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크수도원
여행 5일째 4월 26일 토요일
잘츠부르크를 급하게 둘러보고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쓴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한 멜크에 있는 멜크수도원을 향했다.
멜크수도원은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바로크 양식 건축물의 극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멜크로 향해 가고 있다.
멜크는 합스부르크왕가
이전의 왕가였던 바벤베르크 왕조(1076-1106년)의 수도로서
베네딕트 파의 수도원인 멜크 수도원이 있다.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에 요새처럼 지어진 멜크 수도원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정신적 요람으로서
바로크 양식의 진주로 불리는 유럽최대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로
그 화려함과 규모에 있어서 장관을 이루며, 9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멜크수도원
도나우강과 멜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로마제국의 군사 주둔지였으며,
976~1106년 동안 바벤베르크 왕조의 수도가 있었다.
1106년 바벤베르크 왕조의 레오폴트 3세가
왕궁과 주위 땅을 베네딕투스 수도회에 기증하였고
1702~1726년 개축을 통해
요새형 수도원으로 웅장한 베네딕트 수도원 (멜크수도원)이 탄생하였다.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과 예술의 금자탑이
바로 멜크에 있는 멜크 수도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여제의 입에서 “이곳을 와 보지 않았다면, 평생을 후회할 뻔했다” 라고
극찬을 한 곳이기도 하다.
1702년 새로운 바로크 식 건물을 지을 당시,
디트마이어 신부는 건축가 야콥 프란타우어에게 주문하여
건물을 앉히기에 부적합한 사다리꼴의 부지에 건물을 짓게 했는데
그는 주위 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을 탄생시켰다.
프란트타우어가 1726년에 숨을 거둔 후
작업은 그의 제자 뭉게나스트에게 전수되었다.
멜크수도원으로 가기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열쇠 둘이 합쳐진 정문 문양은 화합을 상징한다.
베드로와 바울의 화합에서 비롯된 문양인데
두 사람은 의견과 믿음의 방향이 달라 다투었지만 함께 로마 선교에 나서
같은 날 순교했다.
15세기에 멜크 개혁 운동의 중심지였던 멜크수도원은
18세기 초 바로크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었다.
건축을 맡은 이는 야콥 프란트타우어였고,
당대 최고의 일류 예술가들이 내부 장식을 맡았다.
프레스코화와 제단화를 그렸던 요한 미카엘 로트마이어,
내부 배치를 맡은 안토니오 베두치,
조각품들을 디자인한 로렌초 마티엘리 등을 들 수 있다.
건축은 1702년 시작되어 1736년 완성되었다.
멜크 수도원은
거의 천 년 동안 영적인 생활의 중심지였으며,
세워진 이래로 계속해서 사용되어 왔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 하나이다.
첫번째 정문 입구
ANNOMDCCXVIII를 풀이하면
ANNO는 서기, M은 1000, D는 500 ,C는 100, XVIII 18이니
서기 1000+500+100+100+18
즉 서기 1718년에 짓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하며
수도원의 수호성인인 성 레오폴트와 성 콜로만의 조각상으로
장식이 되어 있다.
두번째 정문으로 들어가면 성직자의 마당이 나온다.
문에는
천국의 열쇠를 든 베드로와 정의의 칼을 든 바울의 상이 있다.
베네딕트 홀
교단의 창시자 성 베네딕트를 묘사한
천장화가 있는 대기실
교단 창시자 베네딕트를 묘사한 천정화
성직자의 마당
수도원 교회인 애비 성당의 돔이 보인다.
애비성당 돔과 수도원 문장과 삼손분수가
일직선으로 보인다.
삼손분수
삼손분수
세개의 손이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양 옆으로 대칭적인 건물이 배열되어 있다.
지붕은 예언자들을 나타내는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임페리얼 챔버로 올라가는 계단
현재 박물관 용도로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임페리얼 챔버는 2층에 있다.
2층 계단의 조각상
나폴레옹이 이 곳을 방문했을때
말을 타고 이 계단을 올라갔다고 한다.
