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사라예보 박물관, 라틴 다리, 구 시청사
2017년 4월 20일 목요일
발칸 9개국 여행 다섯째 날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 알바니아 -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 불가리아 - 루마니아
사라예보는 유럽문화 속에 이슬람 문화가
깊이 숨쉬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이 도시에 꽃 피는 좋은 계절인
4월도 중순을 넘어 여행을 왔건만
이상기후로 인해 여기서
겨울을 맞이했다.
사라예보에 도착하자
먼저 쌓인 눈이 반겨준다.
사라예보는 일주일만에
따뜻한 봄에서 겨울이 되었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스니아 전쟁 중에 포위 공격을 당해
사라예보는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보스니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이다.
6~7세기 슬라브인들이 정착한 이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민족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아왔다.
종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가 주였지만,
400년이 넘는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이슬람교가 깊게 뿌리를 내렸다.
1429년 스페인의 레콘키스타 이후에는
추방당한 유대인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다.
사라예보가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4개의 종교가 한 도시에 공존하는 곳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사라예보가 유일하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인구는 현재 약 40만명으로 추산된다.
15세기 말 터키 총독 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발칸 반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1914년 6월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내를 흐르는 밀야츠카 강변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고
시가지는 기독교와 이슬람 교의 건물이 뒤섞여 있고
이슬람풍의 거리와 시장,
다수의 모스크, 성당 등이 있다.
보스니아 내전
종전 이후에 안정을 되찾으면서
관광지로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트램이 움직이고 많은 카페와 호텔들이 다시 문을 열고,
여행객들이 조금씩 도시를 채우기 시작했다.
사라예보는
사라예보 국제 공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1531년 대학교가 세워진 교육의 중심지이다.
지방박물관, 근대적인 철도 등
새로운 근대 주택가도 건설되었다.
기계, 전기, 담배, 가구, 금속, 식료품, 화학,
피혁, 양조,·담배 등의 공업과
민예품과 깔개 등의 수공업으로 널리 유명하다.
트램의 색깔이 다양하다.
사라예보는
198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다.
사라예보는
1973년 4월5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 이 에리사선수의 활약으로
한국 구기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한 장소이다.
우승을 생각 못하고 애국가 테이프를 가져가지 않아
시상식때 애국가가 연주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차창으로 교회와
모스크가 보인다.
단편적으로 보이는 이 광경에
보스니아 내전의 실상이 느껴진다.
황제 모스크
무슬림 마을의 모스크는
1480년 보스니아 그리스도교에 의해 파괴된 후
1566년 슐리이만 술탄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모스크 안에는 목욕탕과 방앗간
그리고 묘지가 있다고 한다.
사라예보는
무슬림 보스니아인 44%, 정교회 세르비아인 31%,
천주교 크로아티아인 17%로 구성되어
언제든지 대립과 분쟁이 야기될 소지를 안고 있는
지역의 중심도시이다.
세히르세히야 다리
사진 중앙 대단한 집
그 당시 유명한 식당이었는데
시청사를 짓기 위해서 집터를 양보해 달라고 할 때
집 주인은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같은 건물만 지어 달라고 하여
요구대로 4명의 건축가가 원형을 유지하며 지은 집이다.
그래서 "대단한 집"이라는 호칭이 붙었는데
지금은 레스토랑이다.
버스에서 내려
현지 로컬 가이드를 만났다.
오늘 현지 로컬 가이드는
선하고 수줍음이 많게 보이는 김관호 학생이다.
이곳 사라예보에는 단 한가구 5명이 사는데,
이민개척자 이채원여사가 현지 가이드를 하다가
이제는 둘째 아들이 가이드 자격증을 받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구 시청건물
구 시청 건물 앞 다리를 건넜다.
밀야츠가(Miljacka) 강
다리 밑으로 밀야츠가(Miljacka)강이
흐르고 있다.
