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의 아틀리에
2018년 4월 4일 수요일
미소국여행 일곱째 날
지성의 도시라는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
유수의 대학교가 모여 있고,
세잔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엑상 플로방스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역시나 폴 세잔의 아틀리에이다.
폴 세잔 거리 언덕 위에 세워진
아담한 이층 건물인 세잔의 아틀리에는
세잔이 실제로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곳이다
현재는 박물관및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행 지도
도심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레 로브의 낮은 언덕에 있는
세잔의 아틀리에로 가고있다.
세잔 아틀리에는
프랑스 화가 폴 세잔(1839~1906)이
실제로 작업했던 공간을 보존하고 있는
2층 건물의 박물관으로,
세잔의 고향인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 위치해 있다.
세잔의 죽음 후
그의 작업실의 존재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지만,
그의 작품 및 옷, 그림 도구 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21년 마르셀 프로방스가 그의 작업실이 위치한 건물을 사들였는데,
그는 세잔에 대한 존경의 의미이자 중요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업실이 있는 윗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자신은 아래층만 사용했다.
작업실에는 관람객에게 세잔의 작업 모습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그림 도구를 비롯해
두개골, 사다리, 책상, 꽃병, 소파, 조각상, 십자가, 의자,
그릇, 선반, 옷장, 술병, 외투, 모자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건물 밖의 정원은 화가, 작가, 안무가, 음악가와 같은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펼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되고 있다.
세잔 아틀리에(Atelier Cezanne)
북쪽으로 떨어진 세잔 아틀리에는
세잔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엑상 플로방스에서 나고 자랐으며
여생을 보낸 그는
후대 미술사를 관통하는 많은 걸작을
완성했다.
세잔의 아틀리에 1층 입구
대가의 작업장이라고 보기엔
소박하고 평범하다.
미술관 안내문에서 조차
“이 작업실은 미술관이 아니다.
세잔 이외의 다른 것을 찾으러 오지 말 것”이라는
아틀리에 앞 안내문은
가구를 거의 배치하지 않고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공간을 위한 설명이다.
세잔 아틀리에
부유한 은행가 아버지 덕택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화가가 되는 걸 반대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가게 된다.
이후 아버지가 지병으로 숨지면서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세잔이 지은
2층 짜리 아틀리에다.
2층 전체를 아틀리에로 사용했던
그곳에는 그가 정물화에 사용했던
미술 도구와 오브제들이 있다.
세잔 아틀리에 입구 문을 나오는 세잔
젊은 시절을
파리와 스위스에서 보냈던 폴 세잔은
189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인상파와 결별하고
근대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자신만의 개성 강한 화풍을 창조하며
1902년부터 1906년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 아틀리에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폴 세잔 (Paul Cézanne,1839-1906 )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1859년 엑스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화가가 되려는 그의 욕망은 꺾이지 않아
1861년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파리로 향했다.
인상주의와 플랑드르 미술에 영향을 받았으며,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와 형상에 주목하여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형태와 견고한 색채의 결합은
고전주의 회화와 당대의 발전된 미술 사이의
연결점을 제시했으며,
피카소와 브라크 같은 입체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알려진 작품인
‘사과와 오렌지’는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
말년에는 ‘목욕하는 사람들’처럼
몽환적으로 채색된 누드화 습작을 주로 그렸다.
주요 작품은《에스타크 L'Estaque》(1883~1885),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1892~1896),
《대수욕도 Les Grandes Baigneuses》(1898~1905),
《생트 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1902~1904)
2층 세잔 아틀리에 내부
세잔은 초기에는
인상파 운동에 포함되었던 작가이기도 했으나
이후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시킨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켜
야수파와 입체파에 영향을 준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세잔이 인상파와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게 된 시기가 1896년부터이다.
4년 동안 작업에 골몰한 세잔은
1900년경부터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알리게 된다.
자연을 구형, 원통형, 원추형이라는
단순화한 입체로 형상화하는 그의 견해는
예술계에 새로운 충격이며 혁신이었다.
세잔 아틀리에는 바로 이러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잔의 예술이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세잔 아틀리에 2층 내부
방에는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 도구, 두개골, 사다리, 책상, 꽃병, 소파, 조각상,
십자가, 의자, 그릇, 선반, 옷장, 술병, 외투, 모자 등
화가의 유품과 재현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떤 분 블로그를 보니
아틀리에 사진은 불가라고 했는데
가이드도 아무 말 없었고
우리는 모두 모른 상태로
자유롭게 찍었다.
사진촬영금지였다면 정말 죄송...
그라네 미술관은
2006년 세잔 타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잔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현재 10여점의 작품을 상설전시 중이다.
