마하
두 작품은 다른 나라로 출장을 나가는 경우가 많아
나란히 제자리를 지키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운이 좋아 동시에 직접 보면서 비교할 수 있었던,
세계 3대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의
스페인 왕실이 수집한 컬렉션을 보고
스페인 광장에 왔다.
스페인 광장이란 말에 예전에 로마에서 봤던
스페인 광장이 생각났다.
스페인 광장은 세계 도처에 있는데,
정작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 광장은
마치 광장보다는 공원 같은 곳이었다.
스페인광장
마드리드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는
기준로인 그란비야 대로의 끝쪽에 위치한 스페인 광장은
1916년,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
세르반테스 기념탑을 중심으로
왼쪽은 마드리드타워,
오른쪽은 스페인빌딩이다.
1940년에 지어진 스페인 빌딩은
건축 당시에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지금은호텔, 사무실,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다.
세르반테스 기념탑
광장 중앙에는 세르반테스의 기념탑이 있고
탑 앞에는 에스파냐의 유명한 작가 세르반테스 동상과
소설 속 두 주인공인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날씬한 돈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뚱뚱한 산초판자 동상이 있다.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
라 만차의 돈키호테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소설이자,
최초의 근대소설이며,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무모한 광기의 대명사로 그 이름이 두루 쓰였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1547-1616) 스페인
1547년 9월 29일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에스파냐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출생하였다.
1568년 마드리드에서 로페스 데 오요스의 사숙에서
잠시 공부한 것 외에는 학교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다.
1571년 역사상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가,
가슴에 두 군데, 왼손엔 평생 사용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1575년 에스파냐 해군 총사령관이며 왕제인 돈 후안의 표창장을 받고
에스파냐로 귀국하던 도중,
당시 지중해에 횡행하던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1580년까지 5년간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를 유명하게 한 작품이 바로 돈키호테다.
이 작품 하나로 그는 스페인의 국민작가가 되었고,
‘지혜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587년까지 20∼30편의 희곡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알제리의 생활"과 "라 누만시아" 등
2편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돈키호테의 정식표제는
"재기 발랄한 향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이다.
전편은 1605년, 후편은 1615년에 출판했다.
에스파냐의 시골 향사 아론소 기하노는
밤낮으로 기사도 이야기를 탐독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자기 스스로 중세기의 편력 기사가 되어
세상의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자칭하고,
갑옷을 입고 로시난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편력의 길에 오른다.
돈키호테가 염원하는 여성은 실재하고 있지만,
거의 그의 광기와 망상으로 그린 여성이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근처에 사는 농부 산초 판자를 종자로서 거느린다.
현실과 동떨어진 고매한 이상주의자인 주인 돈키호테는
순박한 농사꾼으로 우직하고 욕심꾸러기이며 애교가 있고
충실한 종자 산초 판자와는 지극히 대조적인 짝을 이루어,
그의 기사도 정신의 광기와 몽상은
이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여,
우스꽝스러우나 주인공들에게는 비통한 실패와 패배를 맛보게 한다.
이러한 가혹한 패배를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쓴 목적을 “당시의 항간에 풍미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듯이
그 당시 에스파냐에 크게 유행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패러디를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감흥이 솟는 대로 일정한 계획도 없이 써 나가는 동안,
처음 의도한 바를 잊고 주인공 돈키호테와 종자인 산초 판사의
성격을 창조한다는 새로운 주제에 열중하여
드디어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대작이 되었다.
이 작품의 중심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두 성격의 창조로,
기사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 판자의 실제적이고
비속한 물질주의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며, 인간성의 양면을 나타낸다.
두 사람의 보편적인 인간성은
국적·인종·나이·성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기념비 꼭대기에는
지구를 머리에 인채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5대륙을 나타내는 5명의 여신을,
여러 민족의 모습으로 조각해,
돈키호테가 세계적으로 읽혀지는
명작임을 형상화했다.
마드리드 타워
마드리드의 에스파냐 광장에 있으며,
에스파냐 건축가 훌리오 오타멘디가 1954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57년 10월에 완공했다.
37층에 높이가 142m(옥상 안테나까지 포함하면 165m)로
마드리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며,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1967년까지는 유럽 전체에서,
1982년까지는 에스파냐 전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많은 유럽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던 명소이다.
현재 각종 사무실과 아파트가 입주해 있으며
총 12대의 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있다.
기념비를 둘러싸고 있는
올리브 나무는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었던
라만차 지방에서 가져왔다.
기념비의 뒷쪽
이사벨 1세( Isabel I de Castilla, 1451-1504)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의
카스티야 여왕(재위 : 1474년 - 1504년)이다.
