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바라나시] 바라나시 사르나트(녹야원)

푸른 바다. 2018. 1. 21. 15:06

바라나시

 

 

 

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인도여행 둘째 날

 

 

비스타나 인도 국내선을 타고

델리에서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힌두교와 불교의 중요한 성지이며,

힌두교와 자이나교에서 지정한

7곳의 성스러운 도시 중 가장 성스러운 도시이다.

전생과 이생에서 쌓인 업이

씻겨 내려가기를 기원하는 이 곳,

바라나시에서 처음 간 곳이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로 석가모니가

최초로 불교의 법을 전한 땅으로 알려져 있는

사르나트이다.

 

 

 

 

북인도 여행 지도

 

델리-바라나시-카주라호-오르차-아그라-자이푸르-델리

 

 

 

 

차창으로 본 바라나시

 

사르나트로 가는 길에 차창으로

바라나시를 본다.

 

 

 

 

바라나시는

인도 여행의 필수 방문지로

미국의 대문호인 마크 트웨인은

바라나시를 일컬어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더 오래된 도시라고 말했다.

 

 

 

 

바라나시의 이름은

바라나 강과 아시 강을 합쳐 붙인 지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바라나시는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라는 뜻이다.

과거 빛의 도시라는 뜻의 카시라고 불렸으며,

베나레스, 바라나스로도 불리기도 한다. 

인구는 약 120만(2011년 기준)이다.

 

 

 

 

기원 전부터 있어 온 고도인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이자,

인도 갠지스 강 중하류에 있는 도시로

갠지스 강 연안에 위치하는데,

북쪽에서 강물이 흘러 들어오는 서쪽 지역을

신성한 지역이라 하여 힌두 교도들이

매일 아침 이 곳에서 해뜨는 동쪽을 보며 기도한다.

힌두교 최대의 성지로

1,500개가 넘는 힌두교 사원이 있다.

바라나시는 동시에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에서도 성지로 꼽고 있다.

 

 

 

 

바라나시는

오랫동안 인도의 문화와 종교, 학문의 중심지로서

카비르, 툴시다스, 라비 샹카르

많은 철학자, 시인, 작가, 음악가를 배출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17년 설립된 바라나시 힌두대학교,

산스크리트 대학을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에서 인도 예술,음악,문화,

철학 교육 및 산스크리트어 연구가 진행된다.

또한 바라나시는 수공예로도 유명하며,

실크 사리, 비단, 금은사, 현악기, 유리 팔찌,보석가공,

놋쇠기구 등 전통적인 수공예가 발달하였다.

 

 

 

 

바라나시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카시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다가

이후 코살라왕국, 마가다왕국에 지배되었다.

11세기경부터는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기 시작해

무굴제국 아우랑제브 황제 때

도시 대부분과 여러 힌두교 사원이 파괴되었다.

당시 파괴된 사원 중 대표적인 것이

‘황금사원’이라고 부르던 비슈와나트 사원이다.

 

 

 

 

바라나시는

연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며,

전생과 이생에서 쌓인 업이 씻겨 내려가기를 기원하며

갠지스강에서 목욕재계를 한다.

이들을 위해서 갠지스강 변에는 약 4Km에 걸쳐

"가트(GHAT)"라고 불리는 계단식의 목욕 시설이,

한쪽에는 화장터가 마련되어있다.

도시의 북쪽 10Km 지점에는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장소로

불교의 중요 성지인 사르나트가 있다.

 

 

 

 

사르나트 (녹야원) 입구

 

바라나시 북쪽 10km 지점에 있는

불타가 처음 설법한 장소인

사르나트 녹야원에 도착했다.

 

 

 

 

부처님의 초전 법륜지 녹야원

 

사르나트는

사슴에 얽힌 이야기 때문에 녹야원이라고도 불리운다. 

아소카 왕이 이곳에 사슴을 풀어놓고 살았다고 해서

옛 경전에는 이름이 녹야원으로 기록되었다.

 

 

 

 

사르나트 (Sarnath)

 

사르나트는 인도의 지명이며,

녹야원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불교 4대 성지의 하나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설법한 곳이다.

 

 

 

 

아소카 석주 관련 역사적인 기록 석판비

 

사르나트 발굴 결과 기원 전 2세기 아소카왕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의 유적과 다수의 조각이 출토퇴고,

다르마라지카탑과 근본정사를 중심으로,

굽타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이곳에는 건물이 없으나 굽타 시대에는

벽돌구조의 고층탑 건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발견된 마우리야 시대의 아쇼카왕 석주는

네 마리의 사자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주두와

법륜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쿠샨 시대에 제작된 보살상은 승려 발라가

카니슈카왕 3년에 봉헌했다는 명문이 있는 중요한 상이다.