작업실 내부에 그의 유품과
작품들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세잔의 자취가
15평 남짓의 공간에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세잔 아틀리에 2층 내부
아틀리에는 세잔이 직접 그린 설계도에 따라
북쪽에 벽면전체에 해당하는 커다란 유리창을 설치했고,
바로 옆은 1894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대작
‘목욕하는 여인들’의 캔버스를 들여놓기 위해
상하로 길고 좁은 통로를 만들어 문을 달았다.
여기다 남쪽으로 두 개의 창문을 더 내어
자연광이 실내에 일정하게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노년의 폴 세잔
세잔의 자화상
에밀 졸라 (1840-1902)
프랑스의 자연주의 소설가.
아버지의 사 후 가난에 시달리며
실증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고
또 고교를 중퇴한 뒤
노동자로서 고난의 생활을 했다.
세잔은 1852년에 같은 학교를 다니던
에밀 졸라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은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두 소년은 엑상프로방스의 시골을 산책하며
스케치하는 등 대부분의 자유 시간을 함께 보냈다.
폴 세잔과 에밀 졸라는 이렇게 30년 이상 친구로 지냈다.
유명한 소설가로 명성을 얻고 있던 졸라는
1886년에 작품을 출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는
늘 불안해하고 성적으로 자신이 없으며,
실패한 화가로, 이후 자살을 한다.
랑티에는 졸라가 알고 있던 많은 화가들의 특성을
섞어 놓은 인물로 여겨지지만,
세잔은 랑티에가 자신을 풍자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세잔은 수십 년 동안 졸라에게 털어놓은 비밀들이
우롱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사건으로, 한때 아름다웠던 둘의 우정은 끝나버렸다.
졸라에게 절교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친애하는 에밀 친절하게도 보내 준 작품은 잘 읽었네.
고맙지만 옛 시절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자네를 기억하겠네.
과거의 친구로 부터
이후 두 사람은 죽는 날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1902년 에밀 졸라의 사망 소식에도
폴 세잔은 하루종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890년/1895년경, 후기인상주의
오르세 미술관
폴 세잔은 189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다섯 점의 작품을 그렸다.
먼저 그려진 작품에는
다섯 명 혹은 네 명의 사람들이 카드를 앞에 두고
자리에 앉거나 카드놀이를 구경하며 서 있는 풍경이다.
나중의 세 작품은 두 명의 남자가
카드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그 중 가장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카드놀이에 몰두하는
두 사람의 극적인 대결을 시간이 정지된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출하였다.
사과와 오렌지
1895~1900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를 일컫는다.
이 중에서 후기 인상파 화가인 세잔은
200여점에 달하는 작품을 통하여
사과의 형태와 색채를 탐구했다.
세잔은 절친한 벗인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사과 한 개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고 언급한 대로
파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세잔의 사과는
사물을 파악하고 관찰하는 기본적인 자세로서의 시각과
눈을 통해 빛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 작용으로서의 시각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한 탐구의 대상이자 본질을 의미한다
입체파를 선도했던 피카소는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아버지와도 같다”고 칭송했다.
20세기 미술사를 저술한 많은 비평가들 역시 세잔을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목욕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1894년~1905년경
런던 내셔날 갤러리
세잔은 1870년대부터 그의 생이 끝나는 시기까지,
목욕하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남성과 여성 모두를 각각의 그림들에
등장시키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은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 무려 200여 점이 넘는다
목욕하는 사람들,
1890년경, 후기인상주의,
오르세 미술관
생트 빅투아르 산
1887년 ~ 1890년경, 후기인상주의,
오르세 미술관
엑상프로방스의 모든 풍경은
세잔의 캔버스에 담겨 작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생트 빅투아르 산을
배경으로 무려 87점을 남겼다.
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비베뮈스 평원에서
30여 점의 유화와 수채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세잔은 1870년에 이어 1902년
‘생 빅트와르 산’ 연작에 다시 몰두했는데
야외에서 맞은 폭우로 인하여 폐렴에 걸리고 만다.
이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원사 발리에’(1906)의 초상을 다듬기 위해
정원에 나갔다가 쓰러져 죽음을 맞는다.
1층은 티켓 판매와 기념품점이 있다.
세잔 아틀리에 기념품점
세잔의 작품 마그넷을
안 사온 것을 뒤 늦게
후회해 본다.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에서 나고 자랐다.
파리에서도 오래 활동을 해왔지만
위대한 업적은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다시 정착한 이후에 달성이 되었다.
나무아래 벤치
계단 위로 올라가면
이런 길이 나온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버스를 타기 위해 주차장으로
이제 고흐의 도시 아를로 출발
[참고 발췌: 두산백과,미술대사전(인명편), 501 위대한 화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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