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서울] 서울여행 2탄 창덕궁

푸른 바다. 2017. 2. 23. 03:29

창덕궁

 

 

 

2016.10.22 토 ~ 2016년 10.23 일

서울여행 첫 날

 

 

아침 일찍 부산에서 출발하여

서울에서 친구와 만나 이른 점심을 먹고

창경궁부터 시작한 투어이다.

평소의 나였으면 될 수 있는대로

구석구석 돌아봤을텐데

친구들이 있어 주마간산식으로 밖에

 둘러보지 못했다.

 

 

 

 

 

 

 

 

 

 

3대 고궁 위치

 

지금은 담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왕궁처럼 사용되었다는

창덕궁과 창경궁

일제시대 때 동물원과 식물원이 되면서

담을 쌓고 완전 분리시켰다고 한다.

 

 

 

 

창덕궁 (창덕궁 홈피 사진)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 북쪽에 위치한 이궁이었다.

응봉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았는데,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창덕궁

 

1405년에 태종이 세운 조선 왕조 제2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별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활을 하였다.

임진왜란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 되지 않고

1610년 광해 2년에 창덕궁이 재건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1991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돈화문 보물 제383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인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 보물 제383호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다.

 

 

 

 

좌우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제472호​

 

돈화문 안으로 들어오면 양 옆으로

8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라는데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무는 높이 15~16m, 가슴높이 줄기둘레 2~3m,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인

동궐도에도 나타난다.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천교 보물 제1762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와

우측(동쪽)으로 90도 꺾인 곳에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태종 11년 1411년에 세워져 600년이 지난

궁궐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홍예석교인 금천교 교각 위에는

이무기가 다리를 지키고 있다.

 

 

 

 

금천교 교각위에 있는 이무기

이무기는 수해를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금천교

 

금천교 남쪽홍예 사이에 귀면상과 해태 조각상

물을 타고 스며드는 사귀를 다스리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비

 

 

 

 

진선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 불리는 북을

태종 때 진선문에 설치했고,

중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영조 때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서쪽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에 어로가 나 있다.

진선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이어진 길은

숙장문과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호위청, 상서원 등의 행각이 있다.

 

 

 

 

호위청

 

인정문 밖 외행각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이 있는데

호위청은 조선 후기에 설치된 군영의 하나로

궁중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 되었다.

 

 

 

 

동쪽 출입문인 숙장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 둘러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인정문 보물 제813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전 국보225호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대한제국의 황실문장인 이화문장이 용마루에 장식되어 있는 인정전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전 국보 제225호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있고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내부는 화려하고 높은 천장이 있는 통층이다.

 

 

 

 

인정전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정전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흙을 구워 만든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 궁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조정의 서반 품계석

 

 의식을 치르는 품계석이 놓인 마당을

조정이라고 부른다.

동쪽은 동반에 해당하는 문관의 품계석이 있고

서쪽은 서반에 해당하는 무관의 품계석이 있다.

 

 

 

 

선정전 보물 제814호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희정당 보물815호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으로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조전 보물 제816호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 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대조전 보물 제816호

 

왕비의 침전으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대조'란 '크게 만든다'는 뜻을 가졌는데,

왕업을 계승할 왕자가 이곳에서 탄생해야 하였기에 붙인 이름이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대조전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 하였으며,

왕가생활의 마지막 모습을 비교적

잘 보관하고 있다.

 

 

 

 

 

 

 

 

 

 

 

 

 

낙선재

 

조선24대 임금 헌종은

1847년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창살과 벽체의 무늬, 평원루의 건축양식등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낙선재는 영왕의 비 이방자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기거 했던 곳으로

지금의 낙선재는 1996년에 복원된 옛 모습이다.

 

 

 

 

 

정청

 

관원들이  궁중에서 정사를 보던 곳

 

 

 

 

 

 

 

성정각 일원

 

 

 

 

 

 

성정각

 

조선시대 세자가 거주했던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세자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성정이라는 명칭은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

성정각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한때는 내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후원 입구

 

창덕궁 뒤쪽에는 135,200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왕실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비원이라고도 불리는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 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성정각 일원에서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왕실정원의 초입부인 부용지에 이른다.

 

 

 

 

후원 부용정 보물 제1763호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부용정 보물 제1763호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으로

2012년 보물 제 1763호로 지정되었다.

 

 

 

 

영화당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주합루 보물 제1769호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합루도 2012년 보물 제 1769호로 지정되었다.

 

 

 

 

 

주합루 일곽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주합루 일곽의 모습은 가장 두드러진다.

이곳에 서면 모든 건물은 정원의 일부이고,

정원은 바로 자연이라는 것을 느낀다.

 

 

 

 

 

 

 

 

 

 

 

 

 

 

 

 

 

 

 

 

 

 

창덕궁을 나와 친구가 가고 싶어 하는

길상사를 가기로 했다.

 

 

 

 

택시 정류장을 찿아....

 

 

 

 

 

 

 

 

 

 

 

 

 

 

 

[출처: 두산백과, 문화유산채널, 답사여행의 길잡이, 한국 미의 재발견]

[서명이 없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