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아부심벨

푸른 바다. 2021. 9. 25. 23:40

아부심벨

 

 

 

2018년 12월 19일 수요일

이집트 여행 셋째 날

 

 

3시간 넘게 사막을 달려와

아부심벨은 약 1시간 가량 관광 하였다.

가장 위대했던 고대 이집트 제 19왕조 람세스 2세가

직접 세운 람세스 2세의 대신전과

왕비를 위해 세운 네페르타리 소신전을 보았다.

아부심벨 신전은 유명한 페트라를 재발견한

스위스 역사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1813년 발견하였다.

아스완댐 건설에 따라 이 지점의 수위가

60m 높아져 수몰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나

유네스코의 헌신적인 노력과 현대공학의 힘으로

1964∼1968년에 이 신전을 원형대로

65m를 끌어올려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 이렇게 대단하고 경이로운 아부심벨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무척 감격스러웠다.

 

 

 

크루즈 여행 지도

 

 

 

이집트는 아스완 로우 댐을 건설하고서도

나일강의 범람을 완전히 조절하지 못하여

급증하는 인구를 유지할 농산물 생산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59년, 이집트 나세르 정부는 나일강의 범람을

확실히 조절하고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

아스완 로우 댐 남쪽 6km 나일강 상류에 대규모 다목적 댐인

아스완 하이 댐을 소련의 기술과 차관으로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처음 소련과 독일의 합작으로 주도하고

미국과 영국도 개입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1년 완공된 아스완 하이 댐의 폭은 3,830m,

높이 110m, 저변 두께 130m, 저수량 1,800 억m3,

여기에서 얻어지는 발전량은 100억 kwh 규모의

세계 최대의 댐이 되었다.

 

 

 

그 결과로 길이 약 500km에 ,폭 평균 30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세르 호수가 형성되었고

나일강 상류의 넓은 지역이 사막에서 옥토로 변하였다.

이 하이 댐 덕분에 나일강의 홍수를 조절하고

강 유역에 항시 물을 공급할 수 있어 농산물 증대에

획기적 결과를 가져왔다.

당장 농산물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뀌었다.

초대 대통령 나세르가 이집트 1,000년을 보고 밀어붙인

농업정책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기는 또 다른 문제도 제기 되었다.

그 당시에는 환경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문화단체의 반발에 부닥쳤다.

그후 현재는 환경문제도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의 수위가 182m가 되고

아부심벨 신전 수위 120m 보다 62m초과 되어

카라브샤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 누비아 지방의

수천 년 문화유적지가 모두 수몰 위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3,000년 이상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24개의 고분과 사원 등

석조 유적지가 물속에 잠기게 되는 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나세르 대통령은 소련에 이 사원들의 구제를 요청했으나 거절되었고

전 세계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이 이 세계적 문화유산을 보존해 주도록

나세르에게 탄원했으나 그 역시 나라의 천년 대계를 막을 수 없었다.

그들 학자들은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이에 따라 유네스코는

누비아 유적보호에 전례 없는 대규모 국제 캠페인을 전개했다.

 

 

 

유네스코가 아부심벨 신전을

수몰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세계적인 유적 구제 캠페인을 전개한 결과

세계 60여 개국에서 3,6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이 원조 형태로 모금되었다.

유적보호 자금이 모이고 별별 보호방법이 제안되었다.

당시 아부심벨 신전을 원 위치에 두고 주변을

제방으로 둘러싸 보호하는 등의 방안도 강구되었으나,

들어 옮기는 것이 비용 면에서 가장 저렴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이태리의 제안에 따라 아부심벨 신전을

당초 위치에서 64m 높은 쪽으로 그리고 180m 안쪽으로

들어간 지점에 당초의 바위 언덕과 같은

인공 바위 언덕을 만들어 신전의 석재를 토막내서

돌에 번호를 매긴 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재조립하였다.

