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나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 영묘
2018년 4월 1일 일요일
미소국여행 넷째 날
라벤나는 5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서로마 제국, 동고트, 비잔틴 제국 등에서
3번이나 수도의 지위를 누렸던 도시이다.
그 영광의 흔적이
8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산 비탈레 성당을 직접 보고 나서
이제 두번 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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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비탈레 성당
길 따라
산 비탈레성당 맞은편으로 가면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가 나온다.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 영묘
산 비탈레 성당 부지 안에 있는
갈라플라치디아 영묘는 5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십자 모양의 평면 구조를 가진 작은 건물인데,
교차부에 둥근 덮개가 씌워져 있다.
외관은 단순하고 간소하게 보이지만,
묘당 안의 천장과 벽 전체가
호화찬란한 모자이크로 덮여 있으며,
그 중에서도 선한 양치기,
성 라우렌티우스의 순교 등은 걸작품이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설계도
작은 그리스 십자형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중앙 교차부에는 둥근 지붕이 있고,
십자가의 가지 부분은 반원통궁륭을
걸쳐 놓은 작은 벽돌집이다.
현재의 마루바닥은 약 1.5m 들어 올려져 있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설명 판넬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입구 문 위의
선한 목자 예수 모자이크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복동생인
갈라 플라치디아는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를
위해 5세기에 이 영묘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신은 라벤나로 돌아오지 못하고
50년에 로마에 안치되었다.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부 인테리어를 가진
이 작은 건물은 일반에게 공개되어 유명해졌다.
이 작은 벽돌 건물은 외부에서 보면
굉장히 수수해 보이지만 그 내부의 화려함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아치형의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과
그리스-로마, 전통 기독교의 종교적 도상이 있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라벤나는 5세기 초 오노리오황제가
로마제국의 안전과 방어를 위해
밀라노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작은 지방도시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수도로
화려하게 성장했다.
이어서 갈라 플라치디아의 25년간의 섭정 기간동안
모자이크가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게 됐다.
당시 건축된 수많은 교회들에 모자이크가 장식됐다.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 영묘
갈라플라치디아는
서고트 아타울프왕의 왕비이자
서로마제국 콘스탄티우스 3세의 황후이다.
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로서
서고트족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410) 때 인질이 되었다가
그의 후계자인 아타울프와 결혼하였다.(414년)
그가 죽은 후, 콘스탄티우스와 재혼하였고,(417년)
421년 남편이 서로마황제가 되자
아우구스타(여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남편 마저 6개월 만에 죽고,
이복오빠인 서로마황제 콘스탄티우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발렌티아누스 3세를 왕위에 앉힌다.
그 뒤 무능한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이 되어
25년간 서로마제국을 다스렸다.
침입자와 결혼했다가 다시 로마황제와 결혼하고,
다시 홀몸이 되어 서로마제국을 다스린 그녀는
라벤나에 묻혔는데 그 영묘가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로
비잔틴 모자이크 예술의 걸작품이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입구
서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의 황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당으로,
산 비탈레 성당 북측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궁전에 부속된 산타 크로체 성당의 일부였다.
424~425년경 황비 자신의 묘로 세운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입구 문 위의
선한 목자 예수 모자이크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입구 천장
현재 라벤나에 남아있는 모자이크 작품들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보존상태가 완벽하며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 중 백미는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다.
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십자가 모양의 이 무덤의 천장은
별들 가득한 청색으로 빚어진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제작된 지 1500년이 지났지만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선한 목자 예수 모자이크
선한 목자로 예수를 묘사한 모자이크이다.
목자의 황금 후광과 그 양떼들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은
평범한 외부와 달리
어두운 내부에는 찬란한 보석처럼
금박 위에 반짝이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있다.
영묘 내부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800개가 넘는 별이 빛나는 하늘 타일
입구 문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전경
중앙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
오른쪽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석관
왼쪽 남편 콘스탄티우스 3세의 석관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내부
내부의 전면은
청을 주조로 한 훌륭한 모자이크로 덮여있으며
원개는 사복음서를 쓴 제자들을 상징하여
네모퉁이에 상징을 배치하였다.
