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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비엔나 성슈테판성당, 게른트너 거리

푸른 바다. 2014. 7. 12. 00:10

비엔나

 

 

 

 

성 슈테판 대성당, 게른트너 거리

 

 

쇤부른 궁전을 둘러보고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게른트너 거리를 보기위해 왔다.

이 거리 끝에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건축물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거행된

성 슈테판 대성당을 볼 참이다.

 

 

알베르티나 미술 박물관

 

빈에 있는 세계 최대의 그래픽 아트 미술관이다.

원래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사위인 알베르트 폰 작센 테첸공이

수집한 판화 소묘에 1920년 빈 국립도서관 소장품을 합친 것으로서

현재 약 5만집의 소묘, 100만 매를 넘는 판화를 소장하고

 특히 뒤러, 렘브란트 작품의 수집은 유명하다.

 

 

알베르티나 광장의 전시물들

 

 

쉔부른궁전을 보고 성 슈테판 대성당에 가기위해

알베르티나 광장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게른트너거리

 

국립 오페라 극장부터 슈테판 성당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보행자 전용 도로이며 길이가 600m에 이른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거리로 도로 양쪽에는

 선물용품점과 액세서리점,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가 늘어서 있다.

 

  게른트너거리

 

  이 거리의 명칭은

1974년 오스트리아 Garinthia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는데,

유럽에서도 가장 화려한 쇼핑 거리로 평판이 높다.

여행자 안내소를 비롯, 유명 브랜드 숍, 선물가게,

그리고 그리고 노천 Cafe가 즐비한 이곳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비엔의 대표적인 곳이다.

 

 게른트너 거리의 맥도날드 간판

 

 

 

게른트너 거리 스와로브스키 매장 앞의 꽃가게

 

빈 스와로브스키 매장

 

모차르트 쿠겔른 초코릿 가게

 

 

20세기의 새로운 회화와 건축및 디자인 양식인

 유겐트 스틸은 독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발전한 회화 디자인 양식인 아루누보가

 이곳 비엔나에서 꽃을 피웠다고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관인지 간판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중의 하나가 

비엔나 출신 천재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로서 

그가 사망한지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재조명 되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그의 회화 정신은 자유로운 영혼과 에로티시즘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벨베데레궁전 안에 있는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인 키스에서 보여주듯 

그의 작품들은 황금색을 비롯한 화려한 색감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금은 세계의 중요한 미술시장에서도 

이 유파의 작품들이 가장 고가의 작품으로 평가되면서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Adam and Eve

 

클림트의 그림에는 금색이 많이 등장한다.

클림트는 이탈리아의 옛 도시 라벤다를 여행하면서

비잔틴 미술에 감명을 받아 이를 되살리려고 금색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다른 이유는 클림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였고,

 이러한 영향으로 금색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고도 한다.

 

 

비엔나 게른트너 거리

 

 

 

 하스하우스

 

슈테판성당을 마주보고 있는 현대식의 하스하우스

 

슈테판 광장

 

  빈 대교구주교좌 성당인 성 슈테판 성당

 

오스트리아의 혼이며

빈을 상징하는 최대의 고딕 건축물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잇다.

 보헤미아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빈을 상징하는

오스트리아 최대 고딕 양식 건물로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다.

12세기 중엽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회가 건설된 것이 시초며,

 14세기 루돌프 4세가 고딕 양식 대교회로 다시 짓게 했다.

 8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며 공사기간만 65년이 소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내부가 소실되었지만

국민이 성금을 모아 194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고딕 건축의 백미 슈테플탑 (Steffl, 작은 스테판)

 

빈 시민들에게

흔히 슈테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높이 137m의 남쪽 슈테판 탑은

슈테판 대성당의 상징이자 빈의 상징이기도 한 첨탑이다.

이 탑 밑에 있는 가수들의 문은 옛날 남자들이 드나들던 문이었다

     슈테플 탑은 343계단을 통해 73m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북쪽 종루탑

 

북쪽 탑은 떠도는 자들의 종인 푸메린이 있는데

 이종은 1683년 터키군을 몰아내고

 수거한 대포를 녹여 만든 22톤 무게의 종이다.  

