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베키오 다리,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산타 크로체성당,단테 박물관

푸른 바다. 2010. 5. 13. 13:00

피렌체

 

서유럽 여행 9일째

로마에서 약 300Km를 달려

 꽃의 도시,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피렌체로 향했다.

 

중학교때 읽은 책에서 플로렌스란 지명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는 곧잘 플로렌스는 어떤 곳일까? 하고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상상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하인리히 만의 소설 앙리4세에 나오는 메디치가의 두 프랑스 왕비 

카타리나 드 메디치(앙리 2세의 왕비)와 마리 드 메디치(앙리 4세의 왕비)로 인하여,

궁금증이 커 가던 피렌체의 메디치가!

머나먼 이탈리아에서 암흑의 중세를 깨고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피렌체!

그곳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들이다.

 

피렌체 (영어명 플로렌스)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

명칭은 ‘꽃 같은 도시’의 뜻. 아르노 강 중류에 위치한다.

‘로마의 딸’이라 불리웠던 고대로마의 도시로 예부터 교통, 무역의 요충지이며

특히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의 번영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탈리아 뿐아니라 전유럽의 금융업, 직물업의 중심지로서 풍성한 번영을 보였었다.

 

 

12세기 이래 공화국으로 교황파에 속하고 14세기의 페스트 대유행 후,

많은 은행가의 활약으로 서서히 부를 축척하여 갔고

15세기에는 메디치 가의 지배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번영의 절정에 서게 된다.

특히 15세기에는 마사치오, 도나텔로를 비롯 많은 발군의 천재를 낳아 르네상스 문화를 꽃 피운다.

그러나 15세기 말 메디치 가의 몰락, 프랑스군 침입, 사보나롤라의 신성정치, 경제적지반의 붕괴 등에 의해서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주의적 르네상스 문화는 쇠퇴하였다.

1537년 이후부터 대공국이 되었고, 코지모 대공 치하에서는 아카데미아를 일으켜

궁정적 · 귀족적인 마니에리슴(전성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특이한 경향을 지닌 예술 양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렌체의 역사지구는 사방 1km밖에 안 되는 좁은 구역이다.

 하지만 지역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가득 차 있다.

 곳곳에서 걸작품들을 보면 ‘꽃’의 도시(피렌체는 꽃이라는 의미이다)라는 이름이 진정 무색하지 않다.

마치 작품 하나하나가 꽃이 되어 거리에 벽면에 피어서 도시를 장식하고 있는 것 같다.

 

 

 

유형의 유물보다 이 도시를 빛내는 건 이곳에서 재주를 펼치고,

기량을 겨루고, 명성을 얻었던 이들의 흔적이다.

 “이제야 겨우 예술에 입문했는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다니!”라고 임종 직전에 고백했다는 미켈란젤로,

 그가 죽어서도 돌아오고 싶어 했던 도시가 피렌체였다.

 로마 교황청이 나이 일흔의 갈릴레오를 재판을 위해 불렀을 때

세상이 그를 버린 순간에도 기꺼이 마차를 내주고 보호했던 유일한 도시.

 그래서 피사 출신의 갈릴레오는 이곳 산타 크로체 성당의 미켈란젤로 옆에 묻혀 있다.

피렌체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쫓겨났던 단테. 

교황의 간섭에 대항했다는 죄목으로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도시를 몰래 떠났던 그는

그토록 그리던 이 도시로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했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무덤을 되찾기 위해 아직도 라벤나 시민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베키오 다리
아르노강 위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45년에 건설되었으며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 알려져 있다.

다리의 1층은 일반 시민들의 통행로였고 2층은 우피치궁에서 피티궁을 잇는 귀족들의 이동 통로였다.

   1944년 연합군의 추격을 받던 독일군이 강 양쪽 기슭의 집을 모두 파괴했으나 베키오 다리 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원래 이 다리에는 푸줏간, 대장간, 가죽 처리장 등이 있었는데

 1593년에 페르디난도 1세가 시끄럽고 악취가 난다며 모두 추방하였고 대신 금세공업자들이 다리 위의 상점에 세들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베키오 다리의 금세공 상점들은 다양한 보석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판매하는
수공예 제품들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이 다리에서 피렌체의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그 증표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강물에 버린다.  다리 입구에는 관광객이 채워놓은 자물쇠가 빼곡하다.

