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겔란 조각공원
북유럽 여행 2일째 첫 관광을 비와 함께 시작했다.
비가 와도 오늘 둘러 볼 곳은 비겔란 조각공원을 시작으로오슬로 시청, 아케르스후스성, 카를 요한거리, 오슬로 민속박물관,홀멘콜렌 스키점프경기장, 오페라 하우스 등이다.
밑에 사진들은 왼손으로 우산을 잡고 오른손으로 카메라를 잡고 찍은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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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이곳은 비겔란의 유언에 따라 누구든지 무료로 드나들 수 있는 공원이다.
비겔란은 불행하게도 자기 일생의 역작으로서 모든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고자 했던
이 공원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그의 작품에 어떤 상징성도 부여하지 않고 어떤 제목도 달지 않아
작품에 대한 해석을 관람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비겔란 조각공원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이름을 따 비겔란 공원이라 불리지만 프롱네르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비겔란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이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20세기 초 오슬로시는 비겔란에게 공원 설계와 조각 작품을 의뢰했고,
비겔란은 청동, 화강암, 주철을 사용해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공원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그의 제자와 오슬로 시민들이 합심해 지금의 공원을 완성하였다.
(출처:저스트 고)
구스타브 비겔란트(1869 - 1943)
구스타프 비겔란은 목수였던 아버지의 솜씨를 물려받았으나,
어린 비겔란을 진정으로 매료시킨 것은 조각이었다.
그는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공부했고,
파리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겔란의 조각 작품에는 자연주의적인 정서가 담겨 있으며,
죽음과 남녀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한 인물의 흉상과 부조가 주를 이루었다.
(출처: 위대한 화가 마로니에북스)
구스타브 비겔란트
노르웨이의 조각가. 만다르에서 출생하여 오슬로에서 사망.
망치와 조각칼을 들고 있다.
비겔란은 국제 전시회에 참여하는 일도 좀처럼 없었고 매매된 작품도 거의 없었기에 살아 생전엔 국제적 명성이 없었으나이제는 그가 남긴 훌륭한 조각 공원의 작품들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다.
비겔란 조각공원 남쪽에는 비겔란박물관이 있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천재 조각가 비겔란의 작업실겸 집이었다.
1920년대에 오슬로시에서 가난했던 비겔란이 생계 걱정 없이 조각에 임할 수 있도록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한다.
비겔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완성된 조각 작품은 물론 조각을 만들기 위한 초기 모형,
밑그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시에 기증하였다.
예술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오슬로 시민들의 높은 문화수준을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은 비겔란 사후 4년 뒤인 1947년에 문을 열었다.(출처: 두산백과)
약 10만평의 공원에 청동, 대리석, 화강암과 석고로 된 약200점의 작품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노병사를 표현한 것이다.
연간 5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는 비겔란 조각공원
이 다리의 양쪽 끝자락 네 개의 모서리에는 정교한 대리석 기둥 위에
남녀 각각 2개의 인물상이 환상의 동물인 이무기와 함께 조각되어 있다.
이무기의 형상들은 인간을 공격하고 무서운 꼬리로 인간을 휘감는 모습인데
인간들은 이무기,
즉 자기의 고난과 운명에 대행해 싸우기도 하고,
다른 한 편의 연약한 인간은 삶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을 묘사한 이 조각 작품들은
달리거나 레슬링을 하거나 춤을 추고 있는 모습들이다.
비겔란은 이 작품들을 통해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두 아우르는
인생의 단계를 주제로 다루었다.
비겔란이 40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200여점의 화강암 작품과 수많은 청동작품들이
조각 공원으로 들어서는 인생의 다리 양쪽 길이 100m 폭 15m 거리에 늘어서 있다.
비겔란은 작품에 제목도 해설도 붙이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하였다.
구스타프 비겔란은
근대조각의 아버지 로뎅에게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1906년부터 생을 마감하는 1943년까지
40여년을 공원에서 조각 제작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58개의 청동조각은 1926년에서 1933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조화,남녀 간의 사랑과 미움, 세대 간의 사랑과 갈등 같은 다양한 연령층의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비겐란이 중점을 두고 표현한 것은 어린 아이의 형상이라 한다.
예로부터 조각이나 예술의 주제가 일반적으로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 비해 이 곳의 조각들은 아버지와 아이들의 모습에 중점을 두었다는 특징이 있으며 역동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조각상이 많은 것은 비겔란이 이혼한 후 아들을 그리워한 때문이란다.
비겔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오슬로시의 상징물인 싱나타겐 심술쟁이
손이 벗겨져 있는데 이 손을 잡으면 행운이 온다 해서 워낙 많은 관광객이 잡아서라고...1992년 겨울 한쪽 다리가 잘려 분실 했는데 후에 발견되어 다시 붙일 수 있었다 한다.자세히 보면 잘린 부분의 칼라가 약간 다르다고.
인간의 원초적인 내면의 감정 상태가 잘 드러났다는 화난 아이상
이 공원에 있는 조각들은 모두 무표정인데 이 아이만 화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래서 화난 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좋고 나쁨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나이인 세 살 때의 어린 아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비겔란은 어린 아이의 화난 얼굴 표정을 얻기 위하여 초콜렛을 주었다가 빼앗았다는 일화도 있다.
