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루마니아의 정식 명칭은 루마니아이며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토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발칸반도에 위치한 라틴계 공화국으로,
다키아를 식민지로 삼은 로마인들의 후손이
주변의 슬라브 세계 속에서
그 언어와 독창적 문화양식을 유지해온 나라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공국과 왈라키아공국이
1861년 합병하여 루마니아 공국이 탄생한 지
20년이 지난 1881년에 투르크로부터 독립했다.
1948년 소련의 영향으로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90년 민주화되었다.
유럽지도
발칸지도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북부 흑해 서안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동쪽으로 몰도바,
서쪽으로 헝가리와 세르비아,
남쪽으로 다뉴브 강을 끼고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흑해와 접하며,
국토 중앙으로 카르파티아 산맥이 지나간다.
루마니아 지도
수도는 부카레스트(부쿠레슈티)이며
193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다뉴브 강은 흑해로 흘러가며
다뉴브 강 삼각지를 이루며 유럽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삼각주를 이룬다.
카르파티아 산맥이 루마니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나,
국토의 대부분은 비옥한 평야이며
언덕과 저지대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행정구역은 41개 주와
1개 지방자치시(부쿠레슈티)로 이루어져 있다.
루마니아 국기
왼쪽으로부터 파랑, 노랑, 빨강의 3색기로서,
국기 이름도 3색이라는 뜻의 '트리쿨로리라고 한다.
파랑은 자유를, 빨강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애국자들의 피를,
노랑은 풍요를 상징한다. 3색은 예로부터
이 나라의 전통적인 깃발 색으로 이용되어왔으며
1940년대의 공산화 후에도 저항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었다.
3색을 국기에 처음 사용한 것은 1848년의 혁명 때로서,
당시는 빨강·노랑·파랑 순으로 가로로 나누어졌고
3색의 비율도 오늘날과는 달랐다.
1881년에 호엔촐레른 지그마링겐 왕가 출신의 카롤 1세가
루마니아의 국왕으로 취임하면서 현재의 형태로 변경하였으며,
공산국가 시절에는 중앙에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문장이 있었으나
989년 민주화 혁명 당시에는 문장을 제거하고
타원형 형태로 비워두었다.
1989년 2월 27일 1872년 당시의 기를 다시 국기로 제정하였다.
루마니아의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가 가미된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이다.
루마니아의 의회는 임기 4년의 양원제이며,
상원의 의석수는 137석, 하원 의석수는 331석이다.
루마니아는
1948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입헌 군주체제였다.
그리고 헝가리를 제외 하고는
주변 국가가 대부분 슬라브족 국가임에 비하여
루마니아인은 로마인의 후손인 라틴계 민족으로,
국명인 루마니아도 로마에서 유래한 것이다.
루마니아의 전체 면적은 238,391㎢로
한반도의 1.1배이다.
동남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에 속하며
유럽에서는 12번째로 큰 국가이다.
평야와 산림, 목초지가 균형 있게 분포되어 있으며,
경작지는 전체 면적의 63.7%이며,
산림지대는 전체 면적의 22.4%, 목초지는 9.9%이다.
국경선의 총 길이는 3,149.9㎞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225㎞이다.
루마니아의 기후는
전체적으로 온대 대륙성 기후이나,
일부 서부 지역은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서남부 지역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춥다.
여름은 따뜻하거나 아주 덥기도 하며,
해안가는 더 따뜻하나 찜통 더위가 없는 편이다.
겨울은 아주 춥고 산기슭 지대일수록
더 추워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인구는 2166만 6350명(2015년 현재)으로,
도시에 전체 인구의 53.2%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방에 46.8%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몰도바에 4백만 명의
루마니아 재외국민이 거주하고 있다.
루마니아 민족 구성은
대부분이 루마니아인 89.5%로
소수민족의 비율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루마니아인 다음으로 많은 민족은 헝가리인 6.6%로
대부분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거주한다.
그 외 집시 2.5%, 우크라이나인 0.3%, 독일인 0.3%,
터키인 0.2%, 세르비아인 0.1%, 타타르인 0.1%,
슬로바키아인 0.1%이다.
언어는 루마니아어가 공용어이고,
헝가리어, 독일어가 소수어로 사용되고 있다.
국민의 91%가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며,
6.5%는 헝가리어를, 1.1%는 블라키아 롬어를 사용하며,
독일어 0.2%, 터키어 0.15%이다.
