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델리] 라지 가트 (Raj Ghat)

푸른 바다. 2018. 6. 9. 11:16

델리 라지 가트 (Raj Ghat)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인도여행 여덟째 날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가 낳은 위대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명실 공히 인도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다.

간디가 죽은 지 7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의 자취를 찾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라지 가트에 왔다.

 

 

 

 

북인도 여행 지도

델리-바라나시-카주라호-오르차-아그라-자이푸르-델리

 

북인도 9일 여행에서 본 유네스코 세계유산 
1.델리 꾸뜹미나르 유적지 / Qutb Minar and Its Monuments, Delhi (1993)

2. 카주라호 카주라호 기념물군 / Khajuraho Group of Monuments (1986)
3. 아그라 아그라 요새 / Agra Fort (1983)
4. 아그라 타지마할 / Taj Mahal (1983)
5. 아그라 파테푸르 시크리 / Fatehpur Sikri (1986)
6. 자이푸르 잔타르 만타르 / The Jantar Mantar, Jaipur (2000)

7. 자이푸르 라자스탄 구릉요새 중 암베르 요새 / Hill forts of Rajasthan (2013)

 

 

 

 

자미 마스지드를 보고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간디의 화장터인 라지 가트이다.

 

 

 

 

 간디 추모 공원인 라지 가트

 

인도 북부 델리에 있는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인

라지 가트는

간디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랄 킬라 (레드 포트) 뒤쪽 야무나강 남쪽

마하트마 간디 거리에 있다.

 

 

 

 

라지 가트 (Raj Ghat) 입구

 

라지 가트는

비폭력, 불복종으로 유명한

인도 민족해방운동 지도자이자

국부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터이다.

화장 후 간디의 재는 조금씩 나뉘어

전국 곳곳에 안치되었는데,

간디 기념박물관에도 일부 재가 묻힌

묘가 조성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잘 정돈된 넓은 공원이 나온다.

중앙에 큰 길이 있고 양 옆은 화단이다.

 

 

 

 

굴다리 밑으로 들어가면

간디 화장터로 들어갈 수 있다.

학생들이 단체로 추모하러 왔는데

간디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는 걸

알수 있었다.

 

 

 

 

단체로 추모하러 온 인도의 여학생들

 

인도는 빈곤한 생활로 인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15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이

48%(여성은 62.3%, 1995)에 달한다.

이처럼 높은 문맹률을 퇴치하기 위해서

특히 초등교육의 보급을 위해 정부는

교육에 힘쓰고 있다.

초등교육과 최하층 카스트 계층은 무료이나

주에 따라 14세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는데,

그 범위가 차츰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는 국민총생산의 6%를

교육에 투자하는 등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교육은

영어, 힌디어 및 주 공용어 등

3개 언어 교육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델리 대학교,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등

7개 종합대학과 5개의 인도공과대학 및

중요 연구기관을 직접 관장하고 있는데

인도 공과대학의 수준은

미국의 MIT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한다.

 

 

 

 

밝은 미소의 인도 여학생들

 

인도 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과 찍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특히 외국 사람들이랑 찍는 것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입구를 통과하여 잘 정돈된

잔디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1948년 1월30일에 극우파 힌두 청년에게

총에 맞아 숨진 간디의 화장터인

검은 대리석 단상이 나온다.

그 앞에는 향을 놓을 수 있는 단이 있어

참배를 하고 싶으면 입구에서

신발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라지 가트 (Raj Ghat)

 

가이드가 시간상 내려가지 말라고 해서

굴다리 위에서 줌으로 찍었는데

램프의 위치로 보아

내가 서 있는 면이 옆 면인 것 같아

그런지 향을 놓는 단이 보이지 않는다.

 

 

 

 

간디의 유해가 화장된 장소에 놓인

검은 대리석 제단

 

1948년 1월30일에 극우파 힌두 청년에게

암살당한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곳으로

중앙의 검은색 대리석 사각 제단에는

간디가 남긴 마지막 말인 '헤이 람(오 신이여!)'이

힌두어로 새겨져 있다.

검은 대리석 제대 옆에는 큰 램프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불꽃이 항상 타오르고 있다.

그 앞에는 향을 놓을 수 있는 단을 마련해 놓고 있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간디의 유해가 화장된 장소에 놓인

검은 대리석 제단

 

대리석 벽에 가려 나오지 않은 부분을

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퍼 왔다.

 

 

 

 

대리석 제단

 

간디의 묘비석에는

그의 마지막 말이 씌어 있다.

'헤이 람(오 신이여!)'

이미 자신의 암살을 예감하고 있었던 간디는

 그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누군가의 총탄에 죽더라도

웃으며 죽어갈 것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간디가 암살당한 요일인 매주 금요일에는

이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날만 추모객들이 찾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 내내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숫자가 워낙 많아 이곳에 분향된 꽃은

결코 시드는 법이 없다고 한다.

 

 

 

 

추모 제단으로 가는 학생들

 

이 인원을 봐서는 추모하러 갔다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다음 일정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가이드의 판단에 100% 동의하는 바이다.

 

 

 

 

 

1948130

간디는 기도를 올리던 중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힌두와 이슬람의 융합을 반대하는

힌두교 근본주의자 고드세의 총탄이었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간디는 지금도 인도에서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도시마다 마하트마 간디 거리가 있고,

그를 화장하고 남은 재를

보관하고 있는 곳은 모두 성지이다.

