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테푸르 시크리 성( Fatehpur Sikri)
2017년 12월 3일 일요일
인도여행 다섯째 날
아그라 성을 관광한 뒤
인도의 대표적인 궁전 장식으로 쓰인
피에트라 듀라 상감기법으로
만든 기념품들을 파는 샵에 들렀다가,
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그라를 떠나 약 1시간 30여분 달려
파테푸르 시크리 성에 도착했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승리의 도시 시크리라는 뜻으로
악바르 대제가 건설하여 15년을 사용하고
식수가 부족하여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잊혀져서
오히려 무굴제국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북인도 여행 지도
델리-바라나시-카주라호-오르차-아그라-자이푸르-델리
아그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타지마할 / Taj Mahal (1983)
아그라 요새 / Agra Fort (1983)
파테푸르 시크리 / Fatehpur Sikri (1986)
파테푸르 시크리 버스
무굴제국의 건축물이 잘 보존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파테푸르 시크리 성에 가기 위해
우리 투어 버스에서 내려
파테푸르 시크리 성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 탔다.
파테푸르 시크리 성 매표소
아그라에서 약 37km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한 파테푸르 시크리는
1570년부터 1585년까지 15년의 짧은 기간 동안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가
아들 자항기르를 얻는데 도움을 준
세이크 살림 치스티라는 이슬람 수피즘의 성자가
은거하고 있었던 이곳에
새로운 수도로서 16세기경 건설했다.
그러나 1585년 악바르 대제는 아프간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파테푸르 시크리를 버리고
라호르에 머물며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면서 지난 400여 년간 방치되었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무굴 제국 악바르 대제가 세운 도시로
왕궁과 공공건물, 이슬람 사원, 이슬람 가옥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복합 건물군이며
다양한 건물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악바르 1세는 1571년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도시명을 페르시아어로 승이라는 뜻의 파테(FATEH)에서
유래한 파테바드(FATEHBAD)라 지었고,
현재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변경되어 불리고 있다.
급수 문제로 수도가 다시 아그라로 이동하고 난 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무굴 제국의 건축물이
가장 잘 보존된 곳 중에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어디를 가던 눈에 많이 띄는 다람쥐
파테푸르 시크리는
돌이 많은 고원 지역에 세워졌으며,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남동쪽에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이 거의 말랐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성채로 요새화된
6㎞의 성벽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성문이 7개가 나 있다.
그중 북쪽에서 두 번째인
아그라 성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널찍한 구역을 둘러싸는 성벽은
방어를 보장하기보다 새로운 도시의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관람 티켓
파테푸르 시크리는 악바르 대제가
재위 말년에 수도를 다시 아그라로 옮기면서
방치되다가 이후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주요 건물들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아그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당일 코스로 즐겨 찾는다.
일상복인 전통의상 사리
파테푸르 시크리
총 길이 3km, 폭 1km의
엄청난 규모인 파테푸르 시크리 성은
크게 왕궁과 사원 구역,
방치된 성곽구역으로 나뉜다.
사원 구역의 주 출입구로 이용되는
높이가 54m에 달하는 승리의 문은
기나긴 전쟁 끝에 구자라트 정벌을 자축하며
1569~1577년에 건설되었다.
악바르 대제가 아들을 얻으리라고 예언한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은
사원 구역에서 유일한 대리석 건물이다.
지금도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는 인도 여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명소다.
그밖에도 무굴제국 시대에 세워진
모든 이슬람 사원의 원형인 자마 마스지드,
힌두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를 각각 상징하는
다양한 양식이 결합된 다르가 사원,
종교 대통합을 추진했던 악바르 대제가
4대 종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던 디와니카스,
공식 접견실이었던 디와니암,
왕비들과 왕실 여인들이 머물던 독특한 양식의
궁전과 정원, 연못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인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악바르 대제는
당시 구자라트 지방을 정복한 뒤
승리의 도시(파테푸르 시크리)를 뜻하는 이름을 짓고,
붉은 사암을 기본으로 신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구자라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도시를 지었기 때문에 여러 양식의 건물들이
공존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조다 바이 궁 (Jodha Bai's Palace)
조다 바이 궁전은
왕궁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는 건물로,
무굴 왕조의 악바르 대제가
힌두 포용 정책의 일환으로 맞이한,
후계자인 자항기르를 낳은
라자스탄의 힌두 왕비 조다 바이를
위해 지은 궁전이다.