 

 

 

인공 바위 언덕은

콘크리트 셀 구조로 그 안은 넓은 무주공간으로

여기에 신전 내부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암벽표면과 암굴내부에 만들어진 조각품들을

사방 3m 크기(중량 30톤 이하 되게)로

760개(총중량 11,600톤)를 절단하여 상부에 있는

인공 콘크리트 산에 옮기는 대공사가

1963년 11월 착공하여 1968년 4월 준공되었다.

이렇게 아부심벨은 위기에서 구해졌다.

신전입구 옆문을 통해서 복원된 신전 뒤로 들어가,

인공 산 콘크리트 구조물의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 벽에 설치된 안내판에

'유네스코가 아부심벨 신전을 이전하기 위해 이 구조물을 건설했다'는

내용의 자료들이 있다.

 

 

 

유네스코의 수몰 위기 아부심벨 신전

이전에 동참한 나라 국기의 일부

 

 

 

옛 아부심벨 신전의 위치(밑)와

현 이전 위치(위)를 보여주는 누비아 박물관 조형물

 

수몰 위기의 옛 신전은

현 신전 앞마당 끝에서 65m 아래,

지금은 물에 잠긴 계곡의 절벽에 있었다.

 

 

 

나세르호에 수몰된 옛 신전

 

아부심벨 대신전은

천연의 사암층을 뚫어서 신전을 건립했는데,

바깥의 람세스 2세 거상 4구를 대강 깍아 남기고

그 뒤 절벽 파사드를 70도 경사지도록

비스듬하게 절삭하여 신전 탑문 윤곽을 이룬후에

중앙 출입문, 다주실, 전실, 창고실, 성소 순으로 파고 들어가,

마감은 역순으로 하여 성소와 벽과 기둥을 조각했다고 한다.

바위산 하나로 이음 없이 신전 하나를 완성했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부심벨 신전 이전 공사 (아부심벨 엽서 사진)

 

1960년대에 나일 강을 막는

아스완 하이 댐 건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아부 심벨 신전이 있는 협곡은 새로 형성되는

나세르 호수 속에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유네스코가 고대 이집트 유산을 구조하는

누비아 사업 캠페인을 벌여 전 세계 60여 개국의 원조를 얻어

신전을 좀 더 높은 지대로 옮기는 작업을 시행했다.

면밀한 고고학적인 조사를 거쳐 신전을 각 30톤에 육박하는

블록 1만여 개로 분해한 후 재배치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

비용은 약 4천만 달러가 들었다.

그러나 이 복원 작업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여,

신전의 위치를 옮긴 이후 신전 내부 성소에

태양 빛이 비추는 날짜가 고대에 비해 하루 늦춰지게 되었다.

 

 

 

아부심벨 엽서 사진

 

사방 3m 크기(중량 30톤 이하 되게)로

760개(총중량 11,600톤)를 절단하여 해체하고

상부에 있는 인공 콘크리트 산으로 옮겨서

다시 조합하는 대공사가

1963년 11월 착공하여 1968년 4월 준공했다.

 

 

 

아부심벨 신전을 이전하여 재건하는 모습

 

 

 

람세스 2세 두상을 옮기는 모습

 

 

 

수몰 위기에서 벗어나 현재 위치로 옮겨진 아부심벨 모습

 

아부 심벨 신전은

람세스 2세가 고대 누비아 지역 나일강 위 절벽에

천연의 사암층을 깍아 태양신을 숭배하여 동쪽을 향해 지었으며,

대신전과 소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 앞에는 이중 왕관을

쓴 람세스 2세의 상이 4개 있다.

대신전에서 북쪽으로 90m 떨어진 곳에 있는 소신전의 입구에는

바위를 파내어 조각한 높이 10m가량의 상이 6개 있다.

그중 4개는 왕을 나타내며,

나머지 2개는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가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아부심벨 신전이 완성되고

수세기 후 이집트는 혼란한 상황으로 빠져들었고,

수단 국경 근처 먼 이집트 남쪽 누비아 지역에 위치한데다

사막의 모래에 뒤덮여 협곡 속에 오랜세월 파묻힌 신전은

1813년 재발견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1813년 스위스 역사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오랫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신전 일부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는 현지 안내원을 데리고 람세스 2세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봉헌된 사원을 찾으려고 나일강 상류에 도착하였다.

