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벨렘탑, 발견기념비, 4.25 다리
2016년 4월3일 일요일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여행 넷째 날
스페인 마드리드-톨레도-콘수에그라-살라망카,
포르투갈 파티마-까보다로까-리스본,
스페인 세비야-타리파,
모로코 탕헤르-페스-라바트-카사블랑카,
스페인 미하스-론다-코르도바-그라나다-바르셀로나-몬세라트
오늘은 4시 45분에 기상해
5시 4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6시 20분에 버스에 올라
유라시아 대륙의 끝
유럽대륙의 서쪽 끝 까보다로까,
호카 곶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대항해 시대를 연 대서양을 조우했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유럽의 땅 끝 마을까지 올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며,
다시 버스에 올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했다.
리스본에 도착하여 처음 간 곳은
테주강의 귀부인이라고 불리는 벨렘탑이었다.
리스본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의 삼각 하구 우안에 위치한다.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 굴지의 양항이기도 하다.
반가운 삼성 로고
리스본의 테주강
리스본은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리스본은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해일로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인 건조물은 그리 많지 않다.
서부의 벨렝 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렝의 탑,
바스코 다 가마를 기념한 고딕양식의 수도원 및
아주다 궁전(현재의 외무성),
박물관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고,
1290년에 창립된 대학이 있다.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리스본은
1755년 11월 1일 대지진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폐허화돼
5만명 이상의 인명을 잃었고,
그 후 폼발 후작이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는
도시계획을 통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리스본 (여행사 홈피 사진)
신항로 개척에 앞장선
포르투갈에는 항해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공원을 가로질러 벨렘탑으로 가고 있다.
리스본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관련된 건축물들이 많은데,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리스본에 부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리스본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인식된다.
벨렘탑 (여행사 홈피 사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마누엘 양식의 탑으로
바스코 다 가마의
신대륙발견(인도항로)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벨렘 탑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벨렘탑은
베들레헴탑의 포르투갈식 표현이다.
에펠탑이 파리를 상징하듯
벨렘탑은 리스본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벨렘탑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에 있는 타워로,
바스코 다 가마의 신대륙발견(인도항로)을 기념하여
1515~1521년에 타호 강변에 세워진 마누엘양식의 탑이다.
항해선박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환송하고 환영하던 곳이었으며,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을 세워 타호 강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며,
또한 적들의 침입에서 리스본항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과
등대로서의 역할도 했던 장소이다.
벨렘탑
이 탑은 귀부인이
드레스 자락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테주 강의 귀부인이라고도 불린다.
벨렘탑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인
테주강변에 건설된 이 탑은 당초 물속에 세워졌으나,
지진으로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현재는 밀물 때는 물에 잠기었다가
썰물 때에는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벨렘탑
타호강변의 벨렘탑은 4층의 등대로서,
1515∼1521년 프란시스코 데 알다가
바스코 다 가마의 업적을 추모하여
하얀 나비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포르투갈 특유의 마누엘 양식 3층 탑으로
밧줄, 조개, 바다풀 등의 장식을 새겨 넣고
총안을 둔 흉벽 등을 설치하고,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을 세우는 형식으로 지었다.
벨렘탑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 상'이 서 있다
1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 진보주의자들이
만조 때에는 물이 들어오고 간조 때에는 물이 빠지는
이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 1층은 감옥인데
이 감옥은 만조때는 물에 잠겼다고 한다.
지금은 강의 흐름이 달라져서
감옥이 물 밖으론 온전히 나와있지만
건립 당시만 해도 대서양과 태주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물살이 굉장히 거칠었고,
정치범들을 비롯하여 죄수들은 만조가 되면
목까지 차오르는 물을 감당해야 했단다.
신음소리로 가득했을거 같은 벨렘의 감옥,
아름다운 건물뒤에 감춰져 있는 이중적인 잔인함에
다시 한번 더 벨렘탑을 보게된다.
벨렘탑
포르투갈 특유의 마누엘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창문이 유난히 아름답다.
끈으로 꼬아 놓은듯한 매듭은 마누엘 양식의 특징인데,
마누엘 1세의 명으로 만들어졌다고해서
마누엘 양식이라고 한다.
마누엘 1세때 만들어진 양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식과
고딕양식, 인도의 모리스코양식이 혼합되어
어류와 해조류같은 조개껍질무늬와 매듭무늬 등을
모티브로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내부는 고딕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누엘 1세 (1469~1521)
포르투갈의 왕으로 행운왕이라고도 부른다.
