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청마문학관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타고
다도해의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경치를
구경하고 가까이 있는 미래사에 들렀다가,
점심을 친한 선생님이 사 주셔서
거하게 먹고는 청마문학관을 방문했다.
거제도와 통영 두 자치단체에서
출생지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었던
청마 유치환선생님의 문학관이다.
주차장에 있는 푯말을 따라 가면
계단이 있는데
이 나무 데크를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청마문학관
매표소에서
1,500원을 내고 티켓팅하면 된다.
본관 오른쪽에 청마생가 가는 길이 있다.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 시인(1908~1967)의
문학정신을 보존,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2월 1,220평의 부지에 문학관(전시관, 51평)과
생가(본채, 아래채)를 복원,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 망일봉 기슭에 개관하였다.
우선 문학관부터
통영시 관광안내도
청마문학관 내부 안내도
전시관에는
청마가 사용하던 유품들과
연도별로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
생명 추구의 시작을 감상하고
작품의 변천,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문학,
청마 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 등의
주제로 구성되며 그리고 시 감상코너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 문을 들어오면
통영의 문인들과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청마 유치환의 흉상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 출신.
유준수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이다.
한국의 시인이자 교육자.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를 노래한 《깃발》을 비롯하여
《수(首)》 《절도(絶島)》등이 있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정지용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수(首)》 《절도(絶島)》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생명의 서(書)》이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냈다.
그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도도하고 웅혼하며
격조 높은 시심을 거침 없이 읊은 데에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칫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기교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준다.
청마 유치환은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예술원공로상·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그의 오랜 연고지인 경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1967년 2월 13일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렸다.
그런 후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였고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육필원고, 편지, 시계 등 유품 100여 점을 비롯해
각종 자료 3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청마 유치환은
사진관 경영, 화신 연쇄점 사원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교직에 있었다.
통영 협성상고와 통영여중에서 4년쯤 교단에 섰고,
경주고 교장이 되기 전 한 학기쯤
경북대에서 강의를 맡은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교직 경력은 교장이었다.
통영여자중학교 교사(1945. 10.-1948),
54년에 거창 안의중학교 교장(54∼55),
경주고(55∼61), 경주여중(61∼62), 대구여고(62∼64) 교장,
경남여고(64) 교장 등을 지냈다.
여자 문제 등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존경받는 교육자였고, 지사적인 시인이었다.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그는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에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에
수록 된 시
<이영도시인에게 보낸 편지>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 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다 할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당시 유치환 시인은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고
이영도 여사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혼자의 몸이었다.
이영도 여사가 통영의 교사로 일하게 되었을때
그녀를 처음 보게된 청마는 이영도 여사를 사모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20년간 약 1,5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유치환 시인의 시 행복은
그때 이영도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된 내용이다.
청마의 끈질긴 구애에 이영도 여사 역시 마음을 살짝 열게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이영도 시인의 무제이다.
<무제>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가 사망한 뒤
그가 이영도 여사에게 보낸 20년간의 편지들은
6.25 전쟁때 일부 소실되고
남은 약 500 여통의 편지를 모아 펴낸 서간집이 바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이다.
당시 작품의 저작료는 이영도 여사가 받게 되었으며
이 여사는 수익금을 모두 우리나라 시 문학 발전을 위해
기탁하였다 한다.
청마 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
문학관 옆의 계단을 올라가면
유치환선생님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본래 청마의 생가는 태평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번화한 중심부로 변하여,
원래 자리가 너무 좁아 전시관 옆에
복원하였다.
삽짝 문을 들어가 본다.
본채와 사랑채 2채의 작은 초가집에
당시에 생활하던 모습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
집 안에는
본채에 방 3칸과 사랑채에 방 1칸
부엌, 창고, 화장실이 있다.
한의였던 부친 유준수는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유치환은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여기서 거제시와 통영군이 청마의 출생지를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한약재들이 서까래에 달려 있다.
유약국
본채와 사랑채
사랑채 방
생가에서 내려와 문학관을
한번 더 찍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글 참고 출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여행 7] 통영 박경리 기념관 (0) | 2016.07.22 |
---|---|
[통영여행 6] 통영 이순신 공원 (0) | 2016.07.21 |
[통영여행 4] 통영 미래사 (0) | 2016.07.21 |
[통영여행 3] 통영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 (0) | 2016.07.21 |
[통영여행 2] 통영 해저터널 (0) | 201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