조다 바이 궁전
동쪽 정문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 가운데 아치형의 문이 있다.
2층에는 발코니가 있어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조다 바이 궁전 안뜰
문을 들어서면 4각형의 궁전 마당에
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다.
궁전은 마당을 둘러싸고 사합원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사방에 복도와 방을 만들고,
그곳에 궁녀들이 기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서남북 쪽 가운데를
2층으로 올려 다른 기능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동쪽은 주 출입문을 만들었고,
북쪽은 이슬람 모스크를 만들었다.
서쪽과 남쪽은 좀 더 지위가 높은 궁녀들의
전용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다 바이 궁전의 페르시아식 푸른 지붕
조다 바이 궁은 건축 양식이 무굴 양식이지만,
그 안에 장식이나 문양은
힌두 건축 모티프에서 영감을 얻은
화려한 장식이 더해져 힌두와 이슬람,
두 문화가 하나로 합류하는 건축물이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듯힌두교식 기둥과 이슬람식 지붕이
결합된 양식의 건물
조다 바이 궁전의 푸른기와 지붕 건물
라자스탄 지방의 용맹한 라지푸트
병사들(힌두교도)을 흡수하고,
반란의 여지를 없애고
평화협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
악바르 황제는 정략 결혼 정책을 펼치고,
힌두와의 융합을 강조했다.
때문에 이 궁전은 힌두와 이슬람의 공존으로,
힌두 기둥과 이슬람의 지붕,
페르시아식 지붕 타일이 혼재되어 있다.
악바르 대제와 조다바이 흰두 왕비
무굴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건국 세력은
원래 인도 사람이 아니라 아프카니스탄에서
인도로 쳐들어온 정복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인도에 살고 있던 토착세력들을
때로는 억누르고 때로는 회유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토착세력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는
라자스탄 지방의 라자(지방 제후)들이 이끄는 군대였다.
그들은 힌두교를 믿고 있었고
예로부터 강한 무사들로 이름이 높았다.
무굴의 3대 황제 악바르 대제는
라자스탄 지방의 라자인
바르말의 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악바르는 바르말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고
라자 바르말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악바르에게
잘 보여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라자 바르말은
1562년 딸 조다 바이를 악바르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처음에 조다 바이는
힌두교도가 이슬람 신자인 악바르에게
시집갈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조다 바이의 미모에 반한 악바르가 신앙을
지켜도 좋다고 허락하는 바람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이다.
잘라우딘 모하메드 악바르 (1542년-1605년)
Akbar the Great 네이버 사진
악바르(위대한 인물이라는 뜻)는
인도의 다섯번째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로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로도 일컬어지며,
16세기 전반~19세기 중엽 인도를 통치한
무굴제국의 사실상의 확립자이다.
부왕 후마윤이 제국 재건 도중에 사고로 죽자
14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그 후 40여 년 동안의 치세를 통하여
영토확장전쟁을 계속하여
고대 제국의 아소카왕에 비견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무굴 체제로 일컬어지는 정치체제를 확립하였다.
종교적 관용을 실천하고 문예를 장려하여
제국 통합을 위한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다.
또한 라지푸트족 제후와의 혼인관계를 통한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화평을 유지하고,
흰두교를 아우르는 관료체제에 의해 강력한 통치를 행했다.
악바르는 50년간의 위대한 통치 후에
1605년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시칸드라에 마련되었다.
이 무덤은 이미 악바르 자신에 의해
그의 생애 동안에 지어진 것이며
그의 사망 후에 그의 아들 자항기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조다 바이( 1542-1623)
악바르 황제의 힌두 부인으로 자항기르를 낳았다.
그녀는 라자스탄 지역의 왕인 라자 바르말의 큰 딸로
힌두교도인 그녀의 원래 이름은
라지푸트의 공주 헤르 쿤와리(일명 하르카 바이)였다.
그녀는 1562년 무굴제국 황제인 악바르에게 시집갔고,
1569년 그녀와 악바르 사이에서 왕자인
무함마드 살림(자항기르)이 태어났다.