이 다리 위의 피티궁까지 연결되는 바사리의 회랑으로는 2차세계대전때 히틀러가 강을 구경하며 걸어갔다고 한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 베키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아르노강의 일몰 풍경이 일품이라고 한다.

 

피렌체의 유대교회 시나고그와 도시 전경.

 

시나고그에서는 예배의식, 각종 집회, 교육훈련 등이 이루어지며

유대인의 종교 뿐 아니라 행정, 교육 그리고 사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피렌체의 지붕들은 모두 붉은 기와로 되어 있어 피렌체가 장미빛 도시로 불린다.

그런데 딱 한군데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 곳이 유태교회 시나고그이다.

 피렌체 시에서 붉은 기와로 바꿔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유태인 사회에서 거절했다 한다.

 

산타 크로체성당

 

피렌체의 기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9년 아르노 강에 식민지를 세울 때,

"꽃피는 마을"이란 뜻으로 "플로렌티아"라고 임명할 때이다.

기원후 1000년까지만 해도 작고 중요하지 않은 도시였다.

그러나 자치제가 생기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900년에는 인구가 5,000명이 되었다가 1200년에는 30,000명으로 늘었다.

 후에 양모 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피렌체의 은행업자들은 성공하면서 도시에 수많은 재산을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14세기에는 여러 미술이 시작되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되었다.

다음 300년 동안, 피렌체는 역사상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15세기 초반에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통치하게 되어, 강한 자치 국가로 변하였다.

 에마누엘레 1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한 뒤 1870년 수도를 로마로 옮길 때까지,

865년부터 5년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수많은 고대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나, 예술품들은 피해를 면하였다.

 

미켈란젤로 언덕의 다비드상 청동 복제품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그의 대표작인 다비드상의 청동 복제품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피렌체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피렌체 관광의 필수 코스다.

나 역시 피렌체시 전망을 찍은 사진들은 다 이 언덕에서 찍었다.

이 곳에서 내려다 보는 피렌체의 석양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미켈란젤로 언덕의 기념품 노점상에는 피노키오의 고향답게  엄청 많은 피노키오 기념품이 있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조토의 종탑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는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으로

피렌체 주교좌(두오모)성당이라고도 불린다.

175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건물답게 장엄하고 화려해서 피렌체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두오모의 거대한 주황색 돔은 피렌체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작품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으로 꾸며진 외관이 화려하다.

 

미켈란젤로는 숨을 거두기전  어디에 묻히고 싶으냐의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영혼은 하늘로 가겠지만 지상에 남은 육체는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볼 수 있는곳에 묻어 달라고.

 

출처 네이버 테마 백과사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바실리카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하여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36년 3월 25일 축성하였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녹색과 핑크색, 흰색의 대리석 파사드,

르네상스 거장들 그림과 조각 작품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돔 덕분에 명성이 높다.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이 바실리카가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또한 1439년부터 피렌체 의회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가이자 '허영의 소각'

(죄가 된다고 여겼던 사치품과 이교도적인 미술품, 책 등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성당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다.

1478년 피렌체의 공동 통치자였던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라이벌인 피사의 대주교와 교황 식스토 4세가 보낸 이들에게 찔려 숨졌던 것이다.

 그의 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역시 칼에 찔렸으나,

무사히 몸을 피했고 이후에는 대주교를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현관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와 조각상들도 에술적 가치가 뛰어 나다.

 

3개의 현관이 있으며  그린과 핑크, 화이트의 대리석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로 만들어져 그 색의 조화로움이 아름답다.

 

 

 

도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피렌체에서도 두오모는 피렌체의 상징이다.