두 바위 언덕 계곡에는 모래만 가득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한동안 헤매다가 모래 경사면을 타고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았을 때

절벽에 거상 머리가 모래 속에서 삐죽이 나와 있었다.

당시 그는 석상의 머리 하나와 신전의 한 부분만을 모래 속에서 찾아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그것이 입상인지 좌상인지

무슨 신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모래를 제거할 수 있는 기계가 아직 없던 때여서

오로지 사람의 힘에만 의지해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르크하르트는 유적을 발견했지만

직접 조사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817년 8월 이탈리아의 조반니 베르지오니가 많은 인부와 자금을 투입,

신전을 덮고 있던 모래를 걷어내고 신전의 입구를 찾아내

안으로 들어가면서 유럽인들에게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이 방면에 관련해 유명했던 탐험가, 화가,

고고학자들을 이 신전에 초대하였다.

아폴리토 롯세리니, 살베이토르 체루비니, 프랑스 화가 네스톨 오테,

상형문자 해독자 장 프랑스와 샹폴리옹,

트로이 유적 발굴자이자 독일 고고학 탐험가인 하인리히 슐리만 등

당시 고고학 대가들이 이 신전을 고증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그들은 이 신전이야 말로 이때껏 발굴한 이집트 유적 가운데

최고의 예술품이라 입을 모아 극찬했다.

 

 

 

아부심벨 티켓 200 이집트 파운드

1파운드 약 75원

 

 

 

아부심벨 람세스 2세 대신전과 네페르타리 소신전

 

수몰위기에서 유네스코와 세계의 도움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한 아부심벨 신전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천연의 사암층을 뚫어서 건립했다.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되어 있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입구에 높이 22m의 람세스 2세의 상 4개가 있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에게 바쳐진 두 번째 신전이자

좀 더 작은 소신전은,

람세스 2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라고까지 일컬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해 건축되었다.

 

 

 

이 모서리를 돌면 람세스 2세 대신전이 나온다.

 

람세스 2세는 파라오로 66년 재위하는 동안

자신의 기념물을 이집트 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이집트와 누비아 전역에 걸쳐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특히 누비아의 경우는 금을 비롯하여 귀중한 물건들을

공급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중요시되었다.

람세스 2세는 누비아 사람들에게 이집트의 힘을 과시하여

이집트화하기 위하여 웅장한 신전을 지었다.

상부 누비아와 하부 누비아의 경계에 있던

아부심벨 마을에서 멀지않은 계곡에 있는 두 번째 폭포 부근의

바위 절벽을 파서 만든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이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의 통치자들 중

가장 강력했던 파라오의 하나였다.

그는 기원전 1279년부터 66년 동안 통치했으며,

람세스 2세의 오늘날 남아있는 많은 유적들은

그의 재위 시절 만들어진 것들이다.

4개의 거대한 좌상이 있는 아부심벨 신전을 비롯해,

룩소르 신전, 카르나크 신전의 라메세움 등에 거대한 석상을 남겼고,

크고 작은 상들은 아직도 이집트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는 예전 왕들의 상을 약간 고쳐서 자신의 상으로 내놓기도 했으며,

전왕이 만든 건물에 새겨진 이름을 지우고 자기 이름을 새겨 넣거나

그 건물의 석재를 빼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왕국의 쿠푸나 카프레가 피라미드를 남겼다면,

람세스 2세는 자신의 기념물로 국토를 채웠다.

게다가 그는 테베에서 북동쪽의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피람세스(람세스의 집)라고 불렀다.

