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독일] 뮌헨 마리엔광장,신 시청사,구 시청사,호프브로이하우스

푸른 바다. 2014. 6. 23. 21:53

 

뮌헨

 

 

 

 

마리엔광장,신 시청사,구 시청사,레지덴츠궁전,막스 요제프 광장,오페라하우스

성령교회, 프라우엔교회,성 피터교회,호프브로이하우스

 

 

타코메타 법을 지키기 위해

원래는 2시간 운행하고 휴게소 한 군데서 20분 정차하고

뮌헨에 도착해 버스 시동을 끌 계획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하자 마자

일행 한 명이 화장실 관계로 첫 번째 휴게소에 들어갔고

또한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정체가 있어 

4시간 이상 운행하는 구간에서의 두번째 휴게소에서는

반드시 30분 휴식을 가져야 하는 법 때문에 30분이나 쉬게 되었다.

2개의 휴게소에서 시간이 지체되고 또 정체 구간이 있어 지체되고 해서

뮌헨에는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이상 지나

 어스럼해질 무렵 도착했다.

 

 

뮌헨은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 주의 최대 도시이자 주도이며,

 베를린,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 제3의 도시이다.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 가까이 이자르강에 면하여 있고

 베네딕트 칙령 당시의 베네딕트 수도승들이 이 도시를 건립하였다.

  뮌헨이라는 도시명의 유래는 옛 고산지대 독일어로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무니헨에서 유래하였다.

 그에 따라,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승이 새겨져 있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14세기 초 이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드비히 4세에 의해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1632년 30년전쟁 중 한때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고,

1634년에는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1825~1848년 재위에 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는

오늘날의 뮌헨을 기획하고 탄생시켰으며,

 그가 선임한 건축가들로 하여금 공공 건축물을 통하여 뮌헨의 특징적인 모습을

확립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 도시는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신교도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였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인구는 1900년에 이르러 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후원함으로써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뮌헨은

금융·상업·공업·교통·통신·문화의 중심지이다.

식품가공, 정밀 광학기기, 전기제품, 화장품, 의류, 맥주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또 영화 제작과 도서 출판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유럽 최대의 도산매 시장도 자리 잡고 있다.

각종 행사와 회의가 자주 개최되고 있다. 

 

바이에른 왕이 살았던  레지덴츠 궁전(박물관)의 뒷편

 

겉보기는 소박하고  옆으로 길고 작아보이는데,

들어가면 겉보기와는 달리 규모도 아주 크고 대단히 화려하단다.

 

 레지덴츠 궁전

 

 바이에른 왕국의 비텔스바흐 왕조의 궁전이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레지덴츠 궁은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100여 개의 방에

바이에른 왕가가 가지고 있던 보석과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왕가가 소장한 고대 조각을 전시하기 위해 만든 안티크바리움이나

 비텔스바흐 가문의 선조들 100명 이상의 초상화가 진열된

선조화 갤러리등이 특히 유명하다.

 

레지덴츠 궁전 뒷문

 

이 건물 정문 앞에서 

레지덴츠 궁전에 딸린 정원인 호프가르텐 정원이 시작된다. 

호프가르텐은

1617년 바이에른 공국의 대공 막시밀리안 1세가 만든 르네상스 정원이다.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시민들의 최고의 쉼터 역할을 한다.

 

 

막스 요제프 광장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동상

 

극장 앞 동상의 주인공은

 바이에른 왕국의 첫 왕이었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로

 이 광장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막스 요제프 광장이라 부른다.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1756년 5월 27일 독일~1825년 10월 13일)는

독일 바이에른 비텔스바흐가 출신의 선제후로

바이에른과 바이에른왕국의 초대 왕이다.

그는 1818년 새로운 헌장을 승인해 바이에른

그의 남은 통치 기간 동안 독일에서 가장 자유주의적 국가가 되었다.

 

신고전 양식의 오페라 극장인 바이에른 국립 극장

 

바이에른 국립극장 혹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이라고도 부른다.

1752년 궁정극장이 들어서고 1818년에 국립극장이 건립되어. 

 오페라의 주 무대가 되었다 한다.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10월 폭격으로 소실 되었으나. 

1963년 옛 모양 그대로 재건하여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바이에른 국립극장

 

바이에른 국립극장은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연극을 위한 국립극장이다.

