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마할
2017년 12월 3일 일요일
인도여행 다섯째 날 오늘은 드디어 오래 전부터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타지마할을 내 눈으로 보는 날이다. 여행을 하면서 오랫동안 갈망하던 곳을 보게되면, 그 감격이 배가 되는데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것 같다. 무굴제국 수도였던 아그라는 인도 여행에서 반드시 방문하는 코스인데, 바로 인도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이슬람 건물인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있기 때문이다.
북인도 여행 지도
델리-바라나시-카주라호-오르차-아그라-자이푸르-델리
타지마할 버스 주차장에서
친 환경적인 전기 버스나 마차를 타고
타지마할 매표소까지 가야한다.
타지마할 주차장 앞 마차
우리 일행은 전기 버스로
오염을 일으키는 자동차는
타지마할 근처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어서
여행객들은 주차장에서부터 걷거나
전기버스를 타야한다.
갠지스 강 상류
인도의 이슬람 봉건왕조였던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는
제국의 영광과 퇴락이라는
두 가지의 선명한 빛깔을 보여주는
도시이다.
이제 내려서
타지마할 성문 앞 매표소까지
걸어갔다.
타지마할 매표소
타지(Taj)는 왕관(crown),
마할(mahal)은 궁전(palace)를 뜻하는
이슬람 말인데,
타지마할을 우리말로 쓰자면,
최고의 궁전이다.
타지마할 금지사항 안내문
타지마할 출입구 검사
타지마할 입장시 개별 가방 소지할 경우,
하나 하나 검사를 하므로 입장시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지갑, 여권, 카메라, 휴대폰 외의 소지품은
가이드가 전용 버스에 두고 가라고 말했다.
타지마할 출입구 검색대
테러 방지를 위해
철저한 가방, 몸 검사를 한다.
동쪽 출입문
검색대를 통과해 들어와
뒤 돌아 본 동쪽 출입문
아그라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는
붉은 사암으로 건축된 아그라성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순백의 타지마할이 있어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이다.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동쪽으로는
갠지스강 유역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북쪽은 야무나 강을 따라 델리를 지나
펀잡 지방의 평야에 연결되어 있다.
무굴 제국이 델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약 100년 동안 인도 북부를 지배했던 도시이며,
시내와 아그라 근교에는
무굴 제국 시대 최고 전성기의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아그라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세계 7대 불가사로 사람이 만든
기적같은 건축물들 중에서,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자한이
왕비를 추모하여 건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묘인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다.
영원한 사랑의 기념비라 할 수 있는
타지마할 영묘는
인도 아그라의 남쪽,
야무나(Jamuna) 강가에 자리잡은
궁전 형식의 묘지로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1592~1666년)이
왕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건축한 것이다.
타지마할의 흰 대리석 돔이 보인다.
곳곳에 있는 무장 군인
타지마할 정문
1648년 완성된 3개 층의 붉은 사암 건축물인
다르와자(Darwaza) 정문은
팔각의 둥근 천장 지붕으로 조성하였다.
중심부의 방과 양편에는 작은 방들이 있다.
입구에는 중앙 아치가 우뚝 솟아 있고
양 옆은 2개 층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졌다.
벽면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 문구를
손 글씨로 검게 써놓았다.
건물 천장의 작은 돔은 힌두 양식으로
왕의 존엄함을 표현하였다.
대문은 원래 은으로 선을 그렸으나
영국의 약탈로 현재는 구리로 대체하였다.
붉은 사암으로 된 아치형 정문
사암과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문 주위에 코란의 글귀와 꽃 무늬가
대리석에 상감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다르와자(darwaza 정문)
타지마할 묘 건물 배치도
(1) 묘 건물 (2) 부속 모스크 (3) 영빈관
(4) 야무나 강변 (5) 연못 (6) 대문 (7) 정원
드디어 아침 안개 속의
타지마할을 마주했다.
야무나 강에서 올라온
수증기로 형성된 안개가
타지마할을 환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안개속의 타지마할 (Taj Mahal)
인도의 상징이며,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으로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타지마할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타지마할
샤 자한 황제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자 시작 된
타지마할(무덤) 건축은 1631년
총 공사비 약 400만루피(720억원)와
2만 2천 명의 인원과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
22년 동안 최고의 대리석과 사암,
세계 각국에서 수입한 보석들을 사용하여
인도와 페르시아의 최고 장인들이
1653년에 완성하였다.