 

 

 

제19왕조 람세스 2세 흉상(B.C. 1279~B.C. 1213년 재위)

대영박물관. 룩소르 신전에서 발견

 

오늘날 가장 유명한 파라오를 꼽으라면

투탕카멘과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람세스 2세인데,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명성을 누리는 파라오는 람세스2세 뿐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고왕국 시대(3, 4, 5, 6왕조)를

이집트의 최고 융성기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신왕국 시대(18, 19, 20왕조)야말로 이집트의 전성기였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고왕국 시대에는 범접할 수 없는 웅대함과 신비함이 있었다면,

신왕국 시대에는 사상 최대의 국토와 화려하고 정교한 문화가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파라오는 람세스 2세다.

그 까닭은 그의 긴 재위 기간이다.

람세스 2세는 14세 때 이미 왕세자-섭정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10년 만에 왕위를 이어받고는 66년을 재위했다.

19왕조의 존속기간 110년 중 세 번째 파라오인 그가 삼분의 이를 차지했다.

아버지 세티 1세 이후 팔레스타인 정복을 계속하였으며,

치세 5년경에는 카데시에서 히타이트왕 무와타리시와 크게 싸웠으나 결전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으로 시달리다가

BC 1258년 두 나라 사이에 화약이 성립되어 이집트는 시리아를 포기하고 말았다.

평온을 유지하는 가운데 BC 1245년에는 히타이트의 왕녀와 결혼하였다.

그 무렵 서 델타에서 리비아인과도 싸웠다.

왕은 여생을 각지의 신전 건축에 바치고, 델타 북동부에 왕도 페르라메스를 세웠으며,

아비도스, 테베, 누비아의 아부심벨 등에 신전 ·장례전 ·신문 등을 세웠다.

왕의 시대에 이집트왕조의 융성기는 끝나고, 제20왕조의 왕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왕은 대표적인 오리엔트적 전제군주로, 자신의 조상을 각지에 남기어 자신을 과시하였다.

적어도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수많은 왕자들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거나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의 사제로 일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그가 수립한 종교질서상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카르나크 신전의 제사장직은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평생 스스로 겸임했다.

그의 오랜 재위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 또는 리더십의 증거로 거론되곤 한다.

람세스는 적어도 90을 넘긴 나이로, 노령으로 숨졌다.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미라를 보면 그는 매부리코에 강한 턱을 가졌으며,

이집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붉은 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1995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5호 고분은 이 왕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이집트의 ‘태양왕’은 보기 드문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람세스는 태양신 ‘라’와 ‘태어나다’는 이집트어 ‘모세’가 합쳐진 이름이다.)

 

 

 

아부심벨 대신전 The Great Temple(람세스 2세 대신전)

 

대신전은 람세스2세 자신에게,

소신전은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것이었다.

신전의 건설은 기원전 1264년 시작하여

기원전 1244년 완되었다.

‘아문신이 사랑한 람세스의 신전’으로 불렀다.

 

 

 

아부심벨 대신전

 

아부심벨 신전은

고대 이집트 왕 람세스 2세(BC 1279~1213 재위)가

지은 2개의 신전 유적이다.

주신전 앞에 있는 4개의 거대한 람세스 좌상은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장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집트 아스완 행정구 코로스코(지금의 쿠루스쿠)의 남쪽,

나일 강 서안의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대신전 전면은

암벽에 폭 38m, 높이 32m의 벽면을 다듬어

입구 양쪽에 높이 22m의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 넷이

상부와 하부 이집트를 상징하는 이중의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발 밑에는 가족들의 작은 입상들이 늘어서 있다.

네 석상은 서로 다른 시기의 람세스 2세의 모습을 새겼다.

입구의 왼쪽에 있는 석상은 지진으로 머리와 몸통이 떨어졌다.

아부심벨의 대신전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떨어진 부분은

복원하지 않고 원래 있던 석상의 발아래 놓아두었다.

 

 

 

아부심벨 람세스 2세 대신전

 

누비아의 아부 심벨의 산자락에 조각된

태양신에게 바쳐진 람세스 2세의 대신전은,

왕관을 쓴 채 옥좌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모습을

나타낸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바위를 깎아 조각되었으며 건물의 파사드를

지배하고 있는 높이 22m의 이 조각상들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아상'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지방 부족들에게 파라오가 지닌 초인적인 힘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다.