화난 아이 뒷편의 연못
여기에 8명의 작은 어린이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1940년 작품) 원의 중앙에는 성숙한 실물 크기의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 머리를 아래로 한 형태로 놓여 있다고 한다.(1923년 작품) 현지 가이드를 쫓아 가느라 내려가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인간의 굴레시간과 운명을 상징하는 둥근 원을 깨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의 남성을 형상화한 작품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이 묻어 뿌연 원모양의 반점이 생겨있다.ㅋ
여섯명의 인간이 인생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생명의 분수대
거대한 쟁반을 청년과 노인들이 받치고 있는데 청년들은 가볍게,노인들은 인생의 나이만큼 더 힘들게 들고 있다.비겔란은 이 6명 중에 한 명을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 했다 한다.
비겔란 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인 분수대 이 분수대는 비겔란이 가장 열정을 쏟고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이다.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성장, 결혼과 자녀양육, 늙고 죽음에 이르는 생노병사의 과정을 차례대로 표현한 조각상들이다.
원래 이 작품은 1909년에 만들어졌으나 그 이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06~1914년 사이에 분수대 테두리에 20여개의 인물 조각상과 나무 형상의 조각이 추가되었다.
한 나무에 어린 소년이 주변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는 이 조각은 비겔란에 의하면 자신의 어릴적 초상이라고 한다.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분수대의 테두리에 있는 조각들은 인생의 연대순으로 제작된 것들로 조상들의 유골을 줍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으로부터 젊은 청년기의 모습을 거쳐 장년과 노년에 이르러 결국 죽음에 이르는 세월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순환은 죽음 이후에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함을 상징하고 있다. 이 분수대의 조각에서 비겔란은 또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라는 새로운 주제도 소개하고 있는데 어린이는 동물들과 뛰노는 모습으로, 여자들은 동물들과 애정과 신뢰를 나누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남자들은 늑대와 싸우는 형상으로 조각하여 동물들과 투쟁적인 관계를 갖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생의 미로를 표현한 흑백 모자이크 바닥
분수대를 중심으로 사각의 테두리에 16개의 원형의 형상으로 된 흑백대리석 모자이크 바닥의 모양은 하나의 미로를 형성하는데 이 미로의 형상 역시 이 분수대의 조각 세계의 일부로 인생에 있어서의 어려움과 불확실성, 그리고 오랜 인내 끝에 해결점을 찾는, 즉 삶의 긴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 조각공원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모노리트
이 모노리트 석탑은 비겔란 공원에 있는 212개의 모든 조각품을 하나로 응축, 통합시켜 놓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모놀리트(1929 -1943)
무게 260톤, 높이 57피트(17미터)의 단단한 화강암 기둥에
121명의 남녀노소들이 안간힘을 쓰며 서로 정상으로 올라 가려는 모습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투쟁, 희망과 고뇌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모노리트의 석고 모형은 비겔란이 겨우 10개월만에 완성했다고 하며 (1924~1925년),1929년도부터 3명의 석공이 14년간 조각하여 비겔란이 죽기 바로 직전인 1943년도에 완성되어 1944년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모노리트 주변에는 총 36개의 화강암 조각을 원형으로 나열해 놓았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양육, 성장, 사랑, 가정, 노년등 사람의 일생을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겔란은 뛰어난 조각가였지만 이 화강암 조각품들을 직접 조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똑같은 크기의 석고 모형을 손수 만들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인 돌에 직접 조각하는 일은 당대의 솜씨 좋은 석공을 고용하여 자기가 구상한 원래의 모형에 따라 작업하게 하여 이를 완성했다고.
해시계12면의 Zodiac 형상의 대리석 조각 위에 해시계가 놓여 있다.(1930년 제작)이 해시계를 받치고 있는 대리석 조각은 원래 비겔란 어머니의 비석으로 제작하였으나 실제로 사용되지 않고, 엔지니어인 임셋이 디자인한 해시계의 받침으로 설치되었다.
12사수 자리들이 빙 돌아가며 조각되어 있다.
The Wheel of Life 삶의 바퀴
비겔란 공원의 5개 구간의 마지막 구간으로 비겔란 공원 후문 가까이에 있는 이 삶의 바퀴 조각은 네 명의 성인과 세 명의 어린이가 한데 뒤엉켜 있는 모습의 조각품이다.이 원의 형상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의미와 삶,그리고 인간의 사후의 윤회사상까지의 의미를 포함한다.
인간이 죽고 사는 윤회사상을 나타낸 삶의 바퀴 조각
조각공원 전체의 주제를 함축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제 심은 튤립들 여름이 되면 꽃이 활짝 피고 분수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칠 것이다.
여름이 되면넓은 초원에 피크닉 가방을 들고 일광욕을 하며 앉아 있는 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다.
비겔란 조각공원은 주어진 공간에 조각물을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조각을 위한 공원 계획을 추진했다하여 혁신적인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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