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리노
2018년 4월 1일 일요일
미소국여행 넷째 날
이탈리아의
천년 비잔틴 모자이크 도시 라벤나에서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에서 유래한,
현재도 집정관이 통치하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유럽에서 세 번째로
작은 나라인 산마리노공화국의 수도
산마리노시에 왔다.
이 곳은 산마리노 역사지구와 티타노산으로
2008년 유네스코 세게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여행 지도
산마리노 지도
산마리노 지도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바티칸 시국, 모나코 다음으로
유럽에서 세번 째로 면적이 좁은 산마리노는
이탈리아 반도 내 베니스 남쪽,
볼로냐 남동쪽 100㎞ 지점에 있다.
국토 면적이 서울(605.21㎢)의
약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유네스코 세게문화유산
산마리노 역사지구와 티타노산
수도 산마리노는 관광도시로
해발고도 750m의 바위산 꼭대기에 있으며,
시 입구까지 자동차 도로가 나 있다.
주위는 3개의 요새화된 바위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채는 박물관, 전시회장이 되어 있다.
그 밖의 사적으로는 1894년에 재건된
정부관청, 바실리카 성당 등이 있다.
산마리노시 이외에는 몇몇 농촌이 있을 뿐이며
주변의 중부 이탈리아의 농촌과 마찬가지로
주민은 곡물과 포도를 재배하고 목축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근년에는 이탈리아로
나가 취업하는 인구가 많아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산마리노 역사지구와 티타노산의 성채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산마리노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중세 자치도시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13세기 중반 공화정체제를 수립한 산마리노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 때의 집정관 제도를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집정관은 왕을 대신하는 국가지도자로,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같은 존재다.
현재의 국경선은 1463년 확정된 것 그대로이며,
국방은 이탈리아가 맡아주고 있으며,
2006년 자발적으로 조직된 군대가 있긴 하지만,
국가 의전 등으로 역할이 제한돼 있다.
산마리노는
티타노산의 산 중턱 및 산정에 입지한
도시국가로
관광산업이 주민의 주요 소득원으로
국가세입의 60%를 차지한다.
1992년 국제연합에 가입하였으며,
행정구역은 9개 자치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탈리아의 행정구역 상으로는
에밀리아로마냐주와 마르케주 사이에 위치한다.
산마리노 성벽
울릉도보다 작은 산마리노는
티타노 서쪽 정상의 요새 아래 자리잡아
3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오래된 집과 가파른 골목길에는
중세의 모습이 남아 있다.
산마리노 역사
산마리노의 국가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1700년 전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석공 마리누스가 세운 나라다.
그의 이름을 따 산마리노 공화국이라 부른다.
산마리노는 1263년에 첫 공화정제를 수립했지만,
몬테펠트로가와 로마 교황의 보호령이 되기도 하였다.
1631년에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독립국 승인을 받았으나,
1815년 빈 회의에서 인정을 받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1800년대 들어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산마리노의 독립국 지위는 또 한 번 흔들렸다.
당시 전쟁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이
이곳으로 숨어들었고,
주변국 중 일부가 산마리노를 비난하며 공격을 가했지만
산마리노 정부가 이들을 격퇴했다.
이를 계기로 산마리노는
이탈리아 통일 후에도 독립국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산마리노인, 이탈리아인, 기타 민족이 살고 있다.
산마리노의 주민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연간 400여 만 명이 관광을 오는 곳이다.
산마리노의 집정관 제도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1243년 최초로 2명의 집정관이
대평의회에서 선출된 이후
현재까지 이 제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산마리노는 현대에도 집정관이 통치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산마리노는 외교권만 있고 관세권은 없다.
이탈리아와 긴밀한 협조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산마리노의 산업은
농목업 이외에 방직업, 건재업, 포도주,
도기, 피혁 제조업 등이다.
산마리노의 전통 공예는 세라믹 제품과 철로 만든 것
현대적인 것을 복제한 가구제품 등이 있다.
회화, 특히 우표는 국가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마리노의 국내총생산(GDP)은
2016년 기준 16억달러에 달하며,
1인당 국민소득도 49,991달러로 우리나라보다 높다.
나라 빚도 거의 없고, 실업률도 1%대로 낮은 편이다.
주된 산업은 관광, 서비스업으로,
매년 많은 수의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대부분이 몇 시간 정도만 머물기 때문에
숙박시설은 적다.
이탈리아와의 경제관계가 밀접하며,
리미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각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2008년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마리노 역사지구와 티타노 산은
요새, 성탑, 성벽, 교회, 수도원 등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뿐 아니라
역사지구 전체가 중세 도시국가의 발달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산마리노는
연간 관광객이 400만 명 이상 다녀갈 정도로
매력적인 특유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이탈리아와 연결된 도로를 따라 운행되는
버스와 자가용 등의 차편을 이용할 수 있고,
리미니 국제공항에서 산마리노까지 헬리콥터를 타거나
산마리노까지 연결된 케이블카를 타고
도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산마리노의 오래된 유적들을 보호하고자
마을 내에서는 자동차 이용을 금지하고 있다.
산마리노의 성벽 요새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벽 안으로는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어
이 곳에서 하차했다.
