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헨
아헨 대성당, 아헨 시청사, 아헨 시립극장
여행 2일째인 오늘은
최초의 유럽인 혹은 유럽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샤를마뉴대제의 도시,
천년 고도인 아헨에서부터 관광을 시작했다.
아헨에서 숙박을 한 관계로 아침 일찍,
독일에서 첫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헨대성당에
도착하여 다른 관광객들 없이 호젓하게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을 외부만 둘러보았다.
아헨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도시로서
벨기에 및 폴란드 국경 가까이에 있는, 로마인들이 건설한 옛도시이다.
도시는 아르덴 고원의 북쪽 사면에 위치해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70도가 넘는 고온의 온천이 솟아 2000년 전부터 로마인들의 휴양지로 이용되었다.
중세시대까지 아헨은 아퀴아 그라니(그라누스의 샘)라고 불렸다.
그라니는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치료의 신이다.
아헨의
역사적인 의미는 샤를마뉴 대제(카를,칼,카롤루스)에서 온다.
샤를마뉴 대제는 서기 768년에 왕이 되어 서기 814년에 죽었고 아헨 성당에 묻혔다.
그는 이곳에 성당과 궁전을 지었고 1165년 신성 로마 제국의 수호 성인이 되자
알프스 이북 지방 최고의 순례지가 되었다.
유럽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742~814)는
가장 아끼는 정착지 아헨을 자신이 두 배로 넓힌 프랑크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아헨은 서쪽은 피레네 산맥, 동쪽은 엘베강,
북쪽은 흑해 연안, 남쪽은 이탈리아 중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의 중심이 됐다.
아헨은 샤를마뉴(카를,칼,카롤루스)대제 시대엔
프랑크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여 제국의회·종교회의·평화회의가 열리는 등
정치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학자·문인들이 모여들어 이른바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에 의해 역사적 건축물들을 상실했으나
시 중심가엔 옛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유명한 건축물이 아헨대성당과 시청사이다.
차창 밖으로 본 아헨 시립극장
극장 소속의 심포니오케스트라가 있는 아헨 시립극장은
아헨과 인근 지역의 중요한 문화 공간으로서
시즌 평균 약 15만 명의 관객이 찾아온단다.
1825년 개관한 아헨의 시립극장
1822년 요한 페터 크레머와 카를 프리드리히 슁켈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하여 1825년 5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적인 폭격의 피해를 받아
건물의 전면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완전히 무너졌다.
전쟁이 끝난 이후 재건되었다.
그리스양식의 시립극장 앞 말 청동상
아헨 시립극장은 프리츠 부쉬, 카라얀, 볼프강 자발리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들이
음악 감독직을 역임했던 극장으로 유명하다.
아헨에서는 역사상 유명한 평화 조약이 2번 체결되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일으킨 네덜란드 전쟁을 결말짓기 위한 강화조약으로
1668년 5월 2일에 체결되었으며,
또 하나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결말을 지은 화약으로
1748년 10월 18일에 성립되었다.
이 도시는 황제가 국가와 교회 모두를 통치하던 곳이다.
아헨은 독일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국경도시이다.
아헨 바로 너머에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있다.
저 교회는 미하엘 교회이다.
814년 샤를마뉴 (카를,칼,카롤루스)대제의 유해를
아헨 대성당에 안치하였고,
1165년 성인 반열에 올라 신성로마제국의 수호성인이 되자
아헨은 알프스 이북 지방 최고의 순례지가 되었다.
아헨대성당 앞이다.
이 탑은 검색으로 현재까지 못 찿았다.
아헨대성당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mkrjjj/63
독일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아헨대성당은
790년부터 800년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립되었는데
독일 최초로 1978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헨 대성당
아헨 대성당은 독일 아헨에 위치한 아헨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당의 수호성인은 성모 마리아다.
790~800년 사이 샤를마뉴 (카를,칼,카롤루스)대제시 건설되었으며
중세건축의 장엄미를 대표한다.