 60m까지 올라갈 수 있는 북쪽 탑에서  

빈 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25만개의 청색과 금색의 아름다운 타일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의 독특한 문양은 비엔나의 공식 상징문양이다.

 

 

지붕은 상당히 높고 경사가 가파르다.

 

쌍두 독수리 무늬

 

성당지붕의 남동쪽면 모자이크에는

쌍두 독수리 무늬가 크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1461년 프리드리히 3세가 이 도시에 수여한 문장이다.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헝가리와 협정을 맺어

자신이 두 나라의 국방과 외교권을 모두 가지고

나머지 권한은 그 나라의 자치에 맡기는 특이한 방식의 이중왕국을 형성한 다음부터

 쌍두독수리 문양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상징했다.

 

서쪽 로마네스크 이교도의 탑이 있는 파사드

 

탑 사이에 큰 창문이 있고 바로 아래 파사드가 있다.

3개의 문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고딕 성당과는 달리 슈테판 대성당의 정문은

거인의 문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다.

 

거인의 문

 

거인의 문으로 불리게 된 것은 1230년경 공사를 할 때 인근에서

거대한 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거대한 뼈를 노아의 홍수 때 물에 빠져죽

거인의 유골로 생각을 하고 문 위에 걸어 놓았었다.

하지만 18세기에 확인한 결과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선사 동물인 맘모스의 경골, 즉 넓적다리 뼈로 판명이 나서 없애버렸다.

 약 500년 동안 맘모스의 넓적다리 뼈를 성당은 귀중한 유물로 모시고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지금도 문의 이름은 여전히 리젠토르, 즉 거인의 문이다.

 이 문은 옛날에는 평상시에는 열지 않은 채 공식 행사가 있을 때에만 사용되었다.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을 향해

 신도들이 앉기 때문에 정문은 성당의 서쪽에 마련되는데,

 문 중앙에는 두 천사가 호위하고 있는 예수님이 조각되어 있다.

 

파사드 기둥

 

성슈테판 대성당 내부

 

예배가 진행 중이라 사진을 많이 못 찍었다.

 

바로크 양식인 중앙 제단

 

중앙 제단

 

 제단은 검은색 대리석의 바로크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조각상들은 1647년 요한 야코프포크에 의해 조성되어졌고

토비아크 포크의 제단 후면 장식은 슈판의 순교를 묘사하고 있다.

 

 

17세기 중엽인 1647년경,

 요한 폭크와 토비아스 포크 형제가 당시 빈에서 크게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에 맞추어 본 제단을 꾸미면서

현재와 같이 바로크 양식으로 성당 내부가 장식되기 시작했다.

 

 

성당 천정의 아치들이 멋있다.

 

 

고딕양식으로 돼 있는 성당 천장

 

파이프 오르간

 

성당에는 모두 다섯 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1978년에서 1984년에 걸쳐 새 것으로 교체되었으며

1993년에도 새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파이프 오르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리드리히 3세의 묘

 

 성당 내부에는

 오이겐 공과 프리드리히 3세의 묘가 안치되어 있고,

 이외에도 유해가 없는 기념묘돌프 4세의 묘가 있다.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

 

가장 장대한 르네상스 양식의 작품으로 15세기 말에

잘츠부르크에서 나는 적색 대리석에 섬세한 조각을 새겨 넣어 화려하게 만들어졌으며, 

 뚜껑에 황제의 실물 모습 그대로를 새겨 넣었다.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

 

성당 내부의 하이라이트는

 16세기 모라비아(현 체코 모라비아 지방) 출신 안톤 필그림이 만든 설교단이다.

 아주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설교단의 윗 부분엔

 기독교를 상징하는 4명의 신부(성 아 우구스틴, 성그래고리, 성제롬, 성 암브로스)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안톤 필그림은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자신을 조각해 넣었다.