종교는 그리스정교의 분파인
루마니아정교가 86.8%로 지배적이며,
프로테스탄트 7.5%, 가톨릭 4.7%,
기타(그레코 가톨릭, 이슬람 등) 3.8%이다.
루마니아의 교육은
10년 의무교육에서 8년을 마치면
각각 전문화된 4년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코스가 있고,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루마니아는
충실한 사회보장제도를 자랑하고 있으며
완전 무료의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나,
의료기술은 서유럽에 비해
낙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도 국민총생산량은 1771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717달러이다.
화폐단위는 레우(Leu)이나 론(Ron)으로 표기,
유럽 연합국이지만 유로를 쓰지 않고
자국 화폐를 쓰고 있다.
1유로(Euro)=3.60론(Ron)
주요 자원은
석유, 천연가스, 석탄을 포함한
구리, 납, 금, 수은, 아연 등 광물자원이 풍부하여
비철금속을 포함한 금속공업은 동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전체 공업생산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화학, 철강, 기계공업이 발달하였고
오랜 전통의 축산업도 비중이 높다.
또한 포도의 생산은 세계적으로 농업과
수산업도 발달하였다.
루마니아는 1955년 유엔에 가입하고,
970년대 초반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세계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
2004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 등 많은 국제 기구에 가입했고,
2007년 1월 1일 유럽 연합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루마니아는 남북 동시 수교국으로
북한과 1948년 11월에 먼저 수교했고,
우리나라와는
1990년 3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루마니아의 문화는
라틴족과 토착 다키아인의 혼합아래
주변의 슬라브족과 비잔틴제국의 영향,
오스만 제국, 헝가리 등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였고,
근대시기에는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에는 일찍이 비잔틴 예술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거쳐 전래되어
중세의 유품들이 볼 것이 많은데,
트란실바니아 지방에는
비잔틴 양식과 토속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목조의 작은 사원들이 많다.
루마니아의 역사
루마니아 어로는 로마니아이며 '로마 인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로마 인들이 원주민인 다키아 인과 공존하면서
그들을 로마화시킨 것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1세기에 다키아 인이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를 통일하여
강대한 노예 제국을 형성하였으나,
105년 로마에 정복당한 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는 13세기경에 헝가리 왕조에 정복되어
제1차 세계 대전 후까지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14세기에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남쪽에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가 성립되었으나,
19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크림 전쟁 후 파리 조약에 의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1861년 합병하여
양 공국의 군주로 A. 쿠자를 선출함으로써
루마니아 공국이 되었다.
그러나 쿠자는 국내 반동 세력의 반대로
1866년 강제 퇴위를 당하고, 대신 독일의 호엔촐레른가의
카롤 1세가 세습군주로 루마니아공에 추대되어,
1947년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그 왕통이 지속되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때
루마니아는 정식으로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불가리아로부터 도브루자를 획득하여
대 루마니아를 이루었다.
1945년 3월 소련군 주둔하에
루마니아 최초의 인민 정권이 탄생하고
1946년 11월의 총선거에서는
농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산당과 소련의 부정선거로 이듬해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7년 12월 30일에 소련군에 의해
최후의 국왕 미하이 1세가 폐위되면서 군주제도 폐지하고,
1948년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65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호를 고쳤고,
차우세스쿠가 당 제1서기가 되었다.
차우세스쿠는 1967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1989년 12월 민주혁명으로 사형당할 때까지 24년 동안
루마니아를 통치하면서 족벌체제를 구축,
테러와 독재로 일관하며,
인민을 친위대와 도청으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철권통치를 하였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차우세스쿠의 강경통치에 항의하여
시위가 일어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무장봉기가 확산되고
결국 차우세스쿠 정권은 붕괴되고,
차우세스쿠는 체포되어 공개 처형되었다.
1990년 1월 1일, 루마니아는 민주화되었다.
1996년 11월, 시민의회 후보인 콘스탄티네스쿠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공산정권이 무너진 지 7년만에
민주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근대 루마니아 왕가
1866년 5월 10일 ~ 1947년 12월 30일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는
프러시아와 독일의 왕들을 배출한 유럽 전통의 왕가이다.
프랑스 왕가, 러시아 왕가, 영국 왕가 등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들과는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를 맺어왔다.
1800년대 후반기 루마니아에서는
귀족들 간의 다툼이 잦았기 때문에
본토 출신의 왕을 선출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로서는 루마니아가 다른 선진 유럽의 근대화를 지켜보며
내릴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이
바로 외국 왕가 출신의 왕을 모셔오는 일이었다.
