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서울] 서울여행 1탄 창경궁

푸른 바다. 2017. 2. 22. 03:06

창경궁

 

 

2016.10.22 토 ~ 2016년 10.23 일

양일간

친구들과 서울여행을 시작했다.

처음에 홍콩, 마카오 여행을 계획했으나,

도저히 서로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택한 것이 서울이다.

서울은 2009년도에 혼자 다녀 본 곳으로

그 때 사진과 내용을 퍼 와서 보충했다.

 

 

 

 

부산역

 

 

 

 

부산역 대합실

 

 

 

 

부산역 대합실 카페

 

 

 

 

B&C 제과점 빵이랑 커피로 아침

 

 

 

 

서울역에서 친구 1명이랑 합류하여

서울역 식당가에서 점심식사

 

 

 

 

해물 순두부 맛있다.

 

 

 

 

맛 본 새우 볶음밥도 맛있다.

 

 

 

 

 창경궁로

 

 

 

 

창경궁 가는 길

백다방에서 커피 테이크 아웃

 

 

 

 

아직도 소녀 ㅋㅋㅋ

 

 

 

 

보도블록에 칠해져 있던 문양 

 

 

 

 

처음에는

서울시티투어버스를 탈 생각이었는데

길상사에 가고 싶은 친구들이 있어 패스하고

4명 투어버스비로

그냥 택시타고 움직이기로 했다.

 

 

 

 

창경궁 매표소

 

 

 

 

1인 1,000원 창경궁 티켓

 

그동안 다녀 본 외국 여행에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 유적지의 관람료가

엄청 싸다는 것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이라 칭하였다.

원래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남경 이궁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을 지었는데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란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이후 창덕궁이 정궁 역활을 하면서

이궁으로서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일제때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 하였으며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 살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중에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창덕궁과의 사이에 있는 산줄기를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며,

이 궁이 정궁이 아닌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창건 당시 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남향인 다른 궁궐

 

 

 

 

창경궁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창경궁

 

1483년, 당시 왕이었던 성종은

창덕궁에서 세 명의 대비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성종은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창덕궁 바로 옆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위해 지은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지었다.

경복궁, 창덕궁에 이은 조선왕조 세 번째 궁궐로

비록 별궁이었지만 궁의 기능에 충실한 곳이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쪽을 향해 있으며,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중층 우진각지붕인 홍화문

 

 

 

 

홍화문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이곳 홍화문에서 친히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재건하였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홍화문 좌우에 있는 익각 중 우편 회랑

 

성종 때 건립된 창경궁의 건물은

 세 왕후(세조,덕종,예종)의 거처를 위해

세종이 상왕이 된 태종을 위해 지었던 옛 수강궁 터에

1483년 성종 14년 2월부터 짓기 시작하여

1484년 성종 15년 9월에 완공되었다.

정전인 명정전, 편전문정전, 침전인 수령전,

그리고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사성각 등이고,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이, 정전인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지었다.

 

 

 

 

홍화문에서 바라 본 홍화문과 명정문 그리고 명정전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은

중심축에 맞추어 일직선 상에 놓여 있으나

가장 안쪽에 있는 명정전은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다.

이는 정문에서 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까지의 거리가

 활의 사정거리 안에 들 정도로 짧아

왕의 안전을 위해 건물을 비껴 세운 것이다.

 

 

 

 

옥천교 보물 제 386호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

다른 궁궐은 문이 3개이다.

 

 

 

 

옥천교 보물 제386호

 

옥천교는 홍화문 앞을 흐르는 금천인 옥류천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조선 전기의 돌다리로,

1483년 성종 14년에 세워졌다.

옥천교는 그 형태가 아름다워

조선시대 궁궐의 다리 가운데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돼 있다.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지은 명칭이다.

다리의 길이는 9.9m이고 너비는 6.6m이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의 대문인 명정문 사이에 있다

 

 

 

 

명정문  보물 제385호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으로

흥화문과 같이 동향을 하였는데,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행각은 2칸 폭의 복랑이며,

경복궁의 것에 비해 높이가 낮다.

