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를] 아를 구시가지

푸른 바다. 2019. 4. 18. 00:37

아를(Arles)



2018년 4월 4일 수요일

미소국여행 일곱째 날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의 고향인 엑상 플로방스와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을

간략하게 오늘 다 보므로서

남 프랑스 여행은 다 끝이 난다.

그리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안도라공국으로 향할 예정이다.

오늘 아를(Arles)로의 여행은

곧 반 고흐의 흔적을 따라 나서는 일이다.

이곳에서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등

300여 점의 작품이 탄생했다.

“내가 더 못나고, 늙고, 아프고, 가난해질수록

나는 잘 배치된, 눈부시게 빛나는

훌륭한 색채로 복수하고 싶어진다.”

고흐가 남긴 글이다.





여행 지도


아를에는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아레나 극장,

원형경기장, 지하회랑 등

인상적인 로마 시대 기념물이 남아 있다.

이들 로마 시대 로마네스크 기념물들은

아를 역사지구 로마시대 기념물로

1981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엑상 플로방스에서 출발하여

약 1시간 20여분 만에

고흐의 도시 아를에 도착했다.





아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도시.

론 강 하류 좌안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군의 기지가 세워졌으며,

기원전 103년 당시 로마의 집정관 마리우스에 의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운하가 건설되어

론강과 지중해를 항행하는 선박들이

이곳에서 화물을 바꿔 실었다.

육상교통에서도 프로방스지방의 중심지가 되어

5세기 전후에는 오리엔트, 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양한 산물이 모여들어 발전하였다.




아를


4세기 말에는 갈리아 주의 주도가 되어

대주교좌가 설치되었고,

공의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8~13세기 프랑스 남부에 있는

모든 왕국의 수도였으며,

중세에는 무역항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론 강 하구가

토사의 퇴적으로 메워지자,

16세기경부터는

상권이 마르세유로 넘어가 쇠퇴하였다.





아를


전체의 논 면적 중 1/2을 차지하는

논농사의 중심지로서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화학, 금속 등의 공업과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산업은 관광이며

로마의 원형극장, 원형경기장(투우장), 목욕탕, 수도,

알리스캉(지하묘지) 등 로마 시대 유적과

12세기의 생트로핌 성당 등

중세시대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갈리아의 로마'라고 불린다.





아를


알퐁소 도데의 희곡 '아를의 여인',

조르주 비제의 '아를의 여인'

가곡에 의해서도 아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시가지에는 고대의 성벽 자리를 나타내는

고리 모양의 도로가 나 있고,

주민은 지방색이 풍부한 의상,

축제, 투우 등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벼룩시장이 아니면

난전이 열린 것인지...












아를


아를은 기독교 순교자 성 제네스트와

아를의 주교였던 생 오노레(Saint Honoré, 350~429)가

안장되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040년 생 오노라 소수도원이 된 뒤

에스파냐의 산티아고로 가는 성지순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아를은 고대 도시가

중세 유럽 문명에 적응한 좋은 본보기이다.

아를에는 로마 시대의 인상적인 기념물들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과 지하회랑은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를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만든

목욕탕과 알리스캉 공동묘지에서 보듯이

4세기에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았다.

11세기와 12세기에 아를은 다시 한 번 지중해에서

가장 매력적인 명소로 명성을 얻었다.

도시 성벽 안에 세운 생 트로핌 대성당은

프로방스 지방의 중요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념물로

회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카발르리 문을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이 멋진 벽화와 부조가 있는 곳이

Bar 술집이라니...

















아를에서는 이 표시를 따라가면

고흐의 작품 속 장소들을 만날 수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이

나타났다





아를 원형 경기장(Amphithéâtre d'Arles)





아를 원형 경기장(Amphithéâtre d'Arles)


아를 아레나(Arnes d’Arles)는

관객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축물이다.

여름에는 야외 음악회가 열리고

투우의 전통을 계승하는 축제 페리아는

4월과 9월 중순에 열리며,

연중 크고 작은 축제로 성황을 이루는 이곳 역시

‘아를의 원형 경기장’이라는 이름으로

고흐의 작품에 등장한다.








아를 원형경기장


원형경기장은

길이 136m, 넓이 109m, 높이 21m,

120개의 아치가 있으며

옛 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타원 모양의 경기장을 2층으로 된

아케이드가 둘러싸고 있고

로마의 콜로세움 영향을 받았다.





