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살라망카 구 시가지
2016년 4월2일 토요일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여행 세째 날
마드리드-톨레도-콘수에그라-살라망카-파티마-까보다로까
리스본-세비야-타리파-탕헤르-페스-라바트-카사블랑카-미하스-론다
코르도바-그라나다-바르셀로나-몬세라트
스페인 살라망카 중세 대학도시는
사암으로 지은 건축물 때문에
도시 전체가 적갈색 분위기를 띠고 있어
수세기 동안 황금빛 도시로 불려왔다는데
가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특히 햇빛에 의해 고풍스럽고 오래된 건물들이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달라지는게 너무 아름다웠다.
바로크, 고딕, 무데하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정말 눈을 호강시켜 주고 마음을 채워 주는 도시였다.
이제 아쉽지만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중세 도시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항상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느끼지만,
지금도 내 안에서 아쉬움의 절규가 메아리친다.
살라망카 구시가지 전경
사암으로 지은 건축물 때문에
도시 전체가 적갈색 분위기를 띠고 있어
수세기 동안 황금빛 도시로 불려왔다고 한다.
골목길을 따라 좌우에 보이는 건물들이
모두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이 고풍스럽다.
르네상스 양식 도시 궁전 몬테레이 궁전
살라망카의 아구스티나스 광장에 있다.
몬테레이 백작인 알론소 데 아세베도이수니가가
16세기 전반기에 건립한 유서 깊은 궁전으로,
16세기 에스파냐 건축계의 거장 로드리고 힐 데 온타뇬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성했다.
몬테레이 궁전
살라망카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던 시기에
윤택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지어
처음에는 웅장한 규모였으나
현재는 원래의 건물 중 1/4 정도만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조성한 에스파냐의 도시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이자
르네상스 양식의 도시 궁전 중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몬테레이 궁전
건축가 온타뇬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궁전 양식을 에스파냐 현실에 맞게 수정해
이 궁전 건축에 적용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외관이 이탈리아풍이다.
외벽 전체에 직사각형 창문과 윗부분이 반원형 아치로 된
기다란 창문 등 여러 형태의 많은 창문이 나 있고,
맨 윗층에는 당시 귀부인들이 거리를 내려다보며
산책을 즐기던 독특한 장소인 갤러리(gallery)가 있다.
현재 이 궁전은 살라망카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미겔 데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1864~1936)
에스파냐의 철학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
살라망카대학에서 교수와 총장을 지냈고
1898년대의 작가의 지도적 중심 인물로서
문학 ·사상 양면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주요저서에 《돈키호테와 산초의 생애》 등이 있으며
실존적인 생의 문제를 다루었다.
고적하다.
Casa del Regidor Ovalle (18th century)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교육자로도 활동했던
미겔 데 우나무노가 사망한 저택.
18세기 건물은 우나무노가
살라망카 대학 총장으로 일할 당시 살았던 거주지였다.
우나무노는 모두 두 차례 살라망카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같은 주택에서 생활했다.
톨레도의 특산물인 톨레도 검을 파는 가게
살라망카의 상징 개구리
살라망카 대학교의 상징은 개구리로,
뒤로는 점프하지않는 개구리처럼
앞만 보고 전진하라는 뜻에서 상징이 되었는데
이제는 살라망카 시의 상징이 되었다.
살라망카 대학 정문 파사드 해골 위에
개구리가 부조되어 있다.
살라망카 기념품점에는 청개구리가 가득하다.
돈 후앙 조각상
파우스트처럼 전 유럽에 전파되어 있던
실존인물이 아닌 전설상의 인물로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쓰인다.
돈 후안
에스파냐의 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의 희곡
<세비야의 호색가와 돌[石]의 초치객>(1630)에 의하여
돈 후안은 비로소 전설에서
문학상의 한 성격으로 정착하였다.
돈 후안 전설에는 2가지 요소가 있다.
그 하나는 ‘방탕자’이고
다른 하나는 ‘식사에 초대된 죽은 사람’이다.
전자는 차례로 여인을 농락하고 정복한 후 버린다.
즉, 오늘날의 여성 편력가의 대명사가 된 돈 후안이다.
후자의 죽은 사람은 신을 상징한 것으로,
죽은 사람의 돈 후안에 대한 복수는
그의 못된 짓에 대한 신벌을 뜻하는 것이다.