굽타 시대의 사르나트는

마투라와 더불어 조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사르나트의 상들은 마투라와 달리

옷이 몸에 밀착되고 옷주름도 없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르나트 불교 유적 발굴 계획

 

오른쪽 검은 원은

최초의 설법지인 다메크 스투파이고,

왼쪽 흰 원은 부다의 사리를 보관했던 사리탑인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이다.

 

 

 

 

사르나트(최초 설법지) 유적군

 

탄생(룸비니), 성도(부다가야),

입멸(쿠시나가라)의 땅과 더불어

불교 4대 성지중 한곳인 사르나트는 

석가가 35세에 성도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아야다교진여 등 5명의 비구를 제도하였다고 한다 .

이 곳 사르나트가 불교의 성지로써 부각되는 이유는

부처님과 부처님 최초의 설법,

그리고 부처님과 그 법을 받드는 무리를 포함하여

불.법.승.삼보의 형성과 함께

최초의 승가가 생겨났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유적지

 

기원 전 2세기 경 아쇼카 왕에 의해 건설된

부다의 사리를 보관했던 사리탑인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파괴되고 남은 원형 기단부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다메크 스투바에서 150m 떨어져 있다.

 

 

 

 

불교의 4대 성지는

탄생지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장소-성도(부다가야),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

입멸지 (쿠시나가라)

 

 

 

 

석가모니

 

석가모니는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카필라국의 왕 슈도다나(정반왕)와

어머니 마야부인 사이의 태자로 태어났다.

성은 고타마이고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석가모니란 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라는 뜻이다.

불타(깨달은 사람이란 뜻), 여래, 세존, 사주 등의 존호가 있다.

어머니 마야부인은 그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돌아가고

그 후 태자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하여 이웃 나라의 야쇼다라 공주를

태자비로 삼고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그러나 태자는 평범한 왕자로서 일생을 살기보다는

삶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길을 찾는 데 더 골몰했다.

그러던 그는 29세가 되던 해의 어느날 마침내 출가를 결행하였다.

출가한 뒤 6년여 동안 여러 스승을 찾아 다니며

배우기도 하고 혹독한 고행도 해 보았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수행방법을 중도로 바꾸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조용한 명상에 들었다.

명상에 잠긴 지 이레 만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의 나이 35세 때 마침내 대각을 이루고 부처가 된 것이다.

그 후 부처는 베나레스의 교외인 녹야원으로 가

자신과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들을 대상으로 초전법륜을 말하고,

45년 동안 인도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설법을 하며 교단을 일으켰다.

노쇠해진 부처님은 80세가 되던 해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고요한 열반에 드셨다.

마지막 설법에서 석존은

“자신이야말로 등불이며 법이야말로 등불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긴다.

이 점은 불교가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던 스투파는

현재는 부지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1794년에 건설 장관이던 자갓 싱

바라나시 마하라자의 궁전 건립 당시

탑의 벽돌을 쓰면서 파괴되었다.

 

 

 

 

석가모니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이유는

진리를 얻기 위하여 함께 고행했던

다섯 동지들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다섯 동지들은 싯다르타(석가모니의 본래 이름)가

처녀 수자타에게 우유를 공양 받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싯다르타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진리를 깨달은 석가모니는

자신의 지혜를 함께 나눌 사람으로

다섯 명의 옛 동지들을 선택했고

녹야원에서 설법을 하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설법한 곳에는 사암으로 만든

거대한 다메크 스투파(탑)가 세워졌으며,

이후 녹야원은 불교의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오랜 세월 불교 성지였던 녹야원은

13세기에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탑과 사원 터만 남게 되었다.

 

 

 

 

높이 43m의 다메크 스투바와

Sridigamber 자이나교 사원

 

 

 

 

Sridigamber 자이나교 사원

 

오른쪽에 보이는 금빛탑은

Sridigamber이라는 자이나교 사원이다.

인도의 성지를 보면,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성지 그리고 자이나교 성지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힌두교의 특성 때문이라고.

 

 

 

 

 

 

 

 

 

 

 

 

 

다메크 스투파 (초전법륜지)

 

아쇼카 왕이 세운

직경 28m, 높이 43m(기단포함)의 탑인

다메크 스투파는

부다가 첫번째 설교를 한 곳에 세워졌다.

 

 

 

 

다메크 스투파(탑)

 

사르나트에서 가장 거대한 석탑으로

마우리얀의 왕, 아소카가 건축한 다메크 스투파는

인도의 중요 불교 관련 건축물 중에 하나이다.

다메크 스투파는 높이 34m, 43.6m(기단 포함시),

지름 28.3m의 원통형으로

탑의 아랫부분은 아름답게 조각된 돌들로 이루어져 있고,

둘레는 기하학적인 꽃, 사람의 모습,

새들의 모습을 잘 조각해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부다가 첫번째 설교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메크란 진리를 본다는 뜻이다.

