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불가리아의 정식 명칭은 불가리아공화국이다.
불가리아는 500년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 오다
1878년 러시아· 투르크 전쟁 결과 자치공국이 되었고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1945년 공산당이 집권하고 1946년 왕정제를 폐지하여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민주화의 영향으로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1991년 신헌법을 채택하여 불가리아 공화국이 되었다.
유럽지도
발칸지도
북쪽은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루마니아와 접하고,
동쪽은 흑해, 남쪽은 터키와 그리스,
서쪽은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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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지도
불가리아의 수도는 소피아(Sofia)로
13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28개주(oblast)로 이루어져 있다.
불가리아 국기
가로세로 비율 5:3에
하양, 초록, 빨강 세 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1877년 S.파라스케보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하양은 자유와 평화를, 초록은 삼림을,
빨강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피를 의미한다.
이 국기는 1879년 처음 제정되었으며,
1946년부터 1990년까지는
하얀색 줄무늬 좌측에 국장이 그려져 있었으나
1990년 11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된 후
국장 부분이 삭제되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이원집정부제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실권자는 총리이다.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이며,
24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110,993평방km로 한반도의 약 1/2 가량이고
유럽 국가 중 15번째 규모로
국경은 1,808km이고 해안선은 354km이다.
기후는
지역적으로 중앙의 발칸산맥을 경계로
남부 평야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이고
북쪽은 사계절이 뚜렷한 대륙성 기후로
우리나라의 기후와 대체로 비슷하나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눈이 좀 더 많고 춥다.
2012년말 기준 인구는 약 728만 명이다.
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다.
주요 민족은
불가리아계가 84%를 차지하고 터키계가 10%다.
그 밖에 집시,·마케도니아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그리스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불가리아인이 인구의 84.8%로 다수를 점하며,
터키인이 8.8%, 롬족이 4.9%,
기타(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등)가 1.5%였다.
종교는
국민의 85%가 불가리아 정교를 믿으며,
나머지는 이슬람교 13%, 가톨릭 1%,
기타 1% 등의 종교를 믿는다.
공식 언어는 불가리아어이고,
상용어는 러시아어, 영어, 독어, 불어 이고,
터키어, 마케도니아어도 쓰인다.
교육은 1964년부터
초등 8년, 중등 4년의 신학제가 실시되었다.
1981년부터 초등 8년은 의무교육제이며,
교육은 각급 학교에서 무상으로 실시된다.
고등교육은 교사 양성을 위한 2· 3년과정과
4년제 대학교 학위를 주는 2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516억 달러,
1인당 GDP는 10,400달러이며
유럽 연합국이지만 유로를 쓰지 않고
불가리아 레프를 쓰고 있다.
2010년 기준 1유로(EUR)=1.95불가리아 레프(BGL)
산업구조는 2012년 기준
농업 3.5%, 공업 33.0%, 서비스업 63.5%이다.
그리고 금속, 기계, 화학(비료·황산 등),
경전기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였으며,
경공업은 면직을 중심으로 모직, 견직 등의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이 두드러진다.
불가리아의 천연자원으로는
보크사이트, 동, 납, 아연, 석탄 등이 있으며,
목재가 풍부하다.
불가리아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서
우리나라는 1990년 3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소피아에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고,
마케도니아 공화국 외교업무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에 주한 불가리아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북한은 1948년 11월 19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53년 11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고,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터키의 동유럽 진출 통로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에
1396년부터 500년간
오스만투르크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발칸반도에 있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화적으로 민주화된 나라이다.
불가리아의 역사
불가리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로,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불가리아 지역의
황금문화로 알려진 트라키아 문명이 번성하였으며,
681년에 제1불가리아 왕국이 건설된 이래
불가리아제국은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계속된 침공을 격퇴하였으며,
9세기 칸 프레시안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영토를 확장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855년에는 키릴형제가 불가리아 문자인 키릴 문자를 발명하였다.
키릴 문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에서 상용되고 있다.
864년에는 칸 보리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수용하였다.
1018년 비잔틴제국에 의해 멸망한 불가리아제국은
이후 비잔틴제국의 지배하에 놓인다.
그러나 1185년 아센과 페타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비잔틴 군대를 격파한 뒤 제2차 불가리아제국을 만들었다.