 

마리아 푀츠의 제단

 

성당 안 오른쪽에 있는 푀츄의 성모 그림으로

어느날 성모가 눈물을 흘리신 것이 목격되었고

그후 이 성모상에게 기도드리면 어려운 질병이 낫게 된다는 전설이 생겼다.

그래서 환자들의 기도가 많은 곳이다.

그런데 그림 속의 성모가 흘린 액체를 학자들이 조사하였더니

인간의 눈물과 성분이 같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푀츄의 성모 그림

 

푀츄의 마돈나라는 그림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이 성모상은 원래 17세기로부터 헝가리의 푀츠에 있던 것이었다.

얼마후 푀츠의 성모상은 성슈테판성당으로 옮겨져

중앙제단을 장식하게 되었으나 나중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성슈테판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화려하지 않고 단순해 보인다.

 

  성슈테판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기에 성가대를 했던 곳이 성 슈테판대성당이다.

 

 

제단 뒷편 스테인드글라스는 2차대전 시

 성직자들이 창문을 떼어

지하에 숨겨놓아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지은지가 800년이 넘는 성당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배가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단다.

 

 

입구에 있는 마주보고 있는 남녀의 목조각상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검색해 봐도 찿을 수가 없다.

 

 

영상으로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성수대

 

 

 

1541년 비엔나를 덮친 흑사병은

시민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다.

고리대금업으로 가뜩이나 미움을 받던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수많은 유대인이 처형되고 추방되었다.

성당 지하엔 흑사병으로 죽은 2천명의 유골이 묻힌

지하묘지 카타콤베가 있다.

 

이교도의 탑

 

오스트리아가 보헤미안 출신의 오토카르 2세 치하에 있을 때

 세워진 바실리카의 자취로

 정문의 양쪽에 서 있는 두개의 이교도의 탑이 있다.

 

이교도의 탑

 

 탑의 모양이 가톨릭 성당의 모습이 아닌

 이교도 사원의 탑과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에

이교도의 탑이란 이름이 붙었다. 

 

 

1782년에는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있었고,

1791년에는 모차르트의 장례식을 치른 곳이다.

 매년 12월 31일 빈 시민은

 슈테판 대성당 앞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이한다.

 

 

 고딕건축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1304년 건축된 유서깊은 성당으로 

제2차세계대전때는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문화적 자긍심이 높은 비엔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완전히 보수되었다고 한다. 

 

북쪽의 독수리 탑(종루탑)

 

슈테플이란 남쪽 탑과 함께 같은 모습으로 만들 예정이었던

 북쪽의 독수리 탑은

1529년 터키 1차 침공 이후에 그 비용을 축소하게 되자

아직까지 미완성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뒤에서 본 성 슈테판대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특히 파아란 북탑이 돋보이며

 조각지붕의 아름다운 무늬가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자세히 보면 수많은 조각상들이 부조된 아름다운 성당이다.

 

 

사암으로 지은 건물이라 오랜 기간이 흐르면서

 까맣게 변했다 한다.

 

 

 성당은 빈 시내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빈 시내의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시민들은 해외에 나가서도 대성당의 종소리를 잊지 못한다.

웅장하면서도 은은한 종소리는 그들의 영원한 고향, 빈의 소리이므로.

 

 성 슈테판 대성당의 외벽 장식

 

 성슈테판 성당의 외부 벽에 붙어 있는 부조들

 

 

2차 세계대전 시 파손된 성당 잔해를 시민들이 간직하고 있다가

 전쟁 후 재건이 시작되었을때 다시 쓸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남쪽탑이 청소를 위해 가려지기 전날

많은 비엔나 시민들이

 성당앞에 모여 오랫동안 볼 수 없음을 아쉬워 했다 한다.

 

 

 

 성슈테판 대성당의 모형

 

  성슈테판 대성당의 모형

 

  

 북쪽의 독수리 탑은 전설에 의하면,

탑을 지은 건축가인 요한 푸슈바움이 성당 전체의 건축을 맡은 건축가의 딸을 사랑했는데,

이 건축가는 일년 안에 탑을 완성하면 딸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제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고, 요한 푸슈바움은 급기야 악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악마는 건축가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축가와 계약을 했고, 탑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직 사랑하는 애인만을 그리며 탑 건설에 열중하고 있던 요한 푸슈바움의 눈에

멀리 걸어가는 사랑하는 애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요한 푸슈바움은 아무 생각없이 애인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다.

