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오벨리스크, 아스완 하이댐
2018년 12월 19일 수요일
이집트 여행 셋째 날
오늘 일정은 미완성 오벨리스크와
아스완 부근 나일강의 급류를 막아 건설한
세계 최대의 록필 댐인 아스완 하이댐,
그리고 하이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했으나
유네스코와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높은 곳으로 이전한 아부심벨 신전을 관광한다.
아스완 피라미사 이시스 아일랜드
리조트에 새벽에 도착해 몇 시간을 보내고
오늘 첫 일정인 3,500년 전
자르다 균열이 간 화강암이 누운 채로 방치된,
고대 이집트 토목 기술의 귀한 연구자료인
미완성의 오벨리스크를 보러 간다.
이집트 묘지
아스완 미완성 오벨리스크로 가고 있다.
아스완
이집트 남동부 아스완 주의 주도로
약 100만의 인구를 가지며,
나일강의 동안 제 1폭포 바로 북쪽에 있으며,
카이로에서 철도로 950km 남쪽에 있다.
예로부터 대상들의 숙박지로,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상업, 교통 중심지를 이루었다.
나일강의 물을 조절해서 사막을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축조된 ‘아스완댐’으로 유명해졌다.
댐은 1902년 완공된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개선, 확장되었다.
1971년에 1911km 지점에 아스완 하이댐이 건설됨에 따라
이 전력을 이용한 화학, 비료, 철강, 구리, 시멘트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그 전까지는 휴양지, 관광지로 알려졌던 도시가
오늘날은 전력을 이용한 대 화학비료공장의 소재지로 변모하였다.
아스완
고대 이집트명 세웨네우(Sewenew), 그리스명 시에네(Syene).
이집트 카이로의 남쪽 약 880km, 나일강 동편의 도시.
고대이집트 왕국의 남쪽 국경에 있고 성서에도 나온다.
지명은 고프트어로 '시장'이라는 뜻이다.
엘레판티네섬과 함께 정치, 군사 특히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다.
대안의 엘레판티네섬은 고대 이집트의 남쪽 문호로,
부근에 많은 고대 유적이 있어 겨울에 피한 관광객이 모여든다.
고대 이집트 시대 에라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와
아스완의 거리를 측정하여 지구의 둘레를 처음으로 계산하였다.
남쪽의 채석장은 옛부터 질 좋은 화강암을 생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일강 서안에 고왕국시대 말기~중왕국시대(B.C. 2400경~B.C. 1786경)의 암굴묘,
성 시메온 수도원(6~11세기), 카타라크트의 강 가운데 있는 섬에는
무수한 암벽비문, 채석장에는 미완성인 오벨리스크 등이 있다.
아스완
길고 좁은 모양의 아스완은
이집트의 나일 강변 최남단에 있는 주이며,
짧은 남쪽의 경계선은 수단과의 국경선의 일부를 이룬다.
아스완은 이집트 남부의 태양의 도시이자,
고대 룩스르에서 남쪽으로 81마일 떨어진
아프리카 풍의 변경도시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곳을 씨에네라고 불렀으며,
나일강의 아름다음을 걸어서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은 댐으로 인해 유적이 수몰되기 전에는
관광의 도시로서의 역할을 다했지만 지금은 댐을 이용한
화학비료 등의 공업이 잘 발달되어 있다.
이곳 누비아 박물관에서 수몰이전의 유물들을 구경할 수도 있고,
근처의 필라에섬의 이시스의 신전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세르 호수를 따라 원래의 장소에서
200m 정도 이전된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유적지이다.
아스완 미완성 오벨리스크 티켓
80이집트 파운드
아스완의 화강암 채석장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90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인
아스완 시가의 남동부는 나일강의 급류 지점으로,
고대부터 화강암 채석장으로 유명했으며,
부근에 흩어져 있는 채석장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잘라
멀리 기자까지 운반해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신전과 조각, 기념비의 석재로 사용했다.
아스완 아브 알 라디 하나페 박사 거리에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 채석장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 시대에 제작되어,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신전이나 능묘에 세워진 기념비로,
후세의 그리스인이 "obeliskos"라고 부른 것이 유래로,
당시 이집트에서는 "테켄(방어, 보호)"이라고 했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기둥 면에는 국왕의 공적을 상형 문자로 적은 글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 길이는 18∼30m이다.
최초의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들이 숭배한
태양신 라(Ra)에게 바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벨리스크는 본래 신전 앞에 쌍으로 세워졌는데,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대부분이 열강제국에게 약탈당했다.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 1개, 영국 런던에 1개,
미국에 1개, 터키 이스탄불에도 1개가 있으며
이탈리아 로마에는 무려 13개가 있다.
이중 미국과 영국에 있는 투트모세 3세의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Cleopatra's Needle)'이라 불린다.
카르나크 신전 오벨리스크
투트모세스 1세와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사각주이다.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태양신을 상징하는 긴 거석으로 석주형의 사면방첨탑이다.
