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식명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뒤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공화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992년 3월 분리 독립하였다.
유럽지도
발칸지도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
동쪽 및 남동쪽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북쪽과 서쪽은 크로아티아와 접한다.
거의 내륙국에 가까우며,
해안선의 길이는 21km에 불과하다.
국토 내륙에서 중앙과 남부는 산지이고,
북서부는 구릉지이며,
북동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도
북쪽과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동쪽으로는 세르비아
동남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비잔틴문화, 슬라브문화, 이슬람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1국가 2체제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행정구역
수도는 사라예보이며
행정 구역은 크게 3개 구역인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스릅스카 공화국의
2개 최고 행정구와
1개의 국제관리구인 브르치코 행정구
로 나뉜다. 1990년 탈냉전 이후문화, 종교적 차이로 인한 민족갈등이 폭발하여,
분리 독립을 원하는 이슬람교도, 세르비아인(세르비아정교),
크로아티아인(가톨릭)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고,
세르비아인에 의한 인종청소로 이어져 국제사회의 개입과
1995년 12월 데이턴 평화협정 체결을 초래하였다.
이 협정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
(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스릅스카공화국(세르비아계 공화국)의
1국가 2체제를 수립하고 각각 입법부와 대통령을 두는
복잡한 정치체계를 갖게 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기
파란색 바탕 가운데에는 노란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으며
노란색 삼각형 빗변에는 7개의 하얀색 별과
위아래로 잘려진 1개의 하얀색 별이 그려져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은 유럽기를 바탕으로 한 색으로,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은 중립과 평화를 의미한다.
삼각형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토의 모양을,
삼각형의 세 개의 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는
세 민족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을 의미한다.
파란색과 하얀색 별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의 일원임을 의미하며
노란색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는 세 민족이 서로 협력하면서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을 함께 창조한다는 뜻을 의미한다.
가로세로 비율은 2:1이다.
이전에는 하얀 바탕에 파란 문장을 넣은 기를 사용하였으나
1998년 2월 4일 현재의 기로 제정하였다.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등
3개 민족은 국기 및 국장의 디자인 결정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기
1996년 11월 5일에 제정되었다.
빨강, 하양, 초록의 세로 줄무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운데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스릅스카 공화국의 기
1992 2월 28일에 제정되었다.
세르비아의 영향을 받은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 세 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국기와 디자인이 동일하다.
국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이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스릅스카공화국(세르비아계 공화국)의
1국가 2체제로 구성되어 있고
두 공화국은 각각 입법부와 대통령을 가지고 있다.
연방정부는 3인 공동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3인의 공동 대통령은 8개월씩 윤번제로 정권을 담당하며,
그 아래 총리는 내각을 이끌고 있다.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2년의 상원(15석)과
하원(42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은 민주행동당(이슬람), 세르비아민주당(정교),
크로아티아민주연합(가톨릭) 등이다.
면적은 5만 1197㎢로
전 국토의 약 39%가 산림이고
목장과 목초지를 포함한 농경지가
전 국토의 39%를 차지하고 있다.
기후는 내륙 지방의 상당 부분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리는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평야 지대인 국토 남단 끝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인구는 2015년 기준 386만 7055명이다.
주민은 보스니아인(이슬람인) 48%,
세르비아인 37%, 크로아티아인 14%,
기타(롬족, 알바니아인, 아랍인, 터키인, 유대인 등)가 0.6%이다.
3대 민족 집단은 크게 보면
모두 남슬라브계에 속하는 종족이나,
정치, 종교와 역사적인 전통에 의한 대립으로 갈려 있다.
보스니아인은 보스니아 무슬림 또는 보스니악이라고도 한다.
언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고,
공용어는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이다.
세르비아어는 스릅스카 공화국 지역에서 주로 쓰이며,
크로아티아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지역에서
보스니아어 다음으로 많이 쓰인다.
보스니아인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아랍 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는 이슬람교 50%,
세르비아 정교 31%, 가톨릭교 15%이다.
보스니아인은 이슬람교,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정교회,
크로아티아인은 로마 가톨릭을 주로 믿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민의 50%는 무슬림이며,
30%는 세르비아 정교회, 15%는 가톨릭 그외 3%인데,
이는 민족구성과 거의 일치한다.
대부분 슬라브족의 종교는
동방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이지만,
보스니아인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는
슬라브 민족이다.