“마리아, 마리아”. 이 소리를 들은 악마는 건축가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비계를 무너뜨렸고

 땅에 떨어진 건축가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후

 그 어떤 건축가도 이 탑 건축을 맡으려고 하질 않았다.

 

 

빈 사람들은 슈테판 성당을 사랑한다.

성당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위해 지금도 성금을 내고 있으며,

 탑은 아직도 보수하고 있다.

 

 

 

빈의 관광 마차 이름은 피아크로

 슈테판광장, 쇤부른궁전, 헨텔광장 등 빈의 곳곳에서 탈 수 있다.

 

 

 

삼성 로고가 붙은 건물이 있다.

이 앞에서 자유시간이 끝나면 모이는 곳이다.

 

 

제천에서 온 룸메이트에게 멜랑쥐를 사서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컵을 들고 기다렸는데 자유시간 끝날 무렵에 와서 하는 말 잊어버렸단다.

황금 같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니...

 

 

 

 

 

게른트너 거리를 지나서 버스를 타기 위해 가고 있다.

 

 

 오스트리아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

 다만, 이와 유사한 형태의 커피 메뉴로 아인슈페너라는 커피가 있는데,

뜻은 '한 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 마부가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즐겼던

 휘핑크림을 얹은 커피에서 유래하였다.

아인슈페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유래하여

 3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차가운 생크림의 부드러움과 뜨거운 커피의 쌉싸래함,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진해지는 단맛이

 한데 어우러져 한 잔의 커피에서 세 가지 이상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여러 맛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 크림을 스푼으로 젓지 않고 마신다.

 

활자를 발명한 쿠텐베르크가 살았던 집

 

루게크 광장

 

구텐베르크 기념상

 

요한네스 구텐베르크 기념상은

1900년 한스 비털리히의 작품이다.

기단부분은 거장 막스 화비아니의 작품이다.

 

 

 

빈은 유럽의 대도시 중에서

가장 먼저 커피 문화를 받아들인 곳이며,

19세기 말의 고풍스러운 문학 카페의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도시다.

 카페 센트럴,카페 데멜,호텔 자허 등 전통의 커피하우스들이 있다.

 

 아이스 글라이슬러

 

줄이 엄청 길게 서 있는 유명한 아이스크림집

 

 

아이스 그라이슬러가 유명해진건

설탕 많이 안 넣고 좋은 재료를 쓰는데서 오는

건강한 맛 때문이라고.

 

 

 아이스 글라이슬러 앞에 20분이나 줄을 서서

 샀다는 아이스크림

 

일본인 백화점인지...

 

 

빈 도심의 무분별한 개발로

비엔나 역사지구가 본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유네스코는 2004년 빈 역사 중심지를

파괴 위험에 처한 위기유산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저녁식사 하러 가기 전에

비엔나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버스로 시내 링을 한 바퀴 돌았다.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비엔나오페라하우스는

파리 오페라하우스, 밀라노 스칼라극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의 하나로 

 성슈테판 성당과 함께 빈을 상징하는 2대 건축물이다.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1869년 5월 궁정오페라극장으로 건립하였으며,

 1918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오전 오후 2번 화려하고 우아한 내부 투어를 할 수 있다.

 

원형대로 시청보다 먼저 재건된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개장 기념으로

 모차르트의 돈조반니 Don Giovanni가 공연되었다.

1897년부터 10년 동안

구스타프 말러가 총 감독으로 있으면서 유럽 일류의 오페라 하우스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폭격으로 손상을 입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1955년 루드비히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하면서

문을 열었고 건물도 보수하였다.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중 하나로 공연 횟수는

매년 300회 이상의 오페라·발레공연이 상연되어

유럽에서 가장 많고 리·밀라노보다는 약 3배 이상 많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와 가수들은 한번쯤 이 무대에 서 보기를 원하는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의 객석은 2,2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석은 100명의 단원이 들어갈 수 있다.