돈 후안은 산문 ·시 ·음악 등에서
많은 작가가 취급하여,
그가 명문 출신이며 매력적이고 또 방랑벽을 지녔으며,
기성도덕에 대립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일반적으로 공통된다.
돈 후안을 소재로 다룬 대표적 작품으로는
합리적인 무신론자이며 위선자인 돈 후안을
사회적인 풍자를 섞어서 쓴 몰리에르의 《돈 후안》을 비롯하여,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있다.
플라자 마요르의 다른 출입구를 통과해야
약속 장소로 바로 갈 수 있다.
플라자 마요르의 여러개 출입구 중 하나
약속 장소인 콜럼버스의 조각상 앞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항해가
신대륙인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지구는 구형이며,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포르투갈 왕에게 탐험을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에스파냐로 가 여러번 거절 당한 후 마침내 이사벨 여왕을 만나
1492년 4월 17일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사벨 여왕의 콜럼버스에 대한 후원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와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계약을 산타페 협약이라고 부른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을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2년 8월 3일에 1회 항해를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서인도 제도의
어느 섬에 도착하여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이 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귀국 뒤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된 그는
17척에 1,500명의 대선단(대부분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었다)을
이끌고 2차 항해를 떠났다.
그는 그곳에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인디언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살육하고 노예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금 대신 노예가 본국으로 보내졌고,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하였다.
3차, 4차 항해도 별 소득이 없었으며,
1504년 이사벨라 여왕이 죽은 뒤 콜럼버스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여 초라한 모습으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1일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인도라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오늘날 서인도 제도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를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인디언의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미국 인디언들로부터 담배를 얻어와
처음으로 유럽에 퍼뜨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콜럼버스의 탐험경로
4차례의 항해 경로
아메리고 베스푸치 (1451 ~ 1512)
아메리카라는 명칭은,
신대륙임을 처음으로 밝혀낸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항해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유래했다.
그는 1499~1502년까지 스페인 탐험대의 일원으로
아마존 유역을 탐사하고 다시 남하했지만
대양으로 진출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그 후 베스푸치는 콜럼버스의 생각과는 달리
이곳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일의 지도 제작자인 발트제뮐러는
1507년 신대륙을 아메리카로 표기한 지도를 발간했는데,
그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여행 기록에 근거해 지도를 제작한 후
그 대륙을 그의 이름을 기려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관광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산 에스테반 수도원
살라망카에서
추리게라양식의 건축물로는 최초라는,
17세기에 지어진 도미니크회의 수도원인
산 에스테반 수도원을 못 보고 가나 했는데
다행히 버스 안에서 조우했다.
살라망카에서 꼭 봐야 하는 수도원이라고 했는데
외관이라도 볼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ㅋ
산 에스테반 수도원
살라망카의 콩실리오데트렌토 광장에 있는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플래터레스크 양식이
섞여 있는 복합 양식의 유서 깊은 수도원이다.
코르도바의 주교인 후안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의뢰에 따라
에스파냐 건축가 후안 데 아빌라가
1524년에 처음 건축을 시작했다.
이후 프라이 산티아고, 로드리고 온타뇬,
후안 리베로 데 라다 등 여러 에스파냐 건축가들이
대를 이어 건축해 1610년에 완성했다.
산 에스테반 수도원
건물 정면은 외벽 전체에
수많은 성인상과 다양한 문양이
극도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걸작품으로,
에스파냐 건축계에서
플래터레스크 양식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살라망카시를 흐르고 있는 토르메스강 위의 다리
올 때는 로마시대에 건축된
로마다리를 보고 들어 갔는데
나갈 때는 일반 다리를 보면서 나간다.
이제 살라망카를 벗어난다.
[참고: 두산백과, 위키백과, 네이버 캐스트, 실크로드 사전]
[푸른 바다 서명이 없는 사진은 퍼 온 사진]
'스페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비야] 황금의 탑, 무리요 공원,산타 크루스 지구 (0) | 2016.11.27 |
---|---|
[살라망카] 살라망카에서의 식사 (0) | 2016.10.21 |
[살라망카] 마요르광장 (0) | 2016.10.19 |
[살라망카] 살라망카 대학, 클레레시아 성당, 조개의 집 (0) | 2016.10.18 |
[살라망카] 살라망카 대성당 (0) | 2016.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