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유럽 지도
오스트리아 지도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보석함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오스트리아 국기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이다.
유럽의 6개 영세중립국 중 하나이며, 헌법에 영속적 중립성을 명시했다.
유럽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유등으로
대륙의 정치적 변혁기마다 수많은 영고성쇠를 거듭하였으며
유럽대륙을 지배하였던 합스부르그 왕가의 본거지로서
1차 대전 직후인 1917년까지만 해도 유럽 정치의 중심지로서 영광을 누렸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영토의 축소와 1938년 나치 독일과의 합병,
2차 세계대전후 미.영.불.소의 공동 점령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를 거쳐서
1955년 영세중립국을 표방하고 독립하였다.
서부 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며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관계로 여러 나라와 국경이 맞닿아 있어
북쪽으로 독일과 체코, 동쪽으로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으로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에 접한다.
국명인 오스트리아는
10세기 중엽 동방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오스트마르크(동쪽의 변경)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은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
행정구역은 9개의 연방 주로
이루어진 대표민주주의 실현국가이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3%,터키인1.6%, 독일인0.9% 등이다.
개신교 4.7%, 이슬람교4.2%이다.
면적은 약 8만 평방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한 넓이보다 약간 작다.
인구는 847만명이며
가장 큰 도시인 수도 빈의 인구는 170만명이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며,
1999년 유로화 사용을 시작하였다.
중부 유럽의 대륙성 기후로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크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서부 알프스 지역은 눈이 많고 겨울에 매우 춥지만,
동부 지역은 비가 적고 기온이 따뜻하다.
봄에는 알프스산에서 따뜻하고 건조한 푄이 불어와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부흥이 늦어졌으나 1949년부터 시작된 마샬플랜을 바탕으로
1951년 이후 연평균 6%의 경제성장을 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하였다.
문화와 교육면에서는 독일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739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520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연방공화제의 의원내각제로,
임기 6년의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5~6년의 상원(62석)과 임기 4년의 하원(183석)으로 구성된다.
주요 정당은 국민당, 사민당, 자유당, 녹색당 등이다.
국민을 위한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지고 있고
수도 빈은 수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UN 회원국이 되었으며
1995년 EU에 가입 하였고, OECD의 창립국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20명으로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는 세계 5위이다.
오스트리아에선 이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다른나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유색인종이 별로 없다.
오스트리아는 수백년 간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음악과 건축, 미술 등 문화·예술이 매우 발달하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같은 아르누보 예술의 대표 화가를 배출해냈고
오토 바그너와 같은 대표적인 근대 건축가 또한 이 나라 출신이다.
오스트리아는 왈츠와 요들의 고장으로
낭만주의 음악, 바로크 음악, 궁정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음악과 같이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안톤 브루크너, 프란츠 리스트, 요한 슈트라우스1세와 2세 등과 같은
유명한 작곡가들의 출생지이며 아주 오랜 기간동안 음악 혁신의 주요 중심지였던 수도 빈은
이들을 비롯 카를 체르니,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활동지였다.
18, 19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으로
여러 작곡가들이 비엔나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는 비엔나를 유럽 음악의 수도로 만들게 된다.
독일 출신의 루트비히 반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 등은
그의 대부분의 음악 인생을 비엔나에서 보냈다.
작곡가 뿐만 아니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 뵘, 구스타프 말러,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도 배출해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 나라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아널드 슈워제네거,
아돌프 히틀러, 쿠르트 괴델은 이 나라 출신이다.
오스트리아인은 게르만민족에 속하지만
중부유럽을 6백4십년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도시로서
중부유럽의 정치·문화의 핵심도시였기 때문에
독일의 게르만민족과는
약간 다른 국제성과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로마가톨릭 신자가
전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사회규범이나 예의범절,
인간관계에서도 가톨릭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급격한 변화와 개혁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역사와 문명에 많은 공헌을 한
자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나
겉으로 드러내놓고 자랑하지는 않는다.
빈 도심의 무분별한 개발로
역사 중심지가 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유네스코는 2004년
빈 역사 중심지를 파괴 위험에 처한 위기유산으로 지정했다.