 빈 필하모닉은 이 극장의 전속 관현악단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사이에 있는 광장으로

1888년 경에 세운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 중앙에 있는 광장이다.

동상 아래에 4개의 동상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4명의 장관들이고

그 외의 조각들은 그녀의 추치의와 귀족들이라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계몽군주로서 1740년부터 1780년까지 40년간 재위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여왕은 교회의 특권과 귀족의 병역 특례 폐지,

고문과 농노제 폐지, 의무교육 실시 등으로 국가 권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외교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왕자와 공주 16명을 낳아

유럽 각국의 황실로 출가시키는 결혼 정책을 펼쳐 오스트리아의 국력을 튼튼히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도 여왕의 막내딸이다.

 "나는 언제나 임신하고 있으리라"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국가적 신념이었다.

 여왕은 평화적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폴란드 남부,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테레지아는 왕위에 즉위한 후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힘의 외교를 펼쳐,

 합스부르크가 왕조는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여왕은 아들 다섯, 딸 열하나를 두고

일찍 사별한 남편을 오랫동안 못 잊어 하던 평범한 여인이기도 했다

 

비엔나 궁정극장 건물의 일부

 

비엔나의 궁정극장 1751년에 설립되었다.

아름답고 우아한 부르그테아터는 2차대전의 포화로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비엔나시의 정성을 들인 재건축 덕택에 1955년 새로 문을 열게 되었다.

비엔나뿐만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럽국가에서

 연극배우로서 성공하려면 우선 부르그테아터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부르그테아터는모든 신인 연극인의 꿈이다.

그 정도로 이 극장은 대단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비엔나대학교 건물과  리벤버그 기념탑

 

유럽에서 두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비엔나대학교는

 1365년 루돌프4세 대공이 설립하였다.

 비엔나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에 이어

 독일어권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가운데 보이는 기념탑은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 때에 비엔나 시장을 지냈던 리벤버그 기념탑

 

카지노스 오스트리아(Casinos Austria) 건물

 

국가에서 허가한 카지노 회사인 카지노스 오스트리아이다.

아마 오스트리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법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카지노스 오스트리아 회사는 전국에 12개의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고

 몬테 칼로 등 외국에 있는 대형 카지노 회사의 주식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

 

 

국회의사당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염원한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테오필 한젠이 고대 그리스 신전양식을 본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883년 완성한 건물 중앙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전쟁과 학예의 여신 아테네가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니케를 들고 있는 상이 조각돼 있다.

중앙부에는 삼각형의 박공이 올라 있는데 8개의 코린트 양식으로 꾸민 기둥이 바치고 있다.

그 박공 안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17개국의 헌법을 승인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회의사당

 

건물 중앙은 4개의 분수가 있고

그 뒤에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황금 투구를 쓴 모습(동상)으로

 4대강인 도나우강, 인스브루크의 인강, 독일 함부르크의 엘바강, 체코 프라하의 블타바강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굽어보고 있다.

아테나 여신의 오른 손에 올라가 있는 날개 달린 작은 여신은 니케의 여신이다.

이는 과거의 오스트리아가 제국주의국가임을 뜻하고 있다.

 

 

비엔나  제체시온 (분리학파회관) 건물

 

황금빛 올리브잎 넝쿨의 돔이 건물 위에 얹혀져 있는

 아르누보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미술관으로

1897년에 오스트리아 크림트를 위시한 예술가들이 만든 빈 분리파 전당이다.

 제체시온(분리파)은

‘인생은 예술이며 예술을 위한 자유’라는 기치아래 만든 예술운동으로

원래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역사주의로부터 분리하려고

요제츠 마리아 올브리히와 클림트가 결성한 예술학파이다.

이 건물의 지하엔 34m의 길이의

클림트의 프레스코 벽화 베토벤 프리즈가 있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인 환희의 송가를 표현한 것인데

제체시온 개막식 때엔 말러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주자들이

환희의 송가를 이 방에서 연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