인도 최고의 건축물 타지마할
건설 당시
엄청난 건축비용이 들어간 이 건축물은
무굴제국의 제 5대 황제였던 샤 자한이
왕비인 뭄타즈 마할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만든 왕비의 무덤으로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이다.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의 부와 힘을 대변하며,
그 후에 찾아온 절도와 복원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타지마할은
전정, 사분정원, 묘 건물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우스타드 아흐마드 라하우리
(Ustad Ahmad Lahauri)가
타지마할의 주 설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타지마할
햇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빛깔을 보이는 타지마할은
인도 최고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네 모퉁이에 배치한 첨탑과 좌우가
정확한 대칭을 이룬 건물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건물과 입구의 수로 및 정원은 완벽하게
좌우대칭되어 균형감을 느끼게 해준다.
토대의 네 모서리에 서 있는 미나레트(미나렛)
미나레트는 타지마할의 높이를
강조하기 위해 더 작게 지어졌으며,
수직이 아니라 기울어지게 세워서
만약 무너지더라도
영묘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했다.
붉은 사암으로 된
아치형 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뜰에 수로가 있는
무굴양식의 정원이 펼쳐진다.
인도 전통 의상인
사리를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
차르바그(char bagh) 양식 정원
차르바그란
네 구획으로 나누어진 정원으로
가로수 길과 꽃밭, 물길 등으로
채워져 있으며,
페르시아인들이 생각한 낙원을
구현한 공간이다.
이슬람 정원 바지차(Bageecha)
무굴 제국의 고전적인
차르바그(char bagh) 양식인
이슬람 정원 바지차(Bageecha)
타지마할
중심부분의 건물은
1변 95m, 높이 7m의 4각형 평면 기단 위에 서 있다.
그 중앙에 솟아오른 구근형의 돔은 높이가 65m이며
그 구조는 지붕과 천장이 2중으로 되어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높이 42m의 미나레트가 서 있으며
중심부분의 건물과 4개의 미나레트는
전부 백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상단 밑 계단에서 올려다 본 모습
전체의 건축을 하얀 대리석으로 짓고
장미, 재스민, 릴리, 등의 꽃과 잎과 줄기를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대리석 안에 상감하여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비할 곳이 없다.
타지마할 기단
정원 북쪽 끝에 있는 타지마할은
2개의 토대 위에 세웠다.
그중 하나는 사암 위쪽으로 흰색과 검은색이
바둑판 형태로 뒤섞인 정사각형 사암 기단과
한 층 위의 푸른색 가는 줄무늬로 덮인
흰 대리석 테라스로 이루어졌다.
타지마할은
지상 최고의 완벽미를 갖춘 건축물로
그 화려함 때문에 끊임없이 약탈의 대상이 되어
타지마할에 장식된 값비싼 보석들은
도굴꾼과 침략자에 의해 사라졌다.
한 앵글에 다 들어오지 않는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둥근 돔과 첨탑은 이슬람의 모스크 양식이고,
격자 세공과 연꽃 장식은 힌두 양식이다.
타지마할 내부 입구 문
내부의 방은 각 방향에서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된 8각이지만,
남쪽 정원에서 보이는 문만 사용되고 있다.
타지마할 내부 안내문
건물 안은 화려한 외관과 달리
뭄타즈 마할 왕비만을 위한 기념비적 무덤이라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정교한 대리석 세공 휘장 뒤 가묘
건물 내부 1층 정 중앙에는
1,5m, 2,5m 크기의 4각 화강암 기초 위에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가묘가 있다.
그 밑 지하 묘에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육신이
얼굴을 메카를 향한 채로 안장되어 있다.
대리석 상감 기법
장미, 재스민, 릴리, 등의 꽃과 잎과 줄기를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이 활용되었다.
타지마할 지하 묘실 내부 (네이버 사진)
샤 자한 황제의 관(좌), 뭄타즈 마할 황후의 관(우)
관 뚜껑에는
전통적인 작은 펜 상자 조각이 있다.
이 펜 상자와 필기 판은
각기 남자들과 여자들의 관을 장식하는
전통적인 무굴 장례식의 상징이다.
“오 고결한, 오 위대한, 오 장엄한, 오 유일한,
오 영원한, 오 영예로운…”을 포함한 99개 신의 이름은
뭄타즈 마할의 실제 무덤과 지하실 측면에 새겨져 있다.
샤 자한의 무덤의 비명은
“히즈리(Hijri) 1075년 7(Rajab)월 26일 밤
이 세상에서 내세의 연회장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쓰여있다.
이슬람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양을
대리석의 섬세한 조각으로
나타낸 예술작품
타지마할
출입구와 묘궁 중앙에 새겨져 있는 아랍어는
코란에서 발췌한 내용들인데
전부 모양이 다른 각각의 문자이다.
그 중에는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와 샤 자한 부부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적 내용도 적혀 있다고 한다.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
돔의 장식들은
원래 황금이었으나 약탈당해
지금은 동으로 되어 있다.
그물망 식 창문을 내어
채광과 통풍이 되도록 했다.