중앙에는 종말 시 십자가가 출현,
아래부분에는 이들을 경배하는 사도들을 표상하였고
하층부에는 선량한 목자,
성 라우렌티우스 등이 표기되어 있다.
고대적인 수법을 남기고 있으나
비잔틴 원개장식으로는 최초의 예이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짙은 파란색의 천장 타일에는
반짝이는 황금빛 별들이 가득하고 가운데에는
대형 금빛 십자가가 놓여져 있다.
영묘 내의 14개의 작은 창문을 통해
자연 채광이 충분히 들어온다.
중앙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
오른쪽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석관
왼쪽 남편 콘스탄티우스 3세의 석관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중앙에 위치한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
석관 위에 십자가를 들고 불로 걸어 들어가는
순교한 성 라우렌티우스 모자이크가 있다.
금고 안에는 신약성서 4권
(마르코, 루카, 마테우스, 요하네스)이 들어있다.
4대 복음서-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
성 라우렌티우스 모자이크
가장 극적인 모자이크 중 하나로
순교하는 순간을 묘사한 화염에 둘러쌓인
성 라우렌티우스 모자이크이다.
성 라우렌티우스는
3세기 전반의 기독교 성인으로 로마 시의 조제이며,
스테파노 윈겐데우스에 버금가는
초대교회의 3대 순교자 중 한사람이다.
258년 목이 잘려서 순교하였다.
4세기 이후, 쇠창살 위에서 불태워 죽었다는 전설이 생겨
그것이 그의 중요한 표식이 되었으며,
교황 식스투스 2세(재위 257~258) 밑에서
재정계를 맡은 연유로 금고와 금화를 담은
성배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
그외에 서적, 십자가 등도 그의 표식이다.
서로마제국 콘스탄티우스 3세의 황후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
서로마제국 콘스탄티우스 3세의 석관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왼쪽에 위치한
남편인 서로마제국 콘스탄티우스 3세의 석관
콘스탄티우스 3세의 석관
콘스탄티우스 3세(재위 421)는
모이시아 속주에 있는 나이수스에서 태어났다.
서로마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 밑에서 장군을 지냈다.
411년에 콘스탄티누스가 황제 자리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렐라테에서
콘스탄티누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415년에는 서고트족을 남부 갈리아에서 에스파냐로 몰아내었다.
그러나 나중에 서고트족이 갈리아 남서부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417년에는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복 누이 플라치디아와 결혼하였다.
421년 2월 8일,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3세를
서로마제국의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3세는 그 해 9월 2일에 사망하였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뒤, 플라치디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황제의 자리를 이었다.
서로마제국 콘스탄티우스 3세의 석관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오른쪽에 있는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석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석관
서로마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년 ~ 455년)는
419년 7월 2일 라벤나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티우스 3세와 호노리우스의 이복 누이인
갈라 플라치디아의 아들이다.
424년 10월 23일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되었다.
425년 10월 23일 불과 6세의 나이에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 플라치디아가 섭정을 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사망한 450년까지 계속되었다.
437년 10월 29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딸 리키니아 유독시아와 결혼하였다.
444년에 개정 칙령 17조를 발표하여 로마 속주에서
로마 주교의 권위와 우월권을 인정하였다.
이는 교황 레오 1세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451년에는 훈족의 왕 아틸라가 갈리아를 침략하였다.
훈족은 이듬해에는 북부 이탈리아까지 쳐들어왔으며,
453년 아틸라가 사망하자 퇴각하였다
454년 9월 세력이 지나치게 커진 아이티우스가
정적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가 죽고 난 뒤 원로원에서는 내분이 일어났고,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살해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뛰어난 업적을 세웠지만
성격이 급하고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석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모자이크로 아름다운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를 나왔다.
5세기경에 만들어진
비잔틴 시대 석관들이 놓여있다.
산 비탈레 성당 출입구를 향해
나가고 있다.
산 비탈레성당
산 비탈레 성당 종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산 비탈레성당과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를
보고 나가고 있다.
산비탈레 성당 정문
산비탈레 성당 앞 거리
산비탈레 성당 앞 거리 카페
카페의 모자이크 장식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라벤나에서 살다가 사망한
단테 알리기에리의 무덤을 찿아 가고 있다.
[참고 발췌:두산백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서양건축문화의 이해, 미술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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