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그리스 테르모필레] 레오니다스 기념동상

푸른 바다. 2015. 6. 8. 19:56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기념동상

 

 

에게해, 테레모필라이협곡, 테르모필레 전투, 레오니다스 기념동상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테르모필레 무명용사의 비,

시모니데스의 시, 살라미스해전,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전사

 

 

그리스, 터키 여행 2일째인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신타그마 광장 앞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무명용사의 비를 둘러보고,

영화 300의 스파르타 격전지 테르모필레로 향했다.

여기에서 레오니다스 기념동상을 보고는

기암 절벽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이 있는

메테오라로 갈 예정이다.

 

 

 

 

동지중해인

 에게해를 끼고 버스가 달리고 있다.

책에서 읽었던 에게해를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꿈만 같다.

그리고 가이드가 에게해 전설을 이야기하자

 옛날 학창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왔던

테세우스의 모험이 생각나면서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에게해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명인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 아이트라의 고향인 트로이젠에서 자랐다.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 아내와 작별할 때

 그의 칼과 구두를 큰 돌 밑에 넣어두고는 아들이 커서 그 돌을 움직여서

그 밑의 물건들을 꺼낼 정도가 되거든 아들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테세우스가 성장하자 어머니는 아이게우스가 지정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고

 테세우스는 쉽게 큰 돌을 들어올려 칼과 구두를 꺼냈다.

그 뒤 테세우스는 아버지를 찾아 여행을 하게 되고

그 여정에서 각종 모험을 하며 아테네에 도착했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게

바치는 조공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는데

 조공은 일곱 명의 소년과 소녀로서, 괴물의 밥이 되기 위해 매년 보내지는 것이었다.

그 괴물은 소의 몽뚱이와 인간의 머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라는 짐승으로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이 만든 미궁 속에 갇혀 있었는데,

 그 구조가 대단히 교묘하여

그 속에 갇힌 자는 누구나 혼자 힘으로 탈출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테세우스는 조공할 시기가 다가오자 자진해서 희생될 한 사람으로 나섰다.

그 당시 젊은이들을 크레타섬으로 실어 나르던 아테네 선박은

 돌아올 때면 애도의 표시로 검은 돛을 달곤 했다.

테세우스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흰 돛을 달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미노스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모습을 보자 그를 사랑하게 되어,

 테세우스에게 괴물을 찌를 칼과 실 한 타래를 주고

입구에 실을 매고 이것을 따라 되돌아 나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테세우스는 괴물을 처치하고 미궁으로부터 탈출하여 아테네에 접근하였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약속한 신호를 잊고 흰 돛을 달지 않았다.

검은 돛을 본 아테네의 왕이자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고

그 후로 그 바다를 아이게우스의 이름을 따

에게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에게해 지도

 

 

 

그리스 본토와 터키의 소아시아 반도 서해안 및 크레타섬에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해역으로 남북길이 640km, 동서길이 320km이다.

 크고 작은 400여개의 섬이 산재해 있다.

에게라는 명칭은 전설상의 아테네왕 아이게우스,

 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성지 아이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BC 1500년경부터 이 해역을 중심으로 한 에게문명이 생겨났으며,

 고대 후기에는 그리스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그러나 북동부로는 다르다넬스해협을 통하여

 마르마라해, 흑해와도 이어지는 해역 교통상의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화근이 되어 주변 민족들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일찍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던 델로스섬을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누리던 문화는 이제 보잘것 없이 쇠퇴하였다.

 

 

 

 

테레모필라이협곡

 

지금은 도로가 뚫려 있지만 옛날의

이곳은 폭 3미터 미만의 험준한 협곡이었다.

 테르모필레의 필레는 관문(gate)이란 뜻으로,

  북쪽에 있는 테살리아평원에서 아테네로 들어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요새로 한 쪽은 바다에 면해 있고

 한쪽은 높은 산에 단애가 있는 6km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현재는 길 바로 옆이 바다가 아니라 올리브를 심은 좁은 평야가 있지만

고대에는 이 올리브 밭이 바다였다고 한다.