1866년에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왕이
루마니아 귀족들의 쿠데타로 퇴위 당하자
루마니아의 정치인들은 외국 왕가 출신의 인물을
왕으로 모셔오기 위해 전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루마니아와 친분이 있던 프랑스 귀족 코르누 부인이
당시 프러시아 군대의 소령으로 재직 중이던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가문의 카롤 1세를 왕으로 추천하였다.
카롤 1세가 아버지 가문 쪽으로는
후에 독일 왕이 되는 프러시아의 빌헬름의 친척이었지만,
그 이유보다는 어머니 가문 쪽에서 보면
나폴레옹 3세의 조카가 된다는 이유가 더 컸다.
카롤 1세의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모두 프랑스 나폴레옹 가문의 딸들이었다
카롤 1세는 부친 쪽으로 프러시아 국왕과 먼 친척이며,
모친 쪽으로 프랑스 국왕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루마니아는 당시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귀족층을 포함한 국민의 대다수가
프랑스 왕가에서 국왕을 선출해 주기를 바랐기에
카롤 1세의 왕위 등극은 별 무리 없이 결정될 수 있었다.
근대 루마니아 왕가는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가문의
카롤 1세가 루마니아 공에 즉위한 1866년부터 시작된다.
루마니아는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의
카롤 1세를 왕으로 추대한 후,
2대 왕 페르디난드 시절에 왕가의 이름을
루마니아 왕가로 바꾸었다.
그 뒤 미하이 1세와 카롤 2세가 루마니아 왕의 자리를 이었다.
그러다가 미하이 1세가 1947년 12월 30일에
공산주의자들에게 강제 퇴위당하면서
루마니아는 왕정을 마감하였다.
루마니아 왕가
로므니아 왕가는 오늘날의 명목상의 지위인
루마니아 왕국의 국왕을 배출하는 가문을 말한다.
2011년에 호엔촐레른 왕가의 분가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에서 분리해 나왔다.
공식적으로는 가문의 현직 수장인
미하이의 아버지인 카롤 2세가 가문의 설립자이지만,
실제로는 미하이가 가문의 설립자이다.
본가는 현재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 있는
엘리사베타 궁전에 거주하고 있다.
루마니아 국왕 카롤1세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루마니아 초대 국왕 카롤 1세는
부친 쪽으로 프러시아 국왕을 배출한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 출신이며,
모친 쪽으로 프랑스 국왕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이다.
카롤 1세는 루마니아에 입성한
1866년 4월부터 군주로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 10일에 루마니아 공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루마니아가 완전한 독립국의 지위를 얻은 다음인
1881년 3월 14일에 카롤 1세는
루마니아 공에서 루마니아 왕으로 승격하여
1881년 5월 10일에 또 한 번 성대한 대관식을 치렀다.
1914년 10월 10일 시나이아의 펠레쉬 성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루마니아의 왕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카를 1세의 왕비 비트의 옐리사베타
카롤 1세는 독일계 귀족이었던
비트의 엘리사베타와 혼인하였으며
사이에서 딸인 마리아 공주가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조카인 페르디난드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페르디난드 1세(1865년 ~ 1927년, 재위 1914년 ~ 1927년)
루마니아 왕국의 두 번째 군주로
남부 독일의 지그마링겐에서 태어났는데,
숙부인 카롤 1세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카롤 1세의 형인 호엔촐레른 공 레오폴트의 차남이었던
그가 루마니아의 추정상속인이 되었다.
그는 독일계 국왕이었지만 영국인 아내였던
에든버러의 마리아의 요구에 의하여
루마니아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측에 참전시켰다.
승전으로 그는 트란실바니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의지력이 약했지만 그와 에든버러의 마리아는
이 사건으로 루마니아의 가장 중요한 군주와 군주 배우자가 되었다.
그는 전 국왕인 카롤 1세와는 달리
루마니아와 그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페르디난드 1세 왕비 에든버러의 마리아 (1875년 ~1938년)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프레트와
그의 아내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다.
따라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이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외손녀이다.
1893년에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하여
1차 대전 와중인 1914년에 루마니아 왕비가 되었다.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를 설득하여,
루마니아 왕국을 연합국으로 참전시켜
후에 많은 영토를 얻어냈기에,
루마니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카롤 2세
루마니아 왕국의 왕세자였던 카롤은
루마니아 장군의 딸인 지지 람브리노와 결혼하는데,
루마니아 왕족은 루마니아인과 혼인할 수 없었던 법 때문에
루마니아의 의회와 왕실은 이 결혼을 축복해주지 않는다.
