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주간, 야간
2016.10.22 토 ~ 2016년 10.23 일 서울여행 첫 날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인
경복궁 야간 관람을 위해
인사동에서 경복궁으로 넘어와
한복대여점을 찿았다.
경복궁 길 건너에 한복대여점이 몇 군데 있는데,
첫 번째 들른 대여점은
불친절하고 한복 사이즈도 다양하지 않아
근처에 있는 경복궁 한복이야기에 갔는데
여기는 한복 종류도 많고 친절하게
요구하는 한복을 성의껏 찿아주고 입혀주었다.
경복궁 한복이야기 한복대여점 강추!!!
그리고 둘러보지 못한 경복궁은
경복궁 홈피 사진과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을
지난 2009년 포스팅에다 내용을 보충해서 올렸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현재의 경복궁 배치도 경복궁 사적 제117호 (위키백과 사진)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후 완공 되었으며 완공된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근정전, 강녕전, 교태전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으며, 경복궁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그후 270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 하였다. 중건한 경복궁은 33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고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이상의 전각이 헐리고 파괴 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내전과 동궁 권역도 제 모습을 되찿아 가고 있다. 경복궁 사적 제117호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 영제교를 지나면 기능에 따라 영역이 나뉜다. 외전 영역에는 근정문, 근정전이 있고, 내전 영역에는 사정전,만춘전,천추전,경회루 강녕전,연생전,경성전,함원전,흠경각,교태전이 있다. 생활주거공간 영역으로 자경전,집경당,함화당이 있으며, 그밖에 후원 영역에는 향원정,집옥재,협길당,팔우정 따위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고 있는 궁궐의 담, 즉 재성의 사방으로 문이 하나씩 있으니 남쪽의 광화문, 북쪽의 신무문, 동쪽의 건춘문, 서쪽의 영추문이 그것이다. <경복궁의 4대문, 경복궁 홈피에서 퍼 온 사진> 남쪽의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북쪽의 신무문 사적 제117호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동쪽의 건춘문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서쪽의 영추문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동궐대 (동십자각)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초소 역할을 한 각루이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인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버렸다. 경복궁 사적 제117호 경복궁 남쪽 앞면에는 광화문이 있고 동, 서쪽에 건춘, 영추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그리고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이 나오고 그 안에 근정전이 있다. 광화문과 해치상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넓은 마당에 1995년까지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는데, 해방 이후 정부종합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용도로 쓰이다가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1996년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일제에 의해 헐려 나갔던 흥례문과 행각을 비롯한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이 1996년부터 2001년 10월에 걸쳐 복원되었다.
흥례문 흥례문은 외전인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던 건물로, 문의 이름은 세종 때까지만 해도 홍례문이라 부르던 것을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흥례문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은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후 그 자리에 사라진 지 8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아 다시 지어진 이익공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흥례문 일곽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다. 흥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영제교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 다리가 있다. 어구는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서고 남쪽에 3품 이하의 관원이 정렬하였다.
근정문 보물 제812호 3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근정문은 그 좌우에 일화문과 월화문이 있고 동쪽 행각에는 융문루가, 서쪽 행각에는 융무루가 있다. 정전 영역의 입구인 근정문에서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을 행하였다.
이때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 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왕의 즉위나 외국 사신접대 등의 큰 행사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근정전은 국가와 왕을 표현하는 상징물이었다.
때문에 중층으로 꾸미고 기둥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도
4신상과 12지신상을 조각해 놓았다.
마당에는 돌을 얇고 네모나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는데,
표면을 약간 거칠게 마무리하여 단조롭지 않고
빛이 반사되어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하였다.
이 마당에서 노인들을 격려하는 기로연이나
과거시험도 치러졌다.
근정전 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으뜸 전각 근정전은
태조 3년 1394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 1867년에 재건되었다.
