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미켈란젤로, 지오토, 레오나르도 다 빈치등 유명 예술가들의 걸작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역사지구 전체가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마치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이 일부러 합심하여 도시 하나를 꾸민 것 같다.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궁과 옥외미술관인 로지아 데리 란치의모습
베키오궁 앞에 있는 광장으로 오랫동안 피렌체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였다.
피렌체 사람들은 국가에 일이 있을때 시뇨리아 광장에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토론하여 국가의 문제를 결정 했다고 한다.
베키오궁전
마치 요새와도 같은 피렌체의 시청사는 14세기 고딕건물로
조각가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던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작품으로
1298년에 착공하여 몇 번에 걸친 개보수를 거쳐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540년에 코시모 공작 1세가 내부를 개조했는데, 개조 작업은 바사리가 했다.
일찍이 피렌체 공화국(토스카나 공화국)의 청사였던 건물로,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시계탑으로 사용하고 있는 종탑은 두오모의 웅장한 돔과 함께 피렌체를 상징하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종탑의 높이는 94m이며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내는데 쓰였다.
피렌체 공화국의 문장을 지닌 사자상
코시모 1세 동상과 종교개혁자였던 사보나롤라 처형지를 볼 수 있다.
피렌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예술과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 덕분이었다.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던 메디치 가문은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에
라파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단테, 보티첼리 등 쟁쟁한 거장들이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 최초의 피렌체 군주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동상
코시모 1세는 1537년 알렉산드로 메디치가 암살당하자 권력을 쥐게 된다.
알렉산드로 메디치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코시모 1세의 선조는 국부로 불렸던 코시모 메디치의 동생인 로렌초 메디치로
이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 계승이 단절되고 차자 계열로 이동한다.
코시모 1세는 1537년 7월 말 프랑스군과 연합한 반대파의 저항을 물리치고,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인정을 받아 지위를 굳혔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마지막 대공이었던 지안 가스토네 데 메디치(1671~1737) 때까지 피렌체의 군주로 군림한다.
코시모 1세는 냉혹하고 독재적인 지배자였으며 시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 피렌체는 작고 보잘것없던 도시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부강한 나라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로 성장했다. 또한 코시모 1세는 다른 메디치 가문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학문에 대한 후원활동을 계속했다. 치세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란체스코에게 대부분의 정사를 맡긴 채 카스텔로 저택에 은거했다.
1574년 저택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았으며, 산 로렌초 성당에 안치되었다.
1610년 베네치아에서 출간한 별의 사자(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를 발견한 것에 관해 위와 같이 말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를 지배하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목성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점, 그에게 4명의 자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그 위성들을 메디치가의 별로 이름 붙였다. 이에 따라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 전속 수학자 겸 철학자로 고용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네 위성이 갈릴레이 위성으로 일컬어진다.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 레오 11세, 클레멘스 7세 등 세 명의 교황을 배출했고 코시모 1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비가 되는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단테, 미켈란젤로,레오나르드 다빈치,지오토등의 유명한 예술인들이 피렌체 출신이다. 넵투누스 1575년 암만나티가 토스카나 해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물의 요정에 둘러싸인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을 묘사하고 있다. 암만나티가 시뇨리아 광장 분수를 위한 콩쿠르에서 우승, 제작한 넵투누스로 진품이다. 넵투누스 분수 옆의 돌바닥에 박혀 있는 둥근 금속은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화형에 처해진 곳을 표시한 것이다. 많은 이탈리아 초등학생들이 여행을 와 역사를 배우는것을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었다. 베키오궁 앞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바치오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상 도미니크회 수도사 사보나롤라는 15세기말 메디치가를 몰아내고 피렌체의 지도자가 돼 과격한 교회개혁을 주도하다 시민들에게 끌어내려져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 당한다. 그에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시민들은 다시 메디치가를 모셔들인 뒤 이 시민의 승리를 기념하기위해 베키오궁 앞에 두 조각상을 세운다. 왼쪽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오른쪽 바치오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상이다. 그러나 조각상들이 비바람에 부식되자 1873년 원본은 아카데미아미술관으로 옮기고 복제품을 만들어 세웠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성경에 나오는 다윗으로 골리앗과 마주한 다윗이 막 돌을 던지려고 하는 나체상이다. 다비드상은 압제자에 대한 공화국의 승리의 상징으로 피렌체공화국 시청사 입구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 위치의 다비드상은 원본과 똑같이 만든 모조품이며 원본은 보존상의 이유로 시청 앞에서 피렌체 아카데미갤러리에 있다. 대성당의 작업장에는 50여 년 전에 조각가 두초가 예언자 상을 제작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대리석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당시 26세였던 미켈란젤로는 결이 좋지 않아 조각하기 어려운 이 대리석을 이용하여 3년만에 5.49m의 거대한 다비드상을 완성하였다. 몸 전체의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고, 노기 띤 얼굴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몸 오른편은 손과 발이 모두 수직으로 지면에 고정되어 있지만, 왼손은 돌팔매를 잡기 위해 올려져 있고 왼발도 약간 움직여 다음 행동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천재란 어떤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는 로맹 롤랑의 말이 생각난다. 바치오 바리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상 복제품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여신의 미움을 받아 12가지의 과제를 행하였다. 로지아 회랑 고대와 르네상스의 복제 조각품들이 전시 되어 있다. 피렌체의 상징인 사자 두마리가 계단에 있다. 로지아 회랑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안고 있는 메넬라오스 아킬레스와 트로이공주 포리세나 1865년 피오 페드의 작품이다. 켄타로우스를 공격하는 헤라클레스 사비니족의 불행을 나타낸 사비니 여인의 강탈
1583년 지암 볼로냐의 작품으로
몸부림치는 인물들이 모두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로 만들어진 유명한 작품인데,
고대 로마시대에 이웃 부족의 처녀를 납치하여 아내를 삼은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메두사 목을 든 페르세우스상
1554년 벤베누토 첼리니가 만든 작품으로 사실적인 인체 묘사가 돋보인다.