빈 그린찡에 있는 바흐 헹겔 식당은
크린턴 미국 전 대통령, 푸틴 대통령 등 유명 정치인들과
각 국의 왕족과 유명 연예인들이 다녀간 유명한 식당 겸 술집으로
1137년부터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데 호이리게라는 포도주를 파는 음식점이다.
호이리게는 금년에 만든 햇 포도주라는 뜻으로
포도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인 그린찡 농가들은
매년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직접 판다고 하는데
정부에서는 이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포도를 직접 키우는 사람에 한해서만
호이리게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근원은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로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17, 18세기 유럽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다.
1804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1제국 성립을 선포하자
이에 대항하여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하였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비엔나를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기는 빨간색과 하얀색이 직사각형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오늘날 오스트리아공화국의 국기와 같다.
합스부르크 왕가 또는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최대의 왕실 가문을 말한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세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역사에서
합스부르크라는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장장 6백여년동안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세력권 안에 둔 신성로마제국을 운영한 왕조이다.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는
직접적으로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헝가리, 보헤미아(체코),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부,
루마니아 일부, 스위스 일부, 벨기에,네덜란드,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북부,
시실리, 사르디니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하였으며
그리고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멕시코와 아시아의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통치력을 행사했고
간접적으로는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 정책은
그 전통이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의 마지막 기사라는 별명을 가진 막시밀리안 1세는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 마리와 결혼함으로써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동부 그리고 네덜란드 지역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 필리프 왕자를 스페인의 공주 요한나와 결혼시킴으로써
스페인과 남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을 상속받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손자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 공주와 결혼시킴으로써 이 지역마저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중부 유럽 대부분의 땅을 차지했으며,
전 세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광활한 제국을 건설했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의 죽음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후 이어지는 혁명으로,
합스부르크왕가는 문을 닫는데 그 이전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 이후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가 점차 해체됐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현재의 스위스 슈봐비아공국에 있던 백작가였던 합스부르크가가
비엔나에 둥지를 튼 것은 막시밀리안2세 때,
현재의 비엔나 교외에 있는 쇤브룬 궁전의 터를 확보하고 부터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는 1521년 당시 스페인 왕을 겸하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5세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영토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분배함으로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와 스페인-합스부르크로 분리 되었다.
1556년 카를로스5세가 세상을 떠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몫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역사
오스트리아는 6세기 초부터 역사가 시작돼
962년에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 후 그 아들 오토 3세가 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동방의 나라란 이름을 붙여 국명이 생겨났다.
1135년 바벤베르크가가 빈을 수도로 삼았으며 1273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1세가 신성로마황제를 겸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속국으로 삼았고 그로부터 640년간 합스부르크가 유럽에서 이름을 떨쳤다.
합스부르크가는 정략결혼과 쇠퇴한 영주의 소유지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영토를 확립하여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만들었다.
174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올라 근대국가의 기틀을 견고히 했고
1805년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직위를 포기하면서 오스트리아제국을 창조하여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패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됐다.
그리고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국가가 축소되었고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면서 1차 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에 패하여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1919년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수립됐다.
1938년 독일의 나치에게 점령당했던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함으로 1945년 해방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는 1955년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유엔에 가입하였다.
또 오스트리아는 1995년에 EU회원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합스부르크가 역사
합스부르크가는 10세기경 스위스 북부의 작은 지역 소 영주에서 시작하여
11세기 합스부르크(매의 성이라는 뜻) 성을 쌓은 뒤부터 가문의 이름을 합스부르크라고 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왕실의 중앙 무대로 나서게 된 것은 독일지역 제후들의 갈등 속에서
13세기 루돌프 1세가 어부지리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를 얻으면서부터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이 무렵 금인칙서를 통해 7명의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게 되어 있었는데
힘이 강한 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가장 약체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황제의 자리가 돌아갔다.
독일의 여타 제후들은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얕보고 그를 황제자리에 앉혔지만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루돌프 1세는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를 획득하였으며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혼인관계를 통해 가문의 영토를 착실히 넓혀갔다.