조선조 최후의 대작으로 2층 구조의 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조정 중앙에는 삼도가 있어 근정전까지 이어지는데,
가운데 넓고 높은 길이 어도이고
동쪽이 문관의 길로 동반 곧 문반의 자리이고,
서쪽이 무관의 길로 서반 즉 무반의 자리이다.
관원의 품계를 나타내는 품게석이 있는 조정
근정전에서는 서울에서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었는데 이를 조하라고 했다.
조하에는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석 하였다.
근정전의 마당 즉 조정에는
직급별로 도열하기 위한 품계석이 서 있는데,
이 앞에서 신하들이 깔고 앉는 방석도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호랑이가죽, 양가죽, 개가죽으로 차별을 두었다.
어가가 올라 가던 곳
근정전 국보 제223호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의 접견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 단청
근정전 내부
정전의 안쪽은 바닥에 전돌을 깔고,
2층까지 높게 트이도록 하였으며,
북쪽 가운데에 임금님의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근정전 내부
근정전의 내부는 전체가 한 공간으로
트여 있는 통층구조이다.
사정전 보물 제1759호
왕이 신하들과 일상으로 정사를 논의하던 편전
편전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만춘전
편전 일곽의 동편전에 해당하는
1988년에 복원된 만춘전은 사정전의 부속 건물로
편전의 기능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온돌이 없는 사정전은 더운 여름철에 정사나 경연를 열었고
겨울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 만춘전에서
경연이나 정무를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정전 보물 제1760호
경회루 연지 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에
재건하면서 수정전이라고 명명했다.
고종대 초기에는 임시로 편전의 역할도 하였으며,
재건 당시 수정전 주변에는
약 200칸의 행각과 전각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으며 1910년 이후 모두 헐렸다.
1894~1896년까지 조선의 개혁을 주도하였던
1894년 갑오경장 때에는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
강녕전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다.
강녕전의 공간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 월대는 의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내진연, 외진연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 때에는
주변에 보계를 설치하여 보조하기도 하였다.
강녕전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수, 부, 강녕, 유호덕(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종명(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 가운데 세 번째인 강녕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강녕전 내부
우물 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들이 숙직을 하였다.
생각보다 방들이 작다.
강녕전 내부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으며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교태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도
강녕전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다만 전면에 월대가 없는 것이 다르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공간구성 뿐만 아니라 집의 구조도 같은데
지붕꼭대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고
내부에는 종도리를 두개 나란히 두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 지휘하던 곳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1440년 세종22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태전 내부
교태전 내부
교태전 내부
아미산과 굴뚝 보물 제811호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는데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옮겨다 쌓은 계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이 아름답다.
자경전 보물 제 809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교태전 동쪽 자미당터에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었다.
경복궁 내의 일상생활하는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자경전은 44칸으로서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향에 복안당이라는 이름의 침실을 두었고
중앙에는 낮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경전을 두었다.
자경전 보물 제 809호
동남향에는 다락집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기에 12칸의 협경당이 붙어 있다.
주변에는 수십 칸의 행각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여러 가지 글자와 꽃, 나비, 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넣은 아름다운 꽃담과
오래 사는 열 가지의 동식물 십장생 무늬를
조화 있게 새겨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자경전 보물 제 809호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조 대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등 왕실의 안 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이다.
자경전 보물 제 809호
조 대비는 남편 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하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즉위시켜 조 대비의 힘을 약화시켰다.
인조의 8대손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의 혈통을 잇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조 대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차남을 양자로 삼고 고종으로 즉위 시켰다.
이때 고종의 나이 12세여서
10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주도 하였다.
자선당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과 비현각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다.
자선당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던 내전인데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빼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옮긴 뒤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돌들을
1993년에 김정동교수가 발견하여
노력 끝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이미 상해 버린 돌들은
자선당 복원때 쓰이지 못하고 녹산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건청궁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에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다.
건청궁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지 않을 때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휴식할 목적과는 달리 이 건물은
조선말기 정치적 혼란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에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서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1887년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되었으며,
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건청궁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 고종10년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왕의 처소인 장안당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며
사대부집을 연상 시키는 구조로 지었다.