현재 이탈리아의 명품 지아니 베르사체의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는 메두사의 목
페르세우스상 받침대
아르노강과 피렌체 도심의 중심인 시뇨리아광장으로 연결되는 우피치미술관의 중정
이 중정은 정원이라기보다 광장과 비슷한 역활을 하기때문에 우피치광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우피치 궁전으로, 초대 토스카나 대공이 된 코시모 1세의 정부 청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르지오 바사리의 설계로 1560년 부터 짓기 시작해서 바사리가 죽은 후 1581년에 완공.
메디치가가 단절되면서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는 1737년,
200년 동안 모아온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은 물론이고,
바로크, 로코코시대의 미술품을 망라하는 수집품들을 피렌체 공국에 기증해
1765년에 우피치 미술관으로 개명하고 일반에게 공개.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64년 8월 1일 세상을 떠나 산로렌초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당으로 향하는 그의 시신 뒤로 피렌체의 수많은 시민이 뒤따랐다.
코시모는 조국의 아버지, 즉 국부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피렌체의 문예와 산업을 진흥시키고 메디치 가문 300년 역사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학문과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까지도 메디치라는 이름이 그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크게 부여 받으며
회자되는 데에는 코시모 메디치의 역할이 매우 컸다.
메디치 가문은 코시모가 세상을 떠난 1464년 이후로도 1737년 지안 가스토네 대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시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루었고,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1569∼1574) 때는 피렌체가 유럽 굴지의 강국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로 성장했다.
그는 사려가 깊고 중후하며 예의가 바르고 덕망이 넘쳤다.
고통과 유배와 신변위협을 겪으면서도 관대한 성품으로 모든 정적을 누르고 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다.
부자이면서도 생활 모습은 검소하고 태도는 소탈했다.
당대에 그처럼 정치에 통달한 이는 드물었으니, 그는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코시모 메디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
우피치 미술관 입구 회랑 기둥에는 유명한 인물 석상들이 서 있다.
이탈리아 통일에 의하여 국립미술관이 되어 1800년에 조각류가 국립바르젤로미술관과 국립고고미술관에 분할되었다.
현재 3층에 회화, 2층에 소묘와 판화, 1층에 고문서류를 수장하고 있다.
아르노 강가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피치궁전의 우피치 미술관
저 문을 나서면 베키오다리가 있는 아르노강변으로 나가진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1667-1743)는 코시모 3세의 딸로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다.
남동생 지안 가스토네 데 메디치 토스카나 대공 사후 토스카나 대공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무사했다.
오랜 기간 예술가들을 후원해온 메디치 가의 방대한 컬렉션은 안나가 상속하게 되었고,
안나는 이들 컬렉션을 피렌체에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토스카나 정부에 기증했다.
1743년 그녀의 사후 300여년에 이르는 가문은 끝났지만 가문의 영광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메디치 가의 컬렉션은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관으로 꼽히는 우피치 미술관의 전신이 되었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하여 미케란젤로의 성가족,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수태고지, 티치아노 등 르네상스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
이외에 르네상스 이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과 회화도 감상할 수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다비드 상을 비롯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1667-1743)
르네상스 회화의 컬렉션으로는 질이나 양적으로 세계 제일의 미술관이다.
우피치미술관의 우리가 많이 보던 유명한 소장품들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작
우피치미술관 소장
프리마베라(봄) 산드로 보티첼리작
우피치미술관 소장
건축가겸 화가 지오토상
우피치 미술관 앞의 때와 장소에 걸맞는 행위 예술가
"이탈리아에는 친절함을 바라고 오는 게 아니다. 인생을 바라고 오는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의 교양인들에게 피렌체는 절대적인 여행지였다.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했고, 죽으려면 거기서 죽어야 했다.
19세기 영국인들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는것이 꿈이자 유행이었다.
1820년 피렌체를 여행하던 영국인 나이팅게일부부가 딸을 낳자
그녀의 이름을 플로렌스(피렌체의 영어발음)로 지었다.
그녀가 바로 크림전쟁의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아일랜드는 유명한 기록 책인 기네스 북을 발간하는 흑맥주 회사 기네스 맥주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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