피라미드형의 정상에는 황금판이 씌워져 있고,
본체와 기대의 표면에는 봉헌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헤리오폴리스의 레 신전의 성석을 모방한 것.
제5왕조(기원전 2494~2345경)의 국왕들은 돌로 쌓은
오벨리스크를 신체로 하는 태양신전을 건립하고,
돌기둥 형태의 것은 제12왕조(기원전 1919년경 이후) 이후부터 신전 내에,
신왕국 시대(기원전 1567~1085년경)에는 신전 앞에 한 쌍씩 세웠다.
대부분 아스완 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카르나크 신전에 하트셉수트 여왕이 건립한 오벨리스크가
최대 규모(높이 2,956cm)이고,
미완성인 아스완의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4,175cm나 된다.
미완성 오벨리스크
아스완에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가장 규모가 크나 미완성이므로,
현재 최고높이 타이틀의 오벨리스크는
바티칸 성베드로성당 앞의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미완성 오벨리스크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북쪽 채석장에 꼭대기를 동북쪽으로 누워있다.
만약 완성되었으면, 높이 약 42m로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가 되었을 것이다.
1,200톤 정도의 무게 역시 고대 이집트 최대였다.
원래 카르나크 신전에 사용될 오벨리스크를
만들기 위해 바위에서 쪼아낸 400m에 이르는
조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곳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건축과
조각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자료이다.
미완성 오벨리스크(unfinished obelisk)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하트셉수트 (기원전 1508~1458년) 여왕의
명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그간 세워진 제일 큰 오벨리스크보다 3분의 1 정도가 더 컸다.
만약 완성되었으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대략 42m, 무게는 1200여톤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오벨리스크의 제작자들은 기반암에서 바로 오벨리스크를
깎아 옮기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화강암 부분에 균열이 가는 바람에
전체 계획이 취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벨리스크의 바닥 부분은 여전히 기반암과
이어져 있는 상태이다.
미완성 오벨리스크(unfinished obelisk)
아스완의 이 고대 채석장에는
하트셉수트 여왕(기원전 1508년~ 1458년)을 위해
화강암을 자르다 균열이 생겨 중단된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3500년전부터 누운 채로 방치되어 있다.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에 있다가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으로 옮겨진 라테라노 오벨리스크와
짝을 이룰 예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완성 오벨리스크(unfinished obelisk)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의 석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경험을 제공하며 인부들의 도구로 생긴 흔적과
황토색 선으로 작업부분을 표시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2005년에는 미완성 오벨리스크 부근의
아스완 채석장에서 작업하다 말고 버려진
또다른 오벨리스크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여기서 돌을 깎아낸 흔적과 유적들이 여럿 발견됐는데,
이에 따라 이집트의 유명한 오벨리스크들은
거의 다 여기서 제작된 것이 아니냐는 추정도 이뤄지고 있다.
아스완 채석장과 미완성 유적들은 야외 유적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집트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고고학 유적지로 보호받고 있다.
하늘에서 본 미완성 오벨리스크(unfinished obelisk)
2005년에 발견된 미완성 오벨리스크로
네모반듯하고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다.
2005년 발견된 또 다른 미완성 오벨리스크
이 채석장에서
2005년 또 다른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작업 중이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채석장은 주로 오벨리스크를
제작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틈을 낸 화강암
채석장에 남아있는 바위에는
정으로 쪼아낸 흔적이 남아있는데,
기반암에서 오벨리스크를 떼어내기 위한
준비작업의 흔적으로 보인다.
아스완 시가의 남동부는 나일강의 급류 지점으로,
고대부터 화강암 채석장으로 유명했으며,
부근에 흩어져 있는 채석장에서 화강암을 잘라
멀리 기자까지 운반해서 피라미드나 신전의 석재로 사용했다.
당시 오벨리스크의 제작 과정을 볼 수 있는데,
돌에 틈을 만들어 나무 쐬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어서 팽창력으로 잘랐다고 한다.
화강암을 갈아서 표면을
매끄럽게 만드는데 쓰였던 검은 주먹돌
사막국가 이집트에서는 건축을 위해
필요한 석재를 채석장에서 채취한 뒤 나일강의 범람을
이용하여 운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벽화에 기록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신전, 조각상에 쓰인
대량의 붉은 화강암이
이곳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옮겨져서 사용되었다.
기념품점
이제 아스완 하이댐으로 향했다.
반가운 엘지전자 간판
차창으로 아스완 시내를 구경한다.
아스완 하이댐의 발전시설
1960년에 완공된 280메가와트 용량의
아스완-I 수력발전소와
1985-1986년 사이에 건설된
270메가와트 용량의 아스완-II
수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게 되어
아스완은 이 전력을 이용한 화학, 비료, 철강, 구리,
시멘트 등의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전까지는 휴양지, 관광지로 알려졌던 도시가
오늘날은 전력을 이용한 대 화학비료공장의
소재지로 변모하였다.
아스완 대학교가 있나보다.