아센 1세의 아들인 이반 아센 2세(재위 1187~1196) 때는
제2차 불가리아제국의 최전성기로
동남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후 귀족들 간의 분쟁, 농민 반란, 몽골의 침략 등으로
불가리아의 국력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1396년 오스만제국에 복속되었다.
1396년부터 약 500년간 터키의 식민 지배를 받아 오다가,
1878년 러시아-터키 전쟁 이후 1879년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상태에서 불가리아 공국을 수립하고
1908년 9월 22일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국이 되었으나
소련군의 침공으로 9월 9일,
조국 전선 정부(후에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가 수립되어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연합국으로 전환하였다.
1947년 시메온 2세가 소련군에 폐위당하면서
공산국가인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89년 35년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이 퇴진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민주화되었다.
이는 루마니아 혁명의 유혈혁명과 구분지어
'푸른 혁명'이라고 불린다.
불가리아 왕가
크룸 왕가: 불가리아를 발칸반도의 강자로 만든 왕조,
크룸 왕가는 803년에서 991년까지
중세 불가리아와 발칸반도를 통치하였다.
아센 왕가: 제2 불가리아 왕국의 시대를 연 가문 ,
쉬슈만 왕가: 제2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불가리아 군주제의 마지막 왕가
불가리아 군주제의 마지막 왕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1887년부터 1946년까지 제3 불가리아 왕국을 통치했던
불가리아 왕정 시대의 마지막 가문이다.
이 가문을 끝으로 불가리아는
공산화되어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불가리아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독일 명문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한 갈래로
1878년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끝나고
신생 불가리아의 첫 번째 왕가인
바텐베르크 가문의 뒤를 이어
세 명의 차르를 배출했다.
친러파에 의해 퇴위된 알렉산더르 바텐베르크 이후에
불가리아는 새로운 군주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1887년 의회가 페르디난드 1세를 추대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불가리아 통치가 시작되었고,
이후 보리스 3세, 시메온 2세를 차르로 배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두 번의 세계대전과
발칸 전쟁이라는 혼란의 시대를 거쳐
1946년 공산주의가 선포되면서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불가리아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페르디난드 1세(1861~1948, 재위 1887~1918)
집권 초기 페르디난드 1세는 정치를 개혁하고
산업과 경제, 문화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이른바 ‘불가리아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더군다나 1908년에는 왕국의 독립을 선포,
오스만제국의 500년 지배에서 완전히 놓여나는 업적을 이룩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 말기 제2차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에 동맹국으로 참가하여 패전국이 됨에 따라
수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국가를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부루봉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주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페르디난드 1세와 첫 번째 왕비 부르봉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페르디난드 1세와 두 번째 왕비 엘레오노라
보리스 3세(1894 - 1943)
보리스 3세는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한
불가리아의 제2대 차르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선왕 페르디난드 1세가
패전을 책임지고 사임하자, 곧바로 즉위했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큰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정치상황 속에서도
25년 간 불가리아를 통치했다.
비록 전쟁을 피해갈 수는 없었지만,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영토인 흑해 북부의 도브루자 지역을 되찾아
통합한 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에 협력, 1943년에 서거하였다.
왕위는 6살인 시메온 2세에게 계승되었으나
1946년에 퇴위, 공산화되었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딸인
요안나 공주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보리스 3세 왕비 이탈리아 사보이아의 요안나 사보이스카
보리스 3세와 요안나 사보이스카 왕비
시메온 2세 (1937~ )
2001년 6월 총선 승리로 55년 만에 권좌에 복귀해
총리로서 2005년까지 재임한 불가리아의 전 국왕이다.
1937년 6월 16일 불가리아 국왕인
보리스 3세와 왕비 요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3년 아버지 보리스 3세가 의문사한 뒤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고, 숙부 키릴 왕자가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1946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국민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퇴위하였고
어머니와 함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망명길에 올랐다.1951년 스페인 정부에 의해
망명이 받아들여져 마드리드에 정착하였다.
스페인과 미국 군사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불가리아어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8개 국어를 구사하며
마드리드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였다.
불가리아가 민주화된 이후 총리가 되었다.
1962년 1월 21일 부르봉 파르마의 마르가리타 공주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이로써 그는 폐위된 군주로서
공화국이 된 국가의 국가 원수가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시메온 2세의 왕비 부르봉 파르마의 마르가리타 왕비
불가리아 유네스코 세계유산
[참고: 불가리아 개황(2011. 9., 외교부), 두산백과,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법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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