그 결과 15세기에 이르러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부, 헝가리, 뵈멘 등을 폭넓게 차지한 유럽명문가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16세기 혼인정책이 성공하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니아 왕실의 통혼으로 카를 5세 때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및 일부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이 거의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카를 5세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보유하는 오스트리아계와
에스파니아를 통치하는 방계 합스부르크가로 분열되었지만
18세기 초반,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대륙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여제로
헝가리 및 보헤미아(체코)의 여왕도 겸하였다.
카를 6세 황제의 장녀로
1736년 토스카나 대공 프란츠슈테판(뒤에 황제 프란츠 1세)과 결혼하였으며,
부친 사망 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상속받고 즉위하였다.
자녀 중 오스트리아 국왕이 된 요제프2세와 레오폴트2세,
프랑스 대혁명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 등이 있다.
남편 프란츠 1세와 아들 요제프2세의 재위기간에도
사실상의 여제로서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마리아 테레지아
일반적으로 여제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여제나 다름없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상 여제시 되고 있었다.
정식으로는 황후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이처럼 다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남편인 황제가 프랑스 국경 주변의 로트링겐 공국 출신이며,
실제 정치적인 권한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제위는 남편의 소유가 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여 실질적으로는 명예 작위이었던 반면,
법적으론 국가가 아니였지만 군주의 권한이 강했던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당주권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로트링겐 공 프란츠 슈테판이 오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소유권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겸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이 되었다.
처녀 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 1세
합스부르크가의 추정상속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당시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대공으로
1722년 빈에 유학하러 온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는데,
항상 밤에는 그를 생각하며 꿈을 꾸었고
낮에는 궁녀들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카를6세 역시 프란츠가 마음에 들었고,
특별히 딸에게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를 수 있도록 하여
1736년 2월 12일에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첫사랑인 프란츠 슈테판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연애 결혼에 성공하였으며
자녀를 열여섯 명이나 둘 정도로 금실이 좋아 부부 생활은 매우 원만하였다.
프란츠는 때때로 다른 여성과 염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 탁월했던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눈치채고 있음에도 눈감아 주었다.
또 남편이 죽은 후 자신이 뒤따라 죽을 때까지 15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780년 서거하였으며,
시신은 가장 사랑했던 남편 프란츠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의 묘소인
카푸치나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
왕자 5명 공주 11명 총 16명의 자녀를 낳아
유럽 각국의 황실로 출가시키는 결혼 정책을 펼쳐 오스트리아의 국력을 튼튼히 했다.
"나는 언제나 임신하고 있으리라"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국가적 신념이었다.
여왕은 평화적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폴란드 남부,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쇤부른궁전의 마지막 안주인 엘리자베트황후의 사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1837. 12. 24~1898.9.10)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1세의 황후이다.
본명은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유제니
당시에 뛰어난 미인으로 유명했으며, 유럽 왕실 중에 허리가 가장 가늘었고
(다이어트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19inch~20inch를 계속 유지했다고 한다.),
시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영국의 다이애나비처럼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황후이다.
비운의 왕후치고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지금도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뮌헨의 루드비히슈트라쎄에서
아버지 막시밀리안 공작과 어머니 루도비카 공주 사이에서 여덟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여름에는 슈타른베르크에 있는 포센호펜 성에서 자랐으며, 겨울에는 뮌헨에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바바리아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녀였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리하르트 백작을 좋아했지만, 그의 낮은 신분때문에 어머니 루도비카 공작 부인에 의해서 강제로 헤어지게 되었고,
백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러던 중 합스부르크가의 대공비였던 이모 조피가 자신의 아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시씨의 언니였던 헬레네와의 약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따라나온 당시 16세인 시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조피 대공비와 루도비카 공작 부인에게 시씨와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대공비와 공작 부인, 시씨 모두 승낙하면서 황제는 시씨에게 청혼하였고, 1년 뒤 시씨는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황실과 달리 자유적이었던 그녀는 조피 대공비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시씨는 비엔나 궁정에서의 엄격한 법도에 익숙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후 아이들을 낳았지만 시어머니인 조피가 아이들을 직접 기르겠다고 하여 데려갔다.