둘 사이에서는 카롤 람브리노가 태어났지만
1919년 이 결혼은 무효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카롤은 자신의 여동생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의
시누이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를 보고 반하여,
그녀와 결혼한다.
그러나, 카롤은 1925년 유대계 여인이었던
마그다 엘레네 루페스쿠를 만나게 된 후,
엘레니 공주와 이혼해버린 후,
이탈리아에서 그녀와 생활하게 된다.
페르디난드 1세는 이러한 왕세자를
루마니아 왕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시키고,
루마니아 왕자 미하이를 왕세손으로 책봉한다.
페르디난드 1세는 1927년 사망하고,
왕세손 미하이가 왕위를 계승한다.
카롤은 자신의 왕위계승권 파기는 불합리적이라고 하며,
자신이 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미하이 1세를 압박해,
1930년 루마니아로 귀국한 뒤 즉위한다
그러나 전제군주제를 시행하면서 삼권 분립 제도를 폐지하고
사형 제도를 되살리는 등 국민의 기대를 크게 잃어버렸고
또한 나치 독일, 소련에 의해서
부코비나, 베사라비아(지금의 몰도바) 지방을 소련에 할양하고,
빈 중재로 북서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게,
불가리아에도 남부 일부를 할양하자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에 수상이었던 이온 안토네스쿠가 퇴위를 요구하였고,
결국 미하이 1세에게 양위한다.
카롤 2세의 왕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1896년 ~ 1982년)
카롤 2세의 아내로, 미하이의 어머니로
루마니아에선 엘레나라고 불렸다.
엘레니는 아테네에서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그 왕비 프로이센의 소피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두 오빠와 남동생은 모두 그리스의 국왕을 지냈다.
미하이 1세(1921년 10월 25일 ~ ) 1947년사진
루마니아의 마지막 국왕
(재위: 1차 1927년 7월 20일 - 1930년 7월 8일,
2차 1940년 9월 6 - 1947년 12월 30일)이다.
빅토리아 영국 여왕의 고손이며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는 8촌지간이다.
미하이 1세(1921.10.25~ ) 현재 사진
1921년 10월 25일
루마니아의 시나이아에 위치한 포이쇼르 성에서
카롤 2세와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카롤이 마그다 루페스쿠 부인과의 연애사건으로
왕위계승을 포기하자 1925년,
조부인 페르디난드 1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1927년 7월에 페르디난드 1세가 죽자
5세의 나이에 국왕이 되었다.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섭정을 하던 중
1930년 아버지 카롤 2세가 돌아와 국왕으로 즉위하자,
아홉 살에 폐위당해 왕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롤 2세의 독재정치에 대해 비판이 높아지고,
1940년 9월 친독반소의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카롤 2세는 1940년에 다시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미하이 1세가 18세의 나이에 다시 왕이 되었다.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자 스물다섯 살에 강제 퇴위 당한 뒤
공산주의 루마니아 정부는 1948년에 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이 타도된 뒤
루마니아 정부는 1992년에 그의 귀국을 허용했다.
현재는 스위스와 루마니아를 오가며 살고 있다.
현재 그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루마니아의 공산정권 수립과 몰락,
그리고 루마니아 민주화 과정 등을 모두 지켜 본
루마니아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현재 부쿠레슈티의 엘리사베타 궁전이 그의 정식 주소이다.
그는 5명의 딸을 두었다
2016년 8월 1일에는 왕비인 안 드 부르봉파르므와 사별하였다.
안 드 부르봉파르므 (1923.9.18.-2016.8.1)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군주였던 파르마의 로베르토 1세의
7번째 아들 레나토 디 보르보네파르마와
덴마크의 마르가레테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퇴위당한 루마니아 왕국의 군주 미하이와 혼인하여,
첫 명목상의 루마니아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이모는 오스트리아의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이다.
그녀는 미하이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딸을 낳았다.
현재 루마니아 왕족 중에선 미하이를 제외하고는
왕위를 승계할 남성이 없기에,
장녀인 마르가레타가 미하이 사후
명목상의 루마니아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다.
루마니아 유네스코 세계유산 총12건
[글 출처: 루마니아 개황,두산백과,위키백과,유네스코,세계지명 유래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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