아를 로마 원형경기장





아를 아레나 원형경기장


AD 90년에 세워진 원형경기장에서는

5세기 말까지 검투사들의 대결,

 맹수와 사람의 싸움 등을 오락거리로 제공했다.

 중세 시대에 원형경기장은

벽체 안에 예배당 2개와 주택 212채를 지어

요새로 사용했다.

이 건물들은 1825년에 철거되었다.





아를의 원형 경기장

빈센트 반 고흐,1888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일부 골목들은 기원 전부터

형성 되었다고 한다.











1세기 말에 세워진

고대 로마 극장





창살 안으로

카메라를 넣어 찍어 본다.

밑에 사진





아를 고대 극장(Théâtre antique d'Arles)


로마 극장은 기원전 1세기 말에 세워졌다.

반원형 계단식 관람석은

33열에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5세기부터 로마 극장에

주택과 교회가 들어섰다가 1834년 철거되었다.

그때 값비싼 대리석으로 바닥을 포장한

반원형 귀빈석 부분과

막을 올리고 내리는 데 쓰는 기계가 있던 부분,

좌석 일부, 중세 시대에 롤랑의 탑에

보전되어 있던 외벽 일부를 복원했다.






로마 원형 극장


무대 뒤에 있는 웅장한 높은 벽인

장식 벽은 원주와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현재 토대와 대리암으로 된

원기둥 2개가 남아 있다.

이 원주 2개와 수많은 조각상은

아를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를의 비너스



고대 로마시대 극장을 발굴할 때

고대 극장의 벽감 안에서 발굴된 여신상인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또한 로마시대 극장을 발굴할 때 나온

다른 수 많은 유물들도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를의 비너스 복원도


아를 비너스는

발견 당시에 오른팔은 완전히 사라졌고

몸통에 가까운 왼팔 일부만 남아있었다.

현재 아를 비너스의 양팔은

조각이 제작된 BC 360년경 당시 모습이 아니라 
루이 14세 시절인 17세기에 발굴된 후

왼손에 거울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를 비너스의 양팔은

현재 추정에 의해 복원된 모습이다.












































옛 생 폴 병원 현 에스파스 반 고흐


반 고흐가 정신병 치료를 받으며

작품 활동을 했던 병원 건물과 부속 정원을

19세기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이 남자는 미치게 되거나,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게 될 것이다."
카미유 피사로





스파스 반 고흐





고흐는

37년의 생애동안 38번 이사를 했다.

그의 성격 때문에 일생 편하지 못했던 삶을 산 고흐는

27세까지는 학생, 미술상의 점원, 서적판매원, 신학생,

광산촌 선교사이자 설교자로 살았다.

정식으로 화가의 길을 시작한 것이 1880년.

18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여

1890년 사망 시까지 겨우 10년을 화가로 살았다.

그 시기에 작품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을 그렸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Vincent van Gogh, 1853.3.30. ~ 1890.7. 29)

1889년, 후기 인상주의,

오르세미술관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

프로트 즌델트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사망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9~1876년 화상 구필의 조수로

헤이그, 런던, 파리에서 일하고

이어서 영국에서 학교교사,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의 일을 보고,

1880년 화가에 뜻을 두었다.

그때까지 짝사랑에 그친 몇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1885년까지 주로 부친의 재임지인 누넨에서 제작활동을 했다.

당시의 대표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있다.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가 특징적이었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1888년 봄 아를르에 가서, 이상할 정도로 꼼꼼한 필촉과

타는 듯한 색채에 의해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전개시킨다.

주작품은 '해바라기', '아를르의 침실', '의사 가셰의 초상' 등이 있다.

1888년 가을, 아를르에서 고갱과의 공동생활 중

병의 발작에 의해서 자기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

계속되는 생 레미 시대에도 입퇴원의 생활을 되풀이한다.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했으나

1890년 7월 권총으로 자살했다.

병 때문인 자기응시가 자화상의 다작과 관련되며,

그것도 불가능한 때에는 자주 밀레나 들라크루아의 모사를 했다.

생전에는 의사 가셰나 시냐크 등,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평가되었다.

동생 테오 및 기타사람에게 보낸 방대한 양의 편지는

서간문학으로서 중요하다.

오테를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 등에

주요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후기 인상주의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아를의 침실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후기 인상주의

파리 오르세미술관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9, 후기 인상주의

뉴욕 현대미술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생 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그림.