인도는 간디가 탄생한 10월2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또한 인도 국민들은 모든 액수의 인도 지폐 루피에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화를 넣어,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서

영원한 스승 간디를 기리고 있다.

 

 

 

 

문 양 쪽에 새겨져 있는 간디에 대한

 

간디의 마지막 말은 '헤이 람(오 신이여!)'

그는 마지막까지도 종교적 이유로 분리되는

조국을 원하지 않아 신께 인도의 미래를 부탁했다.

그러나 인도는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졌고,

파키스탄에서 또 다시 방글라데시가 갈라져 나갔다.

통일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삶을 불태웠던

그가 그토록 원했던 통일조국은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마하트마 간디의 상징이 된 사티아그라하,

   간디는 Satya(진리, 진실) Agraha(확고하다)를 묶어 

 자신의 영국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사티아그라하라는 단어로 규정했다.

과연  사티아그라하 진실의 힘은 위대했다.

사티아그라하는 인도라는 거대한 대륙을 하나로 묶어서

세계를 제패한 대영제국으로부터

인도의 평화적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간디의 철학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며

 그의 외모나 연설이 유별난 카리스마를 지닌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눌변에 가까워서 1895년 남아공에서 귀국해

뭄바이에서 대중연설을 했을 때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말을 제대로 못해,

그의 원고를 다른 사람에게 대독하도록 했는데도

수많은 청중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극우파 청년의 흉탄에 목숨을 잃자

국민들은 큰 슬픔속에 화장하였고

 그 재를 유골함에 나누어 세계 곳곳의 지지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인도에도 간디 유골이 뿌려진 장소가 여러 군데 있다.

 

 

 

 

 

간디가 죽자 간디의 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인도 수상 네루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국부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표현의 애도문을 발표했다.

인도국민이 받아들이는 간디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인도 국민들은 인도 초대 총리 투표에서

다른 능력을 차치하고 오직 간디의 제자로서

스승 간디의 비폭력 투쟁을 계승했다는 이유로

자와할랄 네루 후보를 뽑았을 정도로

인도 국민들은 간디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고 했다.

 

 

 

 

라지 가트 (Raj Ghat) 나오는 문

 

간디 기념박물관에서 북쪽으로는

네루 집안의 3대 즉

네루, 산자이 간디, 인드라 간디의

화장터인 샨티바나가 있으며

더 북쪽으로는 제 2대 수상의 화장터인

비자이 가트가 있다고 한다.

 

 

 

 

마하트마 간디 (1869.10.2.- 1948.1.30)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 겸 법률가로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이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카스트 중 하위 상인계급이었지만

서벵골 구자라트 주의 작은 나라 포르반다르총리였던

카람찬드 간디그의 네 번째 부인 푸틀리바이 사이에서

1869년 10월 2일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고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유명해졌다. 1914년 인도로 돌아와

무저항,불복종,비폭력,비협력주의를 원칙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920~1922, 1930~1934, 1940~1942년에

그가 펼친 3번의 운동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전 후에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었다.

1946~1947,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나고,

19478월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자

간디는 양쪽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여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으로 폭동이 가라앉고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불과 며칠 뒤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마하트마 간디 (1869.10.2.- 1948.1.30)

 

간디는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특별한 방법으로 투쟁한 투사이자,

무소유를 실천한 정치지도자였으며,

가장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종교인보다도 더 종교적인 세속인이었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부른 이름으로,

나중에 위대한 스승에 대한 전 국민의 호칭이 되었다.

 

 

 

 

 

아내 카스트루바이와 함께(1922)

 

간디는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열세 살에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혼인했다.

 

 

 

 

마하트마 간디

 

 

 

 

인도에서 마지막 투어 장소인

악차르담 사원과 바하이 사원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

 

 

 

 

간디 기념 박물관 (Gandhi Memorial Museum)

 

간디 추모공원인 라지 가트 건너편에

간디 기념 박물관이 있는데

이 곳은 방문하지 않은 곳이라

아쉬워 seanchae3님의 블로그에서

사진을 퍼 왔다.

 

 

 

 

간디 기념 박물관 (Gandhi Memorial Museum)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 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기업인이자 간디의 후원자였던 비를라의 저택이었다.

이곳을 비를라 하우스(Birla House)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이곳에서

극우파 힌두교도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인 간디에 관한 자료,

간디의 생애를 돌아보는 각종 유품,

간디의 삶에 대한 다양한 전시물,

간디의 전 생애에 걸친 사진과 신문기사들,

간디의 행적을 형상화한 작은 인형들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매년, 간디가 암살당한 날인 1월 30일경에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

 

 

 

 

간디의 무덤

HERE REST THE ASHES OF GANDHI

 

  간디가 죽은 후,
화장되어 그의 재는 조금씩 나뉘어

전국 곳곳에 안치되었는데
이 무덤 역시 그 중 하나이다.

 

 

 

 

 

간디 아내 카스트루바이와 간디 비서의 무덤

 

 

 

 

 

 

 

[참고 발췌: 두산백과,인물 세계사,위키백과,저스트 고]

[서명이 없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