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나 단테 알리기에리 묘지
2018년 4월 1일 일요일
미소국여행 넷째 날
밀라노로부터
서로마제국의 수도 지위를 계승한
라벤나는 또 하나의 비잔틴 제국으로 불린다.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된
초기 중세의 건축물과 모자이크들은
라벤나를 황금빛 찬란한 모자이크 도시로 만들었다.
이 라벤나에서 또 한군데 반드시 방문해야 할
특별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의 묘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산 비탈레성당과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를 본 후,
단테 알리기에리 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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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 지도
이탈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라벤나는
로마 제국이 분열되면서 주목받는 도시가 되었다.
402년, 라벤나는 로마를 대신해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5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동고트 족의 지배에 들어갔다.
540년경 상황은 다시 한번 바뀌었는데,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라벤나를 자신의 제국 이탈리아 영토의 수도로 삼았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성 프란체스코 성당
라벤나 사람들의
모자이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한데,
이 라벤나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자부심은
중세 최고의 서사시인 신곡의 저자,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그는 쓸쓸하게
이 곳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베네치아는 유골을 되찾으려 했지만
라벤나는 유골을 빼돌려 가면서 지켰다.
광장 한 켠에 진열되어 있는
비잔틴시대의 석관
이 광장에서 1321년
단테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단테의 묘지가 보인다.
단테 알리기에리 무덤
단테 알리기에리 무덤을 볼려고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여기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단테 알리기에리(1265년 - 1321년)
단테 알리기에리의 원래 이름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이다.
후세 사람들이 간단하게 단테로 부르는 것이다.
단테는 1265년 6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단테의 아버지는 몰락한 귀족, 알리기에로 디 벨린치오네이고
어머니는 벨라 아바티였다.
그는 9살 때 베아트리체(당시 8세)라는
아릿따운 소녀를 보고 평생 그녀를 사모하게 된다.
18살 되던 해에 산타 트리니타 다리 앞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단테의 심장은 고동쳤고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는 베아트리체는
바르디라는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리고는 1290년,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베아트리체가 죽자 단테는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300년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6명의 최고위원에
선출되기 까지 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정치, 외교, 행정, 군사 등의
활동을 한 인생 최고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수많은 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반대파인 흑당이 세력을 잡자 단테는
정치적 반역자로 기소되어 공직추방 판결을 받게 된다.
흑당은 단테에게 법정 출두를 요구했지만 그는 출두하지 않았다.
법정은 단테에게 피렌체 영구추방과 함께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거의 20년 동안의 세월을
피사, 루카, 파두아, 볼로냐, 로마, 베로나 등의
도시들을 전전하게 된다.
흑당은 1315년, 단테에게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면
사면과 귀환을 허락하겠다고 제의한다.
이에 단테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어디에 있건 태양과 별 빛을 바라볼 수 있기에
치욕적으로 국민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도
언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단테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1321년 9월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라벤나의 통치자였던 귀도 노벨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월계수 화관을 단테의 영전에 바쳤다.
단테 알리기에리 묘지
피렌체 르네상스의
인문학적 씨앗을 뿌렸던 위대한 작가 단테.
피렌체에서 태어나 평생 피렌체를 사랑했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 19년에 걸친 망명 생활 끝에
결국 라벤나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1318년,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라벤나의 외교 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다가 병에 걸려
1321년 9월 14일에 사망한다.
56년간의 삶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9년을
망명객으로 보낸 뒤 맞이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어서야 실책을 깨달은 피렌체는
단테의 유골을 모셔오려 했지만 라벤나는 번번이 거절했다.
1519년에 교황이 그 분쟁에서 결국 피렌체의 손을 들어주자,
라벤나는 단테의 유골을 몰래 빼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모처에 은닉되었던 유골이 발견되어
라벤나의 작은 교회에 안치된 것은 무려 1865년의 일이었다.
사후 500년이 되어서야 단테의 긴 유랑은 비로소 끝났던 셈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묘지
단테는 1321년에 죽었지만,
현재의 이 무덤은
그 보다 훨씬 후인 중세 시대에 지어졌다.
1780년 완성된 카밀리오 모리지아 디자인의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단테가 죽은 후 6년 후에 씌여진
카나치오의 비문이 담긴 단지가 내부에 있다.
단지 위의 양각 장식은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작품으로
단테가 그의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식은 거의 300년 동안 현재의 이 무덤에 있었지만
원래는 성 프란시스 성당에 있었다.
단테 알리기에리 묘지 내부
단테가 죽은 후 6년 후에 씌여진
카나치오의 비문이 담긴 단지가 중앙에 있다.
단지 위의 양각 장식은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작품으로
단테가 그의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단테 묘지의 꺼지지 않는 등불
라벤나에 있는 그의 무덤 앞의
이 꺼지지 않는 등불의 비용은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시가 속죄하는 의미로
매년 라벤나 시에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피렌체 사람들은 1829년,
유골이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단테의 가묘를 만들어 놓았으나
라벤나시의 반대로 유골은 돌아오지 못하였다.
1865년에 라벤나 출신의 엔리코 파찌가
단테의 동상을 조각해 피렌체 시에 기증한다.
그 해는 단테가 세상에 태어난지 600주년 되던 해였다.
조각상은 산타 크로체 광장 중앙에 세워졌지만
1966년 홍수로 현재는 산타 크로체 성당 앞으로 옮겨 세웠다.
피렌체 시는 2008년,
단테가 세상을 떠난지 700년이 넘어서야
그에게 내렸던 사형 선고를 철회하였다.
개인적으로 단테의 유골은
이제라도 그가 사랑했던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는 르네상스 최초의 천재,
미켈란젤로는
마지막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단테의 유골이 2년간 묻혀 있었다고 쓰인 석판
묘지 옆 정원에는 거의 2년 동안
그의 유골이 안치돼 있던 담쟁이 넝쿨 무덤이 있다.
석판에는 1944년 3월 23일 부터 1945년 12월 19일까지
단테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고 쓰여 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폭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이다.
이곳 외에도 그의 유골은 수도사들에 의해
수도원 담벼락 등 은밀한 장소에 숨겨지기도 했다.
이것은 단테의 유골을 피렌체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라벤나 사람들의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회랑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회랑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중정
로마시대 석관들
단테 박물관(오른쪽 건물)
묘지 옆에 위치한 단테 박물관은
옛 프란치스코 수도원 회랑에 자리 잡고 있다.
개관일은 1921년 9월 11일로
단테의 사망 600주년을 추모하여 만들었다.
박물관은 당시 교육감이었던
암브로지오 안노니’와 코라도 리치에 의해
추진되고 개관됐다.
리치는 아동의 미술을 저술한 교육가로
평생을 단테 연구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내부에는 단테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참고 발췌: 두산백과, 네이버 백과,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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