 

 

 

 

 테르모필레 전투 안내판

 

페르시아와의 전투에 대한 설명.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항복하라고 했더니,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페르시아가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사흘 넘게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테르모필레 (뜨거운 문)에서 기원전 480년 8월 또는 9월에

아르테미시온 해전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크세르크세스 1세페르시아 제국이 맞붙었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나이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뒤늦게 앙갚음을 하고자 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거대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아테나이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육군의 진입을 막고,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병력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여름에 북쪽으로 행군하여 고갯길을 봉쇄하였다.

 고대 사료에서는 백만 명으로 짐작하였던

페르시아 군대는 8월 말 또는 9월 초에 고개에 다다랐다.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던 그리스 군대는

 역사상 유명한 일전에서 후위대가 궤멸되기 전까지

 총 이레 동안(그 중 사흘간은 전투)이나 페르시아군을 막았다.

아르타파누스가 이끄는 1만 명의 선발대를 포함해 이틀 꼬박 전투를 벌이고

 스파르타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가

페르시아의 거대한 군대가 지나갈 길 한곳을 막았다.

이틀째 전투가 지나고 에피알테스라는 지역 주민이 그리스인을 배신하고

그리스 전열 뒤로 이어지는 작은 샛길을 페르시아에 누설하였다.

 포위당했음을 알게 된 레오니다스 왕은 그리스 군대의 진열을 해체하고

후방을 지키기 위하여 스파르타인 300명, 테스피아이인 700명,

테바이인 400명 그리고 여타 몇백명을 배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일전이 끝나고

아르테미시온의 연합군은 테르모필레의 비보를 들었다.

 당초 그리스의 전략은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 양쪽에서 적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육지에서 길을 내어준 이상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로 퇴각하기로 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보이오티아로 쇄도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고 텅 빈 아테나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에 결정적인 일격을 노리던 그리스 연합군 함대는

기원전 480년 말 살라미스 해전에서 침략군을 격퇴하였다.

그리스에서 발이 묶일 것을 두려워한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을 페르시아로 철수시켰으며,

 마르도니오스에게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인을 무찔렀으며,

 이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종식되었다.

고대와 현대 저자 모두 테르모필레 전투를 일컬어

조국 땅을 지키려는 애국적인 자유민 군대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로 삼는다.

 또 이 전투는 훈련, 장비, 지형의 이점을 살려 전력 증강을 꾀한 사례로 꼽히며,

 압도적인 적에 맞서는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레오니다스 기념동상

 

레오니다스 동상 발 밑에는

 "와서 가져가라(Molon labe)"라는 두 단어가 새겨져 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재위 BC 487~BC 480)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의 두 왕가 중 아기아다이 왕가의 왕으로서

가족들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감금한 뒤,

자해하여 죽었다는 이복형 클레오메네스 1세의 뒤를 잇고

그의 딸인 고르고와 결혼하였다.

 그는 원래 셋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으나,

 클레오메네스가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였고,

 다른 형인 도리에오스도 시실리에서 객사하였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

 

 

 

 

레오니다스 스파르타왕은

BC 480년 페르시아군이 침입하자,

 펠로폰네소스군 약 4,000과 기타 중부 그리스병을 이끌고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테르모필레를 수비하였다.

그런데 포키스인이 내통하여 우회로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그는 동맹군의 태반을 귀국시키고,

 후퇴하는 동맹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장에 남았다.

 그리고 스파르타군 300과 테스피스인 700으로 이곳을 사수하다,

이틀 동안 통로를 지켜 시간을 벌고 전원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리스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에서 퇴각할 수 있었다.

전사자는 뒤에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특히 시인 시모니데스가 용사를 기린 시는 유명하다.

 

 

 

 

레오니다스가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마치 일개 장군처럼 직접 결사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던 것은

좀 이상한 면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대의 그리스인들도 이상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먼저 "레오니다스와 스파르타 병사들은

처음에 지키려고 온 지역을 버리고 후퇴하는 것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꼴사나운 일이라고 간주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레오니다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남아야 했을 것이라고 덧붙여 말한다.

 여기까지는 전투에서의 후퇴나, 전장의 이탈을 극도로 혐오하는

 스파르타의 관행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에 더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 잘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신탁을 들어 그 이유를 한 번 더 합리화시키고 있다.