파사드 꼭대기에는 개코원숭이들이 태양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람세스 석상의 다리 사이의 작은 석상들은

파라오의 조강지처 네페르타리 메리트무트,

모후 무아 투야, 장남 아문 헤르 케페셰프, 차남 람세스 B

그리고 장녀 빈타나트를 비롯하여 베케트 무트,

네페르타리, 메리타멘, 네베타위, 이세노프렛 등 여섯 딸이다.

 

 

 

람세스 대신전의 파사드

 

대신전의 전면은 폭이 38m이고,

높이는 33m에 달한다.

파사드 꼭대기 장식 띠에는 두 팔을 들어 떠오르는

태양을 찬양하는 22마리의 개코원숭이들을 새겼다.

그 아래 현판에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평화의 징표가 된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3세의

딸과의 결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람세스 2세 대신전 입구로 들어가는 출입구

 

오른편에는 왕비 네페르타리,

왼쪽에는 모후 모아 투야의 입상이 서 있다.

입구 파사드에는 매의 머리를 한 태양신 라

(고대 이집트의 신왕조에는 호루스와 융합된 라-호라크티)가

서 있는 모습을 새긴 감실이 있고,

라를 예배하는 파라오의 모습을 얕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다.

라의 왼쪽에는 진실과 정의의 여신 마트가

얕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람세스 2세 신전 제 1실

 

태양신인 아몬 라(신왕조의 라-호라크티)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절벽 안쪽으로 56m를 파서 만든

3개의 연속된 홀로 이루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람세스 2세의 전투 장면과

그의 부인 네페르타리의 모습이 조각된 벽화를 볼 수 있다.

신전 내부는 왕의 여러 조상과 함께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한 6면의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는 촬영 금지다.

 

 

 

람세스 2세 대신전 제 1실

 

내부의 다주식 현관은

길이 18m, 폭 16.7m의 장방형 홀로

여기에 오시리스 신의 모습을 한 10m 높이의

람세스 2세의 젊은 입상 8개가 기둥이 되어 두 줄로 서 있는데,

이는 파라오가 영생의 존재임을 나타낸다.

왼쪽 오시리스는 상 이집트의 흰 왕관을,

오른 쪽 오시리스는 상,하 이집트의 이중왕관을 쓰고 있다.

팔은 가슴에 포개고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홀과 도리깨를 들고 있고,

네이브 천장에는 상 이집트의 수호신인 네크베트의 큰 독수리 문양이 있다.

아일 천장에는 별들 문양을 그렸다.

 

 

 

람세스 2세 대신전 제 1실 다주식 공간 (사 온 엽서 사진)

 

바위를 깨내어 조성한 신전 내부는

고대 이집트 신전의 전형적인 구조인 삼각형의 형태이다.

입구로부터 안쪽의 지성소에 이르기까지 폭이 좁아진다.

입구에 들어서면 현관이라고도 하는 다주식 공간이다.

 

 

 

람세스 2세 대신전 제 1실 다주식 공간 벽화 (사 온 엽서 사진)

이륜전차를 탄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달아나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는 장면

 

양쪽 벽에는 파라오가 지휘한 전투를 얕은 돋을새김으로

묘사하였는데, 주로 카데시 전투의 장면이다.

오늘날의 시리아를 흐르는 오론테스 강 유역으로

히타이트 제국에 맞서 싸운 대규모 전투 장면을 그렸는데,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 2세가 거둔 군사적 승리와

왕의 용감성을 찬양하는 노래와 시를 상형문자로 새겨 놓았다.

가장 유명한 부조는 이륜전차에 탄 파라오가

달아나는 적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장면이다.

그밖에도 리비아와 누비아에서 거둔 이집트의 승리를 보여준다.

 

 

 

람세스 2세 대신전 제 1실 다주식 공간 벽화 (사 온 엽서 사진)

 

히타이트 제국과 맞서 싸운

카데시 전투의 장면을 묘사했다.