후계자가 없던 주앙 2세의 종제로서 즉위하였다.
선왕의 항해사업을 계승하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도착(1498)과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1500)에 이어
장대한 포르투갈 해상제국을 실현하였다.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왕녀와 결혼하여
친 에스파냐 정책을 폈다.
그의 치세에 꽃피운 르네상스 건축장식을
‘마누엘양식’이라 부르며,
해산물과 항해용구까지 곁들여 있어 웅장하다.
벨렘탑 모형
벨렘탑 동측 인근에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대항해시대에는
리스본 항구를 떠나는 모험가들을 전송하고
오랜 항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모험가들을
가장 먼저 반갑게 맞이하는 탑으로
항해가들에게는 정다운 존재였다고 한다.
탑의 안뜰에는
성공의 성모 조각상과
인도 양식의 작은 첨탑을 설치하였고,
지하감옥 위에 있는 총독의 방은 고딕 양식으로 꾸몄고,
찬란한 방이라는 거실도 만들었다.
이 곳은 원래 요새였는데
밀물 썰물의 차이로 물에 잠기곤 했던 1층은 감옥,
2층은 포대, 3층은 왕의 거실이자 망루로 쓰였다.
1515년부터 7년간 마누엘 양식을 집약해서 지었는데,
198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깔을 닮은 장식, 동글동글한 포탑,
섬세한 성모 마리아상이 관람 포인트라고 하는데
시간상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테주강 (타호강, 타구스강)
리스본을 거쳐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테주강은
길이 1,007km로 이베리아 반도 최장의 강이다.
에스파냐 쿠엥카 산지의 해발고도 1,600m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톨레도를 거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부근에서 삼각강을 이루면서
대서양으로 유입한다.
유역에서의 강수량은 적지만 홍수가 자주 일어난다.
1966년 리스본 근교에 건설한
4.25일교는 유럽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다.
저 멀리 4.25일 다리가 보인다.
4월 25일 다리(Ponte 25 de Abril)
총 2278m의 길이로,
1974년 4월 25일 혁명을 기념해 붙였다.
4.25다리는 포르투칼의 옛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을때 금문교를 보고 감탄하여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하여 무려 7500만달러를 들여 1950년 미국의 금문교를 건설한 회사에 설계와 시공을 맡겨 1966년에 완성하였다. 그 오른 쪽으로 예수상이 있다.
4월 25일 다리
1966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2278m로
현수교이며 바람의 영향을 피하기 위하여
다리사이에 구멍이 나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살라자르의 다리라고 하였는데1974년 4월 25일 쿠데타에 의해
독재자 살라자르가 실각하고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무혈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4.25다리라고 불리워진다고 한다.
리스본 그리스도 상 (Cristo-Rei)
나중에 리스본을 떠날때 차창으로 찍은 그리스도 상
테주강 맞은편 연안의
4월 25일 다리가 시작되는 부근의 언덕에
110m 높이의 거대한 그리스도 상이
테주강을 바라보며 양팔을 벌리고 서 있다.
이 그리스도 상은 브라질의 리우데 자네이로에 있는
그리스도 상과 같은 모습으로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만든 것으로,
110m의 높은 기단 위에 82m의 예수상이 서 있는 모습이다.
동상대좌의 탑 안엔 엘리베이터도 있다.
이 거대한 그리스도 상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에게 선물한 것이다.
벨렘탑에서 신대륙 발견기념비로
가다보면 만나는 비행기인데,
1922년 리스본에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까지
3000km의 남대서양 횡단비행에
최초로 성공한 수상비행기라고 한다.
버스를 타고
대항해 시대를 기념한 발견기념비로 갔다.
테주강에 정박 중인 요트들
선착장
대항해 시대를 기념한 발견기념비
(Padrao dos Descobrimentos)
1960년 항해왕 엔리케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발견기념비
발견기념비
발견기념비가 있는 벨렝지구는
구시가에서 6키로정도 떨어진 바닷가 동네로
대항해 시대의 화려한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크 왕자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발견기념비
테주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 벨렝지구에
해양국가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연
항해왕 엔리케 왕자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1960년에 세운 53미터의 발견기념비이다.
앞쪽에 십자가가 부조되어 있다.
발견 기념비
53m높이의 범선 모양으로
바다를 향해 카라벨 선을 들고있는 엔리케 왕자와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선교사, 지리학자, 선원 등
대항해시대에 공헌했던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형상이다.
