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푸른 바다. 2017. 7. 12. 13:18

두브로브니크 프란체스코 수도원,스폰자 궁, 렉터 궁, 츨라차거리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발칸 9개국 여행 여섯째 날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 알바니아 -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 불가리아 - 루마니아

 

 

두브로브니크를 보지 않고 천국을 논하지 말라고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가 말했다는데

드디어 오늘 그 두브로브니크릉 투어한다.

꽃보다 누나로 대박이 나

한국 여행객이 세계 1위로 많이 온다는

두브로브니크에 오늘 나도 그 숫자를 보탠다.

 

 

 

 

보스니아 네움의 호텔에서

크로아티아 두브로니크로 출발한다.

 

 

 

 

네움 호텔 밑 마을 풍경

 

 

 

 

지도

 

크로아티아플로체와 두브로브니크

사이에 있는 소도시 네움은 보스니아 땅인데

원래는 크로아티아 땅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시절 티토 대통령이

국경을 일부 조정해 내륙국인 보스니아에

선물한 땅으로 이로 인해 보스니아는

내륙국에서 연안국이 되었지만,

크로아티아는  본의 아니게 분단국이 되었다.

네움을 중심으로 직선거리 8km정도를

보스니아에 양도했는데,

그것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지도

 

성채 도시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어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자기 나라인 두브로브니크를

육로로 갈려면 여권을 지참하고

크로아티아출국->보스니아 입국, 보스니아 출국

->또 크로아티아 입국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보스니아의 양해 아래

보스니아를 거쳐 다리를 놓고 있는 중이다.

 

 

 

 

크로아티아 국경

 

노르웨이 테러 후 국경이 강화되어

이번 발칸 여행 중 처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여권 검사를 하고,

크로아티아에서 출국한지 이틀만에

다시 입국했다.

 

 

 

 

 

 

 

아드리아 해변을 보며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말했다는

지상의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해안에 있는 도시로

크로아티아어로 '작은 떡갈나무숲'이라는 뜻이며

떡갈나무는 힘을 상징한다.

두브로브니크의 옛 이름은 라구사이다.

 

 

 

 

 

 

 

유럽 최고의 휴양도시로 손꼽히는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의 면적은

남한 면적 10만제곱km의 절반이 조금 넘는

56500제곱km밖에 안되는데

두브로브니크를 비롯해 좁고 긴 띠처럼 생긴 영토가

몬테네그로 국경까지 어이지면서

풍광 좋은 아드리아 해안선이 1800km나 되고

섬까지 합치면 무려 5800km 넘게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두브보르니크는 이미 유고내전 전에

한 해 1000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두브로브니크 성채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구시가지 전체가 등재되었으나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보게 되면서

1991년부터는 위기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관심과 지원 끝에

다시 옛 모습을 복원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성 밖에서 본 성채의 견고한 위용

 

성벽 안의 구시가지는

199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주차장에 도착했다.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해안도시로서 유럽인과 일본인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1순위로 꼽힌다.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유일하게 경쟁했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그리이스 로마 풍의 분수

 

 

 

 

얼굴과 몸통,

팔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산양이라

그리이스 신화의 사티로스,

로마 신화에서는 양치기 신인 판으로 보인다.

 

 

 

 

필레문 입구로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이다.

스르지 산이 보인다.

 

 

 

 

중세의 견고한 성벽

 

두브로브니크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이용되었던 곳이었으며

그들이 13세기부터 쌓아올렸던 성벽이

오늘날에는 두브로브니크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남아있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서쪽 문 필레문

 

서문인 필레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다.

 수 세기 동안 필레 관문은 도시를 방어하고

아드리아 해의 진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담당했다.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 조각상

 

필레 문 위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가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모형을 들고있다.

 저명한 종교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

 

 

 

 

성문 해자 도개교

 

필레 관문은 두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5세기에 세워진 내부 문과 1537년에 세워진 외부 문이다.

두 개의 문은 1350년에 팠던

해자 위로 놓인 도개교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1808년 두브로브니크로 쳐들어와,

500년에 걸친 이 도시의 독립에 마침표를 찍었던 것은

바로 필레 관문을 통해서였다.

 

 

 

 

 

 

 

구시가지 도처에 있는 성 블라이세 조각상

 

성 블라이세는

아르메니아인으로 287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또는 316년 리치니우스 치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순교했다.

그가 두보르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것은 10세기이다.

로쿠룸섬에 베네치아 선박이 들어와

두보르브니크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성 블라이세는 이 사실을 두브로브니크에 전달해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

 

 

 

 

 

 

 

도개교 좌측의 모습

 

 

 

 

두브로브니크 성벽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요새에 속한다.