1895년 을미사변때 건청궁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되어 녹산에서 불태워지자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1896년 2월11일 새벽에 고종은 변복을 한 채 황태자만 데리고
신무문을 빠져나가 러시아공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며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곤녕합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이곳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되었다.
왕의 처소인 장안당에서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을 잇는 복도
2006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건청궁의 부속 건물들
향원정 보물 제1761호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향원정 보물 제1761호
북쪽 후원 영역에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6.25때 파괴 되었다.
경회루 국보 제224호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주역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경회루 국보 제224호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 태종 12년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경회루
경복궁 흥례문 수문 교대식
끝 날 무렵이라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
경복궁이 가까워지자
한복을 입은 선남선녀들이 많이 보인다.
경복궁 동십자각
나와 친구 3명도 한복을 대여하기 위해
한복대여점을 찿기 시작했다.
경복궁 한복이야기 한복대여점 강추!!!!!
지하로 내려가면 있다.
예쁜 한복도 많고
사이즈도 다양하고
한복 수량도 엄청 많았다.
주인장이 직접 한복을 만든다고 했다.
경복궁 한복이야기 홈피 사진
사람들이 많은데도 친절하게
요구하는대로 한복을 찿아 입혀 주었다.
한복을 차려 입고
아직 입장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지만
경복궁으로 왔다.
광화문 야경 사진
광화문 안 경복궁
광화문
저 문으로 나가면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게 된다.
한복 패션쇼가 열릴 모양이다.
리허설 중
흥례문 행각 앞에 설치된 전등
쪼매 무섭다. ㅋㅋㅋ
한복을 입고 입장하면
예약을 안해도 무료로 바로 입장이 된다.
흥례문 앞에 긴 줄이 서 있다.
입장 시작
밤에 보는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에서 보는 근정문
근정전 야경
근정문 행각
서쪽 행각의 열주
이제 쇼가 공연되는 경회루로
멋진 경회루의 데칼코마니
경회루의 모습이 연못에그대로 비춰져
데칼코마니를 한 듯하다.
연못에 비친 초승달도 두 개
이쁘다.
멋진 데칼코마니
이제부터 빛의 향연이 시작된다.
경복궁 야간기행 공연의 주제는
문화재와 미디어아트의 융복합 공연의 만남
시간의 다리를 건너다.
빛과 국악의
콜라보레이션이 환상적이다.
북을 치면서 춤을 춘다.
무희들이 춤을 춘다.
아쉽지만 공연이 끝났다.
경복궁 야간기행의 주제 안내
우리도 단체 사진 한 컷
이제 돌아간다.
아까 리허설 중이던
한복의 날
한복패션쇼가 끝 무렵이었다.
한복 디자이너들과 모델들이
무대인사 중이다.
한복패션쇼도 재미났을텐데 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숙소를 잡은 뒤
늦은 저녁을 먹을려고 식당을 찿았지만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는 중이었다.ㅠ
그래도 저녁을 굶을 수는 없어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라면을 사다... ㅠㅠ
서울 상경할 때는 맛있는 맛집을 찿아 가
멋진 식사를 하리라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편의점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ㅠㅠㅠ
그 뒤는 시원한 맥주로 하루의 마무리를... 화이팅!
[참고:두산백과, 경복궁 홈페이지, 답사여행의 길잡이]
[서명이 없는 사진은 경복궁 홈피 사진,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이다.]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서울여행 6탄 홍대거리 (홍대입구) (0) | 2017.02.27 |
---|---|
[서울] 서울여행 5탄 남산케이블카, N서울타워, 팔각정, 봉수대 (0) | 2017.02.26 |
[서울] 서울여행 3탄 길상사, 인사동 거리 (0) | 2017.02.23 |
[서울] 서울여행 2탄 창덕궁 (0) | 2017.02.23 |
[서울] 서울여행 1탄 창경궁 (0) | 2017.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