임페리얼 챔버는
현재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으로
총 11개의 방마다 주제별로 수도원의 역사와 가치를 알 수 있는
전시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수도원 소장 보물들, 영상물, 조각품, 그림, 사진 볼 수 있다.
황제의 복도
11세기부터 존재한 멜크 수도원은 왕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황실 가족의 방으로 마련되었던 방들이 있었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지는 2층의 방들이 그것이다.
이 복도는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왕가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이르는 오스트리아 황제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여왕과 남편 프란츠 스테판의 초상화
황제의 복도에 걸려 있다.
프란츠 1세
프란츠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토스카나 대공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며, 그녀와의 혼인으로 제위에 오르지만
자신의 로트링겐 공국은 프랑스에 양보하게 되었다.
아내와의 사이에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 등 16
명의 아이들(남자 5명, 여자 11명)이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여제로
헝가리 및 보헤미아(체코)의 여왕도 겸하였다.
카를 6세 황제의 장녀로
1736년 토스카나 대공 프란츠슈테판(뒤에 황제 프란츠 1세)과 결혼하였으며,
부친 사망 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상속받고 즉위하였다.
자녀 중 오스트리아 국왕이 된 요제프2세와 레오폴트2세,
프랑스 대혁명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 등이 있다.
남편 프란츠 1세와 아들 요제프2세의 재위기간에도
사실상의 여제로서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 1번째 방>
푸른 빛은 명상 - 우주 - 근원의 색으로
수도원 역사의 시작을 상징한다.
성 베네딕토 상의 옆에 비치는 글은 독일어로 회레인데
듣는다는 뜻이다.
< 2번째 방>
초록색은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성 콜로만의 초상화
아일랜드 귀족 출신 콜로만은 성지 순례를 하다가
1014년 멜크에서 첩자로 몰려 교수형을 당한다.
그를 매단 고사목에서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우자 놀란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어 주었다.
몇년 뒤 멜크에 큰 홍수가 나 모든 것이 떠 내려 갔는데도
콜로만의 무덤만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멜크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멜크는 수 많은 순례자들이 찿아오는 순례지가 되었다.
이를 본 바벤베르크 왕조의 레오폴트 2세가 베네딕토 수도원에
성채와 땅을 내주게 되어 멜크 수도원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상아로 만든 성 콜로만의 성체함
멜크 십자가 (Melk Cross)
멜크 십자가
수도원의 소장 보물 중에 유명한 것으로
1362년에 제작된 것으로 뚜껑을 열 수 있게 되어 있는 이 십자가 속에는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십자가의 나무 조각이 들어있다고 한다.
도난사건이후로 지금은 영상물로만 볼 수 있는데 모니터는 LG였다.
위쪽 중간 부분에
성 콜로만의 치아를 보석으로 치장하여
보관하고 있다.
< 3번째 방>
성경 필사본
수도사들이 순례할 때 가지고 다녔던
손으로 쓴 필사본인데 인쇄한 것 같이 정교하다.
10만권의 장서 중 가장 작은 성경책이란다.
< 4번째 방>
12세기에 보리수로 제작된 평화의 십자가
비엔나 루퍼트 성당에서 소장하고 있던 십자가상인데
1799년 멜크 수도원에 기증되어진 것이다.
고통 중에도 표정이 평화로워 평화의 십자가라고 한다.
<5번째 방>
성체 보관함
< 6번째 방>
교단 창시자인 베네딕트대주교
베네딕트 성인이 수도원장으로 있을때
반대파들이 그를 죽이려고 성찬예식을 하는 잔에 독을 넣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마시려는 순간 번개가 쳐서
잔이 깨지게 되고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베네딕토회 창시자인 베네딕트 대주교의 예복
금사로 만들어져 다 차려 입으면 20Kg이 넘었다 한다.