시씨는 아이들 문제로 시어머니(실은 이모)인 조피와 자주 다투었다.
1859년 시씨는 고향집인 포센호펜으로 떠났다.
이어 1860년에는 비엔나의 집에는 돌아가지 않고
저 멀리 대서양의 마데이라 섬과 지중해의 말타 섬, 그리고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결혼한지 5-6년이 지나서 결혼생활은 위기에 빠졌다.
비엔나에서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시씨는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다녔다. 그래서 비엔나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시씨는 비엔나를 떠나 지내면서 몇 명의 애인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시씨가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통에 남편 프란츠 요셉은 비엔나에서 혼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시씨는 남편 프란츠 요셉에게 정부와 지내는 것을 용인하였다.
1863년 무렵 시씨의 아름다움은 유럽 전역에서 전설로 남게 되었으며
유명한 화가인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가 그린 씨씨의 유명한 초상화는 이때에 완성한 것이다.
시씨는 시에 심취하여 전 유럽을 여행하며 헝가리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중 1898년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인 루케니에게 살해 당하였다.
시씨의 시신은 제네바에서 비엔나로 옮겨져 장엄한 장례식을 치룬후
합스부르크의 관례에 따라 시신은 카이저그루프트에 놓여지고
심장은 성아우구스틴교회에 보관되었으며 장기는 슈테판대성당의 지하에 보관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씨씨가 제상을 떠난후 18년을 더 살다가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세상을 떠났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황후 엘리자베트의 사랑이야기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1830년 빈 쇤부른궁전에서 출생하여
18세에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국왕이 되어 68년간 나라를 다스린 황제였다.
그는 몰락하는 합스부르크왕가와 운명을 같이한 비운의 황제로
그의 유일한 왕위계승자였던 외아들 루돌프가 자살하자
조카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계승자가 됐으나 그도 1914년 세르비아에서 암살당했다.
프란츠 요제프황제는 1916년 86세의 나이로 손자 카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쇤부른궁전에서 운명함으로 사실상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프란츠 요제프황제의 부인이 엘리자베트(시씨) 황후인데
발목까지 오는 긴 머리에 흰 피부와 우아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빈의 거리 간판이나 기념품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시씨는 1837년 독일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공작의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하였다.
언니 헬렌이 프란츠 요제프와 맞선을 보는 자리에
15세의 어린 시씨도 동참을 했다가 요제프가 언니보다는 시씨에게 반하여
1853년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약혼하고 1954년에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 전역에 인기 있는 남녀가 됐었다.
시씨는 늘 자유를 갈망하고 풍부한 시적 정서를 소유하여 세계 여행을 즐겨하다가
1898년에 스위스 여행 중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에게 저격당해
아깝게도 61세로 여생을 마감한 왕후다.
오스트리아의 세계문화유산
1. 잘츠카머구트 지방의 할슈타트 - 다흐슈타인 문화 경관 1997년 문화
2. 알프스 주변의 선사 시대 호상 가옥 2011년 문화 알프스 주변의 선사 시대 호상 가옥은 111개의 작은 유적들로 이루어진 연속 유산이다
6. 잘츠부르크 역사 지구 1996년 문화 중세 때부터 19세기까지 발달해 온 풍부한 도시 구조가 잘 보존 관리되어 있다.
13. 아르놀트 쇤베르크 유산 2011년 기록유산 쇤베르크의 작품은 훗날 새로운 음악이라 이름 붙인 신사조의 원전 자료이다.
18. 타불라 포이팅게리아나 2007년 기록유산 로마 제국의 공공 수송체계인 공공 우편제도를 위한 도로 체계를 나타낸 지도
20. 빈 디오스쿠리데스 1997년 기록유산 중세와 르네상스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의료인들에게 사전으로 사용된 고대 세계의 약학의 원전
기계적인 방법으로만 만들어진 최초의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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