10세기에 건설되어 13~14세기까지 증축하거나 보완하여

현재 성벽 모습의 기초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침략자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더욱 견고하고 두껍게 보완하였다.

도시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성벽의 총길이는

1.949km 이며 최고 높이는 6m, 두께는 1.5~3m이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던 성벽은

두브로브니크의 보호막이 되어

오랜시간 두브로브니크를 지켜왔다.

주변국들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된 후 증축되면서

현재는 두께 1.5~3m, 높이 25m, 길이 1925m에 이른다.

그리고 성 주변에는 16개의 방어탑이 건설되어 있다.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두브로브니크의 여행이 시작된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시가지 안쪽의 도시 풍경과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이 조화를 이룬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단 세곳의 입구가 있는 구시가지의 성벽,

집과 건문들 사이사이 골목길은

중세시대 분위기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

 

 

 

 

구시가지 유네스코 등재 안내문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필레문으로 시작되어 대리석으로 만든

약 300m의 플라차 거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군둘리체바 광장, 대성당, 렉터 궁전 등

두브로브니크의 유명 관광지들이 밀집되어 있는

 두브로브니크 관광의 핵심이라 할수 있다.

 

 

 

 

두브로브니크 관광 지도 (인터넷에서 퍼 옴)

 

 

 

 

필레 내부 문

 

15세기에 세워진 필레 내부 문 위에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모형을 들고 있는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 조각상이 있다.

 

 

 

 

필레 내부 문

 

필레문 안쪽에 또 하나의 내부 문이 있다.

이 문 위에도 두브로브니크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의 조각상이 있다.

 

 

 

 

 서쪽 입구 필레 문

외부 문과 내부 문을 들어서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가 시작된다.

 

 

 

 

성 사비오르성당

 

1520년 첫 번째 지진 당시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남자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1667년 두 번째 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아 더욱 성스럽게 여겨졌다.

르네상스 양식(인간을 중심으로 자연과 조화.

고딕의 수직선보다 수평선 강조)으로

간결한 외관과 단출한 내부로 비록 작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파스코야 밀리체비차광장의 오노프리오 분수

 

1448년 수도사업 완공 기념으로 만들어졌다.

조각가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가 만들어

그의 이름을 붙인 분수이다.

분수는 중앙에 커다란 돔 모양의 석조물이 있고,

16면체에 있는 각각 다른 얼굴들이 물을 내뿜고 있다.

 

 

 

 

 오노프리오 분수

 

구시가지에서 20km 떨어진

스르지산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만든 수도시설로

당시 물이 부족했던 도시에 식수를 공급했다. 
원래는 돔 위에 커다란 쿠폴라와 조각상이 장식되었으나

1667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오노프리오 분수

 

16개의 각기 다른 사람 , 동물 얼굴조각에
수도꼭지가 달려있고 몇 개는

지금도 맑은 물이 나와 식수가 가능하다.

 

 

 

 

 16개의 다양한 동물을 형상화한

수로시설을 겸비한 오노프리오 분수

 

 

 

 

오노프리오 분수

 

중앙에 커다란 돔 모양의 석조 물이 있고
그 아래는 16면으로 되어 있으며

각 면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성벽투어 시 본 오노프리오 분수

 

파스코야 밀리체비차광장

 

 

 

 

성벽투어시 본 구시가지

플라차 대로 (스트라둔거리)

 

 

 

 

유서깊은 14세기 프란체스코 수도원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14세기에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교회로

수도원의 내부를 오래된 프레스코 기법으로 장식했고

조각 장식은 이 지역 최고 조각가 페트로비츠 형제가 만들었다.

고대 필사품, 장서 등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17세기 크로아티아를 휩쓴 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화려한 장식이나 예술품을 보기 힘들지만

입구의 위쪽에는 피에타 상 조각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회랑이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남쪽 문과 플라차 대로

 

프란체스코 수도원 회랑 오른쪽에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있고,

이 약국에서는 14세기 초부터 수도사들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조제하였다.

왼쪽은 종교 박물관이며,

안 쪽의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남쪽 파사드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자유를 가장 중요한 삶의 정신으로 여겼고,

많은 시인과 작가를 배출한 도시인데

그 정신적 산실이 프란체스코 수도원 도서관이다.

초판본, 필사본을 비롯한 장서를 풍부하게 지녀

1860년대 유럽의 유명 문학가 역사가들이

이 도서관으로 몰려들었다.

