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포로 로마노

푸른 바다. 2010. 5. 9. 00:43

포로 로마노

 

로마 시내의 유적을 한군데라도 더 보고 싶어 로마 벤츠 시티투어를 60유로에신청해서 맨 처음 간 곳이 포로 로마노다.이 곳을 보면서 그 옛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새삼 생각 났다.이 곳이 폐허가 되기 전의 모습은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을지 짐작이 간다. 로마 군단들이 개선하면서 내는 군화 소리와 말 울음 소리,꽃을 던지며 소리치는 시민들의 함성 소리, 연단에 올라 연설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소리,시저가 브루투스의 칼에 맞아 쓰러지며 "브루터스 너도냐"하며 분노하는 소리,안토니우스가 피 묻은 시저의 옷을 보이며 로마 시민들에게 울부짓던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저물어 간 저 위대한 로마 제국의 폐허 속에서 들리는듯 했다.

 

포로 로마노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포룸(도시광장)으로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에 걸쳐 로마의 정치와 경제와 시민 생활의 중심지였다.팔라티노와 캄피톨리오 언덕 사이의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각 언덕에 모여 살던 사람들의 자연스런 교류 장소가 되어 급속히 발전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 시저와 아우구스투스가 기초를 닦은후 공화정 시대에 모든 시설들이 밀집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제정 시대가 되면서 공회당의 기능이 쇠퇴하고 정치 활동의 중심이 황제의 궁전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으로 옮겨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어 수도 기능이 라벤나로 옮겨지고,283년에 발생한 대화재와 410년 서고트족의 침략과 지진으로 결국 폐허가 되고 토사 아래에 묻혀버렸다.폐허가 된 이곳은 소와양치기하는 목장으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1871년에 발굴 작업이 본격화 되어 현재도  발굴 작업과 복원 작업이 계속 중이다.

 

양쪽 끝의 사진들이 나오지 않아 몇 개는 이 사진에 표시를 못하고,밑의 다른 사진에 표시를 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콘코르디아 신전과 사투르니스 신전 사이에 위치하며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위한 신전이다. 티투스에 의해 신전 건립이 시작되고 동생인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완공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 징수원의 아들로 가문에서 최초로 원로원에 들어가 황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콘코르디아 신전: 기원전 367년 평민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리키니우스 세스티우스법의 제정을 기념하여 세워진 신전이다.          로마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SPQR(로마의 원로원과 국민)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사용되어 지금까지 로마의 상징이 되고 있다.                        라피스 니제르: 보기 드문 흑대리석(라피스 니제르)이 깔린 6세기의 묘표로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의 무덤으로 추정.

 

산타루카 에 마르티노 사원: 17세기에 성 루카와 성 마르티노를 기려 지은 산타루카 에 마르티노 사원이다.

 

사투르니스 신전 (세턴 신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B.C498년에 축성 되었다.

포름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 되던 283년 화재때 이 신전도 같이 파괴 되었다.

신전은 정면부와 회랑식 현관을 이루고 있던 이오니아식 기둥 앞쪽 여섯개에 양옆에 한개씩 남아 있다.

 

이 신전은 사투르누스의 축제인 사투르날리아에 사용 되었다.12월 17일에서 12월 23일까지 7일간이나 계속 되었던 이 축제는 묵은 태양은 떨어지고 새로운 태양이 다시 떠 오르는것을 축하하는 전야제 형식의 축제로 새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던 제사였다.또한

 

매년 12월 신전에 제사를 지낼 때는 노예와 주인의 대등한 술자리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사투르누스는 씨를 뿌리는 자라는 뜻으로 신화에서는 농업의 신 크로노스가 아들인 제우스에게 쫓겨 이탈리아로 도망가 농업을 가르켰다고 한다. 풍요의 신 오푸스의 남편이며신 중의 왕인 제우스, 결혼의 신 헤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하 죽음의 신 하데스, 곡물과 수확의 신 데메테르의 아버지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및 알제리 주둔 사령관으로 있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사람으로, 황제가 자신의 재위 10년과 동방 원정 승리, 두 아들 카라칼라와 케타가 파르티아인과의          두차례에 걸친 파르티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서기 203년에 세운 개선문이다.포룸에서 가장 먼저 발견 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자 두 아들 카라칼라와 케타가 공동 황제가 되어 공동 통치하게 되었으나

212년 카라칼라가 케타를 살해한 후 단독 황제가 되면서,

케타에 관한 모든것을 제거하고 파괴하였는데 이 개선문에서도 케타에 관한것은 모두 삭제 되었다.