아스완 하이 댐은
이집트에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으며,
해마다 발생하는 나일 강 홍수를 사상 처음으로 통제했다.
이 댐은 홍수 때 물을 저장한 후 적절하게 방출하여
관계농지의 효용성을 높이고,
수십만 ㏊의 새로운 땅에 물을 공급하고,
아스완 근처의 운항을 더욱 원활하게 했으며
엄청난 양의 전력(210만kW)을 생산한다.
송전설비
하이 댐에는 175메가와트급의
발전기 12개를 가진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최대 2.1기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1967년 발전을 시작할 무렵,
아스완 하이 댐(상부 둑)의 발전소에서는
이집트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절반을 감당했다.
나세르 호
나일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해 지어진
댐 건설로 만들어진 나세르호
나세르 호
나세르호는 댐공사가 끝난해 죽은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나세르호
나일 강의 1년 총방류량 중에서 약 740억㎥의 물이
이집트와 수단 인접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
555억㎥는 이집트에, 나머지는 수단에 분배된다.
하이 댐의 건설로 나세르호는 이집트로 약 320㎞,
수단(상류)으로 160㎞ 이상 확장되었는데,
이때문에 아부심벨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전이
물에 잠기게 되자 많은 비용을 들여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9만 명의 이집트 농부와 수단 누비아 지역의
유목민이 이주를 해야 했으며,
5만 명의 이집트인은 아스완의 북쪽 50㎞ 지점에
위치한 카움 움부 계곡으로 이주해
누바리아라는 새로운 농경지구를 형성했고,
대부분의 수단인은 수단의 카슴 알키바 근처에
다시 정착했다.
아스완 하이댐 입간판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이집트 아스완주에 있는 댐으로
나일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해
높이 111m, 제방 길이 3.6km, 저수지 길이 500km인
아스완 부근 나일강 급류를 막아 건설한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댐이다.
1902년 영국인이 나일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하여 아스완에 댐을 만들었는데,
그 후 나세르 대통령이 댐의 상류 7km 지점에
아스완 나일강의 급류를 막아 새로이 건설한 댐으로
러시아의 막대한 원조와 유네스코의 유적이전
프로젝트를 지원받아 착수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는 400명에 이르는
기술자들과 비용을 원조하여
1960년에 착수하여 1971년에 완공하였다.
1902년 영국이 건설한 아스완댐과
1971년 완공된 하이댐이 표시되어 있다.
아스완 하이 댐
아스완 상부 둑의 건설로 나일 강의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어 농업생산과 고용이 증가되었다.
전력생산과 관광산업이 활성화되는 부수적 효과도 있었다.
반면 둑 건설로 인하여 광범위한 지역이 수몰되어
1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많은 고고학 유적이 수몰되었다.
뿐만 아니라 호안지형이 침식되고 토양의 염분이 유실되었으며,
주민들의 건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나일 강이 범람할 때 강물에 실려 오던
퇴적물이 둑에 의하여 차단되면서
나일 강 하류의 토양이 척박해지는 부작용과 함께
저수지에 쌓여가는 퇴적물로 인하여
둑의 담수용량이 줄어들고 있다.
나세르 호
아스완 하이댐 공사로
고대 이집트의 많은 문화 유적이 물속에 잠길 것에 대비하여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유적의 이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 최대의 공사는 아부심벨 신전의 이전이었다.
이 신전은 BC 13세기에 연안의 절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높이 20m, 절벽 속의 너비는 60m였는데,
신전을 구성하는 바위를 톱질하여 20∼30t의 블록으로
절단한 다음 원래의 장소에서 200m 상류에,
원래의 위치보다 70m 높은 위치로 옮겨
댐 건설로 만들어진 나세르호에 수몰을 면하게 되었다.
나세르 호
하이 댐의 건설로 인하여 수몰위기에 빠진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구하기 위하여
유네스코는 누비아 사업을 전개했다.
아부심벨 신전 등 22개의 유적을 수몰지역에서
이집트와 수단 내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유적들이
나세르 호수 속으로 잠겼다.
그리고 일부 유적은 이 사업을 지원한
나라들에게 보상차원으로 보내졌다.
데보드(Debod) 신전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광장으로,
덴두르(Dendur) 신전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타페(Taffeh) 신전은 네덜란드 라이덴에 있는 왕립 유물박물관으로,
엘레시아(Ellesyia) 신전은 이탈리아 토리노의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스페인광장으로 옮겨진 데보드 신전.(좌상),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옮겨진 덴두르 신전.(우상),
네덜란드 라이덴에 있는 왕립 유물박물관으로 옮겨진 타페 신전.(하좌),
이탈리아 토리노의 이집트박물관으로 옮겨진 엘리시아 신전(하우)
(Wikipedia)
아랍-소련 우의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스완 상부 둑의 중간에
연꽃을 형상화한 아랍-소련 우의탑이 서 있다.
[참고 발췌: 두산백과, 미술대사전(용어편), 세계지명 유래 사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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