주차장 근처에서
아래를 내다 본 풍경
Porta San Francesco 산 프란체스코 성문
14세기에 사암을 재료로 하여
아치 형태로 만들어졌다.
성문 안으로...
CASSA DI RISPARMIO 상호저축은행
MUSEO DELLA TORTURA 고문 박물관
고문박물관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 교회
1361년 14세기 중반에 세워진
역사지구 내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물로,
안토니오 알베르티(Antonio Alberti)의
15세기 그림이 있다.
호텔 티타노
1894년도에 오픈한 오래된 4성급 호텔
주세페 가리발디(1807.7.4 ~ 1882.6.2 ) 동상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헌신한 군인,
공화주의자.
공화주의에서 사르데냐왕국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주의로 전향,
해방전쟁 때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했고
‘붉은 셔츠대’를 조직하여 남이탈리아왕국을 점령,
사르디니아왕에 바침으로써 이탈리아통일에 기여하였다.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동상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과 통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산마리노로 피난을 왔는데,
산마리노 주민들이
이들을 숨겨주고 잘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그후 이탈리아는 통일을 하고
가리발디는 산마리노 주민들의 뜻에 따라
산마리노를 이탈리아에 편입시키지 않고
독립국가로 남겨두었다.
이에 산마리노 주민들은 가리발디 동상도 세우고
기념 우표도 발행하며 기념하고 있다.
티타노 광장
산마리노는 면세국가이기 때문에
와인이나 생필품들을 좀 더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 이탈리아 사람들도
많이 들른다고 한다.
산마리노는 나라 전체가
면세구역이다.
오래된 집과 가파른 골목길에는
중세의 모습이 남아있다.
리베르타 광장 입구
리베르타 광장은
나중에 내려 오면서 보기로 하고
제 1성채를 향해 계속 올라갔다.
산마리노의 주요 축제 중 하나인
'중세의 날'에는 산마리노 국가대표들과
이탈리아 주변 마을 대표들이
함께 석궁 대회를 벌인다고 하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산마리노 역사지구 티타노산에는
13세기에 세워진 세 개의 탑이 있다.
세 개의 탑(Torri di San Marino) 중
첫 번째 탑은 프리마 토레
(Prima Torre, 과이타(Guaita)),
두 번째 탑은 세콘다 토레
(Seconda Torre, 체스타(Cesta)),
세 번째 탑은 테르차 토레
(Terza Torre, 몬탈레(Montale))이다.
산마리노 역사지구 티타노산
티타노 산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8각형 모양의 제1탑 로카(Rocca)는
톱니 모양 상단을 가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발고도 756m에 달하는 산 정상에 세워진
제2탑 체스타(Cesta)는 14세기 프라타 성벽을
매개로 도시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절벽 위에 있는 제3탑 몬탈레(Montale)는
16세기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8~19세기 들어 복구되었다.
산마리노는 티타노 산 위의 3개의 봉우리 위에
각각 요새 및 감시탑 역할을 하는 탑을 건설하여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왔다.
제 1요새 로카(Rocca, 과이타)
11세기에 지어져 3개의 성채 중
제일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과이타는
여러번 확대와 수복을 해 왔다.
그 가치를 최대로 알리게 된 것은
1463년의 마라테스타가(현재의 리미니)와의 전쟁으로
산마리노 공화국에서는 마지막 전쟁이었다.
1975년까지 몇세기에 걸쳐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제 1탑 과이타 요새 외부
산마리노의 3개의 성채 중
개방 된 곳은 2번째 성채까지이다.
8각형 모양의 제1탑 로카(Rocca)는
톱니 모양 상단을 가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 1탑 로카, 과이타
해발 755m의 높이에 세워진
첫 번째 탑은 11세기에 건축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입구
(밑에 성채 사진들은 인터넷과 여행사 홈피에서 가져왔다.)
첫 번째 탑
프리마 토레(Prima Torre, 과이타(Guaita))
첫 번째 탑 과이타(Guaita)
첫 번째 탑 과이타(Guaita)
두 번째 탑 체스타(Cesta)
세콘다 토레(Seconda Torre)
해발고도 756m에 달하는 산 정상에 세워진
제2탑 체스타(Cesta)는 14세기 프라타 성벽을
매개로 도시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탑 체스타(Cesta)
티타노 산정의 최고점(755m)에 있는 체스타는
13세기에 지어졌다.
중앙 부분은 다른 두 성채와 같이
5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
동시대의 건조물에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다.
현재는 중세시대의 무기가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두 번째 탑 체스타(Cesta)
두 번째 탑 체스타(Cesta)
세 번째 탑 몬탈레(Montale)
테르차 토레(Terza Torre)
제 3의 성채 몬타레
체스타로부터 도보 약 7분
이 성채는 14세기에 지어졌다.
티타노 산 기슭에 지어져 주로 먼 적을
정찰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성채 주위에는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지키기 위해 바위를 쌓아 올렸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없다고 한다.
입구는 지상 7m의 곳에 있어
이 시대에는 잘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이 또한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내려간다.
저 멀리 아드리아해가 보인다.
[참고서적: 두산백과, 위키백과]
[서명이 없는 사진은 인터넷과 여행사 홈피에서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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