 

 

 

람세스 2세 대신전 제 1실 다주식 공간 벽화

(사 온 엽서 사진)

 

히타이트 제국과 맞서 싸운

카데시 전투의 장면

 

 

 

람세스 2세 대신전 제 2실 다주식 공간 벽화

(사 온 엽서 사진)

 

현관을 지나면 두 번째 다주식 공간이 나오는데,

이 방에는 네 개의 기둥이 서 있다.

신들에게 봉헌하는 장면이 새겨져있다.

제2실의 벽화는 종교의식에 관한 것이다.

 

 

 

사 온 엽서 사진

 

람세스2세와 네페르타리 왕비가

아몬과 라-호라크티의 신성한 배 앞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엽서 사진

 

부조로 왕의 업적, 북쪽 벽에는 카디슈 전투,

남쪽 벽에는 시리아, 리비아, 누비아와의

싸움이 그려져 있다.

 

 

 

엽서 사진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 (사 온 엽서 사진)

 

두 번째 방에는 신전의 끝에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람세스 2세 신전 지성소 (사 온 엽서 사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성소는 바위를 깎아 만들었으며

안쪽으로 부터 프타신, 아몬-라 신, 라-호라크티 신,

신격화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등 네 신들의 좌상이 있다.

 

 

 

람세스 2세 신전 지성소- 빛이 들지 않는 어둠의 신 프타 (위키피디아 사진)

 

신상은 항시 어둠 속에 있으나

1년 중 2월 22일과 10월 22일 두 번만은

지성소에 아침 햇빛이 들어오는데,

신전 탑문 전체를 붉게 비친 태양은

정문으로 들어가 약 20분 동안 암굴 안을 비춘다.

이때 아침 해의 첫 햇살이 65m나 되는 암굴 신전의

가장 깊숙한 지성소까지 들어와 아몬-라 신, 라-호라크티 신과

람세스 2세의 전신을 환히 비추도록 설계 되었으나,

죽음과 어둠의 신인 프타의 석상에는 빛이 들지 않는다.

2월 22일은 람세스2세의 대관식이 있던 날이고,

10월 22일은 람세스2세의 생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날짜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태양 빛이 가 닿도록 치밀하게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은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 지식과 건축 기술 덕분이다.

그러나 이전 후 복원 작업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여,

신전의 위치를 옮긴 이후 신전 내부 성소에

태양 빛이 비추는 날짜가 고대에 비해 하루 늦춰지게 되어

하루 차이가 나게 되었다.

 

 

 

대신전 입구 양쪽 통로의 부조

 

오른편에는 왕비 네페르타리,

왼쪽에는 모후 모아 투야의 입상이 서 있다.

 

 

 

대신전 입구 통로 왼쪽의 부조

 

 

 

출입구 통로 왼쪽 아래 부조

 

누비아인들이 무릎을 꿇은 채 도열해 있다.

 

 

 

출입구 통로 오른쪽 부조

 

 

 

부서진 석상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는 석상은

신전이 완공된 몇 년 뒤 일어난 지진으로

머리와 몸통이 굴러 떨어졌다.

아부심벨의 대신전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떨어진 부분은

복원하지 않고 원래 있던 석상의 발아래 놓아두었다.

람세스 석상의 다리 사이의 작은 석상들은

람세스 2세의 모후 무아 투야, 그리고 아들과 딸들이다.

 

 

 

그리스인의 낙서

 

남쪽에 있는 1쌍의 좌상에 새겨진 낙서들은

BC 6세기에 이집트 용병으로 누비아 원정을 떠난

그리스인 용병들이 고대 그리스어로 새긴 것으로

고대 그리스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출입구 우측 네페르타리, 좌측 투야

 

아부심벨의 대신전의 전면에 있는 출입구 쪽

람세스2세의 좌상 무릎 아래,

오른쪽에 네페르타리 왕비의 입상과

왼쪽에 람세스2세의 모후 투야가 서 있다.