이 개선문은 아치가 세개 연이어져 있는데 이는 후대의 개선문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밑의  검은 부분   라피스 니제르

 

 보기 드문 흑대리석(라피스 니제르)이 깔린 6세기의 묘표로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의 무덤으로 추정.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콘크르디아 신전과 사투르니스 신전 사이에 위치하며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위한 신전이다. 티투스에 의해 신전 건립이 시작되고 동생인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완공 되었다.사원은 로마 역사를 통해 가족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고 장례식 행사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 되었다.

 

왼쪽 원주 3개 뒤 콘크르디아 신전

 

기원전 367년 평민들도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리키니우스 세스티우스법의 제정을 기념하여 세워진 신전이다.          로마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SPQR(로마의 원로원과 국민)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사용되어 지금까지 로마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산타루카 에 마르티노 사원

 

왼쪽은 17세기에 성 루카와 성 마르티노를 기려 지은 산타루카 에 마르티노 사원이다.

 

 

 

 

 

오른쪽 소나무언덕이 팔라티노 언덕

 

기원전 8세기경 로마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팔리티노 언덕으로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웠다는 전설의 무대이다. 

 이 언덕 잔디밭 위에는 아직도 호화로웠던

로마황제의 별궁인 도무스 아우구스티나와 도미티아누스황제의 저택 등이 있다.

고대 로마 유적의 중심을 이루는 포로로마노의 유적이 있는 계곡을 끼고 동쪽 콜로세움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으며,

 언덕 위에서는 경기장터, 경사면에서는 많은 건물 유적이 발굴되었다.

 

베스타 신전

 

베스타는 로마신화에서는 불과 부엌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스티아에 해당한다.

 기원전 6세기경 세워져 이 불이 꺼지면 로마에 재앙이 온다고하여

로마 제국 1000년 동안 한번도 불이 꺼진적 없는 매우 신성한 신앙의 장소이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며 부분적으로 복구 되었다. 

이곳의 성화는 로마 제국과 가정의 불멸을 상징하며 6명의 처녀 제관에 의해 지켜졌다.

          이 제관들은 7-8세경에 귀족 집안에서 선발되며 30년간 성화를 지키는 의무를 수행해야 자유의 몸이 되며 지위가 매우 높아 황제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베스탈은 평생 처녀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어기면 생매장 당했다.          로마 역사상 이 벌을 받은 베스탈은 10명 정도라고 한다.

 

카스토 앤 폴룩스 신전

 

카스토와 폴룩스는 제우스와 레다의 쌍둥이 아들이다.레길루스 호수의 전쟁이 일어 났을때 2명의 마부로 나타나 로마군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그들은 다시 로마 포룸에 나타나 승리를 알리던 유투르나 샘에 나타나 말에 물을 먹이며 승리를 알렸다.사원은 그들이 나타났던 바로 그자리에 484년 포스투미우스의 아들에 의해 세워졌다.로마공화국 시대에 사원은 의회의 회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토대석 앞은 연설하는 연단으로 사용 되었다.

 

카스토 앤 폴록스 신전 뒤 티투스 개선문

 

82년경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그의 형 티투스를 기리기 위하여,

또한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방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개선문을 조성했다.

예루살렘 공방전은 4년에 걸친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대성전이 불 탔다.

이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방전은 로마의 식민지를 상대로 한 진압 군대 규모로는 역사상 가장 컸다.

아치 위에는 "로마 원로원과 민회는 신성한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신성한 티투스 베스파시아우스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친다. 라고 쓰여져 있다.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

 

종탑이 있는 건물로 성 프란체스카에게 바쳐진 이 곳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무릎을 끓었다는 판석이 있다.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그 옆 돔 로물루스 신전

 