 

위쪽 벽돌은 굽타 양식,

벽돌 하단부는

마우리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다메크 스투파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기하학 문양과 꽃무늬는

4~5세기 이 지역을 장악했던

전형적인 굽타왕조 시대 양식이다.

 

 

 

 

굽타 양식의 무늬

 

다메크 스투파는

보드 가야 마하보디 사원을 발굴한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햄이 발굴했다.

발굴 당시 탑의 정상에서

6~7세기 것으로 보이는 석판이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나의 스승은 대성왕(부처님)이시고

이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네."

 

 

 

 

 

 

 

다메크 스투파(탑)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석주모양의 이 대탑은

약 5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수차례의 재건과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실제로 대탑에서는 기원전 200년 경

마우리아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벽돌이 나오기도 해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해준다.

 

 

 

 

사르나트 대사원의

스투파와 비하라들을 장식했던

불, 보살상들은 추나르에서 생산되는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이 곳에서 출토된 초전법륜상은

굽타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사르나트의 불교 조각은

타이나 캄보디아의 초기 불교 조각상 및

보로부두르의 불상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성기 때는

150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르나트 다메크 스투파 주변으로

수많은 건물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아소카 왕

(BC 269년(272년, 273년) 추정 ~ BC 232년)

 

인도의 불교 성지와 유적지는

아소카 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많다.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이었던 아소카 왕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로,

초기 정복 전쟁으로 제국까지 세력을 넓히다가

전쟁의 비참함을 깨달은 후

석가모니의 정법에 의거한 도덕, 윤리 통치를 맹세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30개 정도 되는

석주, 주두 등 불교 상징물을 만들었다.

현재는 인도 전역에 15개 정도가 남아있다.

현재 사르나트에는 기둥만이 남아있다.

 

 

 

 

사르나트 아소카 석주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사르나트 아소카 석주

 

인도 북부 대륙에 산재해 있는 아소카 석주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의 명령에 의해

불교의 가르침을 새겨넣은 것이다.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인

사르나트에 위치한 석주가 가장 유명하다.

전국적으로 세워진 아소카 석주 중

약 10개 가량에는 왕명을 적은 조서가 새겨져 있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소카 석주의 원래 모습

 

아래의 바퀴 모양은 법륜을 뜻한다.

 

 

 

 

 

 

사르나트 아소카 석주 사자상 사진

(델리의 박물관에 있던 사진)

 

석주의 기둥머리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 조각이 올려져 있는데

부다에 대한 왕의 신분과 왕의 법령이

전국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석주의 기둥머리에는 모형이 올려져 있고,

사자상 원형은 현재 사르나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자상의 기둥머리는

종 모양의 연꽃 위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코끼리, 말, 황소, 사자 네 마리의 동물과

법륜을 의미하는 수레바퀴 네 개가 조각된

원형의 판이 올려져 있으며,

맨 위에는 네 방향의 전 지역으로

아쇼카의 법이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네 마리의 사자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형상이다.

현재 사자상은 인도의 국가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도지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수레바퀴 모양은

인도 국기의 중앙에 도안이 되어 있다.

 

 

 

 

사르나트 아소카 석주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명문은

대부분이 파괴되어 하단만 남아 있다.

석주의 상단을 장식했던 사르나트 사자상은

현재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르나트 유적지 사이로

해가 저물고 있다.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외관-출처:Google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은

부처님이 첫 설법을 한 불교 성지인

인도 사르나트에 있다.

1904년 이 지역의 불교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사찰 형태로 지어졌고 5개의 전시관과 2개의 베란다가 있다.

BC 3세기부터 AD 12세기까지 불교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시대

아쇼카왕이 만들었던 석주의 상부로

머리 꼭대기부분에 있었던 4마리의 사자상의 석상인

사르나트 사자상이 있다.

부처님의 8대 성지를 조각한 팔상도,

5세기 초전법륜불좌상을 비롯한

다양한 불교 미술품과 불상 등이 있다.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은

카메라, 휴대폰 등 가방을 맡겨 놓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구글에서 가져왔다.

 

 

 

 

5세기 초전법륜불좌상 -출처:Google

 

초전법륜의 최초의 법의 수레를 굴리다.

즉 부처님의 최초 설법을 말한다.

 

 

 

 

사자상 -출처:Google

 

사자상은 BC 2세기경 마우르얀 아쇼카왕이

최초 불경이 시작되어 부처가 설교했던 곳에

세워졌던 돌기둥위에 올렸던 것이다.

이 사자상은 인도의 국가 문장이기도 하다.

 

 

 

 

녹야원에서 나와

근처 스리랑카 사원으로 향했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세계지명 유래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