1605년 살림이 무굴제국의 제4대 황제 자항기르가 되었고,
그녀는 43년 동안 무굴제국의 황후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악바르와 조다 바이의 결혼은
종교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악바르의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정책은 자한기르의 아들인 샤자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659년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골육상쟁을 통해 등극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갔고,
이것이 결국 무굴제국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무굴 제국의 3대 황제들
악바르 대제(중앙),
아들 자항기르(우), 손자 샤 자한(좌)
[Author=Bichitr] 네이버 사진
예전에 TV로 보았던 인도 영화 조다 악바르
당시 막상한 군사력으로 인도 전역을
제패했던 무굴이지만 용맹한 라자스탄의
군사적 공세는 버거웠기 때문에
악바르 황제는 라자스탄과
상호 평화 협정을 맺고
보증을 위해자이푸르 카츠츠와하 왕국
라자 바르말의 공주인 힌두 여인 조다바이와
정략결혼을 한 뒤 서로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다.
유난히도 사진에 찍히는 것을
좋아하는 인도사람들
마리암의 집, 황금의 집
(Mariam's House, sunahra makan)
건물 내 외의 벽에 금장식을 하여
황금의 집이라 불리우며,
악바르의 부인인 마리암을 위한 궁전이다.
마리암은 고아에서 온
기독교 부인이라는 설이 있다.
물 저장소
파테푸르 시크리 성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판치 마할이
보인다.
판치 마할 (Panch Mahal)
바람의 궁전으로도 불리는 휴식의 궁전인
판치 마할은 파테푸르 시크리 성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로 손꼽히는데,
황제와 황후가 만나 여가도 즐기며
쉬는 장소 역할을 했다.
전체가 5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를 취했다.
그래서 건물보다는 탑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 5층은 돔 형태의 작은 지붕이 얹혀있어
마치 정자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최상층에는 황제 부부만이
올라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판치마할 (Panch Mahal)
판치 마할의 5층 누각 건물은
석재를 사용했으나 목재와 같이
가구 구조로 만든 것이 매우 특이하며,
아치 공법을 사용하지 않고서 석조건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힌두교와 자이나교
건축문화의 전통을 반영하였다.
이 건물은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이기도 하다.
판치 마할(5층각) 입면도
피라미드와 비슷한 형태로 위 층으로
올라갈 수록 면적이 줄어드는 이 건물은
176개의 다양한 모양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건물 1층에는 힌두 점성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숫자인 84개의 교각이 설치되어 있다.
2층에는 56개의 기둥이 있어
건물의 내부 공간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런데 3층부터 기둥이 20개로 줄고,
4층에는 기둥이 12개로 준다.
마지막 5층에는 기둥이 네 개 밖에 되질 않아
정자 하나의 모양을 하고 있고돔 형태의 작은 지붕이 얹혀있다.
하렘 구역에 있는 판치 마할 (바람의 궁전)
바람을 최대한 맞으면서
시원하게 지내기 위해서
악바르 자신이 설계를 했다는데,
176개의 기둥이 지탱하는 5층 건물은
유례없는 양식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곳은 특별한 연회가 있는 때를 제외하면
황제의 후궁과 가족들만 출입하는 곳으로
사방으로 건물과 마당, 연못 등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현재는 그냥 홀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각 층마다 여러 개의 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는데
1층에만 대략 84개의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1층만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
아누프 탈라오(Anup Talao) pool
판치 마할 앞에는
사각형의 인공 석조 연못이 있다.
한 변이 30미터 정도인 사각형 풀 가운데
정방형 무대를 만들어
음악회나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는 악바르 시대 전설적인 음악가
탄센이 주로 음악회를 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노래를 불러 램프에 불을
붙일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압다르 카나 Abdar Khana
학교 역할을 했던 Abdar Khana 건물로
악바르 대제 자신은 문맹이었지만
현명함으로 대제국을 이루고
후손들의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파테푸르 시크리
아누프 탈라오 연못의 정방형 연단
아누프 탈라오 연못과 카스 마할
아누프 탈라오 연못의 남쪽에는
황제의 침실인 카스 마할(Khas Mahal)이 있다.
3층 건물인 카스 마할은 '꿈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더위를 이길 수 있도록 자연 냉방장치를 설치했다.
여기서 자연냉방이란 방의 한쪽으로
물을 흘러내리게 해서 방안의 열을 내리게 하는 방식이다.
내부 벽에는 장식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가장 중요하고아름다운 장소로 알려져 있다.