 

 

 

왕비 네페르타리와 아들과 딸들

 

람세스 석상의 다리 사이의 작은 석상들은

람세스 2세의 조강지처 네페르타리 메리트무트,

그리고 아들과 딸들이다.

 

 

 

 

 

 

 

람세스2세가 남긴 신전은

무려 3,000년이 넘어가도록 남아

파라오의 위엄을 전한다.

 

 

 

 

이제 네페르타리 소신전으로 향했다.

 

 

 

기원전 13세기에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용감하고 위대한 동시에 허풍이 심하고 자아도취적인 인물로 평가 받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에 속했다.

람세스 2세는 정부인이 최소 6명, 첩은 수십 명이었다고 하며

그들 사이에서 56명의 아들과 60여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부인들 중에는 람세스의 누이나 딸도 있었는데,

신성한 피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집트의 관습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은 왕비 네페르타리였으며,

퍼스트레이디의 지위는 오직 한 사람, 네페르타리에게만 부여되었다.

18왕조의 파라오 아이의 증손녀,

또는 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방계 혈족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람세스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동맹을 맺은 히타이트의 왕비와 친목을 위한 선물과 서신을 교환하는 등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아부심벨 신전은 그와 그의 아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녀가 재위 40년경에 죽자, 람세스는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

왕비의 무덤으로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무덤을

그녀에게 만들어 주었다.

 

 

 

하토르여신과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헌정된 소신전

 

아부심벨 소신전은

람세스2세 신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소신전이 있다.

람세스 2세의 첫번째 비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었고,

이집트 최초로 왕이 왕비를 위해 지은 신전으로,

사랑과 음악의 여신 하토르에게 헌정한 것이다.

원래 이 지역은 하토르 여신이 관장하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 입상 4개, 네페르타리 왕비의 입상 2개가

정면 벽감 안에 조각되어 있다.

 

 

 

아부심벨 소신전

 

소신전의 전면은 바위를 깎아서 조성하였는데,

커다란 입구의 좌우에 세운

높이 10m 크기의 거대한 석상 6개가 서있다.

람세스2세의 석상이 4개

그리고 네페르타리의 석상이 2개이다.

입구의 왼쪽에 서 있는 람세스 2세는

상부 이집트 왕을 상징하는 흰색 왕관을 썼고,

입구 오른쪽에 서 있는 람세스2세는

통일 이집트의 왕을 상징하는 이중 왕관을 썼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와 왕비의 석상이

같은 크기로 조성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

 

소신전은 대신전에서 90m 떨어진 북쪽에 있는데,

정면 높이 12m, 너비 26m, 안쪽 길이 20m이며

입구에 높이 10m의 상 6개가 있다.

4개는 왕을, 2개는 하토르 여신의 복장을 한 왕비를 나타낸다.

내부에는 돋을새김으로 여신의 모습을 장식한 기둥들로 지탱되는 홀,

측면에 방이 있는 현관, 성소가 있으며,

황소의 형상을 한 하토르 신상이 있다.

내벽에 훌륭한 돋을새김으로 장식된 그림에는

신에게 포로를 바치는 왕의 모습과

그 옆에 서 있는 왕비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 입구문

 

네페르타리는 네페르타리 메리무트라고도 했다.

네페르타리는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의미이며,

메리무트는 ‘무트 여신의 사랑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네페르타리 왕비는 람세스2세의 첫 번째 왕비였다.

크레오파트라, 네페르티티, 하트수셉트 등과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이집트의 여왕 혹은 왕비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녀는 교육을 많이 받아 신성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고,

그녀의 이런 능력을 외교 등의 분야에서 활용했다.

특히 스스로의 권리를 당당하게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대왕의 아내, 모든 땅의 여인, 상하이집트의 여주인 등,

그녀를 찬양하는 다양한 호칭들이 있었다.

람세스2세는 그녀를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아부심벨의 하토르와 네페르타리 신전은

그녀의 위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신전 전면에 서 있는 그녀의 석상은 왕의 석상과 같은 규모이다.