대리석 바탕에 대리석 문양으로 만든 벽면
눈처럼 새하얀 대리석은
사파이어, 라피스라줄리, 터키석,
그 밖의 준보석들을 박아 만든 꽃무늬,
추상이나 기하학적인 문양,
그리고 서예를 얕게 조각한 부조 등으로
채워져 있다.
힌두교 전통과 이슬람 전통이
적절하게 융합되어 있는
타지마할
타지마할
반투명 백대리석은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
재스퍼(jasper: 벽옥)는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의 펀자브,
옥과 수정은 중국에서 가져왔다.
청록색의 터코이즈(터어키 옥)은 티베트에서
그리고 감청색의 라피즈 라줄리(청금석)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사파이어(청옥)는 스리랑카에서
카넬리언(홍옥수)은 아라비아에서 들여왔다.
모두 28개 종류의 보석과 반보석들이
백대리석에 상감되어 있었다.
타지마할은
하루 중 시간과 계절에 따라,
그리고 태양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순백의 대리석이 시시각각
다른 빛깔로 변한다.
타지마할
아라베스크풍의 꽃 장식과 띠 모양의 장식
그리고 다색의 피에트라 듀라 (pietra dura,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기법)로
외관을 장식한 캘리그래피
시간이 지나면서
태양 빛의 세기에 따라
타지마할의 색깔이
핑크 빛으로 점점 물들고 있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색깔이 바뀐다고 하는데
과연 점점 짙어지고 있다.
타지마할은
순백의 대리석이 물드는
일출과 석양이 질 때가 가장 아름답고,
보름달이 뜰 때는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석양으로 물드는 타지마할 (퍼 온 사진)
동틀 무렵에는 옅은 분홍색을 띠며,
해질녘에는 노을이 붉게 물든다.
영빈관
모스크
대리석 테라스
야무나 강변
안개로 안 보이지만 저기 어딘가에
샤 자한이 말년에 아들에게 유폐당한채,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살았던
아그라 성이 있다.
동쪽 영빈관
서쪽 모스크의 다른 한쪽에는
마주 보는 부속 건물 자와브(jawab)가 있는데,
메카와 반대 방향에 있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슬람 정원 바지차(Bageecha)
대리석 수로 2개에는 분수가 촘촘하게 있고,
길 중앙에 일직선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서 있다.
정원을 크게 넷으로 분할하여
정원 중앙 부분의 교차 지점에 연못을 만들었다.
식물 400여 종을 심은 정원은 화단을
각각 16개씩 만들어 모두 64개이다.
이곳의 특징은 정원이 완벽하게 좌우 대칭이라는 점이다.
타지마할이 온전히 반사되도록 설계한 수로는
다채색 물고기와 함께
아름다운 새들이 노는 정원을 꾸미기 위해 만들었다.
수로
길이가 약 300미터에 이르는
일직선의 수로 중앙에는
연꽃 모양의 수조가 있고,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있다.
사암 기단
흰색과 검은색의 바둑판 형태인
붉은 사암 기단 위쪽
묘의 동쪽과 서쪽에는
똑같은 붉은 사암 건물이 있다.
서쪽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회교 사원(모스크)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마주 보는
부속 건물 자와브(jawab)가 있는데,
메카와 반대 방향에 있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기단 하부 서쪽 타지마할 부속 모스크
서쪽에는 모스크, 동쪽에는 영빈관이
각각 수심이 얕고 넓은 장방형의 반사지(못)를
각각 사이에 두고 서 있다.
붉은 사암 토대 위에 세운
타지마할 영묘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세워진
50m의 탑 미나레트
사암 기단
이제는 약속 장소로 이동
이슬람 정원 바지차(Bageecha)
무굴 제국의 고전적인
차르바그(char bagh) 양식인
이슬람 정원 바지차(Bageecha)
지키는 사람들 몰래
각종 포지션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팁을 받으려는 사람이 많다.
정면 방향
1631년 시작해 1653년 완공된
타지마할은 샤 자한의 명령에 따라
건축가 우스타드 아흐메드 라호리가
수천여 명의 석공, 대리석 기술자,
모자이크 기술자, 장식업자와 팀을 이루어
건설하였다.
타지마할 옆 방향인 모스크 앞
세계 7대 불가사의 타지마할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봐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타지마할과
똑같은 건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기술자들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흰 대리석 조각 예술의 극치인
타지마할을 보지 않고
인도를 여행했다고 말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다.
19세기 후반까지
타지마할의 일부가 아주 황폐해졌다.
1857년 인도 세포이 반란시기
타지마할은 벽에서 보석과 라피즈 라줄리를 파낸
영국군과 관리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총독 커즌(Curzon: 1859-1925)은
대대적인 복구계획을 지시했고,
1908년 재건되었다.