 

 

높이 106m에 이르는 붉은 돔 '쿠폴라'의 464개 계단을 따라 성당 꼭대기에 오르면

빨간 지붕으로 뒤덮인 피렌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쿠폴라 천장에는 바사리의 프레스코화 창세기,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고,

본당 뒤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있다.

 성당 지하에는 쿠폴라를 설계하고 건축한 브루넬레스키의 무덤이 있다.

 


 1418년 돔을 건축할 디자이너를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다.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발되었다.

그의 혁신적인 설계는 발판이 필요 없이 스스로 지탱되는 돔을 낳았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공되어,독창적인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졌고 그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이 돔은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돔 안쪽에는 추카리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는데

밑에서 보면 천국의 모습이 돔을 오르면서 보면 지옥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 판테온 신전의 돔의 영향을 받아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만들었고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보고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의 돔을 만들었다 한다.

 

 

 냉정과 열정사이에 주인공 남녀 준세이와 아오이가 

10년 뒤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가 바로 이 성당의 코풀라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탑으로

단테가 유리상자에 넣어두고 감상하고 싶다고 극찬한 종탑이다.

종탑의 높이는 85m이며 흰색과 분홍색 초코렛색의 토스카나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왼쪽의 종탑은 흰색, 연두색, 분홍색의 토스카나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건축가 조토가 만들었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두오모 옆에 있는 85m 높이의 종탑으로 조토가 종탑 하단부를 짓고 사망하자

 그의 제자들이 나머지를 완성하였다.13세기에 시작해서 14세기에 건축된 것이다.

지붕은 그의 제자 안드레아 피사노와프란체스코 탈런티등이 장식했다.

외벽은 흰색, 분홍색,초코렛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414개의 계단을 올라 탑꼭대기에서

피렌체의 전경과 두오모의 쿠폴라(돔의 천장)를 보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산 조반니(성 요한) 세례당

 

피렌체 두오모 건너편에 있는 산 조반니(성 요한) 세례당은 

두오모 대성당의 부속세례당으로 1128년까지 피렌체의 구대성당이었으나 현재의 대성당이 건립된 뒤에 세례당이 되었다. 

팔각형 플랜에 팔각지붕을 덮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11세기 말에 건축을 시작하여 12세기 초에 완성하였으며, 도시의 수호성인 산 조반니(성 요한)에게 바쳐졌다.

 단테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세례당에는 3개의 청동문 출입구가 있는데

피사노는 1336년에 도금한 청동 부조로 세례자 요한의 일생을 묘사한 세문중 제일 오래된 제1(남쪽)출입문을,

 제2(북쪽), 제3(동쪽)의 문은 기베르티가 1401년에 실시한 콩쿠르의 결과로 위촉되어 제작된 것으로

제2문(1404~24)에는 그리스도전,사복음서기자, 성자전을 표현했는데 금색 도금으로 황금빛이 나는 문으로

 미켈란젤로에 의하여 천국의 문이라 극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제3문(1425~52)에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

 

 

 

광장 노천 카페

 

산타 크로체성당

 

1294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를 바탕으로  탁발승단의 프란체스코회수도원 성당으로서 착공,

1442년에  헌당된 고딕 성당. 그 동안에 당초의 설계는 계속 변경되었으며, 말기에는 브루넬레스키도 참가하였다.

주간을 넓게 잡고 바실리카식 장식 천장을 채용했으며, 구조상의 특징은 시에나 대성당에 가깝다.

  당내에는 단테, 미켈란젤로 등 이탈리아의 유명인들의 기념묘가 많고, 피렌체의 판테온이란 이름도 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원 교회당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그 이름 Santa Croce는 성스러운 십자가를 의미한다.

 이탈리아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물 프란치스코회 교회당으로서는

최대급 규모(전장 115m, 전폭 74m)이다.

 

 

기둥이 없는 내부 구조가 특이하며 성당 지하 벽면을 따라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단테, 마키아벨리,로시니등 피렌체 출신

유명 인사의 묘지와 기념비가 있어 묘지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피렌체의 대표 시인 단테는 기념비만 있다.