발견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바로 그 자리에 그가 탄 카라벨선을 본 따 세웠다.
발견기념비 조각
뱃머리에 항해왕 엔리케가 서 있고,
그 뒤에 바스코 다 가마(인도 항로 개척),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브라질 발견),
페르난드 마젤란(마젤란 해협 발견),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발견) 등의 탐험가와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 지도 제작자 페드루 누네스 등을 순서로 조각했다.
유일한 여성 승선원이자 동엔리케와 동페드루의 모친인
필리파 렝카스트 여왕도 있다.
전망대로 올라 갈 수 있는
엘레베이터가 있다.
<밑에 사진은 EBS 동영상에서 캡쳐해 왔다.>
발견기념비는
항해중인 범선 카라벨의 모양을 하고 있다.
범선 카라벨을 들고
뱃머리 맨 앞에 서 있는 엔리케 왕자가
선두에서 테주강을 바라보고 있다.
해양왕 엔리케
바다에 대한 열망을 직접 실천하여
대양 항해에 적합한 범선 카라벨 선을 만들고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왕자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1394~1460)
15세기 포르투갈의 왕자로
아프리카 서해안 보쟈도르곶 탐험에 성공하여
인도로 가는 서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는 기초를 다졌다.
아비스 왕조의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아버지 주앙 1세(아비스왕조 창시자)와 형 두아르테,
그리고 조카 아폰수 5세 등 세 명의 왕을 섬겼다.
1415년 그리스도 기사단장으로
유럽인에 의한 최초의 대서양 탐험을 하였다.
일찌감치 바다로 나아가야 함을 깨달은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고
그곳을 중계무역에 활용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포르투갈 남단의 알가르베 총독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유럽 각국의 항해가, 천문학자, 조선공, 지도제작자를 초빙하여
여러 항해 기기를 개발하고 선박을 개량하며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더 넓은 바다를 탐했다.
마침내 적도를 넘어 세네갈에 도착한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카보 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발한 원정활동은 이후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데도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열다섯 번이나 원정대를 꾸려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미지의 땅에 보냈던 그는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은 없지만,
'해양왕'이라는 그의 별칭은 과분한 것은 아니었다.
해양왕 엔리케 뒤로
바스코 다 가마(인도 항로 개척),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브라질 발견),
페르난드 마젤란(마젤란 해협 발견),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발견) 등의 탐험가와
서사시인 카몽이스 그 외에도 많은 모험가와
천문학자, 선교사가 따르고 있다.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전성기 당시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나라들을 표시한 세계전도가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세계지도
광장의 바닥에는 세계지도와 함께
포르투갈인들이 발견하고
정복했던 지명들이 표시되어 있다.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영광된 과거이다.
15~16세기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포르투갈의 위세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깃발이 꽂힌 곳이 포르투갈
포르투갈 리스본 발견기념비 자리에서
바스코 다 가마가 출항하여
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돌아왔다.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발견)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브라질을 발견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우리나라와 일본
1541년에 일본과 교역
바스코 다가마(1469 ~ 1524)
포르투갈의 항해자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의 개척자이다.
마누엘 1세의 인정을 받아,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 대사업을 성취했다.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격파,
코친·카나놀 등에 상관을 설치하여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다.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1497년 마누엘 왕의 명을 받고 리스본을 출항하여
그해 11월에 희망봉에 도달하였다.
그 뒤 인도양을 횡단하여 1498년 5월,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하였다.
현지에서 캘리컷 지배자의 적대적인 태도와
인도양 무역의 독점권 탈취를 두려워한
이슬람 상인의 박해를 받았으나
다음해 탈출하여 리스본에 귀항하였다.
이로써 인도로 가는 직접 항로가 열렸는데,
이는 동서 교통 역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는 그 뒤 인도의 총독이 되었으며 현지에서 사망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의 제 1회 항해 항로
벨렘탑 쪽에서 본 발견기념비
범선 카라벨선 모양의 발견기념비
발견기념비
해양 절대강국으로 군림하고
브라질을 비롯하여 남미와 아프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한 엔리케 왕자
1960년, 해양왕 엔리케의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여 범선 카라벨 선 모양의 발견기념비가 세워졌다.
높이 53m의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났다는 바로 그 자리다.
해양왕 엔리케가 개발한 범선 카라벨선 모형
발견기념비 광장 너머로
제로니모스수도원이 보인다.
이제 제로니모스수도원을 갈 참이다.
[참고:위키백과,두산백과,네이버캐스트,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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