극장 바로 옆에 뮌헨의 레지덴츠 궁전이 있는데

 레지던츠에 속한 극장이었다가 확장하여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마리엔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

 

 

레지덴츠 궁전에서 내려

 마리엔 광장을 향해 가는 중

 

 

 

구시가는 점차 기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과거의 특징을 많이 상실하였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건축물 가운데는

7개의 성문 중 카를스, 젠들링거, 이자어 등 3개가 있는데

모두 14세기에 세워진 것들이란다.

 

트램의 레일

 

 

뮌헨은

 스포츠 레저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어

 각종 스포츠 대회가 여러번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경기로 1972년 제 20회 하계 올림픽 대회가 있으며,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당시 주요 거점 도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검은9월단, 뮌헨올림픽 인질극
1972년 9월5일 새벽.

검은 9월단을 자칭하는 8명의 아랍 무장 게릴라들이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 코치 2명을 사살하고 선수 9명을 인질로 삼았다.

 화해와 축제의 장이어야 할 올림픽이 졸지에 공포의 무대로 변했다.

이스라엘에 투옥된 200여명의 동료들을 석방하라는게 이들의 요구였다.

검은 9월단은

아랍 게릴라들이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은 1971년 9월을 의미하며,

 같은 해 11월 요르단의 탈 총리를 보복,암살한 게릴라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부른데서 유래한다.
게릴라들은 몸값을 주겠다는 서독정부의 제안은 거부하고

이집트 카이로까지 이송해주겠다는 제안만을 받아들여

그날밤 헬리콥터를 이용, 여객기가 준비된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게릴라들이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순간, 잠복해있던 서독 경찰들로부터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게릴라들도 응사했지만 인질 전원과 5명의 게릴라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생포됐다.
그러나 3명은 10월29일 서독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하이재킹한

무장단체의 요구로 석방돼 이스라엘을 격분시켰다.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캠프를 폭격하면서

피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마리엔광장

 

시 중앙부에

1158년 뮌헨의 시가지가 탄생 했을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한 마리엔 광장은

중세에는 시장이 서거나 기사들의 마상 시합 경기가 열리던 곳이다.

원래의 명칭은 슈란렌광장인데 1638년에 광장 중앙에 성모마리아상이 설치된 뒤로

 마리엔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뮌헨 여행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보행자 구역이라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광장 중앙에 마리아 상이 있으며

광장 부근에는 뮌헨 신 시청사, 구 청사, 프라우엔 교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쇼핑 센터도 많다.

 

뮌헨 신 시청사

 

 겉모습만 봐서는

수백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20세기 초 완공되어

100여 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뮌헨 신 시청사

 

루드비히 1세의 명에 의해 1867년부터 1909년에 걸쳐서 건설된

신 시청사는 네오 고딕 양식으로 지어 졌으며,

 총 85m의 탑과 종루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 글로켄슈필이 유명한

아름다운 종탑이 있는

 세련되고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뮌헨 신 시청사 건물 중앙의 종루

 

독일 최대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인 글로켄슈필은

독일 내에서 가장 큰 특수장치로 꼽히며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하나는 빌헬름 5세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사육제의 댄스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매일 오전 11시에 10분간 작동하며,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정오 12시와 오후 5시에도 볼 수 있다고.

  

글로켄슈필

 

1568년에 행해진 바이에른 대공 빌헬름 5세와

로트링겐의 로렌느공녀 레나테 공주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독일 최대의 춤추는 인형이 나와 종각을 돌면서 춤을 춘다.

이 장치 시계 인형은

1.4미터의 구리세공으로 무게는 75킬로,

 43개의 종은 7톤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글로켄슈필

 

사람 크기만한 인형들이 출연하는데

 처음에는 빌헬름 5세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실감나는 마상시합이 한바탕 벌어지고,

 다음에는 1517년 페스트가 만연해 외출 금지되었을 당시

페스트가 없어짐을 알리고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며 신나게 춤추는 모습 등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해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다.

 

 


신 시청사 탑에 올라가면

 뮌헨의 아름다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다.

 

 

 

 

정면 벽에는

성인, 바이에른왕, 우화나 전설의 영웅 등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 시청사 입구로 들어가면

자그마한 안뜰이 펼쳐져 있고,  라츠켈러 레스토랑이 영업 중이다.

 안뜰을 가로질러 그 뒤편의 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갤러리도 들어가 볼 수 있다.

 

마리엔광장의 성모마리아상 뒷 모습

 

막시밀리안 1세가

 30년 전쟁으로 스웨덴군의 점령하에 있던 뮌헨의 해방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운 광장의 성모마리아상

 

마리엔광장의 성모마리아 황금색동상

 

꼭대기에는 성모마리아의 황금색동상이 올려져 있다.