파치시 광장
판치 마할의 맞은 편은 광장과 맞닿아 있는데 이 광장의 이름이 파치시 정원으로 악바르가 노예소녀들을 게임말로 삼아 파치시(고대 게임)를 즐겼다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파치시(고대 게임) 표식
인도판 장기인 판과 말을
가지고 하는 놀이인 파치시 게임 판
보석 창고 앙크 미차우리와 디완이 카스
오른쪽 회랑이 달린
왕의 개인 접견실인 디완이 카스와
왼쪽 건물은 보석 창고 앙크 미차우리이다.
디완이 카스 (왕의 개인 접견실)
광장의 북쪽 면에는
디완이 카스라는 왕의 개인 접견실이 있는데
보석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이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 사방에 정자 형태의 건물을 네 개 얹었다.
2층임에도 불구하고 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기둥을 세우고
사방으로 들보 형태의 통로를 만들었다.
이 건물의 특징은 내 외부가 완벽한 대칭이고,
장식과 치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리고 훼손이 가장 적어
옛날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디완이 카스 (Diwan-i-Khas)
디완이 카스는
황제의 개인 접견실로
왕궁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붉은 사암 중에서도 가장 비싼 돌을 사용하였고,
독특한 기둥들이 원형의 발코니를 받치고 있는데
가운데 기둥에는 황제의 옥좌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황제는 이곳 2층 한 가운데 기둥 위에 앉아서
가장자리에 앉은 신하나 외빈들의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악바르 황제는
사상이나 종교의 종파 등에 얽매임이 없어서
이곳에서 많은 지식인이나 종교인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재처럼 보이지만 모두
붉은 사암으로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위쪽에 황제의 옥좌가 있었다는 중앙 기둥
중앙의 화려한 돌기둥의 중심에 악바르가 있고,
돌기둥에서 뻗어 나와
방의 네 모서리와 연결되어 있는 편평한 난간과
그 끝에 학자나 종교인들이 자리한 듯 보인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문이 닫혀 있다.
디완이 카스 기둥
건물 내부 중앙에 서 있는 기둥 형태는
매우 특이하게 조각장식이 되어 있다.
이 중앙기둥 상부에는 원형평면으로 만든
악바르 황제의 좌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대각선 형태의 통로가
건물 모서리와 내부 주위를 연결하고 있다.
개인 접견실 2층 중심에 있는 황제의 좌석은
우주의 신비로운 중심축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러 종교의 통합을 의미하는 무늬 양식
이 기둥에는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를 수용하고
통합하려던 악바르 왕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 기둥의 양식은 여러 가지인데,
맨 위쪽의 종같이 생긴 부분은 불교 양식,
그 아래의 빗살무늬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양식,
그 바로 아래의 사원 입구 같은 양식은 기독교 양식,
그 아래쪽은 자이나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양식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디완이 카스
이 건물의 특이한 내부공간 구성은
악바르 황제의 통치력을 고대의 신화적 도상인
만다라의 개념을 새롭게 변화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보석 창고 (앙크 미차우리)와 보석정자(점성가의 자리)
돔 형식의 보석정자 (점성가의 자리)와
그 뒷편 황제의 보물창고(앙크 미차우리)
보석 정자, 점성가의 자리
(Treasury Kiosk : Astrologer's seat)
앙크 미차우리 건물 앞에 자리 잡은
트레서리 정자(Treasury Kiosk : Astrologer's seat)
이 곳에서 밤 하늘의 별자리를 통해
운세를 보던 점성술가의 공간이다.
보석 창고 (앙크 미차우리)
보석정자 뒤의
앙크 미차우리라는 건물은
황제가 궁녀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던 방으로
왕의 보석과 수집품들도 보관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보석 창고 (앙크 미차우리)
보물을 저장한 창고
(The Treasure: Ankh Michauli
or Blind Man's Buff House,
눈먼 사람의 붉은 집이란 뜻)
술타나 하우스, 터키 부인의 집 (Sultana's House)
연못의 동북쪽에는
터키 출신 왕비의 생활공간인
술타나 하우스가 있다.
터키 부인의 방으로도 불리는
이 건물의 문과 벽그리고 천정 장식이 이슬람 양식이다.
문양이 기하학적이기도 하고,
꽃과 나무, 새 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세력 지배하에서
전통종교와 정통예술을 융합하여
건축양식을 발전시킨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인 황후와 함께
힌두교, 자이나교 및 기독교를 믿고 있었던
후궁들이 각각 따로 거처할 수 있게 배려하여
궁전의 건물을 만들었다.
