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캄보디아 씨엠립] 왓트마이 사원 (작은 킬링필드)

푸른 바다. 2018. 8. 16. 12:10

씨엠립 왓트마이 사원 (작은 킬링필드)

 

 

 

2017년 12월 23일

캄보디아, 베트남 여행 세째 날

 

 

캄보디아 여행을 오면서

가장 보고싶었던

앙코르 와트와 크메르의 미소를

어제 내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둘러보았다.

언제나 페키지 여행을 하다 보면

좀 더 자세히 보고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생기는데

이 바람을 누르기가

어떨 때는 힘들 때도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오늘은 캄보디아의 암울했던 역사를 품고 있는

작은 킬링필드 왓트마이 사원과

캄보디아 제일의 호수 톤레삽을 보고난 뒤

베트남으로 넘어가는 날이다.

 

 

 

 

씨엠립, 앙코르 유적지 지도

 

20세기 초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1952년 독립한 이후로도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쿠테타와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캄보디아에 계속해서 세계인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그곳에 수백년 동안 숨어있다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

과거 앙코르 제국의 유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앙코르 와트라 부르는 유적은

거대한 앙코르 유적군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원일 뿐이다.

앙코르 유적군은 앙코르 와트를 비롯해

앙코르 톰, 타프롬, 톰마논, 스랑스랑,

타케오, 프라삿 라반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이 일대에 조성된

앙코르 왕조의 사원, 왕궁, 무덤 등을

틀어 일컫는 것이다.

 

 

 

 

왓트마이 사원 입구

 

12월 23일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을

왓트마이 사원에서 시작했다.

 

 

 

 

작은 킬링필드 왓트마이 사원

 

크메르루즈 대학살 당시 씨엠립과

앙코르 유적 인근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 놓은 왓트마이 사원을

씨엠립의 작은 킬링필드라고 한다.

앙코르 유적 입구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폴 포트 정권 당시 형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킬링필드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죽음의 들이란 뜻으로

크메르루즈(붉은 크메르) 정권 때

대학살로 생긴 집단 무덤을 말한다.
학살 장소는

캄보디아 전역에 200개가 넘게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프놈펜 인근과 씨엠립에 있는

2개가 관광용으로 개방되고 있다.

 

 

 

 

작은 킬링필드 왓트마이 사원

 

 프놈펜에 있는 킬링필드에서는

2만여 구의 유골이 발굴되었으며,

씨엠립의 작은 킬링필드에서는

3천여 구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불탑

 

 

 

 

사원을 지을 때 기부한 사람들 명단

 

 

 

 

왓트마이 사원 전경

 

옛날에 감명 깊게 본

킬링필드 영화가 생각난다.

 

 

 

 

왓트마이 사원 전경

 

유골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역사적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씨엠립에서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

 

 

 

 

유골 위령탑

 

위령탑에는

유골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아

당시의 참혹했던 사건을

피부로 느끼게 하고 있다.

이런 무참하고 슬픈 역사가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지 싶다.

 

 

 

 

유골 위령탑

 

씨엠립 킬링필드는 씨엠립에서

유골이 가장 많이 발견된 장소에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왓트마이 사원을 지었다.

 

 

 

 

유골 위령탑

 

킬링필드로 희생된

유골을 위령탑에 안치해 놓고

매년 제를 올려 원혼을 달래고 있다.

 

 

 

 

헌화

 

캄보디아에는 안경 낀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리고 학교에도 잘 보내지 않는다.

단지 안경 쓰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단지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온 가족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재 캄보디아의 문맹률은 60%가 넘는다.

 

 

 

 

 

 

 

명복을 빌기 위한 제단

 

 

 

 

 

 

 

 

 

 

 

 

 

 

 

 

 

 

 

 

 

 

왓트마이 사원 내에는

전시관과 소승 불교 건물도 있다.

 

 

 

 

 

 

 

역시나 사자와 나가상이

여기도 있다.