이 시기 정원은 오늘날 볼 수 있는
영국풍의 잔디밭으로 재건되었다.
약속장소에 도착
우리나라 한복 체험을 하듯이
관광객들이 사리를 입고 있다.
사리를 입고 이제는 포토타임
나가는 문
타지마할 출구
작은 출구를 통하여
밖으로 나왔다.
정문
인도의 무굴 제국은
동아시아 몽골제국이 인도 북부를
침략한 후에 세워졌다.
이 무렵에 인도 북부에 무굴 왕국이 설립되었고
네 번째 왕 자항거는 궁궐과 기념물 건축을 즐겼다.
그의 아들 다섯 번째 왕 샤자한은
아버지의 본을 받아 아그라성 건축을 완성하고
사랑하는 왕비를 기념하여
정방형과 원형을 조합한 인도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타지마할을 건립하였다.
다시 첫번째 검색대 입구로
첫번째 검색대 문 안
첫번째 검색대 문 밖
줄을 서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움직인 보람이 있다.
야무나 강가의 타지마할
막대한 국가재정을 탕진한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 10년 뒤인 1658년
샤 자한은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의
반란으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2km 떨어진 타지마할의 모습이 보이는
아그라 요새의 무삼만 버즈 탑에 갇혀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의 묘를 바라보며 여생을 보냈다.
1666년 샤 자한의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 옆에 묻혔다.
아그라 성에서 보이는 타지마할
샤 자한이 갇혀 있던 아그라 요새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 탑에 서면
저 멀리 타지마할이 아련히 보인다.
샤 자한(Shah Jahan)과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지혜와 총명함으로 사랑을 받던 뭄타즈는
샤 자한과 함께 간 데칸고원 지역 원정길에서
샤 자한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근처 야외 천막에서 14번째 아이를 낳은 뒤 1629년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결국 역사상 유래가 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해 그녀에게 바쳤다.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터키옥,
청금석, 사파이어 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역을,
세금을 50%나 올리면서까지 조성하기 시작했다.
중앙의 능을 완공한 것이 1648년,
묘역 전체는 착공 22년 만인 1653년에 완공되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반열에 드는
타지마할이다.
샤 자한 (1592.1.5-1666.1.22)
인도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재위 1628∼1657)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은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라호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샤 자한은 폭넓은 교양을 쌓았고,
10대 중반부터 원정에 참가하여 군사적 능력도 보여주었다.
무굴제국의 황위 계승은 전공을 세우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황자가 황위를 차지하므로,
샤 자한도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에 무굴제국은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그의 궁정에 온 외국 사절들은
궁정의 화려함에 크게 놀라고,
고도로 체계화되고 질서 잡힌 통치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1632년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을 멸망시켜 병합하고,
1636년 골콘다와 비자푸르를 굴복시켰다.
그의 영토는 데칸고원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으나
궁정의 낭비와 귀족들의 사치로
왕조의 기강은 점차 문란해졌고,
또한 타지마할 건축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는 황위 계승을 둘러 싼
골육상쟁에서 승리한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의
반란으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아그라 요새의 탑에 유폐 당했다.
그는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여
건축한 아그라의 타지마할 외에도 델리 궁전이나
이슬람교 본산 등의 장려한 건축물들을 남겼다.
뭄타즈 마할(1593.4.27-1631.6.17)
18세기에 그려진 무굴제국의 그림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이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은
명문인 아사프 칸의 딸로 태어나 1612년
샤 자한이 15살 때인 14살에 샤 자한과 혼인했다.
샤 자한은 “용모와 성격에서 모든 여성들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 말하고 그녀에게 뭄타즈 마할,
즉 ‘황궁의 보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굴제국 황제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종족 별로 황비를 들이는 것이 관례였고
샤 자한도 아내를 여럿 두었지만,
궁정 연대기 기록자들은
샤 자한과 다른 아내들의 관계는
‘혼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그쳤으며
폐하의 무한한 관심과 애정은
오직 뭄타즈 마할만을 향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자들은 그녀가 ‘정치적 야심을 털끝만치도
품지 않은 완벽한 아내였다’고 기록했다.
뭄타즈 마할은 14세에 결혼하여
19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가운데 여덟은 출산할 때 또는 유아 시절 사망했다.
뭄타즈 마할은 1631년
14번째 아이(딸 가우하라 베굼)를 낳다가
부르한푸르에서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는 데칸 고원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
남편을 수행하고 있었다.
샤 자한의 슬픔은 깊고도 또 깊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기를 수십 일,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바뀔 정도였다.
1650년경에 그려진 샤 자한의 궁정 그림
샤 자한 얼굴 주위의 후광이
황제의 존엄과 영광을 상징한다.
[문헌 발췌: 두산백과, 인도의 건축,유네스코 세계유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인물세계사]
[서명이 없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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