 

 

 

 

성 블라이세 조각상과 피에타

 

문 위에 성 블라이세 조각상이 서 있고

그 아래 문 바로 위엔

페트로비치 형제가 조각한 피에타상이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약국

 

골목으로 들어가면

1391년에 문을 연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수도원 약국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데,

세계 최초로 일반인에게 개방된 약국이라는데 의미가 크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계율에는

수도원 안에 약국을 둘 것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 약국 안에는 낡은 처방전, 당시의 약품 등을 그대로 남겨

한쪽 면에 전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 만들고 이 약국에서만 파는

장미 수분 크림이 유명하다.

 

 

 

 

플라차 거리(스트라둔 거리)

 

두브로브니크 최고의 번화가로

필레 문에서 루자 광장까지 이어진

대리석으로 포장된 300m의 대로이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의 중심 거리로

스트라둔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거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스트라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플라차 거리(스트라둔 거리)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중심 거리인 플라차 거리는

1468년에 건설되었으며 구시가지의 중심거리로

서쪽에 있는 파일 게이트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플로체 게이트까지 이어진다.

 

 

 

 

플라차 거리

 

원래는 바닷물이 흐르는 운하였으나

성채도시가 된 이후 바다를 메워 길을 만들었다.

대리석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매끄럽게 닳았다.
이전에 스트라둔 거리는 화려한 궁전들로 가득 찼으나

지진으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667년 대지진 이후에 들어섰다.

 

 

 

 

 

 

 

 

 

 

 

 

 

 

 

 

 

 

 

카페, 레스토랑, 상점이 늘어서 있고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어

순백으로 빛나는 스트라둔 거리

 

 

 

 

 

 

 

 

 

 

현금인출기

 

 

 

 

 

 

 

 

 

 

 

 

 

 

 

 

루자광장에서 본 플라차 거리

 

이곳은 처음부터 번화가는 아니였으며

7세기에는 물자를 운반하기위한 수송로로 쓰이던

도로였지만 도시가 커지기시작하면서 상점들과

사람들이 몰려 도시의 중심 시가지가 되었다.
끝에서 끝까지 걷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유고 내전) 당시

전투로 인한 파편이 플라차 거리에 널브러져 있다.

<출처: (CC) Peter Denton @ wikimedia commons>

 

유고 내전은 유고연방이 사회주의 붕괴와 민주화 바람 속에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제일 먼저 독립을 선언했다.

유고연방 주축 세르비아는 독립한 나라들에 사는

세르비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하고 그곳 나라 안에

세르비아 민병대를 조직해 내전이 시작되었다.

슬로베니는 인구의 80% 이상이

슬로베니아 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고 철수하였다.

크로아티아에서는 국내의 세르비아 인들과

정부군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수습을 명분으로

내전에 개입하였으나

1995년 국제연합(UN)의 중재로 내전이 종식되고

독립하였다.

 

 

 

 

두보르브닉 구시가지의 중심인 루자광장

 

두브로브니크의 메인 광장인 루자광장은

플라차 거리가 끝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름 페스티벌 때

개막식과 폐막식이 열리는 장소이다.

 

 

 

 

시계탑 맞은편 루자광장 모습

 

시계탑 앞의 루자 광장은

이전부터 집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의

삶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루자광장 종탑 (시계탑)

 

두브르보니크의 랜드마크로

1444년에 세워진 높이는 35m의 종탑이다.

1506년에는 이발 라블자닌에 의해 종이 달렸으며

망치 든 두 개의 조각상이 있다.

1667년에는 대진으로 피해를 당하고

1929년에 재건되었다.

 

 

 

 

35미터의 종탑 (시계탑)

 

무게  2톤 청동 종은

처음 건축했을 당시인 15세기 것 그대로이고,

종탑 꼭대기에 왕관 모양 장식 돔은 새로 얹었다.

종 양쪽으로 망치를 든 종지기 조각상 한 쌍이 있고

종은 유명한 주조자가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녹색을 띠고 있다.

 

 

 

 

플라차 거리가 끝나는 곳에 있는 시계탑

 

종탑 중간에 이글거리는 태양 무늬로

디자인한 시계가 있고

그 아래엔 숫자로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따로 있다.

 

 

 

 

오노프리오 소분수

 

오노프리오가 시가지 동쪽 블라이세 성당 뒤에

세운 작은 오노프리오 분수

뛰노는 돌고래가 우아하게 조각돼 있다.

 

 

 

 

소 오노프리오 분수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의 작품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던 세관인

스폰자 궁전이 앞에 보인다.

 

 

 

 

스폰자 궁

 

두브로브니크 문화 관광의 중심지

구시가지의 번화가인 스트라둔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왕이 살던 곳이 아니라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었다.