785년경에 착공한 궁정 예배당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오늘날 성당은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에 탑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은 1664년에 덧붙여졌고
1884년에는 서쪽에 첨탑을 세웠다
아헨성당은
고대 이래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 둥근 지붕이 있는 첫 번째 건축물이다.
고딕 양식과 비잔틴 양식의 전통을 온전히 따른 이 성당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뿐 아니라
중세 초기에도 종교적 건축물의 원형으로 유지되었다.
아헨 대성당
팔각형 바실리카와 둥근 지붕이 있는 아헨 대성당은
샤를마뉴 (카를,칼,카롤루스)대제가
790년~800년경에 궁정 예배당으로 건설하였다
1165년에 샤를마뉴 대제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자,
아헨을 방문하는 순례자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
그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중세에 들어 웅장하게 증축하여
이윽고 독립된 대성당이 되었다.
아헨 대성당의
특징은 뾰족한 고딕형식의 높은 첨탑과 둥근 돔의 아름다움이다.
대성당의 중심을 이루는 돔 건물은 8각형이며 16각형으로 된 외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비잔틴양식의 전형이다.
그 당시 8이 종교적으로 완벽함과 조화로움을 뜻하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서유럽 통합과 샤를마뉴 치하의 종교적·정치적 부흥을 상징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아헨 대성당의 정수는
고딕 양식, 비잔틴 양식, 독일·프랑크 양식를 융합한 데 있다.
샤를마뉴 대제는 814년 이곳에 안치되었다.
샤를마뉴(카를, 칼, 카롤루스)대제의 사후에도,
그 셋째아들인 루드비히 1세(서로마황제, 재위 814~840) 이후부터
936년 중세 시대에 걸쳐 1531년까지
30여 명에 이르는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아헨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아헨 대성당은 궁정 예배당으로 건설할 당시부터
뛰어난 예술적 창조물로 여겨졌다.
그리스에서 가져온 기둥과 이탈리아산 대리석, 청동제 창문,
돔에 있는 가장 큰 모자이크(현재는 파괴되어 없음) 등으로 장식하였다.
대성당의 현재 형태는 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처음에 지은 건물 가운데
14세기에 지은 시청 건물에 위치한 대관식장과 궁정 예배당 두 곳이
지금까지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아헨 대성당의
부속 보물실은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보물실로 손꼽힌다.
성당 지하실에는
보석을 아로새긴 금제 로타의 십자가(990), 진주를 수놓은 짙은 청색의 벨벳 제의,
은과 금으로 만든 샤를마뉴 대제의 성골함 흉상, 성모 마리아의 성유물 상자,
샤를마뉴(카를,칼,카롤루스) 대제의 유해가 있다.
그리스 신화 중 페르세포네 납치 내용을 양각한 대리석 관도 있다.
대성당의 외벽
성당 외벽 사이사이엔 조각된 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외벽의 조각상들
아헨 대성당은
비잔틴 요소와 프랑크 요소를 융합한 카롤링거왕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집중식 평면구도로 되어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대리석과 오래되고 화려한 기둥을 가져와 건축재료로 사용하였다.
15세기 초에는 고딕양식으로 성당 내진을 건립하였다.
제단 앞에 샤를마뉴(카를,칼,카롤루스)대제의 황금유골함이
보관되어 있다.
샤를마뉴(카를,칼,카롤루스)대제의 황금유골함
성인 반열에 들고 새로운 관으로 옮길 때
관 표면에 예수, 교황, 제자, 샤를마뉴 대제, 성모마리아를 새겼는데
예수를 중심으로 한 구도가 아니라 샤를마뉴 대제를 중심으로 삼았다.
이 관은 프리드리히 2세가 만든 것으로 대관식 때 직접 새 관에 샤를마뉴
대제의 유골을 옮겨 담았다고 한다.