모로코 풍의 국립 도서관 (구 시청 건물)
사라예보 구 시청사로
1949년 국립 및 대학 도서관으로 사용했는데
1992년 8월 내전 당시 폭격을 받아 파괴되고
150만 장서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 후 지원금으로 공사를 하여 사라예보 시청 홀과
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밀야츠가(Miljacka)강
1차 세계대전의 비극적인 시발점이 된
라틴다리로 가고 있다.
이슬람 풍의 목욕탕
밀야츠가(Miljacka)강
구 시청건물 앞 다리를 건넌 후
직진하면서 다리 한개를 지나니
드디어 보이는 라틴다리
생각보다 작고 아담하다.
라틴다리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된 라틴다리는
1791년 대홍수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비극적이고 역사적인 라틴다리
길이 39m, 폭4.3m의 이 작은 다리에서
103년 전인 1914년 6월 28일 10:00시,
세르비아의 보스니아계인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라틴다리 북쪽(오른쪽)끝 모리쉴러카페 입구에서
38구경 브라우닝 권총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사살하였고,
이것이 세계 제1차 대전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900만이 사망하였고,
보스니아인 1/4이 죽었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인 조피가
세르비아계의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1918)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라틴 다리
사라예보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지만,
당시에는 1908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 주의 중심도시였다.
이 암살사건은 남 슬라브민족의 통일을 부르짖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그 장애물로 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비밀결사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이 라틴 다리 위에서 17살 청년 가브릴로 프린츠프가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살해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사건을 구실로
독일에게 협조를 구하고,
세르비아 정부가 관련되었다고 생각한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이 된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살해된
라틴스카 다리(프린치프 다리)와 박물관
라틴 다리
라틴 다리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부부 암살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인 다리를 건너고 있는 순간이다.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꽃 피는 사랑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
모리쉴러 카페는
지금은 당시의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사라예보 박물관으로 운용되고 있으며,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보스니아 민족의 의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옛 모리쉴러 카페 골목에서
현 모리쉴러 박물관
유리창에 전시해 놓은 자료 사진으로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103년 전 당시 황태자 부부가 탔던 차량
세르비아 비밀결사단체 검은 손의
같은 일원이었던 한 공범의 사라예보에서의 기록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에
스물두 명의 동지 모두는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무장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역에서 시청에 이르기까지 대공이 지나갈 길을 따라
500야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차가 식자공 가브리노비치를 지나갈 때 그가 수류탄을 던졌다.
폭탄은 차 옆구리에 맞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드는 침착하게 몸을 뒤로 젖혀 부상을 면했다.
수행하던 장교 몇 명만이 다쳤다.
차들은 속도를 높여 시청을 향해 달렸고 다른 동지들은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시청에서 접견이 끝난 후 부상자들을 문병하겠다고 병원으로 향해 가는 길은
닐가치카 강 다리에서 V자 모양으로 예리하게 꺾어졌다.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탄 차는 다리 앞까지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지만
거기서는 차를 돌리기 위해 속도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프린치프가 버티고 있었다.
차가 앞에 왔을 때 프린치프는 보도에서 걸어 나오며
코트 주머니에서 자동권총을 꺼내 두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대공부인 소피아의 배에 맞았다. 임신 중이던 부인은 즉사했다.
두 번째 총알이 대공의 심장 가까이 맞았다.
대공의 입에서는 한 마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피아!” 쓰러진 아내를 부른 것이었다.
그의 고개가 꺾이고 몸이 쓰러졌다. 거의 즉사였다.
19세였던 범인 프린치프는 미성년자로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18년 골수 결핵으로 병원에서 숨졌다.
뒤에 그가 보인 유일한 후회의 표시는 대공 부인을 죽인 것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대공 한 사람에게만 조준을 맞췄고,
다른 사람을 맞춘다면 포티오레크 장군을 맞췄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 출처: 역사의 원전, 존 캐리, 바다출판사]
프린치프는 체포되어 20년 형을 받아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감옥에서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박물관 외벽 하단 표지석
1914년 6월 28일
이곳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와
그의 아내 소피아를 암살하다.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 명판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
사라예보 박물관을 뒤로 하고
로마 가톨릭 대성당을 향해 출발
[참고 출처: 두산백과, 위키백과, 역사의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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