소용돌이치는 듯한 붓질로

하늘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아를 병원의 정원

빈센트 반 고흐,

1889, 후기 인상주의


네덜란드 화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 전부를

정신질환(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초기 작품은 어두운 색조의 작품이었고,

후기 작품은 표현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고흐의 작품은 20세기 미술운동인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에스파스 반 고흐


고흐가 머무를 때 병원으로 사용하던

에스파스 반 고흐(L’espace Van Gogh)는

병든 이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현재는 고흐에 헌정된 문화 공간으로 사용된다.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


 남프랑스 론 강의 역사 도시 아를에 있는

복합 문화센터이다.

현재 시내 중심가 펠릭스 레이 박사 광장에 세워진

구 병원과 부속 정원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곳은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부터 1889년 사이에

실제로 입원해 그림을 그렸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정신 착란증으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기행을 저지른

빈센트 반 고흐는 병원의 펠릭스 레이 박사로부터

치료를 받았으나 호전되지 못했고

아를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살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에스파스 반 고흐


건물 내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문서 자료와

작품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아를 요양원의 정원'을

토대로 건물뿐만 아니라 정원까지

그대로 복구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방문객들은 정원 입구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실제 풍경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


레퓌블리크 광장은 시청 앞에 있는 광장으로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아를의 중심이다.

이곳은 원래 로마시대의 정치의 중심인

포럼(forum)이 있었던 곳이다

로마시대 당시 이곳에는 열주의 기둥이 이어진

공공건축물들이 모여 있었고,

건축물 앞에는 시민들이 모이는 집회소와

시장이 있었다.








오벨리스크 분수대


레퓌블리크 광장 한 중앙에는

20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똑같이 보이지만

이 낡은 사암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약탈해온 작품은 아니고

아를에서 직접 만든 것이다.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 아래에

청동인면상과 사자상이 조각된

분수대가 있다.





생 트로핌 대성당(Cathédrale Saint-Trophime)


프랑스 아를 레퓌블리크 광장에 있는

12~14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립된

유서 깊은 중세 대성당이다.

프로방스 지방의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종교 건축물로,

입구와 회랑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12~14세기의 섬세한 조각들이 유명하다.





생 트로핌 대성당(Cathédrale Saint-Trophime)


12세기 시작된 성당 건립 공사는

14세기까지 이어졌는데

고대 로마 극장들의 일부를 떼어내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프로방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개축 작업으로 제단과 회랑에

고딕 요소가 일부 반영되기도 했다.





생 트로핌 대성당 파사드


성당 문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기둥 사이사이에는

사도와 성 트로핌의 조각상으로 채워져 있다.

기둥 끝에는 성서 장면 등이 새겨져,

건물 곳곳이 종교적 메시지가 담긴

전형적인 프로방스 파의 조각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팀파눔 조각


좌우에 작은 문을 거느린 성당 정문 위에는

지붕 모양이 장식되어 있고,

지붕 아래 삼각형 부분에 아치 모양으로

둘러싸인 장식인 팀파눔이 조각되어 있다.
팀파눔 윗부분 한 중앙에는

왼손에 복음서를 든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스도 주변에는 그리스도교

네 복음서의 저자를 상징하는

천사, 사자, 황소, 독수리가 둘러싸고 있다.

천사는 마태, 사자는 마가, 황소는 누가,

독수리는 요한을 상징하는데

모두 손과 발에 복음서를 잡고 있다.

그 아래에는 12사도들이 좌정해 있다.





생 트로핌 대성당 조각상


12사도 옆 인물 조각상들

성당 정문을 바라봤을 때 왼쪽에 보이는 인물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여 서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영원한 기쁨에 차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천국에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반면, 그리스도 오른쪽으로는

그리스도를 등지고 있는 모습의 조각인데

 그리스도에 등을 돌린 사람들,

즉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슬에 매여 지옥으로 끌려가는

죄인들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 인물상 조각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선택 받은 자와 버림 받은 자를 표현한 것이다.





1840년 대성당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선정되었으며

1981년부터는

아를의 로마시대 기념물 목록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대성당 정문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성당이 지어지던 당시의 아를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지만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생트로핌 성당은 아를 왕국의 중심성당이었다.