 

 

 

 

품계석

 

명정문을 통과하면

정전인 명정전 앞에 동반 서반의 9개 품계석이

어도를 중심으로 서 있는 안 뜰이 나온다.

 

 

 

 

걸을 때 조심스럽게 걷도록 박석이 깔린 명정전 안 뜰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고 국가의 연회를 치렀던 명정전은

중종의 아들인 인종이 즉위한 곳이다.

1484년 성종 15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 광해군 8년에 중건한 이후 그대로 보존되었다.

 

 

 

 

명정전 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규모가 작게 격식을 낮추었다.

이는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어진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명정전의 돌계단 어도

 

돌계단에는 4마리의 돌짐승을 배치하였고

가운데 계단에는 봉황을 새겨넣은 답도를 배치했다.

 

 

 

 

명정전  현판

 

조선시대의 궁궐의 대전은 남향으로 세웠으나,

명정전은 예외적으로 동향이다.

창건 당시 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명정전 국보 제226호

 

임금의 의자인 어좌와 일월오악도병문

 

 

 

 

1616년 광해군 때 재건되어

큰 화재에도 살아남아

400여년 세월의 연륜이 느껴진다.

 

 

 

 

천장에 봉황무늬가 새겨져 다.

 

 

 

 

드므

 

화재 대비용 방화수 저장용기

북경 자금성에 갔을 때도

곳곳에서 보았다.

 

 

 

 

명정전에서 바라 본 명정문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붙어 있는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명정전 마당 측면 회랑

 

명정전 북쪽은

왕과 왕실 여인들의 처소가 모여 있는

내전공간이다.

 

 

 

 

문정전

 

명정전의 오른쪽인 남쪽으로는

문정전이 남향하여 명정전과 직교하며 서 있다

임금이 일상적인 정사를 보던 편전으로,

동향을 한 명정전과 달리 남향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휘녕전이

문정전의 옛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왕이나 왕비의 국상 중에는 장사를 마치고 난 뒤,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곳을 혼전이라고 하는데,

문정전은 특히 왕대비의 혼전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인현왕후의 경우,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모시는 빈전으로

문정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숭문당

 

 명정전 뒤쪽에는 숭문당이 있는데,

왕의 경연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궁궐 처마 위에 일렬로 도열해 있는 잡상 

 

 잡상이란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줄줄이 놓이는 와제 토우들이다.

장식기와의 하나로서, 이를 만드는 사람을 잡상장이라 한다.

조선도교사에 의하면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을 일러 잡상이라 하는데

이는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잡상은 인물상과 동물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앞쪽에 앉은 것이 인물상이고, 그 뒤쪽의 것이 동물상이다.

 

 

 

 

궁궐투어 신청하면 역사 해설가들의

설명을 들으며 투어 할 수 있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는데,

1615년(광해군 7)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인조 때와 순조 때에도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

그 중 특기할 만한 사건은 숙종 때 신사년의 변고와

신임년, 신축년과 임인년의 사화,

그리고 영조 때의 사도세자의 변고이다.

 

 

 

 

 

 

 

경춘전 뒤,

담 뒷쪽에 영조 때 화재로 소실된

장희빈이 살았던 옛 취선당 터가 있다는데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창경궁은 대비들을 위해 지어졌기에

여인들의 처소가 많고, 조경역시 여성스럽다.

 

 

 

 

경춘전

 

소혜왕후(인수대비),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 등이 머물고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경춘전

 

 

 

 

경춘전

 

스물여섯 칸의 비교적 큰 전각인 경춘전에서

제일 먼저 생활했던 여인은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이다.

그녀는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아내로,

덕종이 요절하여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인수대비가 된 인물이다.

인수대비는 학식이 깊어 정치에 많은 자문을 하였고,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인 내훈을 간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일로 말년에 이르러

손자 연산군에 의해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504년 연산군 10년 4월에

인수대비는 경춘전에서 6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경춘전

 

통명전 서쪽의 경춘전은

조선왕조 최대의 스캔들의 희생자,

인현왕후(1667~1701)가 승하한 곳이다.