신전의 부벽에는 “네페르타리 메리에트무트

대왕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신전이다.

그녀를 위하여 태양은 빛나고 생명을 주셨고 사랑했다.”

라고 적혀있다.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 파사드

 

 

 

아부심벨 소신전 입구문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 내부

 

신전의 내부 구조는 대신전과 비슷하다.

입구를 들어서면 6개의 기둥이 서 있는 다주식 공간,

즉 현관이 나온다.

이곳에 서 있는 기둥은 대신전에서 보는 것처럼

오시리스의 형상을 딴 파라오의 모습이 아니라,

왕비가 시스트룸(하토르 여신의 신성한 악기)을

연주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람세스2세가 신에게 꽃이나 향초를 헌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있다.

기둥의 주두는 하토르 여신의 머리를 형상화했다.

현실의 벽에는 파라오가 적을 무찌르는 장면을 그렸는데,

이런 장면에는 왕비가 함께하고 있다.

다주식 공간을 지나면 3개의 커다란 문을 통하여

문간방으로 연결된다.

이 방의 남쪽과 북쪽 벽에는 두 개의 은혜롭고 시적인 부조가 있다.

왕과 왕비가 배를 타고 파피루스 덤불 사이를 운항하는

하토르 여신에게 파피루스 풀을 헌정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서쪽 벽에는 람세스2세와 네페르타리가

호루스 신에게 선물을 헌정하는 모습을 새겼다.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의 현관인 다주식 공간(인터넷 사진)

 

제1실에는 사랑과 출산의 여신으로 숭배된

12개의 하토르 여신상의 기둥이 있으며,

기둥의 주두는 하토르 여신의 머리를 형상화했다.

각 기둥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왕비가 시스트룸(하토르 여신의 신성한 악기)을

연주하는 모습과

람세스2세가 신에게 꽃이나 향초를 헌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있다.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의 현실(인터넷 사진)

 

제 2실인 현실의 벽에는

파라오가 포로를 희생으로 신에게 바치며

왕비가 옆에 시립해 있는 그림이 있다.

 

 

 

아부심벨 네페르타리 소신전의 문간방 남쪽 벽(인터넷 사진)

 

다주식 공간을 지나면 3개의 커다란 문을 통하여

공물봉헌의 그림이 있는 제 3실로 연결된다.

이 방의 남쪽과 북쪽 벽에는 두 개의 은혜롭고 시적인 부조가 있다.

남쪽 벽에는 왕과 왕비가 배를 타고 파피루스 덤불 사이를 운항하는

하토르 여신에게 파피루스 풀을 헌정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서쪽 벽에는 람세스2세와 네페르타리가

호루스 신에게 선물을 헌정하는 모습을 새겼다.

 

 

 

위키피디아 사진

 

네페르타리가 작은 신전에 앉은 여신 하토르에게

시스트럼(이집트 악기)을 바치고 있다.

 

 

 

룩소르 왕가의 계곡 네페르타리 무덤의 네페르타리 모습

(인터넷 사진)

 

 

 

아부심벨 소신전 입구문

 

좁고 높은 장방형 벽감 6개 안에

높이가 거의 10.5m나 되는 왕과 왕비가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태양빛을 향하여 걸어 나오는 자세로

다리 사이에 자식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소신전 입구문 왼쪽 입상들

 

 

 

소신전 입구문 오른쪽 입상들

 

 

 

 

다리 옆 딸들의 입상들

 

 

 

 

 

 

 

 

 

아부심벨 대신전 야경 (인터넷 사진)

 

 

 

아부심벨 소신전 야경 (인터넷 사진)

 

 

 

 

나세르호

 

 

 

아스완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사막이 펼쳐진다.

왔던 길 3시간을 다시 달려

아스완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스완에 도착하면 앞으로 2박 3일을

보낼 크루즈에 승선 할 예정이다.

 

 

 

[참고발췌: 두산백과, 위키피디아, 유네스코 세계유산, 미술대사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인물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