 

 

 

 

 

 

 

 왼쪽으로 프라우엔 교회의 쌍둥이 녹색 탑이 보인다.

 

양파 모양의 두 개의 첨탑은

신 시청사와 더불어 뮌헨의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1468년을 기점으로 20년에 걸쳐 건설된 뮌헨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카톨릭 교회로,

 뮌헨에서는 성모 교회라는 이름과 뮌헨 대성당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한다.

   수 세기 전의 예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배가 행해진다. 

 

뮌헨 성모교회 (프라우엔교회)의 첨탑

 

두 개의 독특한 양파모양의 탑이 특징으로  양파모양의 탑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바위 돔 교회를 모델로 삼았다고 하며,

 두 개의 탑 중 남쪽 탑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뮌헨의 도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에 있는 거대한 알프스 산맥의 위용이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미지 출처: Kaiser Jissi님 블로그]

 

두 개의 탑은 실제 높이가 109m와 97m로 높이가 서로 다르다.

뮌헨 시가지 중심 내에서 109m를 넘는 빌딩의 건축은 금지되어 있는데

 즉 성모 교회보다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양파 모양의 첨탑은 독일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은 아닌데,

원래는 쾰른 대성당처럼 뾰족한 첨탑으로 설계되었으나

건축 당시 예산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첨탑을 완성하여 서로 다른 건축양식이 섞이게 되었다고 한다.

 

 

음산할 정도로 위압적인 신 시청사와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강한 구 시청사.

신, 구 두 시청사가 서로 바뀐 것 같이 보인다.

 

마리엔광장 동쪽의 구 시청사

 

1669년 주의회가 상주했던 구 시청사 홀에서

1805년에 첫 천연두 예방접종이 있었고,

1848년에는 뮌헨 의원들이 국민의회를 위한 선거를 했다.

현재 뮌헨 시의회 건물로 사용중이며 시장의 집무실도 이 건물에 있다. 

구 시청사의 탑에는 장난감 박물관이 있다.

 

 

하늘을 찌를듯이 뾰족뾰족 솟은 지붕의 첨탑들이 인상적인 구 시청사

 

뮌헨 구 시청사는 1310년 역사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무려 700여 년의 역사가 깃든 건축물이다.

 1392년부터 1394년까지

 4년 동안 건물 안에 대연회장을 지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오늘날 대 축제의 홀에서는

 심포지엄, 기념식, 시상식, 축제 등 뮌헨시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구 시청사는

1470년부터 프라우엔교회를 세운 건축가 외르크 폰 할스바흐에 의해

후기 고딕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1487년 현재 모습의 탑을 위한 기반도 다져졌다.

이후 1861년에서 1864년에 걸쳐 4년 동안 다시 보수를 했는데,

이 때 건물의 외관이 네오 고딕양식으로 바뀌었다.

건물의 외관이 네오 고딕양식으로 다시 한 번 변경됐다.

 

뮌헨 구 시청사

 

구 시청사에 있던 뮌헨 시 행정 부서들이 1874년에 신 시청사로 옮겨갔는데

 이 무렵에 마리엔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건물 1층을 아치형의 터널로 만들었다.

이 터널은 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 현재와 같은 고딕 양식으로 재건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게 파괴되었으나

1953년에서 1958년에 4년 동안 재건해 현재에 이른다.

 

 

구 시청사의 탑 정면에는 다양한 뮌헨시의 문장을 볼 수 있고

탑에는 장난감 박물관과 큰 종이 있다.

종 위에는

 이전에 내가 의원들을 불렀고 전쟁이 나를 집어 삼켰으며

시민 정신이 나를 탄생시켰고 시간이 나를 두들겼고

안토 구스가 나를 주조했다고 새겨져 있다.

 

 

1938년11 월 9일 아돌프 히틀러와 요세프 괴벨스가

독일 제국 유대인 박해를 일으킨 곳이다.

 

성령교회 정면 모습

 

성령 교회는 성 페트리 교회와 바로 이웃하고 있다.

 두 교회가 크기도 비슷하고 건축 양식도 유사점이 있어서 언뜻 보면 닮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또 완전히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외부는 고딕 양식 내부는 로코코 양식이며,

나중에 네오 바로크 양식도 추가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심하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것으로,

내부의 장식은 전쟁 전보다는 많이 간소해졌다.