전쟁이 일어났던 초기에 스파르타인이 델포이의 신탁소에 가서 무녀에게 신탁을 구했을 때,

다음의 신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대들, 광활한 라케다이몬의 길들에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이러한 운명이 지워졌노라.
현재 강력하고 명망 높은 그대들의 도시가 페르세우스의 자식들에 의해 약탈되든지,
아니면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의 죽음을 라코니아 전역에서 애도하게 되리라.
그대가 황소나 사자의 용기를 갖고 있어도 적을 정복하지 못하리니,
적은 제우스처럼 강력하게 오나니, 그의 발길을 멈추지 못하리라.
그가 제물로 너희의 왕이나 너희의 영광스러운 도시를 제물로 갖기 전까지는

헤로도토스는 이 신탁을 떠올린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의 명예를 위해 다른 동맹군을 돌려보내고

자신들만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보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어느 트라키아 사람이

레오니다스 휘하의 한 전사에게 페르시아군의 수가 하도 많아

 그들이 활을 쏘면 화살로 태양이 가려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스파르타인은 "즐겁군요. 그들이 태양을 가려준다면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겠네요."라고 태연히 대답했다고 전한다.

 

 

 

 

 무명용사의 비

 

테르모필레 전투 300용사와

함께 싸웠던 이름모를 전사들을 기념하는

무명용사의 비다.

 

 

 

 

레오니다스 동상 옆으로 약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당최 뭔 말인지 ㅋ

 

 

 

 

왼쪽에 난 길로 올라가면

 스파르타의 300전사가 전사한 곳에

시인 시모니데스의 시비가 있다는데

시간상 올라가지는 못했다.

 

 

 

 

스파르타의 300전사가 궤멸 된 곳 - 퍼 온 사진

 

레오니다스뿐만 아니라,

휘하의 근위대 병사들마저도 죽음이 닥쳐올 것이 분명한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끝까지 싸웠던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들이 전사한 현장에는

후일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

용사를 기린 시비를 세워주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는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에 잠들었노라고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

자크 루이 다비드

 

 

 

 

전쟁 지도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인 살라미스해전

테르모필레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85∼BC 465) 대군은

 파죽지세로 아티카를 점령하였으나

살라미스의 그리스군 공격이 여의치 않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의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페르시아 출신 충복으로 하여금

그리스 군의 연합이 와해되고 있으며 크세르크세스가

지금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면 페르시아 군이 이길 수 있다는

거짓 정보를 말하게 하여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하여

BC 480년 9월 23일 11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해전이다.

 

아테네가 이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를 함으로서 아테네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 후에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그리스군은 다시 그들을 무찔렀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날 무렵 

아테네 인들은 아테네 제국의 초석을 만들어 갔고

 아테네는 곧 지중해의 힘 있는 국가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 해군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매년 9월 12일에 기념식을 연다.
반면, 페르시아 제국은 전투 이 후에 쇠약해져 갔고,

식민지 지역에서 더욱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 제국은

 150년 더 지속 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진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그리스 도시국가 

전사의 모습

 

 

 

포키스전사

 

두 개의 술이 달린 코린토스식 헬멧, 합성 갑옷, 호플론방패.

 방패에는 불의 상징, 불패의 상징, 전쟁의 신이 모는 전차의 상징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포키스 전사들이 어떻게 차려입고

스파르타와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는지를 보여준다.

 

 

 

 

테스피아 전사

 

이 전사는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인과 함께 싸우다 전멸한 700명의 테스피아인을 묘사한다.

 기원전 5세기 테스피아의 상징은

베오티안식 방패에 그려진 멜라이니 아프로디테의 반달이었다.

멜라이니는 아프로디테의 별칭으로 ‘검은 자’ 정도로 해석된다.

 어쨌건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힘은 테스피아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던 모양이다.

 갑옷 전체는 밤과 비통의 상징인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전투에 참가해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들의 굳은 신념을 묘사한 것이다.

 

 

 

 

스파르타 전사

 

패르시아 전쟁에 참가한 스파르타 호플라이트는

 붉은색 망토, 청동 갑옷, 호플론 방패, 코린토스식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개인적인 차이는 방패의 상징, 투구의 술, 옷을 장식하는 색칠이다. 

 

 

 

출처 http://warandgame.com/2010/01/18/greek-warri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