생트로핌 성당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리크 1세가

부르고뉴 왕 즉위식을 겸한 대관식을

올렸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식을 절제한 예배당 내부











생 오노레 주교의 석관(?)


아를의 주교였던

생 오노레(Saint Honoré, 350~429)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대성당에 있다.















태피스트리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














아를 시청


아를 시청 지하에는

고대로마 포럼의 지하비밀통로인

크립토포르티쿠스(Cryptoportiques)가 있다.

이곳에 갈려면 시청사로 들어가

입장권을 사고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아를의 시청사


시계탑이 있는 아를의 시청사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반 고흐 카페(Café Van Gogh


포럼 광장(Place du Forum)의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으로

고흐가 사랑한 장소인

카페 반 고흐에 드디어 왔다.





Le Cafe La Nuit


고흐가 즐겨 찿던,

1888년 9월에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 반 고흐





Le Cafe La Nuit











그림 위로 열주 옆에

Place du Forum

포룸광장 명패가 작게 보인다.





포룸 광장의 밤의 카페 테라스





포룸 광장의 밤의 카페 테라스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후기 인상주의

크뢸러뮐러 미술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Frederic Mistral)

(1830.9.8,-1914.3월.25)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으로

19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아를 근처 마이얀에서 출생,

아비뇽중학교에서 선배격인

루마뉴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방스 문화의 보존과 부흥을 위한

‘펠리브리지’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연애 서사시 '미레유'(1859)를 비롯하여

많은 시집을 남겼다.

또한 랑그도크어사전인

'펠리브리지 보전'(1878∼1886)의 출판

아를 박물관창설을 위해서도 힘썼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목욕탕


론 강변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목욕탕은

4세기에 부속 건물 몇 동을 포함한 복합 단지로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한증막, 욕조는 물론 속이 빈 벽돌을 통해

벽돌마루 밑 온돌과 벽 사이로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기 장치를 볼 수 있다.

벽돌과 작게 만든 석회 블록을 한 줄씩 번갈아 쌓아올린 벽은

반원형 애프스 주위에 세워졌다.

높은 아치형 창문 3개로 빛이 들어오는 애프스는

거대한 사각형 아치 천장으로 덮여 있다.

남쪽에는 온탕, 냉탕, 체육관이 배치되어 있다.














론(Rhone) 강


스위스의 이탈리아 국경에 가까운

알프스 산중에 있는 론빙하에서 발원하여,

프랑스 남동부를 지나

816Km를 흘러 지중해로 흘러든다.

길이 약 810km. 유역면적 약 10만㎢.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탄생한 론강을 걷고 있다.





고흐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그려낸 공간이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1888년경, 후기 인상주의

오르세미술관





아를의 론 강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아를에

 1년 3개월을 머물며 고흐는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이었고

'해바라기' '노란 집', '아를 병원의 정원',

'밤의 카페 테라스(포룸 광장의 밤의 카페 테라스 )' 등

그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흐가 아를을 찾은 것은 1888년 2월.

겨울이었지만 파리의 우울한 생활을 벗어난

화가에게 도시에 대한 인상은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화가가 느꼈을 아를의 매혹이 담겨 있었다.











론 강을 끼고

버스 주차장으로 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안도라공국으로 출발

약 5시간을 달려야 한다.



























피레네 산

















이 마을에서 내려

잠깐 쉬어 가기로 한다.





마을 식당에서 스시를 팔았다.

늘 먹던 맛이 보여 반가운 김에

 얼른 구입해서 룸메이트랑 인솔자님과

나눠 먹었다.





인솔자님이 구입한 피자


치즈가 정말 장난이 이니었다.

맛이 좋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안도라 공국의 수도

안도라라베야로 Go Go Go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 동부에서  눈을 만났다.











오랜 시간을 달려

드디어 호텔 근처에 도착했다.





안도라 HOTEL ROC BLANC

다음날 아침에 찍은 호텔 전경





호텔 입구 문





객실








욕실





호텔 어메니티




[참고 발췌: 두산백과, 세계지명 유래 사전,

유네스코, 미술대사전(인명편), 501 위대한 화가]



'프랑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를에서의 식사  (0) 2019.04.18
엑상 플로방스에서 먹은 식사  (0) 2019.04.16
[엑상 플로방스] 폴 세잔의 아틀리에  (0) 2019.04.16
[엑상 플로방스] 엑상 플로방스  (0) 2019.04.16
[칸느] 칸  (0) 201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