중앙홀은 예전에 많은 무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한쪽 부속건물에는 14세기 국립조폐국이 들어섰으며

그밖에도 은행, 귀중품창고, 무기고 등이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으로 들어오는 무역상인들의

출입국 역할을 하여 국가경제의 중추 구실을 한 곳이었다.

16세기에는 지식인들이 모여 여러 분야를

논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스폰자 궁

 

그 당시 두브로브니크에 유행하던

후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로

필레문을 건설한 유명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츠가 건축을 맡았다.

현관과 건물의 조각장식은 안드리지치 형제가 담당했다.

당시에는 무역거래센터로 쓰였고,

현재는 고문서와 역사적 기록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국립기록보관소로 사용된다.

1층에는 크로아티아 내전의 참상을 보여주는

영상실과 사진,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스폰자 궁전

 

 정면에 곡선이 아름다운 6개 기둥으로

회랑 복도를 만들고

1층과 3층은 르네상스양식,

2층은 후기 고딕양식으로 달리 해

이 도시의 부와 문화를 과시한 건물이다. 

석재를 다듬은 솜씨도 빼어나

돌 세공 물이라고도 불린다.

 

 

 

 

세관, 재무국, 은행 등

경제 활동을 담당해 온 스폰자 궁

 

 

 

 

스폰자 궁

 

성 사비오르 성당에 이어

1667년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직사각형 형태로 작은 안뜰을 가지고 있으며,

아케이드가 있는 주랑과 아치형으로

긴 형태의 고딕 창문이 특징인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고 있다.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린다.

 

 

 

 

 

 

 

 

 

 

16세기 크로아티아 최고의 극작가

마린 드르지치

 

 

 

 

마린 드르지치 좌상


크로아티아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극작가이자 정치가 마린 드르지치의 좌상이 보이는데

그의 코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얼마나 만졌는지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다.

 

 

 

 

 

 

 

부유한 자유 복지 국가였던 라구사 공화국

두브로브니크에는 두 개의 명언이 있다고 한다.

구시가지에 있는 성 요한 요새 입구에 새겨져 있는 문구로

“세상의 돈을 모두 준다 해도 자유를 팔 수는 없다.”

그리고 렉터 궁전 총령 집무실에 있는 문구인

사적인 일은 잊고 오직 공사에만 철저하자.” 

 

 

 

 

라구사 공화국 총독의 저택 렉터궁전

 

두브로브니크에는 왕이 없고

귀족, 시민, 기술자의 세 신분만 있었으며,

두브로브니크의 최고 지도자를 렉터라고 불렀다.

렉터 궁전은 렉터의 거주지겸

도시 행정업무를 보던 관청이었다.

14세기부터 선출된 렉터는 마흔살 넘은 귀족이 돌아가며,

권력 독점을 막으려고 임기 한 달씩만 맡았다.

독재를 하려야 할 수도 없었고 보수도 없었다.

그리고 재임 기간에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렉터 궁으로 옮겨가면

국가 또는 정부적인 중차대한 업무가 있을때만

렉터 궁전을 떠날 수 있었고,

그 이외에는 임기 동안 렉터 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오로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이다.

 

 

 

 

렉터궁전

 

스폰자 궁이 두브로니크 경제와 관련된 곳이었다면,

렉터 궁은 정치와 관련된 곳이다.

궁전이라 이름붙여진 건물들이 대체로 화려한 외형과

실내장식을 보여주는 것에 반하여

렉터 궁전은 단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1층에는 법정과 감옥, 무기고를 볼 수 있고

2층에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화폐와 문장,

통치자의 집무실 등을 볼 수 있다.

 

 

 

 

채로운 유물이 있는 렉터 궁전

 

궁전 통로 천장의 선도 아름답고

기둥에도 조각으로 가득하다.

 

 

 

 

렉터 궁전 박물관

 

청동문 사이로 보이는 선박왕 미카이로 프라카드 흉상

엄청난 유산을 국가에 기증해

존경을 받은 인물로 1638년에 세워졌다.

2층은 현재 시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라구사공화국 시절의 유물들을 전시한다.

특히 1만 5000점의 회화작품 중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가

두브로브니크 성을 들고있는 조각상

 

 

 

 

렉터 궁전

 

15세기 중반에 두브로브니크 정부에 소속되어

수로와 분수를 건설한 나폴리 건축가

오노프리오에 의해

후기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양식을 혼합해

세운 아름다운 건물이다.

1667년 대지진으로 심하게 파괴된 뒤

17세기에 바로크양식으로 보수했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 기간에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회가 열린다.

 

 

 

 

 

 

[참고 출처: 두산백과, 위키백과, 네이버 캐스트, 유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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