로물루스 신전: 로마 건국 신화의 로물루스가 아니라 제정 말기의 황제 막센티우스의 왕자 로물루스이다.           이 시기에는 황실의 신격화가 가속화 되어 309년에 황제가 아들을 신격화하여 신전을 지었다.           6세기에 성 코스마스 데 다미아노 교회로 조성 되었으며 4세기경의 오리지날 청동문을 보유하고 있다.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10개의 원기둥이 있는 신전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황후 파우스티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141년에 세웠다.161년 피우스 황제가 죽자 아우릴리우스 황제에 의해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를 위해 재헌정 되었다.          뒤에 있는 건물은 미란다 성 로렌조 교회로 유적이 묻혀 있는 것을 모른체 그 위에 지어진 교회라 한다. 미란다 성 로렌조 교회와 유적이 합쳐진이 조합이 유적을 더 매혹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뒷쪽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

 

308년 서로마제국의 황제 막센티우스에 의해 포룸의 남쪽면에 세워지기 시작하여           그의 밀비안 다리 전투의 패배이후 312년 콘스탄티누스1세에 의해 완공 되었다.           전형적인 로마 바실리카의 구조에 목욕탕 시설을 구비한 독특한 구조로 혁신적인 방법을 이용해 만든 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구성하는 큰 아치형의 천장이 포룸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재판소와 사업장등으로 사용되었다.           넓이가 100m*65m, 높이가 35m나 되며 성 베드로 성당 건축시 이 바실리카의 천장을 떼어 냈다고 한다.

 

바실리카 에밀리아나와 그 앞쪽 길인  비아 사크라 (신성한 길)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과 연이은 바실리카 에밀리아나는 시민 공회당이다.          기원전 179년 에밀리아 가문에 의해 지어진 포로 노마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금융과 사법등의 일이 행해지던 중요한 곳이다.

 

비아 사크라 (신성한 길): 포로 로마노의 중앙을 가로 지르는 중요한 길로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다.          캄피톨리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주피터 신전으로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지나           여러 바실리카 앞으로 해서 티누스 개선문으로, 콜로세움까지 연결된다.

 

시저 (카이사르) 신전

 

기원전 44년 시저의 시신을 화장 했던 장소에 기원전 29년 시저의 조카였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시저를 신격화하여 세운 신전으로  인간을 위한 최초의 신전이다.

 

 삼두정치의 1인자이며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가, 웅변가이자 문인이었던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곧 줄리어스 시저가 부루터스의 칼을 맞고 죽어 화장 했던 곳이다. 소아시아에서 승전보를 원로원에 보고할 때 그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란 유명한 글 세마디를 남겼다.

또한 시저가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와 게르만, 영국 원정을 다니며 세력을 키우자

기원전 49년 정적에게 장악된 원로원은 시저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시저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돌아오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시저의 장례식장에서 행한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유명하다. 안토니우스는 슬픔을 억제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나는 시저의 장례식장에 왔지,

그를 찬양하러 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악행은 죽은 후에도 남고 선행은 자주 뼈와 함께 묻히는데, 시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1인당 상당한 금액을 기증한다는 시저의 유언을 발표하고

피로 물든 시저의 옷을 군중들에게 보였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의 감정에 호소하는데 성공하여

로마를 지키기 위하여 시저를 암살한 부루터스를 로마의 적으로 만들었다. 

급히 도망친 부루터스는, 추격해온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마케도니아에서 패하여 자살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궤멸된다.

 

바실리카 줄리아

 

기원전 54년 시저가 짓기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성한 곳으로 로마의 법이 만들어진 법원이었으며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바실리카 줄리아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기원전 58년 갈륨 전쟁의 보상금으로 세워졌다.

건물은 아우구수투스에 의해 완성 되었는데 완공후 건물의 이름을 그의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포로 로마노에 나뒹구는 돌덩어리 하나에도 2000년 역사가 숨쉬고 있다.

 

 

사투르니스 신전 근처에 골든 이정표라는 뜻의 밀라리움 아우레움이라는 돌 유적이 있는데

그 자리가 로마의 모든 도로가 출발하는 지점인 " 0 마일 지점".

이 이정표에서 모든 길은 시작하고 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해 이 지점에서 끝이 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이정표는 케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세워졌다.

 

 

 

'SPQR'은 로마 원로원과 민회를 뜻하는 라틴어의 약자로

 

자부심이 대단한 로마인들은 하수구 두껑에도 SPQR를 새겨넣을 정도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

 

포로 로마노의 유적지에서 잠든 앤공주 (오드리 햅번)와 그레고릭 펙

 

 

트레비분수.e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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