버발(Birbal) 궁전
악바르 황제가 총애했던
재상 버발을 위해 지은
이곳 왕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버발 궁전이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커다란 보석상자 같다고
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고 한다.
비대칭적 구조로 인하여,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고
내부 장식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디완이 암으로 나가는 문
파테푸르 시크리 성 디완이 암
공식 접견실인 이곳은 열주랑으로
둘러싸였고 황제의 특별석이 있다.
악바르 황제는 매일 일정 시간에
이곳에서 신하와 백성의 인사를 받은 뒤,
그들의 청원과 고충을 듣기도 하고
최고위직 판사로서 분쟁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디완이 암
디완이 암
은 바깥마당을 포함해서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가운데에 중심 건물인 디완이 암이 있고,
좌우로 회랑 형태의 건물이 이어진다.
회랑의 벽에는 예술성이 있는
태피스트리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우측 디완이 암 회랑
사암으로 만든 디완이 암
왜 파테푸르 시크리는 버려졌는가?
여러 추론이 있지만
살림 치쉬티 성자가 죽기전에 악바르에게
파테푸르 시크리를 떠나서
아그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조언하고,
무엇보다 심각한 마실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악바르가 1586년에 아그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가장 유력한 가설인 물 부족은
도시 북쪽에 악바르가 건설한둘레 20km의 인공호수에서 지금도 좋은 물이
나고 있기 때문에 용수부족이라는 이유보다는,
펀잡지방의 반란을 해결하기 위해
더 이상 신도시 건설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가 보지 못한 사원지역을 수연님 (unesco114)에서 가져왔다.
가장 왼쪽이 승리의 문 블란드 다르와자,
가운데가 자마 마스지드,
하얀색 건물이 치스티 묘,그 옆에 이슬람 칸의 묘
승리의 문, 블란드 다르와자(Buland Darwaza)
파테푸르 시크리의 랜드마크인 승리의 문으로
높이가 54미터에 달하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정문이다.
1572년 구자라트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여세운 승리의 문으로 1575년에 완성되었다.
승리의 문, 블란드 다르와자(Buland Darwaza)
안에서 본 모습
자미(자마) 마스지드
자미 마스지드는
인도에서 가장 큰(165mx133m) 이슬람 사원으로
10,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사원은 1571년〜1572년에 완성되었으며,
사원 벽에는 메카를 숭배하는
시구가 많이 새겨져 있다.
자미 마스지드는 무굴제국의 수피주의 성인
살림 치스티(1478–1572)를 위해 지은 사원이다.
살림 치스티는 신비주의적인 삶을 살았으며,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13년 동안 자식이 없던 악바르가 살림 치스티의
축복을 받고 나서 4대 황제인 자항기르를 낳자
악바르는 아들의 처음 이름을 살림이라고 지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살림 성인은
자신의 딸을 자항기르의 유모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살림 치스티의 자손은
신앙적 정치적으로 무굴제국의 요직을 계속 차지했고,
살림가의 무덤이 이곳 자미 마스지드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악바르는 살림 치스티가 살던 곳에
궁전과 자미 마스지드를 짓고
파테푸르 시크리로 천도하였다.
자미 마스지드는 동쪽과 남쪽 두 군데 문이 있다.
사원 동쪽에 궁정으로부터
사원으로 들어가는 샤히 다르와자가 있고,
남쪽에 승리의 문을 뜻하는 불란드 다르와자가 있다.
샤이크 살림 치스티(1478–1572)의 묘당
자마 마스지드 사원 한가운데에는
격자 모양의 대리석 건축물인
살림 치스티의 묘당이 있다.
그의 무덤 마자르에서는 무엇을 소원하든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으며,
특히 출산을 기원하는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
그의 무덤은 파테푸르 시크리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무굴 시대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버려진 도시지만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
파테푸르 시크리의 왕궁 구역만 관광 후
약 4시간이 소요되는 자이푸르로 이동 중
중간에 찬드 바오르 (우물)를
선택관광으로 보기로 했다.
[ 참고 문헌 발췌: 두산백과, 저스트 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도의 건축,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1001, 인물 세계사, 프렌즈]
[서명이 없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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