천장의 프레스코가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집이 아닐까 싶은

 호프브로이 하우스로 가고 있다.

 

 

호프브로이하우스

뮌헨의 가장 유명한 연간행사인 옥토버페스트때에

두 번째로 큰 텐트를 운영한다.

 

호프브로이하우스

 

바이에른 왕실의 지정 양조장이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홀이다.

 1589년 당시 바이에른 지방의 영주인 빌헬름 5세에 의해

만들어진 왕실 지정 양조장으로

 1828년 일반인의 출입이 허가되자

대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생 맥줏집이 딸린 맥주 양조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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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브로이하우스

 

1828년 루트비히 1세는

일반인도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가격도 파격적으로 낮추어자 맥주 판매량이 어마어마하게 급증하게 되었다.

 때때로 수요를 채우지 못해 문을 닫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했다.

1852년 막시밀리안 2세는 호프브로이하우스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하는데

 이유는 왕실 소속인 이 술집의 지나친 선전이

개인 선술집과 양조장을 무너뜨린다는 불만들 때문이었다.

1897년 막스 리트만이

현대적인 건물로 호프브로이하우스를 다시 지었다.

 

호프브로이하우스 로그

 

2차 세계대전 당시 호프브로이하우스는

 폭격으로 인해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었었다.

그러나 대규모 공습에도 불구하고,

호프브로이하우스 지하에는 많은 양의 맥주들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표적인 상품은

델리케이터라고 하는 독한 맥주이며,

하루에 팔리는 맥주의 양이 1만 리터나 된다고 한다.

 

 

 1958년 뮌헨 800주년 기념을 맞아

호프브로이는 새로운 홀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1997년에는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 건물과 레스토랑으로써

100주년 행사를 맞이했다.

 

 

 많은 유명한 고객들이 이 저장소를 방문했는데,

그중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여황제, 레닌과 그의 아내가 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호프브로이에 대한 우리의 추억은 특별히 사랑스럽다.

 이곳에서는 훌륭한 맥주가 계급 간의 모든 차이를 없애 준다.

 

 

뮌헨에 유명한 비어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의 관광지가 되었고,

그래서 한 켠에 기념품숍을 만들어

티셔츠, 악세사리 등도 판매하고 있다.

 

 

1층은 독일식 전통 맥주 하우스로,

 2층은 저녁 식사를 겸해서 일반인들이 사교춤을 출수 있는

무도회장으로 각각 이용되고 있다.

 무대에서는 바이에른 여성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폴카춤을 추기도 하고,

 국적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함께 흥에 겨워 노래를 합창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술집이라 불려 왔는데,

 총 3천 명의 손님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미루어 보아

이는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바이에른 맥주를 마실 수 있으며

1ℓ짜리 맥주 조끼로 라이트 맥주와 다크 맥주를 모두 맛볼 수 있다.

이 지방의 특산물이 곁들여 나오는데,

바이스부르스트 즉 하얀 소시지도 있다. 

 

 

  양조장 측은 손님의 반은 단골들이라고 하지만,

 호프브로이하우스는

점차 뮌헨에서 여행자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명소가 되어 가고 있다

 


  히틀러가 나치를 조직하기 전 그 전신인 독일 노동자 집회를 개최하고

직접 연설을 했던 곳이 바로 호프브로이 하우스이다.

그는 1921년 11월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지닌 군중들에게 연설을 했다.

반대되는 편 사이에서 커다란 싸움이 터졌고,

 자신의 책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이 사건을 애정 어린 어조로 회상했다.

 

 

독일 사람들은 양조장에서 갓 만들어 신선한 상태의 맥주를 선호한다.

그리고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병맥주로 만들어 전국에 유통하는 일을 호프브로이하우스 양조장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장인정신이고 철학인 것이다.

다만 신선도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그 지역에 한하여 병맥주를 판매하는데,

그래서 호프브로이 하우스의 병맥주는 뮌헨을 벗어나면 구경하기 어렵다.

 

 

 

독일 맥주

뮌헨은 맥주 양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맥주는 밀맥주로 바이에른 특산물이다.

 헬레즈는 1895년에 처음 만들어진 투명한 황금빛 맥주로,

뮌헨에서 현재 가장 인기있는 맥주이다.

 헬레즈와 필즈는

당밀을 태워 만든 19세에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흑맥주의 존재를 없애버렸다.

슈타크비어는 뮌헨에서 생산되는 맥주들 중 가장 도수가 높으며 (6-9% 알코올),

 어두운 앰버색으로, 짙은 당밀맛을 낸다.