대주교가 장례식때 입었던 성복도
< 7번째 방>
그당시 매장 관습을 알 수 있는 관의 모습
[이미지 출처: 멜크 수도원 홈피]
<8번째 방>
하얀 벽에 수도원의 어제와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영상으로 보여 주는 방인데
신비하면서도 약간 무서웠다.
<9번째 방>
성화들이 있는 방
글자를 모르는 시민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그림
<10번째 방>
자물쇠
<11번째 방>
바벤베르크 성의 모습
1106년 바벤베르크 왕조의 레오폴트 3세가
왕궁과 주위 땅을 베네딕투스 수도회에 기증할 때의
바벤베르크 성의 모습
996년부터 이 지역을 통치하던 바벤베르크가의 남자 혈통이 끊기자
이를 스위스 출신의 합스부르크가가 승계하였다.
임페리얼 챔버의 맨 마지막 방에 있던 멜크수도원 모형도
바로크 양식의
멜크수도원으로 바뀌고 난 뒤의 모습
여러 각도에서의 수도원 모형
수도원의 모형도
11개의 방을 다 보고
옆에 있는 대리석 홀로 들어가기 전에 찍은 복도
복도의 사진 중에서
대리석 홀
박물관 끝나는 곳에 있는 대리석 홀은
1731년에 그린 천장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며,
합스부르크 왕실의 방문시 또는 귀빈들의 방문시
만찬과 연회를 열던 홀이었다.
대리석 홀
보는 사람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여지는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진정한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자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칼 6세에게 바쳐진것이다.
어둠과 악마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황제가 빛을 가져다 준다는 내용이다.
Paul Troger 의 대리석홀 천장화(1731)
프레스코 기법의 천장화는 지오타로 화피의 작품을
파울 트루거가 프레스코화로 그린 것으로 중앙에
지혜와 중용의 여신인 아테네 여신의 마차를 사자가 이끌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으로 용맹의 신인 헤라클레스가
지옥, 암흑의 밤, 죄의 세머리를 가진 악마를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리석홀
지금은 컨벤션센터와 전시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금 도금 조각상들이 있는 자주색 대리석 기둥이
천정의 프레스코화를 떠 받들고 있다.
홀 중앙 철망 바닥은 연회를 열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대기하는 자리라고 한다.
대리석 홀 창문으로 바라다 본 멜크 구 시가지
11개의 방으로 이어진 수도원 2층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면 도서관 건물과 이어진 테라스가 나온다.
대리석 홀을 나와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테라스
두 시계탑 사이에
천사를 양 옆에 거느리신 예수님상이 있다.
그 밑에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와
검을 짚고 있는 바울상이 서 있다.
이 모습은 잘츠부르크 대성당 정문에 있던 두 사도의 모습과 똑 같다.
베드로와 바울
사도
수호자
라고 쓰여 있다.
풍경들은
박물관과 도서관을 이은 테라스에서 찍었다.
도나우강의 지류
테라스에서 멜크 구시가지를 찍고
도서관으로 이동 중이다.
도서관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지역이라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서 한 컷 했다.
도서관 천정의 프레스코화는
파울 트루거의 하늘로 날아 오르는 승리의 성 베네딕트이다.
멜크 수도원에는 10만권에 이르는 장서에
9~15세기 사이의 필사본 1200점과
17,18세기의 필사본 600점,고판본 700점이 소장되어 있다.
출입문을 들어오면 양쪽에는 대학의 4개 학부인
법학, 의학, 철학, 신학을 의미하는 조각품이 있으며
1690년도 빈센조 코로넬리의 천국과 지상을 표현한 두개의 지구본이
양쪽으로 마주보고 있다.
12세기에 설립된 수도원의 학교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며, 900명 가량의 남녀 학생이 다닌다.
도서관을 관람하고
멋진 원형 계단을 내려가면 성당이 나온다.
수도원과 성당 사이에 있는
독특한 무늬의 아름다운 나선형계단
이 계단을 내려가면
화려한 수도원 성당 본당이 나온다.
멜크 수도원의 애비성당은
빛나는 황금색의 화려함으로 인해
극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때까지 본 성당 중에서 제일 화려한 것 같다.