남편 페르난도 2세와 더불어 부부 군주 가톨릭 군주로 불린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상속녀였던 이사벨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영토를 통합하고
공동 군주가 되어 스페인을 재통일하였다.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벌인 실지 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이사벨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페인에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치세를
스페인의 황금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재물을 통해 스페인은 매우 부유해졌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은
훗날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1504년 11월 26일 메디나델캄포에서 사망하였다.
이사벨 1세 초상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1452-1516)
페르난도 2세는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의 아라곤 국왕(재위 1479-1516)이다.
또한 카스티야 국왕으로서는 페르난도 5세(재위 1474 - 1504)이며,
나폴리 국왕으로서는 페르디난도 3세,
시칠리아 국왕으로서는 페르디난도 2세이다.
아내 이사벨 1세와 더불어 가톨릭 군주로 불린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으로
에스파냐 왕국 탄생
팔라시오 레알 마드리드 왕궁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마드리드 왕궁은 동쪽 궁전이라 불리기도 하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식 왕궁 중의 하나이다.
9세기경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지배할 당시에 요새화된 왕궁은
그 후에 개조되어 오스트리아 왕가의 성으로 사용되다가
1734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1764년 부르봉가 왕가의 시조이자 베르사이유 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펠리페 5세가 재건축하여 완공하였다.
펠리페 5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삼아 궁전을 재건축했으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돌과 화강암만을 사용하였다.
마드리드왕궁 정면
서부 유럽을 통틀어서는 2,800여 개 이상의 방과
135,000 m²의 크기로 단연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왕궁 앞 오리엔테 광장
현 국왕 가족은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궁전인
사르수엘라 궁에 머물고 있다.
1083년 그리스도교가
마드리드를 탈환할 때까지
이슬람교의 성채가 있던 자리이고
그 후 왕궁이 되었다.
궁전 아래의 서쪽 편에는 정원이 있는데 스페인어로는 "캄포 델 모로"라고 한다. 이 이름은 당시 이슬람 군주가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마드리드를 탈환하고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남쪽에는 성당이 있고 북쪽으로는 정원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사바티니 정원이 위치한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 알무데나 대성당 로마 가톨릭교회의 마드리드 대교구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1085년 알폰소 6세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던 중세 시대 이슬람교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알무데나 대성당 남동쪽 프란시스코 데 쿠바스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설계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시민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성당의 건축은 전면 중단되었으며, 이 계획은 1950년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1950년 새로 건설의 책임자를 맡게 된 페르난도 추에카 고이티아는 쿠바스 후작의 계획과 설계도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전면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성당이 지어질 장소 맞은편에 있는 마드리드 왕궁과 잘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대성당은 1993년에 완공된 후,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2004년 5월 22일 스페인의 제1왕위 계승자인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와 레티시아 오르티스의 혼배미사가 이곳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알무데나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는 독특한 현대식 모습인데 부속 경당과 조각상들은 네오고딕 양식에서부터 팝아트 데코 양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실에는 16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알무데나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최근에는 무어 양식의 중세 시대 도시 성벽의 잔해들이 발굴되었다. 알무데나 대성당 사진들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왔다. 대성당의 성모상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마드리드 왕궁 후면
1764년 펠리페 5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3세가
궁전에서 살기 시작하여
후안 카를로스 현 국왕의 조부인 알폰소 13세가
왕정의 문을 내린 1931년까지
궁전은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었다.
현재 마드리드 왕궁은 박물관,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빈 리셉션 등 국왕의 공식행사가 이 왕궁에서 거행된다.
마드리드 왕궁은
한 면의 길이가 140m에 이르는 장방형의 건축물로,
왕궁 안의 방은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2,800여 개에 달한다.
19세기식 내부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왕궁에는
초기 안달루시아 지방의 플라멩코 화가로부터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그린 그림과
타펫화 등이 비치되어 있다.
레판토 정원
44개의 이베리아 반도
옛 왕들의 동상이 서 있다.
마드리드 왕궁 정면도 가 보지 않고
단지 상점에 가기 위해
이 길을 가로질러 갔다.ㅠㅠㅠ
미리 알았으면 현지 가이드한테
왕궁 정면 쪽에 잠시 들렀다 가자고 했을텐데
이게 페키지 여행의 한계이다.
마드리드 왕궁의 야경
이사벨 1세의 조각상
19세기식 내부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화려한 마드리드 왕궁 내부
베르사이유궁전과 우열을 가린다는
마드리드 왕궁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다른 이의 사진과 백과사전으로 접한다.
[참고: 두산백과, 위키백과, 네이버 캐스트]
[서명 없는 사진은 퍼 온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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