 성요셉의 날 (5월 19일) 이나 그전에 열리는 강맥주 시즌에 주로 소비된다.

 뮌헨 시내에는 20여개의 맥주정원이 있으며,

 이들 중 4개는 영국정원에 있고, 가장 큰 맥주정원은 히어슈가어텐에 있다.

 

 

흰소시지는 뮌헨의 지역 요리이다.

이 소시지는 정오 이전에만 먹는 음식으로,

 냉장고가 생기기 전부터 이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소세지는 주로 단겨자와 갓 구워낸 브레첼과 같이 먹는다.

레버케스라는 바이에른식 소시지는

주로 감자 샐러드와 곁들여지는 지역의 또다른 별미이다.

 

 

현재 독일에는

 5000종류 맥주가 있으며 양조장 숫자만도 1274개에 달한다.

 

 

통계에 따르면 독일인 1인당 맥주 소비량은 연간 144ℓ.

 500㏄ 잔으로 계산했을 때 한 사람이 1년간 288잔씩 마시는 셈이니

맥주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뮌헨 맥주의 단위는 ‘마스’로 1리터들이의

커다란 맥주컵이다. 

 

 

 

독일 맥주가 유명한 이유는

1516년 빌헬름 4세가 내린 맥주 순수령때문이다.

맥주 제조업자들이 무분별한 재료를 사용해

맥주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만든 법령이다.
덕분에 독일 맥주는 물, 호프, 효모, 몰트 4가지 원료만으로 제조된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자기네들의 맥주에는

 방부제나 화학첨가제를 넣지 않았기 때문에 숙취가 없다고 말한다.

 

 

히틀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뮌헨은 정치적 반란이 잦았다.

1918년 11월, 혁명의 전야에 루트비히 3세의 가문은 도시에서 탈출하였다.

쿠어트 아이스너 초대 공화국 총리가 1919년 2월에 암살되자,

바이에른 공산당이 창단되었다.

 공산당이 집권하자, 뮌헨에서 거주한 적이 있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보를 보내려 했으나

 1919년 5월 3일에 자유군단에 의해 실패하였다.

다시 공화국이 된 이후,

 뮌헨은 나치즘의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극단적 정치가들의 소굴이 되었다.

1923년,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는 뮌헨에 집결하여 맥주홀 폭동을 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하여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 폭동에서 진압당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히틀러가 체포되고 잠시 힘을 잃었다.

 당시 나치당은 뮌헨 밖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후 뮌헨은 1933년에 히틀러가 수상에 오르며 다시 나치의 본거지가 되었다.

 나치는 첫 강제 수용소를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다하우에 건설하였다.

나치는 자신들의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뮌헨을 개혁의 중심지라고 불렀다.

 나치당 본부 건물은 뮌헨에 위치하였고,

다수의 총통의 건물들이 왕의 광장에 다수 지어져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지붕 넘어로 성 페트리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뒤섞인

 성 페트리 교회는 약 12세기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부터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세우고 거주하던 곳에 새로 큰 교회를 지은 것이라고.

 뮌헨에서 가장 오래 된 교구교회이기 때문에

이 부근에서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 된 교회라서 그런지 몰라도 알터 피터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이미지 출처: Kaiser Jissi님 블로그]

 

1327년 대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고,

 17세기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첨탑(높이 92m)이 추가되어

 현재 시내 전망대로 사용된다.

교회 내부는 수준 높은 성화와 조각들,

그리고 눈길을 확 잡아끄는 천장 프레스코화 등이 볼만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마리엔광장을 거쳐

다시 막스 요제프 광장으로 가고 있다.

 

 

 

 

 

 

 2010년,

모노클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뮌헨을 선정하였다.

 

 

다시 막스 요제프 광장으로 왔다.

 

 

버스로 가고 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다.

 

nH호텔

 

 저녁 늦게 호텔에 들어오는 사정상

호텔 외관 사진은 아침에

 체크 아웃 할 때 찍는 관계로 날이 밝다. 

 

호텔 입구

 

 

넓은 호텔 로비

 

호텔 휴게실

  

호텔 바

 

 

 환호가 들려 봤더니 축구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

 

 

내일 아침 조식뷔페 식당

 

멋진 와인 셋팅

 

진열품이라 모두 빈병이다.

 

호텔 객실

 

이 과자들을 먹으면 체크 아웃때 계산을 해야 된다.

 

호텔 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