이탈리아 장인
안토니오 베누치와 로렌초 마티엘리가
건축했다.
중앙 제단
높은 제단에 그려진 그림은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당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회중석에 있는 프레스코화의 인물은 성 베네딕투스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멜크 근처에서 순교당한
11세기의 아일랜드 성인 성 콜만의 유골이다.
이 유골은 왼쪽 제단 안에 있는 대리석 석관 안에 들어 있다.
기부로만 운영 된다는 성당은
천정의 프레스코화와
파이프 오르간으로도 유명하다.
금빛 찬란한 화려한 성당을
처음 본 순간의
그 놀라움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주 제단을 바라보며 양쪽으로
여러 성인들에게 바치는 부속 제단들이 늘어 서 있는데
이도 거장 안토니오 베누치의 작품이다.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성당 내부의 모습
천정의 프레스코화
부속 제단
파이프 오르간
모차르트가 두 번이나 방문하여 연주했다고 하는
파이프 오르간은 1929년 건물 보수때 철거가 되었고
현재의 것은 1970년 크램스 출신의 오르간 제작자가 설계 제작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의 천정
온통 금으로 장식된 조각상에 입힌 금은
5Kg가 넘는다고 한다.
성경을 읽어 주는 독서대
파이프 오르간 밑의 채광 창
오래된 나무 시계
성당을 보고 나가는 길이다.
196m의 긴 회랑으로 이어진 수도원 내부 통로
성직자의 마당을 지나
대기실을 나오면
보이는 공간이다.
성인상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성인상 옆에 있던 숍
비엔나 인근인 멜크지역은 질 좋은 포도산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바카우 계곡
다뉴브강을 끼고 들어선 마을들 가운데
멜크에서 크렘스에 이르는 약35Km의 좁은 지형을 바카우 계곡이라고 하는데
이 계곡은 경치가 아름답기는 하나 경작지가 별로 없고 토양이 척박하므로 농사짓기가 어려워
예로부터 산비탈에 흙을 덮어서 고소득작물인 포도나무를 재배,
명품 백포도주인 바카우와인의 생산지가 되었다고 한다.
바카우 와인 생산이 이 지역의 주소득원이라고 한다.
음료를 파는 야외 카페
점심식사를 한
멜크 수도원 레스토랑이다.
우리는 이 건물 2층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신부님도 식사를 하러 들어 가신다.
멜크 수도원은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되어 더욱 더 유명해 졌다.
장미의 이름은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중세의 신학과 철학과 더불어
당대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탁월한 역사소설이다.
소설은 윌리엄과 아드소가 이 멜크수도원에 도착하면서
일주일간 벌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중세의 생활상과 세계관, 이단논쟁과 종교재판, 수도원의 장서관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14세기 종교적 독선이
얼마나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가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인다.
17세기 멜크수도원에서 수기하나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14세기 이곳에서 독일인 수도승인 아트솝이 견습수도승일때 쓴 회상기다.
이 회상기를 바탕으로 움베르토 에코는
20세기 최대의 걸작이라는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무르녹아 있는
생생한 지적 보고로서, 새로운 의미의 현대적 고전으로 평가된다.
특히 작가의 해박한 인류학적 지식과 기호학적 추리력이 빈틈없는 구성과 조화를 이루어
출간과 동시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음으로써,
현재 40여 개 국어로 번역되는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1986년 번역·출판되었다.
1987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에 의해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기호학·철학·역사학· 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까지 통달한 언어의 천재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다.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학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념품 숍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시씨)의 자석
점심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기 위해
돌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돌계단에서 다시 한번
멜크 수도원을 찍어 본다.
멜크수도원 티켓
< 밑에 사진들은 멜크 수도원 홈피에서 퍼 왔다.>
멜크 수도원 전경
가 보지 못한 멜크 수도원 정원
점심을 안 먹고서라도 가야 했던 파빌리온
파빌리온 홀
도나우강과 멜크수도원
멜크수도원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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