정비임에도 후사가 없던 인현황후와

미천한 신분임에도 왕자를 낳아 숙종의 총애를 받은 장희빈.

중전의 자리를 두고 두 여인은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1689년에는 원자책봉문제로 인현왕후가 폐서인 되고,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5년 뒤에는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만다.

이에 왕비의 자리를 되찾고 싶던 장희빈은

취선당에 몰래 신당을 차리고 무녀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통명전에 저주를 위한 흉물을 묻어 두기에 이른다.

인현왕후는 나날이 쇠약해지더니 숙종 27년 죽음을 맞이한다.

얼마 후, 장희빈의 저주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녀 역시 사약을 먹고 죽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 한다.

 

 

 

 

경춘전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은

혜경궁 홍씨(1735~1805)가 사도세자가 용꿈을 꾸고

정조를 낳았던 곳이 경춘전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해 창경궁에 따로 자경전을 지어드렸다.

그곳에서 생활하던 혜경궁은 순조가 즉위한 뒤에,

손주 며느리인 효의왕후에게 자경전을 넘겨주고

경춘전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고 한중록을 집필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 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아들과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며,

경춘전에서 1815년 순조 15년 2월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춘전

 

고종 때 조대비로 널리 알려진

순조의 아들 익종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가

1827년 순조 27년 7월 경춘전에서 헌종을 낳았다.

순조는 기쁜 마음에

원손의 백일과 첫 돌 잔치도 경춘전에서 베풀었다.

 

 

 

 

양화당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건립된 전각으로

통명전의 동쪽 옆에 있다.

명칭은 서거정이 지었고,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임진왜란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 재건되었으나

이후에도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1834년(순조 34) 재건된 후 오늘에 이른다.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부끄러워

 차마 왕의 거처에서 지낼 수 없다며 양화당에 잠시 머물렀다.

1878년(고종 15)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가 승하한 곳이다.

 

 

 

 

통명전 보물 제818호

 

내전에서도 가장 크고 중심 되는 건물은

중궁전으로 쓰인 통명전인데,

그 위상을 말해주듯 2단 월대 위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앞면 7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왕이 머물던 중궁전이 다 그러하듯

용마루를 없애고 곡와로 지붕을 올렸다.

이는 지붕의 용마루가 용으로 상징되는

왕을 눌러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통명전

 

창경궁의 정침,

즉 왕과 왕비의 침전인 내전으로

연회장소로 쓰였던 공간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내전을 이루는 전각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며 규모가 크다.

 

 

 

 

1484년 성종 15년에 지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중건하였다가

이괄의 난으로 다시 전소되었으며

1633년 인조 11년에 재차 복구되었다.

하지만 1790년 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3년 순조 33년 중건하였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통명전 현판

 

내부에 금박으로 쓴

통명전이라는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통명전 내부

 

 

 

 

 

 

 

통명전 서쪽 연지

 

 통명전 서쪽에는 돌을 정교하게 조각하고

다듬어 만든 남북 길이 12.8m, 동서 길이 5.2m가 되는

장방형 연못아름다운 연지를 조성하였고

그위로 길이 5.94m, 폭 2.56m의 돌다리를 

동서로 놓았다.

 

 

 

 

통명전 서쪽 연지

 

이 연못은 북쪽의 샘에서 넘쳐나는 물을,

직선으로 설치한 석구를 통해

연못 안으로 떨어지도록 고안했는데,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가에 정자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1911년에는 통명전 뒤 언덕에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 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설치하여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밭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창경궁은 해방 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이용되다가

1981년 정부에 의해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창덕궁으로 향했다.

 

 

 

 

3대 고궁 위치

 

지금은 담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왕궁처럼 사용되었다는

창덕궁과 창경궁

일제시대 때 동물원과 식물원이 되면서

담을 쌓고 완전 분리시켰다고 한다.

 

 

 

[출처: 두산백과, 문화유산채널, 답사여행의 길잡이, 한국 미의 재발견]

 [서명이 없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