 

 

 

 

 

 

 

 

 

 

사원 경내에는

학살이 발생한 과정과 관련자들 모습,

학살 장면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크메르루즈 폴 포트 정권

 

1975년 4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이던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지도자 폴 포트는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미 론 놀 정권을 몰아냈다.

당시 폴 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 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러나 폴 포트는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 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승려,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00여만 명을 학살하였다.

 

 

 

 

 

이런 일을 가장 앞에서 자행한 사람들이

어린애들로 이루어진 혁명군이었다. 

그들은 "너희들 부모들은 부패 정권에 의해서 죽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 부모를 죽인 모두를 죽이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한다."라고 세뇌시켰다.

그들 혁명군은 14세 미만의 어린아이들로 구성되었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경 낀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무조건 살해했다.

길 가다가 손을 내밀라고 해서 손이 깨끗한 사람은

농사를 지은 적 없다는 이유로 잡아가 죽였다.

거기에 더하여 가족 중에 배운 사람이나 안경 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가족 모두를 몰살시켰다.

총알이 아깝다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산 채로 구덩이에 묻었다.

반항하지 못하게 며칠 굶겨 힘을 뺀 다음

꼬챙이에 꿰매달아 죽였다.

특히 여성들은 S자 꼬챙이에 양 가슴을 꿰어

매달아 죽이기도 했다.

보관된 유골들 중 붉은색을 띠는 두개골이

그런 여성의 두개골이라고 한다.

죽음 직전 극도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으면

두개골 색갈이 그렇게 변한다고 한다.

보관된 유골들 중  머리 뒷부분이 구멍이 있는 것들이 있다.

머리 뒤에서 드릴로 구멍을 뚫어 죽인 시신들의 유골이다.

이렇게 폴 포트 정권 3년 7개월 동안 살해된 사람들이

200여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이런 참극은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동족을 이렇게 무참히 죽인 예가 없다.

폴 포트 정권은 1978년 12월 24일

베트남의 전면 공격으로 무너지고

1979년 1월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입성했다.

폴 포트는 서북부 산악지대로 도피해 게릴라전을 하다가

1998년 4월 15일 밀림 속에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800만 전 인구의 1/4을 잃은 캄보디아는

이후 경제성장 등 나라가 발전하는데 큰 문제에 빠지게 된다.

인구의 감소도 문제지만 국가 사회를 이끌어갈

지식인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무를 담당하고 회사를 운영할 사람도 없고

그런 재화도 없어

세계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1993년 UN 감시 하에 민주적인

총선거를 실시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캄보디아는 무척이나 가난한 나라지만

지금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2011년 11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공동설립한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는

크메르루주 2인자였던 누온 체아 등 크메르루주

정권의 핵심인사 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학살, 고문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2010년 7월 투올슬랭 교도소 소장이었던

카잉 구엑 에바브는 징역 30년형을 받아

전범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바 있다.

그러나  정권 1인자인 폴 포트는

앞서 1998년 재판을 받지 않고, 사망했다.

 

 

 

 

 

폴 포트의 만행은 캄보디아

뉴욕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의 글,

디스프란의 생과 사(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글은 1980년 뉴욕타임스에 실렸고

쉔버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이를 토대로 학살된 양민이 매장된 곳을 뜻하는

킬링필드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쉔버그의 글을 각색하여 롤랑 조페가 감독한

영국 영화 킬링필드는 1985년 개봉되었다.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와

현지인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킬링필드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도

이 영화 제목 때문이다.

 

 

 

 

 

 

 

 

 

 

 

 

 

우울한 마음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며

왓트마이 사원을 나갔다.

 

 

 

 

아이의 표정이...

 

 

 

 

톤레삽 호수로 가기 전에

상황버섯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먼저 향했다.

 

 

 

 

 

 

 

 

 

 

 

 

 

 

 

 

 

 

 

 

 

 

 

 

 

 

 

 

 

 

 

 

 

 

 

 

 

 

 

 

캄보디아는

상황버섯이 유명하다고 한다.

 

 

 

 

 

 

 

 

 

 

 

 

 

 

 

 

 

 

 

 

 

 

 

 

[참고서적: 두산백과, 론리플래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