피렌체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결석 재판으로 귀족파인 네리당(흑색당)에게

사형 선고와 영구 추방 당한 단테는 1321년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에 사망한 뒤, 라벤나에 묻혔기 때문이다.

 

왼쪽 옆으로 단테상이 보인다.

원래는 성당 앞에 서 있다가 너무 권위적이라고 해서

한쪽으로 비켜 세웠다고 한다.

 

이 성당은 도나텔로의 십자가 상과 수태고지,

치마부에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

지오토의 벽화 두 요한과 성프란체스코전의 일부가 남아 있다. 

 

단테의 조각상

 

단테는 피렌체에서 출생한 르네상스의 선구적 문인으로, 최후의 중세인이라 불리고 있다.

정쟁에 가담하였다가 추방된 뒤 이탈리아 각지를 방랑하였다.

한편 신격화되고 영화된 베아트리체와의 연정을 노래한

그의 대표작 신곡은 중세적 사상이 남아 있지만, 등장 인물에 대하여는 개성적인 비판이 가해졌고,

 이탈리아 어로 기록되어 근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철학 서사시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이 각각 33개의 곡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서곡을 합쳐 모두 100곡이다.

신곡은 시로 표현된 단테의 자서전적인 책이다.

그는 두 명의 교황을 비롯한 자신의 적들을 지옥에 던지고,

자신의 친구와 존경하는 인물은 연옥(또는 림보)에 두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천국에 모셨다.

망명 당시에 단테는 지옥의 처음 일곱 곡을 완성한 상황이었으며,

이 원고를 압수한 정적들조차도

그 문학성에 감탄한 나머지 원고를 단테에게 돌려보내며 완성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지옥의 경우에는 사전지식 없이 읽어도 충분히 압도적이며,

단테의 탁월한 상상력이 빚어낸 걸작이다.

 

단테 박물관

 

단테는 19년의 유랑 기간에 영원불멸의 서사시 신곡을 써서 중세의 모든 학문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아우름으로써 르네상스시대를 여는 철학과 사상의 디딤돌을 놓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단테를 떠받드는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의 이탈리아어를 확립한 업적에 있다.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 분열돼 있으면서 각기 다른 방언을 썼다.

그러던 시대에 단테는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일상어로 썼고

그가 쓴 피렌체 말, 즉 토스카나 방언이 이탈리아어로 자리잡게 된것이다.

 

 

700년전에 살았던 단테의 생가는 없어지고

 이곳은 단테탄생 600주년을 기념해 1865년피렌체에서 사들인 것이라 한다.

 내부에는 7개의 방에 걸쳐서

 단테의 생활과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의 생활과 단테의 행적등이 시대별로 정리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 전편을 적어 놓은 종이나 책들을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라고 하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두 사람은 신체적 접촉은커녕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다.

단테는 베아트리체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연애시를 줄줄이 써냈지만,

정작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에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전전긍긍 가슴만 앓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못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은 그저 단테의 짝사랑이었고,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1318년,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을 마무리한다.

단테는 신곡 천국편에서 피렌체 시민들이 자기를 계관시인으로 맞아달라고 희망했지만,

 라벤나의 외교 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다가 병에 걸려 1321년 9월 14일에 사망한다.

 56년간의 삶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9년을 망명객으로 보낸 뒤 맞이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어서야 실책을 깨달은 피렌체는 단테의 유골을 모셔오려 했지만 라벤나는 번번이 거절했다.

 1519년에 교황이 그 분쟁에서 결국 피렌체의 손을 들어주자, 라벤나는 단테의 유골을 몰래 빼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모처에 은닉되었던 유골이 발견되어 라벤나의 작은 교회에 안치된 것은 무려 1865년의 일이었다.

사후 500년이 되어서야 단테의 긴 유랑은 비로소 끝났던 셈이다.

 

 

전기로 충전하는 오토바이

피렌체에는 전기로 충전하는 경차도 볼 수 있었다.

 

장식용품 가게

 

옷가게

 

신발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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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집 외벽에도 조각상이 있다.

 

 참조: 1.네이버 백과사전

 2.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