천장에 예수와 성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건물 내부의 위쪽 벽과 천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1165년에 프리드리히 1세가
지름 4.2m의 커다란 바퀴모양 청동샹들리에 촛대를 달면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둥근 원은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하며 27m 길이의 쇠사슬로 고정되어 있다.
일명 프레데릭 바바로사 황제의 샹들리에
작은 탑 16기와 촛대 48개가 달린 청동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는 1165년 샤를마뉴(카를,칼,카롤루스) 대제가 성인 반열에 오른 것을 기념해
프리드리히 1세가 헌납한 것이다.
팔각형 돔 아래 부분이라 내부도 역시 팔각형이다.
로타의 십자가
로타의 십자가는 100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를 부조한 1세기 로마시대의 카메오가 박혀 있다.
샤를마뉴 (카를루스) 대제의 흉상
아헨 대성당에 전시된 카를루스 대제의 흉상.
이 흉상은 1349년에 제작된 것으로 파손이 심해
지난 1년여 동안 복구작업을 거쳐 이전 상태를 겨우 회복했다
전문가들은 이 흉상은 내부를 나무로 만든 뒤
이 위에 금과 은으로 덮는 방식으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이상 아헨성당 내부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왔음을 밝힌다.
아헨성당 뒤로 돌아가는 길
아헨성당 측면
성당의 뒷편이자 아헨 시청사가 있는 곳이다.
아헨성당의 뒷 모습
샤를마뉴대제에 관한 무슨 행사를 할 예정인지
아헨성당의 뒷편이자 아헨시청사의 뒷편이기도 한 광장에
샤를마뉴대제의 상을 가득 세워 놓았다.
행사 푯말
샤를마뉴대제
샤를마뉴대제는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왕이다.
단신왕 피핀의 맏아들로 768년에 피핀이 죽자
동생 카를만과 함께 프랑크왕국을 공동으로 다스리다가
3년 뒤 동생이 죽자 단독으로 왕국을 다스렸다.
밖으로는 영토확장에 주력하여 서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안으로는 행정제도 개혁에 힘써 문서를 통한 칙령과 감사제도를 활성화했다.
교육과 문예 부문에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고전문화 부흥운동을 펼쳤다.
가톨릭 교회의 탄생도 실질적으로는 샤를마뉴대제의 치세 때 이루어졌다.
교회 조직을 국가 통치수단으로 삼아
주교가 지방행정관들과 공동으로 도시행정을 주관했고,
왕은 주교선거와 교회법 입법에 직접 참여했다.
그가 로마의 후예가 아니라 최초의 유럽인이라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800년에 프랑크 왕 샤를마뉴대제는
로마 황제 레오 3세에게서 서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과 지위를 받았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는 서유럽의 군주가 되었고,
프랑스는 후일 그의 이같은 후광에 힘입어 유럽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아헨의 궁정을 중심으로
알쿠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 성직자들이 활약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정신의 3요소로 이루어지는 유럽 문화가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개화되어, 유럽의 역사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아헨시청사 뒷모습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7~18세기에 다시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어
외벽은 고딕 느낌, 지붕은 바로크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시청사 양 끝 첨탑 중
둥글고 굵은 오른쪽 탑이 마르크트 탑,
날씬하고 뾰족한 왼쪽 탑이 그라누스 탑이다.
(그라누스는 켈트 신화에 나오는 치료의 신의 이름)
아헨 시청사 후면부 벽면 조각
아헨 대성당 옆 골목에 있는 성당
이름 모르는 성당의 파사드
수요일 아침인데 미사가 있는 모양이다.
성당 내부 전경
저 길로 조금만 더 가면 시청광장이 나오는데
시간상 가지 못했다.
인형 분수대
인형 조형물들의 관절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인형 분수대
목과 팔, 다리, 손목, 발목이 모두 꺽어지면서 돌아간다.
약간 무서운 인형들이다.
샤를마뉴대제의 과자가 있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 중 하나인
아헨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500년전 17세기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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