교육체계는 8-4-4제이다.
초등교육은 6~14세까지
8년간 의무교육으로 실시되나
교육제도가 낙후되어 있다.
국내총생산은 2014년 기준 190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386달러이다.
경제적으로 구 유고공화국들 가운데농업 위주의 가장 저개발되었다.
지하 자원은 철광석, 망간, 아연,
은, 대리석 등이 산출되고 있으며,
풍부한 삼림 자원과 수자원을 개발하여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를 표방하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우리나라는 1995년 12월 15일 내전종식과 동시에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6년 현재 주 헝가리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은 1996년 1월 19일 수교하였으며,
2005년 현재 주 불가리아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길이 39m, 폭4.3m의 이 작은 다리에서
103년 전인 1914년 6월 28일 10:00시,
세르비아의 보스니아계인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라틴다리 북쪽(오른쪽)끝 모리쉴러카페 입구에서
38구경 브라우닝 권총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사살하였고,
이것이 세계 제1차 대전으로 비화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900만이 사망하였고,
보스니아인 1/4이 죽고 말았다.
1992~1995년간 벌어진 내전에서
각 계파가 '인종청소'를 자행하여,
민족 간 거주지가 뚜렷이 구별되는 등
상호갈등과 불신이 상존하고 있다.
내전으로 불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부 청사
<출처: (CC) Mikhail Evstafiev @ wikimedia commons>
유고 내전은 유고연방이 사회주의 붕괴와 민주화 바람 속에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제일 먼저 독립했고
그해 11월 마케도니아가,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했다.
유고연방 주축 세르비아는 독립한 나라들에 사는
세르비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하고 그곳 나라 안에
세르비아 민병대를 조직해 내전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특히 마지막으로 독립에 나선
보스니아까지 포기할 수 없다며 총력전을 기울였다.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의 많은 이슬람 교도들을
학살하는 인종 청소까지 벌였다.
거기에다 크로아티아군마저 이 기회에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의 영향력을 키우고
영토를 늘리기 위해 보스니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군대도 체제도 부실한 보스니아 사람들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앙쪽에게 무참하게 당했다.
1992년 5월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돼
나토 개입으로 보스니아가 독립을 이룰 때까지
3년 7개월 동안 450만 보스니아 인구 중에
25만명이 목숨을 잃고 200만명 넘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끔찍한 방화와 약탈, 성폭행, 학살의 상처가 보스니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보스니아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런 비극을 당하지 말자는 다짐 삼아
파괴되고 손상된 건물을 그대로 고치지 않은 채 쓰고 있다.
보스니아 인종 청소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1992년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8천명의 이슬람 주민을
기관총으로 쏘아 학살한 뒤 불도저로 파묻은 사건이다.
이 학살의 주범인 당시 세르비아 군사령관 믈라디치가
체포돼 전범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재판정에서도 "세르비아민족을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큰소리치고
방청석의 보스니아 유족들을 향해 목을 그어보이는 시늉까지 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역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고대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슬라브인이 이주해오면서
북부지방의 보스니아는 12세기에,
남부지방의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에 각각 독립하였다.
두 지방은 15세기에 들어와
오스만투르크에 저항하였지만 결국 병합되어 주가 되었다.
1875년 투르크 지배에 대한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발단이 되었으며,
러시아가 승리한 뒤 1878년 베를린회의의 결과
두 주의 행정권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위임되었다.
1914년 6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여
보스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패배하고
민족해방운동이 더욱 활발해져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형성되고
1918년 12월 1일 베오그라드왕국의 성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이 왕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북부의 보스니아와 남부의 헤르체고비나지방이 합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1991년 공화국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가결되어
1992년 3월 3일 독립을 선포하였으나
공화국 거주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세력 간
유혈 민족분규가 발생하여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내전기간 동안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100만 명의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1995년 11월 내전 3개 당사국 대통령들이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 공군기지에 모여 내전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에 가조인한 뒤,
1995년 12월 14일 파리에서 보스니아평화 협정에
공식 조인함으로써 43개월 여에 걸친
인류최악의 민족분규가 종식되었다.
협정에 따라 이슬람-크로아티아연방과 스르프스카공화국이
국가연합의 형태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을 구성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네스코 유산 총 4건
[참고, 출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개황 외교부, 두산백과, 위키백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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